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기간이라서 아이들을 일찍 집에 보내고 이런저런 밀린 업무를 하고 있던 중에 친구 S에게서 전화가 왔다. 얼마전 메신저 상에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착잡한 마음을 호소했던 친구였다. 연애 기간도 2년을 채워가고 있었고 남자친구가 그녀보다 네 살 연상이어서 더 이상 지체할 이유도 없기에 슬슬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린 건, 시부모님이 될 분들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 분들은 며느리가 될 내 친구와 한 집에서 함께 살고 싶어하신다고 했다. 맏아들이니 과히 무리한 제안도 아니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 집에는 아직 미혼인 예비 시동생과 예비 시누이가 함께 살고 있었고 더군다나 예비 시누이는 S의 대학 동기이기도 했다. 결국 S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시부모님 되실 분들은 특별히 하고 계신 일이 없는데다 시누이가 될 친구도 무슨 시험인가를 준비 중이었고 밥벌이를 하는 건 S의 남자친구와 시동생 뿐이었다. S가 그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되면 S는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을 관둬야 할 형편이고 그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시어머니 되실 분이 취직은 내가 시켜줄테니 걱정 말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이미 환갑을 바라보시는 분이 무슨 능력이 뻗쳐서 오십만 청년실업시대에 취직을 시켜주신다는 말씀인가. 과년한 딸내미도 집에서 놀고 있는 판국에 며느리 자리 취업까지 알선해 주실만큼 발이 넓으시단 말씀인가. 고민 끝에 S는 시집에 들어가서는 못 살겠다, 고 말했고 남자친구는 딱 2년만 같이 살다가 독립하자고 했단다. S가 위와 같은 대강의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었을 때 내가 맨 먼저 했던 말은, 그런데 있잖아. 과연 딱 2년일까. 그 말이 지켜질까, 였다. 지금은 2년이라고 하지만 2년이 20년이 될지, 그보다 더 길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S는 내 말이 맞다면서 시어머니 되실 분이 무섭다고도 했다. S를 처음 보시자마자 한 말씀이, "넌 왜 이렇게 구두굽이 높으냐. 여러모로 건강에 안좋으니 낮은 거 신고 다녀라." 였단다. 곱게 들으면 고마운 말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첫 대면에 저 정도 말씀을 하실 분이면 S를 쥐락펴락 하고도 남으실 분 같긴 했다. 극성스런 시어머니한테 쥐어 사는 것도 나름 편하고 이로운 일일 수는 있겠지만 똑똑하면서 극성스러우냐, 그냥 극성스러움 그 자체냐는 살아보지 않았으므로 아직 판단보류의 문제이기 때문에 S는 그냥 두려워만 하고 있었다.

제 머리도 못 깎고 남의 머리도 못 깎지만 남의 머리에 관심만 많은 내가 S에게 남자친구를 사랑하냐고 물었다. 정말로 사랑하냐고. 그러자 S는 잘 모르겠다고,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아냐고 했다. 우문현답이요, 박수를 쳐주고 싶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당최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대답이기도 했다. 역시나 겁대가리 없는 로맨티스트인 나. 제법 깐깐하고 현명했던 순간은 깡그리 삭제되고 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야! 그렇게 확신도 없음서 무슨 결혼은 결혼이냐. 진짜 사랑하고 아끼면 시댁 식구니 뭐니 그보다 더한 거라도 껴안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정도로 힘들어 하면서 그게 사랑이니, 사랑이야?! 그러자 학교 때부터 내 말을 곧잘 존중해 마지 않았던 S, 문득 목소리 톤이 바뀌면서 그렇지? 사랑하면 다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맞어. 곧 찜찜하고도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으나 나는 또 무책임하게 네가 잘 알아서 하리라고 생각한다, 라면서 이야길 맺었다. 그리고는 얼마 후, S가 그 사람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 사람이 쉽게 받아들여? 응, 내가 시집에 들어가서 살기도 싫고 돈 없는 시집도 싫다고 말했거든. 오, 저런. 너무 과하게 때렸당. 그런가? 근데 그 사람도 나같이 속물적인 여자는 필요 없대. 두주째 서로 연락 안하고 있어. 진짜 헤어진거야? 그렇다니깐. 난 정말로 오빠를 사랑하진 않았나봐.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애.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애...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애... 이 말이 내 가슴에 무슨 공명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S도 그 동안 많이 힘들어 했고 오랜 친구로서 S가 더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물론 있었지만 사랑하면 다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사랑하지도 않는데 무슨 결혼이냐고, 온통 그 쥑일놈의 사랑으로 뒤범벅을 해놓은 내 조언을 받아들이고 난 후 저런 결정을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영 개운치 않았다. 내 말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서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 쯤은 알지만 그래도, 왠지 미안했다. 정말 서로에게 질려버린 경우에도 그 놈의 정 때문에 헤어지기가 쉽지 않은건데 S와 S의 남자친구는 여전히 서로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S에게 좀더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라고 할 것을, 사랑 운운하며 혼자 흥분한 내 자신이 참 싫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 S에게서 온 전화. 우리 다시 연락하고 있어. 하하하하하하하하하. ㅠ.ㅠ 기왕 그렇게 된 거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하며 무탈하게 잘 이어졌음 좋겠다. 아웅다웅 톰과 제리.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둘만의 속사정을 누가 알겠는가. 정말 사랑하면 내가 생쥐여도 고양이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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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7-07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이네요...현실적으로 부딪칠 상황은 정말 많을 커플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연락한다고 하니...두사람의 정도 보통은 아닌 듯 하네요...^^
깐따삐야님이 한시름 놓은건 아닌가 모르겠어요...ㅋㅋㅋ

깐따삐야 2006-07-08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글쎄요. 그게 그렇게 확실치가 않은 문제이고 제 편에서는 앞으로도 줄곧 확실치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지도 모르겠어요.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짓은 더 이상 안할테지만 친구가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조금 더 신중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아직은 막연한 느낌 뿐이지만, 두 사람의 사랑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