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도 종강을 했고 어제는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얼굴이 그을리고 머리가 많이 자란 선배는,
도를 아십니까, 하고 우리에게 다가오곤 했던 여자들에게나 딱 걸려들법한,
군데군데 틈새가 많이 보이는, 현실감 없는 외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건너편에서 선배를 보자마자 마치 학생 때처럼,
선배~ 하고 손을 막 흔들었다.
웃을 때 눈이 잘 안 보이는 선배는 쑥스럽게 미소 지었고 나는 언제나처럼 호들갑스럽게 반가움을 표현했다.

대개는 만나면 순대나 곱창에 소주였는데,
어제는 지하에 있는 호프집에서 소세지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실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안주는 수제소세지다.
가장 별로라 하는 건 과일안주.
어쨌든 홀가분한 기분과 문득 선선해진 밤공기 때문인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맥주는 시원하고 노곤했다.

잊고 지냈던 지인들의 소식과 함께 서로의 일상을 주고받았다.
스무살 때 처음 보았던 스물두살의 선배는 한참 위의 어른 같았는데...
스물여덟과 서른이란, 어느새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 그런가.
나는 언젠가부터 선배님의 '님'자를 나도 모르게 떼어먹고 있었다.
이제 알거 다 안다는 식의 내 어투가 나조차 거북했는데,
원래 말수가 적고 생각이 많던 선배는 편안히 대화를 이끌었다.

화제가 연애로 옮겨지자,
전부를 다 드러낼 수도, 그렇다고 한번 꺼내면 쉬이 멎을 수도 없는 이야기들이 시작되었다.
선배의 상대는 솔직하지만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선배는 예나 지금이나 소년처럼 미숙한 거리 조절 능력에,
아마도 태생적인 방랑벽을 못 버린 것 같았다.
힘들어서 헤어졌지만 끝나고 나서도 끝났는가, 확신할 때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나처럼 관계를 단칼에 베어버린 후 마음을 안으로 꽁꽁 쥐어잡는 사람도 미련이 남아 몸부림칠 때가 있는데,
선배는 오죽했을까 싶었다.
선배에겐 안 좋은 습관이 있다.
얼핏 온순하고 심약한 남자들의 특성이기도 한데,
술 마시면 전화하는... 아마 그녀에게도 그랬으리라.
백해무익한 일이지만 말려도 소용없는 일.

살짝 다운되어 보이는 선배를 향해,
나는 박상민의 무기여 잘 있거라, 의 노래가사처럼
적절히 과장과 위트를 섞어 몇 건의 소개팅 스토리를 이야기 했지만...
정작 내 마음을 칼날처럼 훑고 지나갔던 누군가와,
요즘 딱딱히 겁먹고 있는 내 마음을 향해 성실히 괭이질을 해대고 있는 남자에 대해선 침묵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에 대해서 신중하자는 태도였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땐 문득 선배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넌 참 실속이 있어."
선배가 그 말을 했을 때,
재테크에도 까막눈이고, 운전면허증은 오직 신분증 대용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런 뜻이 아님을 알고는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실속 없는 맹추인지를 굳이 까발리고 싶지도 않은 게 진심이었다.
선배는 아마 여전히 야무지고 옹골찬 내 모습에 안심했을 것이다.

아무리 거하게 차려놓은 진수성찬이라도,
구미가 당기지 않으면 목 마를 때 물 한잔만도 못하듯,
가슴을 움직이지 못하는 만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며...
여전히 우리가 철이 덜 든 건 아닌가, 의심해가며 멋쩍게 웃었다.
다양한 노하우를 축적하는 대신 이렇게 계속 정공법만 고수해도 좋은가, 자문해가며.

이제 개강이 머지 않았고 여름이 가고 있다.
빳빳하게 펄럭이는 빨래처럼 상쾌한 가을을 즐기고 싶다.
두려움 반, 의심 반으로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화창한 햇볕 아래 내어놓을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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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8-30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헛 깐따삐야님은 독일식 으로 맥주를 드시는군요...
맥주의 목넘김처럼 사랑도 시원하면 뭔 고민을 하겠냐마는..
때론 50도를 넘는 화주같은 매력을 가지고 있기에 사랑이란 걸 하는 걸지도
모른다죠..^^ 혹시 선배가 앞에 "나보단"을 생략한 건 아닐까요.? ^^

깐따삐야 2007-08-30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그래서 돌아오는 가을엔 머리를 비우고 가슴을 채울까 생각 중입니다.^^;

라로 2007-08-31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마시며 전화하는 남자는,,,,마음 둘곳이 없어서 그런것 같아요,,,에혀
그 맘을 알면서 모른체 하시기 힘들죠???뭔말인지 저두 몰라욥~.>.<

깐따삐야 2007-08-31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bi님, 마음 둘 곳이 없어서... 맞는 말씀이에요.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습관이라서 받아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죠. 술 마신 자, 곱게 잠들어야 할지니...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