영화를 보고나서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되 리뷰를 쓰긴 어렵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운 것은 내가 아니라 전도연인데 한참을 울고 난 것처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고 가슴이 먹먹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대개 그러하듯 밀양 또한 널널한 마음으로 편한히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익살맞고 넉살좋은 송강호를 보면서 쿡쿡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나는 이제 그런 케릭터들에게조차 어째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남편의 외도와 죽음, 유괴 당한 아이의 죽음... 신애(전도연 분)의 불운은 계속된다. 특별히 살아오면서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괴상망측한 성품을 가진 것도 아닌데 남들에게는 한 두 번 일어날까 말까한 불행들이 그녀에겐 연달아 들이닥친다.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라는 질문을 떨칠 수가 없었고 그녀가 어떤 면에서 성격비극에 나오는 주인공 같기도 하단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에 대한 꿈을 포기한 채 남자를 믿고 일찍 결혼한 실수, 은밀하게 숨어있으리라는 희망을 믿고 생면부지의 사람들만 모여있는 밀양으로 옮겨온 실수, 만만히 보이지 않기 위해 없는 돈을 있는 척한 실수, 얼른 들어오라는 아들의 전화를 대수롭잖게 여기고 늦게 들어온 실수, 용서와 구원에 대해 너무 쉽고도 빠르게 스스로의 능력을 믿어버린 실수... 어찌 보면 그녀는 실수투성이 여자였다. 그녀에게 부족한 건 솔직함, 그녀에게 필요한 건 기다림, 이란 생각이 들었다. 

  배신한 남편은 미워해야 마땅하고 그의 고향까지 증오하는 게 당연하다. 밀양은 종찬(송강호 분)의 말맞다나 그저 다른 데와 똑같은 사람 사는 곳이지 숨어 있는 빛, 따위는 없는 곳이다. 남편을 사고로 잃은 미망인이 낯선 땅에 들어와 돈 자랑을 하는 허영은 날 잡아잡수,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신애는 아들 준 앞에서 아빠의 배신과 죽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더 나았다. 아들을 살해한 유괴범이 그녀 곁을 지나칠 때 얼른 고개를 떨구며 외면해 버리는 신애의 모습은 고통을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못하는 나약함을 드러낸다. 처음 만나는 옷가게 주인에게 인테리어를 바꾸면 장사가 더 잘될 거라고 충고하는 그녀는, 뭇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역시 서울 여자고 피아노 치는 여자라 고상해, 가 아니라 생긴 건 멀쩡한데 어딘가 좀 이상해, 정도로 밖에 비치지 않는다. 신애는 의미를 찾아 불행을 합리화하며 고상을 떨지만 그 고상함 덕분에 스스로는 고생에 빠지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손목을 긋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신애, 미장원에서 유괴범의 딸과 맞닥뜨리자 신경질을 부려대며 미장원을 뛰쳐나온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종찬에게 왜 나를 여기로 데려왔냐며 버럭버럭 화를 내기도 한다. 한 쪽만 껑충 올라간 머리결을 바람에 날리며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하며 집에 오자 스스로 썩둑썩둑 가위질을 한다. 영화는 끝나가고 그 즈음에야 신애의 하늘색 원피스와 풀어헤친 머리칼처럼 그녀가 드디어 자유를 얻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너나 나나 그다지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세상은 가도가도 별 수 없고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는 것. 감독은 결국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쉽게 용서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위선, 하느님에게 나 좀 봐라 하는 식으로 도둑질을 하고 유부남을 유혹하는 위악, 어쩌면 남들보다 순수하고 예민한 탓에 극단에 극단을 내달리지만 신애는 내 모습이기도 했고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기도 했다.   

  마치 언저리 뉴스마냥 심심하게 신애 곁을 맴맴 도는 종찬은 이웃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케릭터이다. 아니, 오히려 평범하기에 요즘은 더 찾기 힘들어진 그런 인물. 전도연이 연기를 잘하는 것이야 설탕이 달거나 소금이 짠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것이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송강호에게 따로 큰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물 같은 배우란 느낌. 대단히 머리 좋고 성실한. 어깨에 힘주는 장동건, 눈동자에 힘들어가는 설경구, 목소리에 힘 싣는 최민수들에게 이렇게 힘 하나 안 들이고도 강력한 포스를 발휘하는, 그야말로 secret sunshine 같은 송강호의 반짝이는 가치를 배우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언뜻 무애무덕한 평범한 케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종찬은 송강호의 연기를 통해 빛을 발했다. 매사를 웃어넘길 줄 아는, 어쩌면 자기 자신조차 웃어넘길 줄 아는 배포 있는 농담, 차가움 이면에 가려진 따듯한 빛을 본능적으로 알아보곤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진득하니 노력할 줄 아는 성실성, 묵은 머리카락, 오래된 과거를 잘라내는 여자를 위해 선뜻 거울을 비춰줄 수 있는 배려, 그러한 소박한 미덕들을 갖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종찬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인간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반쯤 미쳐가는 신애 곁에서 그녀를 변함없이 아껴주었다. 그와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기에 종찬의 노력은 실수였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되든 아마 그는 다시 웃을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라고 웃어넘기면서. 희망을 품고 밀양을 찾는 이들에게 사람 사는 데야 다 똑같죠 뭐, 라고 이야기 하면서. 신애는 운명에 끌려다녔고 종찬은 신애에게 끌려다니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신애는 종찬이 들어주는 거울 앞에 앉았다.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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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6-02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도연의 수상소감이 생각나네요..
강호오빠가 받쳐줬기에 지금의 이 자리에 있다는 내용이요..^^
송강호씨의 연기는 초록물고기보다 넘버3를 통해 먼저 알게 되었어요..
어찌보면 그의 히트작이였죠..그런데 몇편의 영화를 더보니 양파같은 기질이
다분한 배우같더라구요...껍데기를 벗겨도 계속해서 다른 껍데기가 나오는...^^

깐따삐야 2007-06-0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전도연이 연기를 잘하는 배우임에는 틀림없지만 가끔 감정 배분에 있어서 아주 미세하나마 위태위태한 면이 엿보이는데 아무래도 여자라는 성별 때문이라면 편견일까요. 아무튼 그런 부족한 점은 시야가 넓고 해석력이 좋은 송강호에게 두고두고 배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아, 송강호. 정말 최고입니다.^^

프레이야 2007-06-02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종찬이 들어주는 거울의 의미, 인상 깊어요.
이 영화 보고 나서 벌레이야기를 읽었어요. 책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어요. 영화에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음이 강조되지만
책에선 사랑하기 위해 살아야함을 강조했어요. 정말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을 때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싯구절처럼..

깐따삐야 2007-06-03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그렇죠. 사랑을 받으려고 들면 항상 궁핍감에 시달리고, 사랑을 하려고 들면 한없이 충만해지는 마음. 그렇듯 삶이 종교가 되어야 궁극의 행복에 이르는 걸까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봄봄 2007-06-04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포스터 맘에 드네요..글도 좋으네요^^ 전도연의 위태위태는 그녀의 불안한 삶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구도적으로는 영화를 그녀가 이끌어가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을 것 같구요, 그 전체적인 틀을 송강호가 탄탄하게(그리고 티 안나게^^) 잘 받쳐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들이 각자 다른 곳에 끌려다녔더라고 그녀는 이제 거울을 들고 있는 이 남자 앞에서 조용히 거부하지 않으며 머리를 자릅니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듯..
저는 이 영화가 하나의 텍스트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지 처럼 그냥 특별할 것 없는 것을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별 얘기 없는 것 같은데 다 똑같은 얘기같은데 삶 전체를 아우러버리는, 그래서 결코 단순하지마는 않는, 그래서 머리속이 징징거리는, 너무 많은 해석들이 나올법한 영화였습니다.

깐따삐야 2007-06-04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봄님, 아... 보기 좋게 정리를 해주셨네요. 징징거리는, 참 적확한 표현이에요. 저 포스터를 올리면서 송강호가 빠진 것에 대해서 좀 아쉬웠더랬죠.^^

생각중 2007-06-07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양...

감독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 착각이라는 화두를 던진건 아닐까..

용서한 적이 없는데 용서 받았다고 믿는 범인... 화해도 없이 용서하러 가는 피해자...

이런 웃지못할 에피소드를 감독의 높은 경지의 감수성이 그려낸 영화라고 본다.

신앙인에게는... 어쩌면... 평생토록.. 착각의 신앙속에서 죽을때까지 깨닫지 못할 중요한 실수에 대해

던진 메시지이며.. 사회에는...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이기심의 분쟁에 대해 던진 메시지라고 본다.

자극과 반응사이엔 공간이 있듯이 상처와 용서 사이엔 화해가 있어야 한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주어진 공간... 신이 인간에게만 내리신 특혜의 시간이다!

참 많은 생각을 남긴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나도 수많은 관계속에서 무슨 착각을 하는지 점검해봐야 겠다.

 

 


깐따삐야 2007-06-15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중님, 자극과 반응 사이에 주어진 공간... 신이 인간에게만 내리신 특혜의 시간이라는 말씀, 흥미롭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영화도 참 드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