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더 어릴적의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은 반드시 환하고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모름지기 밝고 눈부신 햇볕 아래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모든 걸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럴 수도 있다, 가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고 믿었다. 엄청난 비약을 감수하고라도 당시의 나는 무엇인가를 감추는 것은 비겁함을 넘어서 곧 악의라고까지 생각했다. 당시의 내가 상대를 불문하고 자주 들이대던 말 중 하나가, 너 왜 말을 못해, 였으니까. 상대가 드러내는 머뭇거림이나 곤혹스러움을 비겁함의 징표로 해석하며 한껏 우월감을 느꼈던 나는 솔직함을 무기로 다분히 악랄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처럼 견고하던 의지에 조금씩 틈을 보이며 진행되는 균열을, 몹시도 선명하게 느끼고 있다. 이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고 비약하기는 커녕 반드시 그래서는 안된다, 고 거꾸로 비약할 지경이다. 삶이 그렇듯 반듯하고 투명한 한 가지 루트로만 통하는 게 아니라는 어딘지 꺼림칙하면서도 부정하기 힘든 깨달음에 지배되고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사회적 공의에 관해 어린 시절보다 더욱 더 의심스러워하고 절망스러워 하는 지금의 나는, 공개와 진실보다도 비밀과 거짓말이야말로 물과 산소처럼 삶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인간적 영역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나 스스로의 동의를 구해보는 것이다.
머리 꼭대기의 고상함부터 발뒤꿈치의 누추함까지 모조리 드러낸다는 것은 타고난 솔직성과 용기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빈약한 마인드를 드러내는 정신적 노출증이자 전부 아니면 무를 원하는 극단적 이기심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말해도 괜찮을까? 그렇다면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 반드시 말해야겠어. 세 번 쯤 생각해 보는 게 좋다. 곤란한 느낌이 드는 내용물은 성급히 쏟아내 보았자 악취 섞인 냉기로 주변을 얼리기밖에 더하겠는가. 더군다나 솔직했기에 나는 무죄가 되고 상대는 그 결과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조차 없다. 자백한 자는 진실의 속박에서 벗어나 구원받았으므로 쌔근쌔근 발을 뻗고 자겠지만 자백을 감당해야 하는 입장에선 손발을 오므린 채로 조용히 사면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이다. 혹은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다. 이해받으려 했든 그저 털어놓는 것에 위안을 받았든, 이해하고 싶었든 그저 진실을 알았다는 것에 안도를 했든, 결국 어떤 의미에서 지나친 솔직함은 양끝에 날이 선 곡괭이처럼 상대와 나를 향해 동시에 휘두르는 잔인한 폭력인 셈이다. 말하지 말지 그랬어. 듣지 말지 그랬어. 그것만큼 무용한 말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지금은 백퍼센트 솔직한 상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오십퍼센트 알듯말듯한 베일에 싸인 상대를 이해하는 일이, 가끔은 더 편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전에 없던 생뚱맞은 생각을 하는 중이다. 개인적인 영역에 있어선 무엇이 더 공정한가, 보다 무엇이 나를 더 편히 숨쉬게 하는가, 가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