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더 어릴적의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은 반드시 환하고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모름지기 밝고 눈부신 햇볕 아래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모든 걸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럴 수도 있다, 가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고 믿었다. 엄청난 비약을 감수하고라도 당시의 나는 무엇인가를 감추는 것은 비겁함을 넘어서 곧 악의라고까지 생각했다. 당시의 내가 상대를 불문하고 자주 들이대던 말 중 하나가, 너 왜 말을 못해, 였으니까. 상대가 드러내는 머뭇거림이나 곤혹스러움을 비겁함의 징표로 해석하며 한껏 우월감을 느꼈던 나는 솔직함을 무기로 다분히 악랄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처럼 견고하던 의지에 조금씩 틈을 보이며 진행되는 균열을, 몹시도 선명하게 느끼고 있다. 이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고 비약하기는 커녕 반드시 그래서는 안된다, 고 거꾸로 비약할 지경이다. 삶이 그렇듯 반듯하고 투명한 한 가지 루트로만 통하는 게 아니라는 어딘지 꺼림칙하면서도 부정하기 힘든 깨달음에 지배되고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사회적 공의에 관해 어린 시절보다 더욱 더 의심스러워하고 절망스러워 하는 지금의 나는, 공개와 진실보다도 비밀과 거짓말이야말로 물과 산소처럼 삶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인간적 영역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나 스스로의 동의를 구해보는 것이다.  

머리 꼭대기의 고상함부터 발뒤꿈치의 누추함까지 모조리 드러낸다는 것은 타고난 솔직성과 용기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빈약한 마인드를 드러내는 정신적 노출증이자 전부 아니면 무를 원하는 극단적 이기심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말해도 괜찮을까? 그렇다면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 반드시 말해야겠어. 세 번 쯤 생각해 보는 게 좋다. 곤란한 느낌이 드는 내용물은 성급히 쏟아내 보았자 악취 섞인 냉기로 주변을 얼리기밖에 더하겠는가. 더군다나 솔직했기에 나는 무죄가 되고 상대는 그 결과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조차 없다. 자백한 자는 진실의 속박에서 벗어나 구원받았으므로 쌔근쌔근 발을 뻗고 자겠지만 자백을 감당해야 하는 입장에선 손발을 오므린 채로 조용히 사면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이다. 혹은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다. 이해받으려 했든 그저 털어놓는 것에 위안을 받았든, 이해하고 싶었든 그저 진실을 알았다는 것에 안도를 했든, 결국 어떤 의미에서 지나친 솔직함은 양끝에 날이 선 곡괭이처럼 상대와 나를 향해 동시에 휘두르는 잔인한 폭력인 셈이다. 말하지 말지 그랬어. 듣지 말지 그랬어. 그것만큼 무용한 말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지금은 백퍼센트 솔직한 상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오십퍼센트 알듯말듯한 베일에 싸인 상대를 이해하는 일이, 가끔은 더 편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전에 없던 생뚱맞은 생각을 하는 중이다. 개인적인 영역에 있어선 무엇이 더 공정한가, 보다 무엇이 나를 더 편히 숨쉬게 하는가, 가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태우스 2006-07-26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걸 공개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저도 나름 솔직하게 글을 쓰려고 하는데요, 다른 사람이 볼 가능성이란 저로 하여금 어느 정도의 검열을 하게 만들지요. 제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욕구란... 글구 사랑은 솔직한 사람이랑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베일에 싸인 게 첨엔 신비해 보이겠지만, 예측이 안되서 말입니다 그냥 제 생각.

깐따삐야 2006-07-26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물론 저도 솔직한 사람이 좋은데 가끔 하지 않아도 될 말,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말까지 해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도 있는지라 솔직함도 어느 정도껏이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답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 내지 존중으로 입을 다무는 사람이 있고, 오직 내 마음 편하자는 식으로 솔직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자가 좀더 낫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요. 사실은 저란 사람이 후자에 속하는데 조용히 있다가도 급작스런 직설화법으로 상대를 곤혹스럽게 하는 경향이 있어서 고쳐나가야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만 그런지는 모르지만, 솔직한 사람은 솔직한 말에 상처도 잘 받는답니다. 항상 부메랑을 던지고 있는 셈인데 참 아이러니지요. ^^

마태우스 2006-07-26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한 것과 말을 막하는 건 다르다고 생각해요. 음, 님한테 그런 경향이 있으시단 말이죠. 자신의 실수를 공개하는 건 솔직, 다른 사람의 실수를 꼬집는 건 배려가 없는 것, 이렇게 정리하면 어떨까요

깐따삐야 2006-07-26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실수를 공개하는 것을 곧 면죄부로 생각하는 뻔뻔함만 없다면, 그런 자기 본위의 솔직함만 아니라면, 솔직하다는 것은 여전히 미덕이에요. 그나저나 마태우스님이 정리해 주신 내용을 보니 저는 솔직하지도 못한데다, 배려도 없는 사람이네요. 이쿠!

blowup 2006-07-27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쯤 저도 쓰고 싶었던 글이에요.
서재 어딘가에 저 제목으로 글을 쓰다 만 것도 있구요.^-^
깐따삐야 님의 글쓰기는 가벼운 놀림 속에 묵직한 펀치를 숨기고 있어요.
글, 참 잘쓰세요. 늘 생각하는 거지만.

깐따삐야 2006-07-27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님, 제가 두서 없이 써내려가느라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까지도 헤아려 읽어주시는 것이라 생각이 되요. 감사합니다. ^^
 

T는 우리반 학생이다. 재작년에도 내가 담임을 맡았던 아인데 반장선거를 하던 날, 후보를 정하던 즈음해서 눈을 깜빡이면서 수줍게 손을 들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몇 표 차이로 부반장이 되었지만 일 년 동안 그 역할을 야무지게 해냈고 성적도 항상 우수했다. 좋은 글을 써서 종종 상도 받아왔고, 키는 작지만 빠른 발로 상대를 앞지르며 재간을 부리는 우리반의 걸출한 축구선수이기도 했다. 3학년이 되어 T와 다시 만났을 때, 예전의 순진하고 깍듯하던 모습보다는 좀더 남자답고 의젓해진 모습이 먼저 눈에 띄었다. 예나 지금이나 담임으로서의 내 역할이 거의 필요 없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매사를 알아서 잘하는 모범생이란 사실은 여전했다.  

남자 아이들은 중3 정도 되면 뻗쳐 오르는 에너지를 주체 못해서 가끔 별다른 이유도 없이 화를 내기도 하고, 멀쩡한 학교 기물을 파손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멱살잡이를 하는 등, 곧잘 후회의 빛을 보일만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곤 한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더 서투른 신참이었을 때, 또래에 비해 다소 조숙해서 일찍 사춘기가 찾아온 아이들이 저런 식의 행동을 보일라치면, 같이 펄펄 뛰고 고함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서 아이를 항복시키기 위해 난리를 치곤 했다. 물론 아이에게나 나에게나 서로에 대해 악의는 없었다. 단지 젊은 피끼리 파바방 부딪쳐 지금 이 순간 너에게만은 지지 않겠다는 치기 어린 오기에 발동이 걸렸달까. 그 때를 떠올리면서 요즘은 서로 쑥스럽게 웃기도 하지만 아무튼 매일매일이 활화산같았던  한 해였다. 한편, 그러한 잦은 충돌과 상처 속에서 내가 배운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기다림'이었다. 아이들은 대개 뜨겁고 성급하기에 대척점에 있는 어른들은 그만큼 냉정하고 느긋해야 한다는 것. 상대방에 대해서 일정 부분 체념 모드로 돌입했을 때 그를 대함에 있어 차고 게을러지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언제나 일정 비율로 냉정하고 느긋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경지가 아니다. 간혹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언제나 웃는 얼굴로 학생들을 대하시는 연로하신 선생님들에게서 저런 모습을 뵙게 된다. 아직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사랑받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아이들은 금새 알아차린다. 아, 저 선생님은 진심으로 우릴 사랑하시는구나. 가끔 뾰로통한 표정으로 본숭만숭 앉아있던 아이들이 저렇듯 연세 지긋하신 선생님들 팔에 매달려 한껏 친근함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면 과연 그 노하우는 뭘까 궁금했다. 지금껏 관찰해 온 내 짧은 소견으로는 지칠 줄 모르는 '기다림'이란 느낌이 든다.

아이들 하나, 하나를 향해 공평한 웃음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아이들을 현재로 대하기보단 미래로 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은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눈앞에 벌여놓은 사소한 실수들을 서둘러 지적하게 되기 마련이고 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이해하는 건 한바탕 잔소리 뒤의 과정으로 그치는 경우가 사실은 더 흔하다. 대개는 그 자리에서 잘못했다,는 마음에도 없는 한 마디를 받아내기 위해서 앙앙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아이들보다 한 발짝 더 앞선 성급함 때문에 나중에 두고두고 생각하면 할수록 스스로 얼굴 빨개질 짓만 반복하게 되곤 한다. 기다려주고 지켜봐주면 아이들도 오래지 않아 알게 된다. 잘못했다, 는 것을. 내 기분을 통제하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는 것을. 하지만 어떤 경우와 맞닥뜨렸을 때, 그처럼 아이들의 머릿속과 마음속을 오가며 그들의 심중을 헤아리고 가장 현명하고도 효과적인 절차를 떠올린다는 것은, 다 컸다는 어른들에게조차 그다지 호락호락하진 않은 일이다.

T의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T는 작가가 되고 싶어한다. 글 쓰는 것을 다른 어떤 것보다 좋아할 뿐더러, 보통 아이들이 무협지나 환타지 소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때도 세계명작이나 현대소설을 읽으면서 나름의 진지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담임이다보니 대회에 출품할 작품이라든가, 교내에서 열리는 백일장 작품 등, T의 글을 읽게 될 기회가 가끔 있었다. 모든 기교적인 면을 떠나서 우선은,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도 정성 어리고 따스해서 읽고나면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되는 그런 글들이었다. 글은 곧 그 사람이라고 하듯, 항상 인간적인 것에 먼저 시선을 주고 그것을 조곤조곤 상기하며 완성된 한 편의 글로 담아낼 줄 아는 T의 감성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해 왔다. 공부도 곧잘 하면서 좋은 글도 쓸 줄 아는 T에 대해선 그렇듯 만족감만 있을 뿐 별다른 우려를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T의 부모님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상담을 청해오신 T의 어머니는 T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걱정을 하고 계셨다. 진로에 대해 T가 아버지와 심하게 부딪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T의 아버지는 이 근방에서 꽤 유명한 한의사다. 한 지방의 유지로서 T의 아버지가 갖고 있는 꿈은 작지 않은 듯 보였다. 아버지는 T가 대를 이어 한의사가 되길 바라고 있었고 T는 다른 건 몰라도 의사나 한의사는 싫다고 버티고 있었고 어머니는 중간에서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들인 T를 간간히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T가 남자로서의 야망이나 명예에도 눈과 귀를 열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고 T는 국어교사를 하면서 평생 글이나 쓰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니, 뜻이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해마다 일류 대학을 많이 보내고 있는 어느 사립고등학교의 입시 전형에 대해 문의를 해왔고 T가 진로를 바꾸도록 설득해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T는 한의사란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며 싫다는 뜻을 비쳤다. 원체 언어와 문학을 좋아하는 T에게는 의사보다는 국어선생님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머니의 당부를 상기하며 요즘 의사들은 시도 쓰고 수필도 쓰고 소설도 쓴다면서, 진짜 순수전업작가는 아주 드문 경우에 속한다고 말했다. T는 참하고 반듯한 모범생이었지만 모범생 특유의 고집 또한 대단할 것이었다. 무작정 설득한다고 쉽게 뜻을 바꿀 것 같지 않아 예전에 내가 써먹었던 방법을 일러주었다. 아직 생각 중이라고 해. 천천히 생각해 볼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려봐. 아버지와 정면으로 부딪쳐봤자 서로 힘들어지기만 한다. 네가 계속 고집을 부리면 어머니도 힘들어지셔. 대신 공부는 아주 여얼심히 해서 부모님이 너를 마음 놓고 믿으실 수 있게끔 해드려야 돼. 그리고 꿈은 여러번 바뀌는 거야. 너무 빨리 결정지워 놓는 것도 좋지는 않아. T는 그제서야 수긍을 하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나는 누구 한 편의 입장만 옹호할 수가 없었다. T만 따라준다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의사가 되어서 아픈 사람들을 돕는 것도 참 좋은 일이고, 아버지만 이해해 주신다면 국어나 문학 교사가 되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글도 쓰며 사는 삶도 참 좋을 것이었다. 삶을 끝까지 살아보지 않는 한 무엇이 더 좋을 것이라고 그 누가 단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먼저 인생을 사신 부모님은 확률과 통계에 대해 빠삭한 분들이라지만 그 결정이 자녀의 의지와 상반되는 것이라면 무조건 밀어부치기만 해서도 안되는 일일 것이다. 인생은 부모님이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님 뜻을 거슬러서 아무 문제 없이 잘 살게 되고 행복해지는 경우도 흔치는 않다. 결국 나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은 T에게 저만치의 조언을 해주는 것에 그쳤고 나는 그저 T는 잘할 것이고, T의 부모님도 그렇게 답답한 분들은 아니니 분명 서로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막연히 믿어보기만 할 뿐이다.

요즘은 결손가정도 많아졌고 아주 기본적인 생활고를 겪는 아이들도 여전히 적지 않기에 T의 경우엔 어떻게 보면 참 배부르고 행복한 고민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가정사에는 상대적 우월감이나 상대적 박탈감 따윈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한의사를 시키고 싶은데 작가를 꿈꾸는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나, 학업과는 담을 쌓고 오토바이만 몰고 다니는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나 부모에겐 비중의 차이 없이 똑같이 난감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옛말은 하나도 그른 것이 없다. 특히 자식 문제에 대해선 인간적으로 보나, 대외적으로 보나 요만큼의 티끌도 없는 사람들이 간혹 의외의 성급한 면을 보이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나도 예전엔 기다린다고 뭐가 달라져?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전혀 그렇지 않다. 기다릴 줄만 안다면, 사람이 뭔가를 충분히 기다릴 수만 있다면, 좋은 부모, 좋은 교사의 역할을 절반도 넘게 해낸 것이라고 믿고 있다. 빨리 이끌어낸 대답은 정답이 아닐 확률이 더 높다. 정답의 탈을 쓴 오답이랄까.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급하게 지우고 쓴, 지운 흔적 밑으로 원래 썼던 오답이 지저분하게 보이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스스로에게 왠지 모를 슬픔과 창피함을 동시에 느끼는. 그래서 시의적절한 기다림, 질기디 질긴 애정이 뒷받침 된, 능동적인 기다림에 대해서 좀더 알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 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rainy 2006-07-13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글.. 무장해제 되어버리는 심정이네요.. 현장에서 오래 진심으로 생각한 사람만이 해 낼 수 있는 생각들.. 아이는 나날이 커가는데 제 자신이 아직 질풍노도를 못 벗어나서 매일매일이 바람에 펄럭이는 종잇장같은데.. (물론 따스하고 평온한 날도 많지만^^;;) 두고 두고 가끔씩 읽어야겠어요. 이 페이퍼를..

깐따삐야 2006-07-13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ainy님, 반갑습니다. 저 자신도 사시사철 질풍노도랍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하루하루가 외줄타기 같기도 하구요. rainy님 서재로 조만간 구경가겠습니다. ^^

마태우스 2006-07-13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멋진 글이십니다. '파바방'이란 단어도 아주 신선한걸요. 무엇보다 애들에 대한 님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져서 좋습니다. T의 장래가 어찌될지 모르지만 어떤 길을 걷든지 '좋은 사람'이 될 것만은 분명하군요.

깐따삐야 2006-07-1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저도 어떤 길을 걷든, T는 행복해질 수 있는 자질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개츠비 2006-07-14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오즈님)! 개성 가득한 아이들의 성장기를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입니다. 그들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기다릴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신 것도 큰 배움중 하나 같습니다. 곧 방학이군요. 즐겁고 좋은 일들이 많길 바랍니다. ^^

깐따삐야 2006-07-14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retre7님, 격려 감사합니다. 무더운 여름, 즐겁고 건강하게 보내세요. ^^
 

내가 가지고 있는 나쁜 습성 중의 하나는, 진짜 불만은 결코 겉으로 내보이지 않고 가슴 한켠에 꽁꽁 모셔둔다는 것이다. 그것을 찬찬히 삭혀서 발효시킨 다음 이해와 인내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나의 인격에 비추어 볼 때 전무후무할 확률이 상당히 높다. 그렇듯 차곡차곡 쌓인 불만들이 어느 날 가슴 속에서 봇물 터지듯 폭발함과 동시에 나는 흥분하지도 않은 채로 상대에게 관계의 종언을 고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까지, 라고.

나란 사람은 꾸준한 줄폭탄보다는 급작스런 직격탄을 선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참 나쁘다, 란 생각이 들지만 본래 소심한 A형으로 타고났기 때문인지 불만에도 쫀쫀한 정리벽이 있는 모양이다. 어릴 때 겨울에 눈싸움을 할 때도 나는 오래도록 꼼꼼하고 찬찬하게, 눈가루들을 모아모아 단단히 뭉친 다음 표면에 물까지 발라 꽝꽝 얼린 후 도망가는 상대의 등짝을 향해 눈덩이를 명중시키는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대개의 여자아이들은 눈가루를 얼굴에 뿌리고 도망치기도 하고 덜 뭉친 눈덩이를 던지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눈싸움을 눈놀이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다분했지만 나는 오빠들이 눈싸움을 하는 모양을 잘 눈여겨 보았다가 실전에 활용하곤 했다. 그다지 관계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아무튼 나는, 까르르 까르르 웃고 살짝살짝 토라지기도 하는 가운데 진행되는 눈놀이보다는, 나였든 다른 아이였든 딱딱한 눈덩이 하나 얼얼하게 얻어맞고 누구 하나 세상 떠나갈 듯 울고 난 다음에야 끝나는 눈싸움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지지부진한 즐거움 보다는 한 방의 설움이 훨씬 더 가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예전에 남자친구를 대할 때 역시 그랬다. 나는 그가 가게 점원들을 대하는 태도,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모양, 전화를 걸고 받는 습관, 부모님과 형제들을 향해 갖고 있는 마인드에 대해 항상 불만이었지만 한 번 운을 띄웠을 때 상대의 반응이 별로 진지하지 않다는 것을 간파한 다음에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는 그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상대가 마음에 들면 때로 나는 나를 넘어서는 노력까지 불사한다. 나의 모순됨은 바로 거기에 있다. 싫은 점이 있으면 싫다고 말한 다음 상대가 스스로 변화하기를 촉구하던가, 상대의 변화를 부추겨야 할텐데 나는 일단 상대에게 나를 맞춘다. 상대는 자신의 가려운 데를 다 알아서 긁어주고 맞춰주는 나를 편하게 생각하면서 나에게 익숙해진다. 그 과정 안에서 난 앙앙거리지도 않고 징징대지도 않는다. 마음 속으로는 성벽을 쌓았다 부수었다 여러 차례 반복할지라도 입 밖으로 뱉어내는 말은 배려와 관용이 넘치는 다정한 말들 뿐이다. 그러다가는, 어느 날 급작스럽게, 상대에 대한 마음이 식어버린다. 서서히, 가 아니라 아주 빨리. 별 고민도 없이 잠들고 난 후 그 다음 날 아침 눈을 떠서 오늘 헤어져야지, 라고 결정하는 식으로. 뜬금없이 직격탄을 맞아버린 상대는 당연히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그리고는 내가 읊어대는 이유들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왜 그 때 말하지 않았냐고. 내가 돌려주는 말은, 내가 말할 때 넌 뭐하고 있었니.   

평소 다정하고 솔직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나지만 알고보면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 물론 겉으로는 그렇다. 가게에 들르거나 하다못해 지나가는 택시를 타더라도, 주변 사람들은 내가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조차 상냥하고 친절하다는 것에 좋은 인상을 받곤 하니까 말이다. 솔직한 것도 맞다. 거짓말을 좋아하거나 즐기는 사람이 드문 것처럼 나도 그렇다. 가능한 한 투명하게 살길 바랄 뿐더러,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솔직한 것이 인간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저처럼 켜켜이 쌓아놓고 묵혀두는 불만 섞인 감정들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 되곤 한다. 나의 해결방식은 언제나 이별 뿐. 대안책은 없다. 학부 시절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나와 한 그룹에 배정된 친구가 있었는데 한 달 동안의 실습 기간 동안 나는 그녀에게 이런저런 불만들을 갖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진 않았다. 슬슬 눈치를 살피던 친구가 이유를 물어왔지만 적당히 얼버무리곤, 한 달간의 실습기간이 끝나자 그녀의 경박함 때문에 내가 겪어야 했던 피곤함에 대해 짧고 굵게 읊어준 뒤 더 이상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졸업 이후에도 문자를 보내오고 소식을 전해 왔지만 응대하지 않았다. 시간이 이만치 흐른 마당에 계속 그러는 나 자신도 우스웠고, 어쨌든 대학 4년을 함께 보낸 친구였는데 내가 지금 친구 하나를 잃어버리고 있구나... 싶은 느낌도 썩 기쁘진 않았다. 그런데도, 마음 속에서는 나의 해결책은 이별, 이별 그 이후의 대안책은 없음, 이라는 갑갑한 공지사항만 뜨는 것이다. 이건 무슨 미련한 고집이고 까닭 없는 오기인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보면 나는 말을 참 못하는 사람이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떠드는 직업을 가졌고 남의 나라 말로 밥벌어 먹고 산다지만 말을 많이만 하고 있을 뿐, 정작 필요한 부분에서는 저렇듯 입을 다물어 버리니 말을 못하는 사람이 맞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아도, 상대의 독설이 주는 상처보다 침묵이 주는 상처가 훨씬 더 공포스러울 수 있다. 직접 대놓고 말하기 싫다면,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약간씩의 힌트라도 내비쳐주는 배려가 필요한 건 아닐까. 나란 사람은 기괴한 방식으로, 뒤틀린 방식으로 나와 상대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구 하나를 울리고 끝나야만 속이 시원하단 말인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인 2006-07-0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유형이군요. 전 아주 둔감하고 귀가 어두워 일일이 직설적으로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는 경우가 참 많아요. 그래서 놓쳐버린 친구들에게 미련을 가지고 지금도 꾸준히 연락을 취하긴 하지만, 그 친구들이 마음의 문을 열 거 같지 않아 슬퍼요.

깐따삐야 2006-07-10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인간관계에서 시시때때로 서로간의 진심보다 타이밍이 우위에 놓일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시험 기간이라서 아이들을 일찍 집에 보내고 이런저런 밀린 업무를 하고 있던 중에 친구 S에게서 전화가 왔다. 얼마전 메신저 상에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착잡한 마음을 호소했던 친구였다. 연애 기간도 2년을 채워가고 있었고 남자친구가 그녀보다 네 살 연상이어서 더 이상 지체할 이유도 없기에 슬슬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린 건, 시부모님이 될 분들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 분들은 며느리가 될 내 친구와 한 집에서 함께 살고 싶어하신다고 했다. 맏아들이니 과히 무리한 제안도 아니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 집에는 아직 미혼인 예비 시동생과 예비 시누이가 함께 살고 있었고 더군다나 예비 시누이는 S의 대학 동기이기도 했다. 결국 S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시부모님 되실 분들은 특별히 하고 계신 일이 없는데다 시누이가 될 친구도 무슨 시험인가를 준비 중이었고 밥벌이를 하는 건 S의 남자친구와 시동생 뿐이었다. S가 그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되면 S는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을 관둬야 할 형편이고 그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시어머니 되실 분이 취직은 내가 시켜줄테니 걱정 말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이미 환갑을 바라보시는 분이 무슨 능력이 뻗쳐서 오십만 청년실업시대에 취직을 시켜주신다는 말씀인가. 과년한 딸내미도 집에서 놀고 있는 판국에 며느리 자리 취업까지 알선해 주실만큼 발이 넓으시단 말씀인가. 고민 끝에 S는 시집에 들어가서는 못 살겠다, 고 말했고 남자친구는 딱 2년만 같이 살다가 독립하자고 했단다. S가 위와 같은 대강의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었을 때 내가 맨 먼저 했던 말은, 그런데 있잖아. 과연 딱 2년일까. 그 말이 지켜질까, 였다. 지금은 2년이라고 하지만 2년이 20년이 될지, 그보다 더 길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S는 내 말이 맞다면서 시어머니 되실 분이 무섭다고도 했다. S를 처음 보시자마자 한 말씀이, "넌 왜 이렇게 구두굽이 높으냐. 여러모로 건강에 안좋으니 낮은 거 신고 다녀라." 였단다. 곱게 들으면 고마운 말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첫 대면에 저 정도 말씀을 하실 분이면 S를 쥐락펴락 하고도 남으실 분 같긴 했다. 극성스런 시어머니한테 쥐어 사는 것도 나름 편하고 이로운 일일 수는 있겠지만 똑똑하면서 극성스러우냐, 그냥 극성스러움 그 자체냐는 살아보지 않았으므로 아직 판단보류의 문제이기 때문에 S는 그냥 두려워만 하고 있었다.

제 머리도 못 깎고 남의 머리도 못 깎지만 남의 머리에 관심만 많은 내가 S에게 남자친구를 사랑하냐고 물었다. 정말로 사랑하냐고. 그러자 S는 잘 모르겠다고,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아냐고 했다. 우문현답이요, 박수를 쳐주고 싶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당최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대답이기도 했다. 역시나 겁대가리 없는 로맨티스트인 나. 제법 깐깐하고 현명했던 순간은 깡그리 삭제되고 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야! 그렇게 확신도 없음서 무슨 결혼은 결혼이냐. 진짜 사랑하고 아끼면 시댁 식구니 뭐니 그보다 더한 거라도 껴안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정도로 힘들어 하면서 그게 사랑이니, 사랑이야?! 그러자 학교 때부터 내 말을 곧잘 존중해 마지 않았던 S, 문득 목소리 톤이 바뀌면서 그렇지? 사랑하면 다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맞어. 곧 찜찜하고도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으나 나는 또 무책임하게 네가 잘 알아서 하리라고 생각한다, 라면서 이야길 맺었다. 그리고는 얼마 후, S가 그 사람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 사람이 쉽게 받아들여? 응, 내가 시집에 들어가서 살기도 싫고 돈 없는 시집도 싫다고 말했거든. 오, 저런. 너무 과하게 때렸당. 그런가? 근데 그 사람도 나같이 속물적인 여자는 필요 없대. 두주째 서로 연락 안하고 있어. 진짜 헤어진거야? 그렇다니깐. 난 정말로 오빠를 사랑하진 않았나봐.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애.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애...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애... 이 말이 내 가슴에 무슨 공명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S도 그 동안 많이 힘들어 했고 오랜 친구로서 S가 더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물론 있었지만 사랑하면 다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사랑하지도 않는데 무슨 결혼이냐고, 온통 그 쥑일놈의 사랑으로 뒤범벅을 해놓은 내 조언을 받아들이고 난 후 저런 결정을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영 개운치 않았다. 내 말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서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 쯤은 알지만 그래도, 왠지 미안했다. 정말 서로에게 질려버린 경우에도 그 놈의 정 때문에 헤어지기가 쉽지 않은건데 S와 S의 남자친구는 여전히 서로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S에게 좀더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라고 할 것을, 사랑 운운하며 혼자 흥분한 내 자신이 참 싫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 S에게서 온 전화. 우리 다시 연락하고 있어. 하하하하하하하하하. ㅠ.ㅠ 기왕 그렇게 된 거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하며 무탈하게 잘 이어졌음 좋겠다. 아웅다웅 톰과 제리.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둘만의 속사정을 누가 알겠는가. 정말 사랑하면 내가 생쥐여도 고양이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6-07-07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이네요...현실적으로 부딪칠 상황은 정말 많을 커플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연락한다고 하니...두사람의 정도 보통은 아닌 듯 하네요...^^
깐따삐야님이 한시름 놓은건 아닌가 모르겠어요...ㅋㅋㅋ

깐따삐야 2006-07-08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글쎄요. 그게 그렇게 확실치가 않은 문제이고 제 편에서는 앞으로도 줄곧 확실치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지도 모르겠어요.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짓은 더 이상 안할테지만 친구가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조금 더 신중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아직은 막연한 느낌 뿐이지만, 두 사람의 사랑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아요.
 

친구 K가 아기를 낳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친구와 친구가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은 것이다. 아내 되는 사람은 나의 초중등 동창이며 남편 되는 사람은 중등 동창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 7년간의 연애 끝에 이들은 결혼에 골인했고 더 이상의 비유를 찾을 수 없는, 그야말로 천사처럼 예쁜 딸내미를 낳았다. 비 오는 주말, 마트에 들러 기저귀 꾸러미를 사들고 다른 두 친구들과 함께 신혼부부의 집을 방문했다. 아직 세상에 나온 지 2개월밖에 안된 윤아는 앙증맞은 손싸개를 한 채 발가락을 꼬물꼬물, 입술을 옹알옹알하며 비 오는 주말의 눅눅함과 노곤함을 싹 가시게 해주었다. 윤아는 이미 평균 체중을 넘어선 채 잘 먹고 잘 자며 쑥쑥 자라고 있는 중이었다.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동그랗고 맑은 눈, 웃을 때 살짝 도드라지는 볼살이 꼭 제 엄마를 빼닮은 것 같았다. K는 아기 아빠 어릴적이랑 똑같다고 하는데 사실 누굴 닮은들 어떠랴. 아기는 그 자체로 예쁘고 사랑스럽고 소중하다.

K가 윤아를 안아보라고 했을 때 솔직히 겁이 났다. 하지만 꼭 한 번 안아보고 싶기도 했다. 아기가 안아주고 싶을만큼 예뻐서이기도 했지만 안으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윤아는 나에게 안기자 발을 쪽쪽 뻗으며 내 눈을 바라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좀 무거웠고 꼬무락거리며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신기하고도 무서웠다. 가슴과 손에 아기의 따듯한 체온이 전해져왔고 간혹 눈웃음도 치다가, 찡그리기도 하다가, 를 반복하는 표정은 너무나 귀여웠다. 친구들은 나에게 아기 안은 폼이 난다면서 좋아했지만 윤아를 엄마에게 다시 안겨주고 나니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느껴졌다. 휴우- 하는 한숨과 함께. 능숙한 솜씨로 우유를 먹이고 아기를 어르고 하는 K가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보였다. 엄마란 저런 것이구나. 나와 같이 까불고 소리 지르고 하던 중학생 시절의 K는 온데간데 없고 아기를 애틋하고도 정겨운 눈으로 바라보는, 따뜻하고 의젓한 엄마 K가 그 곳에 있었다. 아기가 예쁠 때는 예뻐도 힘들 때는 정말 내가 왜 애를 낳았나, 싶을만큼 힘들 때도 많다고 푸념했지만 엄마가 된 K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아름답고 성숙해 보였다. K와 H 부부, 그리고 윤아가 지금처럼 계속 건강하고 행복하길 빈다.

너도 낳아야지. 그러는 너는. 나도 낳아야겠지. 돌아오는 길에 미혼인 친구들끼리의 심심한 대화. 솔직히 지금은 결혼에 대해서도, 아기를 낳는 것에 대해서도, 절대 자신이 없는데. 누군가 다 준비시켜놓고 코앞에 대령한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두렵고 자신이 없는데. 그런데도 신혼부부는 부러웠고 아기는 참 예뻤다. 생각해보면 인생이 별 게 있나 싶기도 하다. 바로 그런 게 행복이지.

 


댓글(9)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6-07-03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이라는게 별건가요...다 닥치면 잘하지 않나 싶어요..^^
가끔 제자신을 봐도 제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문뜩 문뜩 드는 이유는 잘 자라고 있는
주니어 때문이랍니다..^^

깐따삐야 2006-07-03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음... 일리 있는 말씀이란 생각이 들어요. 저도 막상 닥치면 잘할 것 같은데 좀 닥쳐줬음 좋겠어요. ^^

비로그인 2006-07-03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행복, 소소한 일상들. 어쩌면 무섭고 두려운데 어느 순간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는 일들이 모여서 일상이 되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에는 도저히 못하겠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당장 해버리는 일들이 있잖아요. 그 때에는 하지 않는 순간이 작다거나 무언가를 결심하는 순간이 크다거나, 그 비중을 떠나서 두가지 모두가 나를 이룬다는 생각이 듭니다.

깐따삐야 2006-07-03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de님, 비중을 떠나서 두 가지 모두가 나를 이룬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매사에 있어서 심사숙고한 다음 결정은 가능한 한 빠르게, 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잠깐 생각하고는 결론을 내리는 시점에 뭉개면서 질질 끌지 말구요. 제가 좀 그런 편이거든요. ^^

비로그인 2006-07-03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사숙고한 다음 결정은 빠르게, 라는 대목에서 으윽, 소리가 나올 뻔 했습니다. 전 오래 생각하고(생각하다가 또 잠깐 쉬기도 합니다) 결정을 내리는 시점에서 질질 끌기도 아주 잘하거든요.ㅠ.ㅠ

깐따삐야 2006-07-0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de님, 머리가 아파서 오래 생각하지도 못하고 대충 결론을 내린 다음, 그 결론이 마음에 안들어서 질질 끌다가 그래도 별로 뾰족한 수가 안 떠올라 결국 맨 처음 내렸던 결론으로 귀결되어, 종종 아메바라는 말을 듣는 저보다는... 그래도 신중하다, 라는 느낌이 팍팍 전해져오는 Jude님이 훨씬 나으신 겁니다. ^^

마태우스 2006-07-03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낳고 기르는 거,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전 진작에 포기했습니다만... 그래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애낳는 거, 부럽지가 않더라구요

BRINY 2006-07-03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지나가는 말로 어머니께서 그러시더라구요. 아무 생각없이 나이차서 결혼해야한다는 생각으로 결혼했고, 너희들 기르기도 너무 힘들어서 귀엽고 예쁜지도 몰랐다구요. 어머니는 그래서 본인도 이제 귀여운 손자손녀를 보고 싶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지만, 솔직히 그런 의무로만 가득찬 가정환경이 저도 너무 힘들었구, 남들 다 한다고 해서 결혼하고 애 낳을 일 아니라는 거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깐따삐야 2006-07-03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아기가 보기에 좋았더라, 하는 것과 실제로 낳고 기르는 것은 분명 다른일일거에요. 불안정하고 험난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저 녀석한테도 해맑게 웃던 아기 시절이 있었을텐데, 그저 방긋방긋 웃는 것만으로도 부모에게 기쁨을 주던 시기가 있었을텐데, 라고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하고 두려워지기도 하고 그렇답니다.

BRINY님, 어쩌면 멋 모를 때 결혼하고 아기 낳는 일이 행복의 첩경인지도 몰라요. 저도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깨달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부담감만 자꾸 자꾸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