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섬에 갈까?
그러자, 그럼.
그렇게 문득 여행길에 올랐다.
물론 그 곳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선배가 있어 어느만치 든든했는지도 모르겠다.
잠자리 걱정은 하지 말고 편하게 오라는 선배의 부추김이 한몫을 했고,
주춤거리다 보면 가을이 다 져버릴까, 친구와 나는 부지런히 일정을 짰다.

청량리역에서 기차에 올랐고 기차 안은 단체로 엠티를 가는 대학생들로 만원이었다.
젊고 소란한 그들 틈에 끼어서 귤과 김밥을 먹으며 우리는 주섬주섬 수다를 떨었다.
그녀가 키우는 애완견의 안부에서부터 시작해서 다음엔 과연 어디로 떠나볼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한때 신기루처럼 아른아른 내 기억 속에만 머물던 그녀는,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환하게 생글거리고 있었다.
친구란 그런 것 같다.
오래도록 만나지 않은 채로도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고,
다시 만나도 처음처럼 변함없이 반가운 사람.

가평 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남이섬이 있었고,
남이섬의 첫인상은 익히 들어왔던대로 매우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선배는 앞치마를 두른 채 나무를 깎고 있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소개하며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짐을 풀고 나서, 친구와 나는 아름다운 정취에 계속 탄성을 질러대며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가을의 끝무렵이라 이파리 풍성한 나무들을 볼 수 없는 점이 다소 아쉬웠지만,
폭신한 융단처럼 밟히는 낙엽 위에서 우리는 눈 맞는 강아지처럼 계속 깔깔거렸다.

해가 기울고 저녁이 되어서는 선배와 그의 동료와 함께 저녁을 같이 했다.
마침 옆좌석에서 회식을 하던 남이섬 직원들의 아량으로 신선한 회도 먹고,
어르신들에게 어필하는 나의 푼수끼로 생선구이와 된장찌개가 추가되었다.
동양화를 전공했다는 선배의 동료는 언뜻 자유분방해 보이면서도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는 방심할 무렵 치고 들어오는 pun으로 간간히 우리를 웃겨줬다.
선배는 기분이 좋은지 술을 많이 마셨고,
나는 마치 엄마라도 된냥, 이것저것 잘 먹지 못하는 친구를 다그쳐가며 회를 먹였다.
 
밖으로 나오자 몇몇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고구마를 굽고 있었고,
곁에 가서 불을 쬐는 우리에게 식당 주인아저씨는 따끈한 모과차를 내왔다.
밤이 되자 인파가 빠져나간 섬은 고요하고 평화로웠고,
하늘에 떠 있는 반달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만큼 청초했다.
 
그 날 밤,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는 각자 모두 다른 곳, 다른 자리에 있지만 과거의 추억과 앞으로의 우정에 대해서는 한길이었다.
서로를 꼬집기도 하고 부추기기도 하는 화법은 여전했지만,
그간의 세월 속에서 말없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까.
선배는 앞으로도 한동안 묵묵히 나무를 깎을 것이고,
그녀는 낮에는 취재를 다니고 밤에는 글을 쓰며 꿈을 키우겠지.
나는..
성실만이 살길, 이라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몰입과 방황을 계속하겠지.
때로 그 안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발견한다면!

삶과 꿈에 대해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참 행운인 것 같다.
나의 염려 섞인 잔소리를 달큼하게 받아들여준 착한 친구와,
따듯한 방과 차분한 격려를 함께 제공해 준 선배에게 감사한다.
하늘을 향해 곧고 활기차게 뻗어오른 남이섬의 나무들처럼,
그들도, 나도, 내내 건강하고 아름답기를 바래본다.   


남이섬의 아침, 숲길


길 위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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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0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0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7-11-2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랙백 걸어놨습니다.
사진의 풍경이 옛날에 봤던 영화의 마지막장면과 비슷해서요...^^
규모나 스케일은 좀 틀리지만..아 그리고 영화 속 여배우보다 깐따삐야님 미모가 100배는 이쁘십니다.(지나친 아부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깐따삐야 2007-11-21 14:54   좋아요 0 | URL
남이섬엔 원근감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숲길이 아주 많았어요. 지나친 아부임엔 틀림없지만 기분은 역시 좋습니다.^^;

라로 2007-11-2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깐따삐아님이닷!!
처음뵈요~. 안녕하세요?ㅎㅎㅎ
저두 남이섬 가고파요~.흑흑흑

깐따삐야 2007-11-22 10:04   좋아요 0 | URL
nabi님,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어 놀라셨죠?ㅋㅋ 지금은 좀 늦은 감이 있구요. 봄이 오면 아이들과 함께 꼭 가보세요. 폐품을 활용해서 작품을 만드는 환경학교체험을 권해드릴게요. 저도 나뭇잎의 천연 색소를 이용한 손수건을 만들어 왔답니다.^^
 

주말엔 서울에 다녀왔다.
일상에 묻혀 잠시 잊고 지냈던 지인들을 만나서 회포를 풀었고 오빠 내외도 보고 왔다.
새벽을 밝히며 놀았던 기억이 까마득한데 여전히 녹슬지 않은 에너자이저로써 간만에 실력발휘 하고 왔다.

언젠가 페이퍼에 그리움을 물씬 담아 한 친구 이야기를 쓴 적이 있는데, 이번에 그 친구와 재회했다.
못 보던 사이 숙녀가 되었고 더불어 기자가 되어 있었다.
위태위태해 보이던 예전 모습은 사라지고 훨씬 밝고 안정된 표정에 마음이 놓였다.
수줍은 표정은 여전했지만, 취재용 카메라를 솜씨 좋게 다뤘고 내 이야기에 언니같은 조언도 해주었다.
마치 장성한 자식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그녀가 자랑스러웠고, 그처럼 의젓하게 살아있음이 왠지 감격스러웠다.
한번만 더 사라지면 이번엔 지구 끝까지 쫓아가겠노라고 으름장을 놓고 왔다.
옛날처럼 여기저기 아프지 말고 모쪼록 이대로,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마음껏 웃고 싶었고 그 웃음을 통해 위로받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지인들은 나를 당차고 야무진 사람으로 기억해주었고 넘치는 에너지에 찬사를 보내주었다.
올케의 배려와 오빠의 애정이 새삼스레 고마웠고 큰 산과 같은 그들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바람은 찼지만, 포근한 주말이었다.

청년에게는 이별을 고했고 나는 비교적 말짱하게 잘 지내고 있다.
눈물이 나지 않았는데 그를 덜 좋아했기 때문인지, 내가 나이 먹어서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담담해지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농담을 섞어가며 준비했던 프리젠테이션을 마쳤고 굳건한 일상에 문득 고마움을 느꼈다.
앞으로 나는 아마 성실하되, 좀더 신중해질 것이다.
신중하되, 좀더 성실해야 맞는 건가?
기회가 닿는대로 열렬히 연애질을 하는 것이 옳겠지만, 당분간은 금남의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고려 중이다.
위험한 귀차니즘이 재차 도래하는 중...

내일은 친구가 결혼할 남자를 보여준다고 해서 약속을 잡았다.
나는 서로를 번갈아가며 칭찬할 것이다.
그녀야 워낙 장점이 수두룩한 여인네지만, 그녀의 완소 남친이 완전 키작은 남자일지라도 열심히 그를 띄워주겠다.
사귀는 남자도 아니고 결혼할 남자라는데 암~
단, 오버는 금물.

친구는 시집을 갈 태세고 가을도 저물 태세구나.
근황이라는 게 이 모양이어서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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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1-06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요 저기요..요즘은 판매량 1위 건전지는 듀라셀이라고 하더군요...
에너자이저는 왠지 남성적인 이미지를 풍기니 차라리 듀라셀 일당백 토끼라고 표현하시면 어떠실런지요.? (이건 뭐 전혀 페이퍼와 아무 연관도 없는 댓글이네..)

깐따삐야 2007-11-06 22:46   좋아요 0 | URL
하핫~ 제가 메피 오라버님 때문에 웃습니다. 그렇다고 수정할 생각은 음써요?

라로 2007-11-07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넘 착하시다~.
저같은면 키크고 멋진 남자라도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일텐데,,,,,
전 아직 인간이 될려면 멀었다,,,입니다.흑
아이를 셋이나 낳으면 뭐합니까!!인간이 되야하는디,,,음냐음냐,,,근데 제가 님의 근황에다
대고서 뭔말을 하는건지,,(이건 뭐 전혀 페이퍼와 관계 없다고는 할 수 없는 댓글이지만,,,,)

깐따삐야 2007-11-07 22:43   좋아요 0 | URL
오늘 저녁에 만나고 왔어요. 착하고 예의 바른 남자 같았어요.^^

이게다예요 2007-11-07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 깐따삐아님.
예전엔 그렇게 명확하게 보이고 들리고 믿어졌던 것들이 이제는 그저 담담해집니다. 이래도 저래도 괜찮아, 그런 건 아니지만 어쩌면 이래도 저래도 괜찮아질 준비가 되어 있는 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흘러줘서 고마울 따름이에요.

깐따삐야 2007-11-07 22:44   좋아요 0 | URL
마지막 멘트에 공감합니다. 참 다행이죠. 힘내자구요.^^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10월이다.
작년 이 무렵엔 무척 바빴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의 고교 입시와 나의 대학원 입시가 겹쳐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반면에 올해 10월은 아, 가을이구나... 하는 계절감을 여유롭게 느끼고 있다.
만만찮은 과제와 논문에 대한 부담이 없지 않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요즘만 같다면 싶을 정도로 삶에 무리가 없고 일상은 순조롭다.

어쩌면 나는 이 상태를 가능한 한 오래도록 유예시키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유기농 청년은 한결같이 내게 공을 들이는 중인데 나는 그에게 아직 사랑한다, 또는 그 비슷한 말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했고 그 때문에 잠깐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상실의 시대>의 레이코가 와타나베에게 썼던 편지 구절처럼,
'날씨가 좋은 날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를 띄우고, 호수도 아름답지만 하늘도 아름답다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요.'라고 자위했다.
물론 이런 건 본래 내 스타일은  아니다.
내 안에 내가 몰랐던 또 다른 내가 있었던 걸까.

나는 누구든 아직은 yes도 no도 아니라고 생각하다가도,
어쩌면 누구든 no라고 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마음 먹고 선택하기에 따라 여유롭게 안착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종종 내 가슴이 뛰는 걸 스스로도 느끼지만,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의 공명음이 더 크게 울린다.
지금으로썬 혼자 지내는 데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고 공부가 재미있다.
결혼에 대한 부담 없이 가끔 데이트나 하며 평생 싱글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한때는 참하고 똑똑하고 직업 좋고... 그러한 주변의 세속적인 미사여구에 탄력 받아 마구잡이로 오만해진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는 혼자서 꿋꿋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대차거나 당차지도 못하고,
웅대한 야망보다는 평균적 삶에 더 매력을 느끼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걸 나 스스로 잘 안다.

다만, 그냥 지금이 좋다.
상대가 들으면 맥 빠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좋다는데, 행복하다는데,
그것을 맘껏 누릴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아량을 기대하게 된다.
그는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수용할 수 있는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예전에는 사랑은 미궁 같고 연애는 퍼즐 같았다.
그럼에도 근원을 알지 못하는 엄청난 에너지가 어두운 미궁을 헤치고 복잡한 퍼즐을 꾀어맞추게끔 만들었다.
몰입과 권태의 반복이 롤러코스터와도 같았고 그 소소한 과정이야 어떠했든 나름 즐거웠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마치 담배 연기 폴폴 피워 올리는 능청스런 노파가 된 것 같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서로가 서로에게 믿을만한 건덕지가 하나도 없었을 땐 사랑과 믿음으로 한량없이 충만하더니,
사랑이란 게 대충 이런 건 아닐까 감이 오기 시작하고 누가 봐도 올인해도 좋을만한 때가 되니,
그 많던 사랑과 믿음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른들 흔히 하시는 말씀대로 그저 아무것도 모를 때 눈에 뭐가 확 씌이던가, 주변의 힘에 대충 떠밀려서 저질렀어야 하는가 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스스로 선택해 놓고 징징거리는 것인데,
그것은 뼈저린 후회보다도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심약하기 짝이 없는 내 천성을 극복해가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모토이기도 한데,
가끔은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덜 징징대기 위해서 사는 건 아닌가 싶은 다소 서글픈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알량한 자존심인지, 아니면 빡빡하게 타고난 성품 탓인지, 어차피 그게 그거인지.

어쩌면 내가 원하는 삶은 저 너머에 있는 것은 아닐까.
부모님도, 연인도 없는 오직 나만의 방에서 커피 마시고 공부하는 그런 삶.
중심이 모호한, 부유하는 듯한 지금...
이 유예의 시간을 오래 지속하더라도 부디 아무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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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1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종 제가 후회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 보다는,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았던 경우들이었어요. 유에의 시간, 하니 생각났지만 깐따삐야 님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을 분은 아닌 걸로 보입니다.

깐따삐야 2007-10-22 12:26   좋아요 0 | URL
Jude님, 아마 제가 약하기 때문일 거에요. 용기가 있다면 이러지 않을텐데 말이죠. 저는 때때로 저 자신과 상대방을 너무도 지치게 만들곤 해요.

2007-10-19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2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3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10-19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시절의 '부유하는 정신', 괜찮지요.


깐따삐야 2007-10-22 12:31   좋아요 0 | URL
Hansa님, 크게 보면 그렇지만, 저의 겁 많고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상대방까지 미궁에 빠뜨린다는건 참 미안할 노릇이지요.

2007-10-19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2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주에 개강을 했고,
아직은 드문드문이긴 하지만 캠퍼스에도 가을빛이 들기 시작했다.
긴 휴가가 끝나고 오랜만에 사람들을 다시 보니 반가웠다.
착착 쌓아올린 책더미에 넋을 놓아버린 수강생들을 향해,
얼마 안 됩니다...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는 교수님들의 모습도 여전했다.
휴게실에 모이는 학부생들은 주로 다가오는 임용고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열람실에선 1학기에 비해 사뭇 더 뜨거워진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왔는데,
교사가 아니라 다시 학생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지난 학기에 같은 수업을 들었던 오 선생님은 여전히 둘째 만들기 프로젝트에 여념이 없으셨고,
여름 동안 조금 헬쓱해진 H양은 교수님과 상의해 본 결과,
원하는 방향으로 논문주제를 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개설되었던 지도교수님의 강의 하나가 신청 인원 부족으로 폐강되었고,
교수님은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새 강의를 개설하셔야 했다.
광고 하나 하겠다며 어렵게 말문을 떼시는데,
저 분 성품에 오늘 저 이야길 하려고 밤새 고민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까지 아팠다.
갑자기 넓어진 나의 오지랖은 손을 번쩍 들게 만들었고,
다른 강의를 신청했던 몇몇 지인들까지 부리나케 끌어모았다. 
하기사 디지털 시대의 학부생들을 놓고 셰익스피어 강독, 이라니 어쩌면 시대착오적일지 모르겠다.
요즘 애들이야 시험에 출제될 것만 콕콕 찝어줘야 좋아들 하니까 말이다. 
원래 개설했던 강의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널널하기 짝이 없는 내용으로 트랜스폼 했지만,
전처럼 성실한 강의를 하실 것이라 믿는다.
 
매사를 항상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야겠지만 뭔가 마음대로 안 되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이도, 논문도, 강의도 원하는 대로 된다면 좋을텐데.
마누라 비위 맞추랴,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으랴, 요즘 우리나라 남자들 참 불쌍하다는 오 선생님의 이야기에도 공감했고,
학부에서도 문학을 전공한 H는 관심도 없었던 교재론으로 논문을 쓰게 되었다고 해서 안타까움을 샀다.
다소 시니컬한 뉘앙스를 품고 있는데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을 '부부'라고들 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으나, 싫으나 함께 가야 한다고.
우리 지도교수님처럼 별다른 터치 없이 대학원에 왔으면 공부에 매진하라는 분도 있지만,
연구실 근무를 할 때는 항상 정장만 입을 것을 고집하는 독특한 스타일의 교수님도 있다.
그래도 깊숙이 들어가보면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다 나쁜 것만도 아니고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다.
자의든, 타의든 H는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보고 배우는 게 많을테지만,
우리의 수줍고 섬세한 교수님은 때때로 혼자 다른 세계에 침잠해 계신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 적극적으로 똑똑, 노크하지 않는 한 그 곳에 얼마든지 머물러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요즘 어떤 남자를 꾸준히 만나고 있다.
원래 한꺼번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못하는 내가,
학업과 연애를 균형감 있게 병행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그의 배려를 믿고 조심스럽게 시작했다. 
그는 내게 빨간 우산을 건넸던 그 사람도 아니고,
맛있는 것을 사주러 오겠다던 그 남자도 아니다.
인연은 정말 무심결에 우연히 찾아온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만한 허우대를 갖고도 내 앞에선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은,
순박한 유기농 청년 같은 그 남자를,
내치기 힘들었고 놓치기 싫었는데, 그 마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더 두고 볼 일.
중요한 건,
어느 하나 소홀히 하고 싶지 않다는 것.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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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7-09-10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박한 유기농청년!!표현 넘 신선해요~~~~.^^
화이팅!!!

Mephistopheles 2007-09-10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야흐로 가슴을 따뜻한 무언가로 가득 채우고 싶어하실 깐띠삐야표 계절이 다가오고 있는 건가요..^^

조선인 2007-09-11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박한 유기농 청년이라니, 잡으십시오!!!

BRINY 2007-09-11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업과 연애 병행~ 대학생 시절을 다시 사는 셈이네요. 와!와!

비로그인 2007-09-11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연은 정말 무심결에 우연히 찾아온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만한 허우대를 갖고도 내 앞에선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은,
순박한 유기농 청년 같은 그 남자를,
...

오.. 하하
추천합니다.


비로그인 2007-09-1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보이시는 사이에 이런 훈훈한 소식이... ^^
부러워요!

부리 2007-09-11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기농청년같다는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드네요. 앞에 읽은 건 다 까먹어버리고 뒤의 연애담만 눈에 들어오네요^^ 반갑습니다.

깐따삐야 2007-09-11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bi님, 그러게요. 지금까진 참 신선했는데 더 두고봐야겠지요.

메피스토님, 비우는 그 순간 비로소 채워지는 게 가슴인가 봐요.^^

조선인님, 제가 벌레는 손바닥으로 턱턱~ 쳐서 잘 잡는데 남자 잡는데엔 영 서툴러요. ㅋ

BRINY님, 좋게 보면 정말 그런 셈이지만 부담감 또한 만만찮아요.

한사님, 남녀간의 인연은 참 묘한 것 같아요.

체셔고양이님, 항상 따듯한 연애무드인 체셔님의 마인드가 저는 더 부럽습니다.

부리님, 오랜만이에요. 어쩔 땐 연애란 게 당사자들보다도 주변 사람들을 더 들뜨고 즐겁게 하는 것 같아요.^^
 

학원도 종강을 했고 어제는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얼굴이 그을리고 머리가 많이 자란 선배는,
도를 아십니까, 하고 우리에게 다가오곤 했던 여자들에게나 딱 걸려들법한,
군데군데 틈새가 많이 보이는, 현실감 없는 외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건너편에서 선배를 보자마자 마치 학생 때처럼,
선배~ 하고 손을 막 흔들었다.
웃을 때 눈이 잘 안 보이는 선배는 쑥스럽게 미소 지었고 나는 언제나처럼 호들갑스럽게 반가움을 표현했다.

대개는 만나면 순대나 곱창에 소주였는데,
어제는 지하에 있는 호프집에서 소세지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실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안주는 수제소세지다.
가장 별로라 하는 건 과일안주.
어쨌든 홀가분한 기분과 문득 선선해진 밤공기 때문인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맥주는 시원하고 노곤했다.

잊고 지냈던 지인들의 소식과 함께 서로의 일상을 주고받았다.
스무살 때 처음 보았던 스물두살의 선배는 한참 위의 어른 같았는데...
스물여덟과 서른이란, 어느새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 그런가.
나는 언젠가부터 선배님의 '님'자를 나도 모르게 떼어먹고 있었다.
이제 알거 다 안다는 식의 내 어투가 나조차 거북했는데,
원래 말수가 적고 생각이 많던 선배는 편안히 대화를 이끌었다.

화제가 연애로 옮겨지자,
전부를 다 드러낼 수도, 그렇다고 한번 꺼내면 쉬이 멎을 수도 없는 이야기들이 시작되었다.
선배의 상대는 솔직하지만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선배는 예나 지금이나 소년처럼 미숙한 거리 조절 능력에,
아마도 태생적인 방랑벽을 못 버린 것 같았다.
힘들어서 헤어졌지만 끝나고 나서도 끝났는가, 확신할 때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나처럼 관계를 단칼에 베어버린 후 마음을 안으로 꽁꽁 쥐어잡는 사람도 미련이 남아 몸부림칠 때가 있는데,
선배는 오죽했을까 싶었다.
선배에겐 안 좋은 습관이 있다.
얼핏 온순하고 심약한 남자들의 특성이기도 한데,
술 마시면 전화하는... 아마 그녀에게도 그랬으리라.
백해무익한 일이지만 말려도 소용없는 일.

살짝 다운되어 보이는 선배를 향해,
나는 박상민의 무기여 잘 있거라, 의 노래가사처럼
적절히 과장과 위트를 섞어 몇 건의 소개팅 스토리를 이야기 했지만...
정작 내 마음을 칼날처럼 훑고 지나갔던 누군가와,
요즘 딱딱히 겁먹고 있는 내 마음을 향해 성실히 괭이질을 해대고 있는 남자에 대해선 침묵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에 대해서 신중하자는 태도였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땐 문득 선배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넌 참 실속이 있어."
선배가 그 말을 했을 때,
재테크에도 까막눈이고, 운전면허증은 오직 신분증 대용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런 뜻이 아님을 알고는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실속 없는 맹추인지를 굳이 까발리고 싶지도 않은 게 진심이었다.
선배는 아마 여전히 야무지고 옹골찬 내 모습에 안심했을 것이다.

아무리 거하게 차려놓은 진수성찬이라도,
구미가 당기지 않으면 목 마를 때 물 한잔만도 못하듯,
가슴을 움직이지 못하는 만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며...
여전히 우리가 철이 덜 든 건 아닌가, 의심해가며 멋쩍게 웃었다.
다양한 노하우를 축적하는 대신 이렇게 계속 정공법만 고수해도 좋은가, 자문해가며.

이제 개강이 머지 않았고 여름이 가고 있다.
빳빳하게 펄럭이는 빨래처럼 상쾌한 가을을 즐기고 싶다.
두려움 반, 의심 반으로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화창한 햇볕 아래 내어놓을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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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8-30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헛 깐따삐야님은 독일식 으로 맥주를 드시는군요...
맥주의 목넘김처럼 사랑도 시원하면 뭔 고민을 하겠냐마는..
때론 50도를 넘는 화주같은 매력을 가지고 있기에 사랑이란 걸 하는 걸지도
모른다죠..^^ 혹시 선배가 앞에 "나보단"을 생략한 건 아닐까요.? ^^

깐따삐야 2007-08-30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그래서 돌아오는 가을엔 머리를 비우고 가슴을 채울까 생각 중입니다.^^;

라로 2007-08-31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마시며 전화하는 남자는,,,,마음 둘곳이 없어서 그런것 같아요,,,에혀
그 맘을 알면서 모른체 하시기 힘들죠???뭔말인지 저두 몰라욥~.>.<

깐따삐야 2007-08-31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bi님, 마음 둘 곳이 없어서... 맞는 말씀이에요.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습관이라서 받아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죠. 술 마신 자, 곱게 잠들어야 할지니...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