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10월이다.
작년 이 무렵엔 무척 바빴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의 고교 입시와 나의 대학원 입시가 겹쳐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반면에 올해 10월은 아, 가을이구나... 하는 계절감을 여유롭게 느끼고 있다.
만만찮은 과제와 논문에 대한 부담이 없지 않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요즘만 같다면 싶을 정도로 삶에 무리가 없고 일상은 순조롭다.

어쩌면 나는 이 상태를 가능한 한 오래도록 유예시키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유기농 청년은 한결같이 내게 공을 들이는 중인데 나는 그에게 아직 사랑한다, 또는 그 비슷한 말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했고 그 때문에 잠깐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상실의 시대>의 레이코가 와타나베에게 썼던 편지 구절처럼,
'날씨가 좋은 날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를 띄우고, 호수도 아름답지만 하늘도 아름답다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요.'라고 자위했다.
물론 이런 건 본래 내 스타일은  아니다.
내 안에 내가 몰랐던 또 다른 내가 있었던 걸까.

나는 누구든 아직은 yes도 no도 아니라고 생각하다가도,
어쩌면 누구든 no라고 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마음 먹고 선택하기에 따라 여유롭게 안착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종종 내 가슴이 뛰는 걸 스스로도 느끼지만,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의 공명음이 더 크게 울린다.
지금으로썬 혼자 지내는 데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고 공부가 재미있다.
결혼에 대한 부담 없이 가끔 데이트나 하며 평생 싱글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한때는 참하고 똑똑하고 직업 좋고... 그러한 주변의 세속적인 미사여구에 탄력 받아 마구잡이로 오만해진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는 혼자서 꿋꿋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대차거나 당차지도 못하고,
웅대한 야망보다는 평균적 삶에 더 매력을 느끼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걸 나 스스로 잘 안다.

다만, 그냥 지금이 좋다.
상대가 들으면 맥 빠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좋다는데, 행복하다는데,
그것을 맘껏 누릴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아량을 기대하게 된다.
그는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수용할 수 있는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예전에는 사랑은 미궁 같고 연애는 퍼즐 같았다.
그럼에도 근원을 알지 못하는 엄청난 에너지가 어두운 미궁을 헤치고 복잡한 퍼즐을 꾀어맞추게끔 만들었다.
몰입과 권태의 반복이 롤러코스터와도 같았고 그 소소한 과정이야 어떠했든 나름 즐거웠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마치 담배 연기 폴폴 피워 올리는 능청스런 노파가 된 것 같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서로가 서로에게 믿을만한 건덕지가 하나도 없었을 땐 사랑과 믿음으로 한량없이 충만하더니,
사랑이란 게 대충 이런 건 아닐까 감이 오기 시작하고 누가 봐도 올인해도 좋을만한 때가 되니,
그 많던 사랑과 믿음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른들 흔히 하시는 말씀대로 그저 아무것도 모를 때 눈에 뭐가 확 씌이던가, 주변의 힘에 대충 떠밀려서 저질렀어야 하는가 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스스로 선택해 놓고 징징거리는 것인데,
그것은 뼈저린 후회보다도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심약하기 짝이 없는 내 천성을 극복해가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모토이기도 한데,
가끔은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덜 징징대기 위해서 사는 건 아닌가 싶은 다소 서글픈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알량한 자존심인지, 아니면 빡빡하게 타고난 성품 탓인지, 어차피 그게 그거인지.

어쩌면 내가 원하는 삶은 저 너머에 있는 것은 아닐까.
부모님도, 연인도 없는 오직 나만의 방에서 커피 마시고 공부하는 그런 삶.
중심이 모호한, 부유하는 듯한 지금...
이 유예의 시간을 오래 지속하더라도 부디 아무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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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1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종 제가 후회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 보다는,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았던 경우들이었어요. 유에의 시간, 하니 생각났지만 깐따삐야 님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을 분은 아닌 걸로 보입니다.

깐따삐야 2007-10-22 12:26   좋아요 0 | URL
Jude님, 아마 제가 약하기 때문일 거에요. 용기가 있다면 이러지 않을텐데 말이죠. 저는 때때로 저 자신과 상대방을 너무도 지치게 만들곤 해요.

2007-10-19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2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3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10-19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시절의 '부유하는 정신', 괜찮지요.


깐따삐야 2007-10-22 12:31   좋아요 0 | URL
Hansa님, 크게 보면 그렇지만, 저의 겁 많고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상대방까지 미궁에 빠뜨린다는건 참 미안할 노릇이지요.

2007-10-19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2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