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개강을 했고,
아직은 드문드문이긴 하지만 캠퍼스에도 가을빛이 들기 시작했다.
긴 휴가가 끝나고 오랜만에 사람들을 다시 보니 반가웠다.
착착 쌓아올린 책더미에 넋을 놓아버린 수강생들을 향해,
얼마 안 됩니다...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는 교수님들의 모습도 여전했다.
휴게실에 모이는 학부생들은 주로 다가오는 임용고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열람실에선 1학기에 비해 사뭇 더 뜨거워진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왔는데,
교사가 아니라 다시 학생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지난 학기에 같은 수업을 들었던 오 선생님은 여전히 둘째 만들기 프로젝트에 여념이 없으셨고,
여름 동안 조금 헬쓱해진 H양은 교수님과 상의해 본 결과,
원하는 방향으로 논문주제를 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개설되었던 지도교수님의 강의 하나가 신청 인원 부족으로 폐강되었고,
교수님은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새 강의를 개설하셔야 했다.
광고 하나 하겠다며 어렵게 말문을 떼시는데,
저 분 성품에 오늘 저 이야길 하려고 밤새 고민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까지 아팠다.
갑자기 넓어진 나의 오지랖은 손을 번쩍 들게 만들었고,
다른 강의를 신청했던 몇몇 지인들까지 부리나케 끌어모았다.
하기사 디지털 시대의 학부생들을 놓고 셰익스피어 강독, 이라니 어쩌면 시대착오적일지 모르겠다.
요즘 애들이야 시험에 출제될 것만 콕콕 찝어줘야 좋아들 하니까 말이다.
원래 개설했던 강의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널널하기 짝이 없는 내용으로 트랜스폼 했지만,
전처럼 성실한 강의를 하실 것이라 믿는다.
매사를 항상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야겠지만 뭔가 마음대로 안 되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이도, 논문도, 강의도 원하는 대로 된다면 좋을텐데.
마누라 비위 맞추랴,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으랴, 요즘 우리나라 남자들 참 불쌍하다는 오 선생님의 이야기에도 공감했고,
학부에서도 문학을 전공한 H는 관심도 없었던 교재론으로 논문을 쓰게 되었다고 해서 안타까움을 샀다.
다소 시니컬한 뉘앙스를 품고 있는데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을 '부부'라고들 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으나, 싫으나 함께 가야 한다고.
우리 지도교수님처럼 별다른 터치 없이 대학원에 왔으면 공부에 매진하라는 분도 있지만,
연구실 근무를 할 때는 항상 정장만 입을 것을 고집하는 독특한 스타일의 교수님도 있다.
그래도 깊숙이 들어가보면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다 나쁜 것만도 아니고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다.
자의든, 타의든 H는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보고 배우는 게 많을테지만,
우리의 수줍고 섬세한 교수님은 때때로 혼자 다른 세계에 침잠해 계신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 적극적으로 똑똑, 노크하지 않는 한 그 곳에 얼마든지 머물러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요즘 어떤 남자를 꾸준히 만나고 있다.
원래 한꺼번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못하는 내가,
학업과 연애를 균형감 있게 병행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그의 배려를 믿고 조심스럽게 시작했다.
그는 내게 빨간 우산을 건넸던 그 사람도 아니고,
맛있는 것을 사주러 오겠다던 그 남자도 아니다.
인연은 정말 무심결에 우연히 찾아온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만한 허우대를 갖고도 내 앞에선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은,
순박한 유기농 청년 같은 그 남자를,
내치기 힘들었고 놓치기 싫었는데, 그 마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더 두고 볼 일.
중요한 건,
어느 하나 소홀히 하고 싶지 않다는 것.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