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는 우리반 학생이다. 재작년에도 내가 담임을 맡았던 아인데 반장선거를 하던 날, 후보를 정하던 즈음해서 눈을 깜빡이면서 수줍게 손을 들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몇 표 차이로 부반장이 되었지만 일 년 동안 그 역할을 야무지게 해냈고 성적도 항상 우수했다. 좋은 글을 써서 종종 상도 받아왔고, 키는 작지만 빠른 발로 상대를 앞지르며 재간을 부리는 우리반의 걸출한 축구선수이기도 했다. 3학년이 되어 T와 다시 만났을 때, 예전의 순진하고 깍듯하던 모습보다는 좀더 남자답고 의젓해진 모습이 먼저 눈에 띄었다. 예나 지금이나 담임으로서의 내 역할이 거의 필요 없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매사를 알아서 잘하는 모범생이란 사실은 여전했다.  

남자 아이들은 중3 정도 되면 뻗쳐 오르는 에너지를 주체 못해서 가끔 별다른 이유도 없이 화를 내기도 하고, 멀쩡한 학교 기물을 파손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멱살잡이를 하는 등, 곧잘 후회의 빛을 보일만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곤 한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더 서투른 신참이었을 때, 또래에 비해 다소 조숙해서 일찍 사춘기가 찾아온 아이들이 저런 식의 행동을 보일라치면, 같이 펄펄 뛰고 고함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서 아이를 항복시키기 위해 난리를 치곤 했다. 물론 아이에게나 나에게나 서로에 대해 악의는 없었다. 단지 젊은 피끼리 파바방 부딪쳐 지금 이 순간 너에게만은 지지 않겠다는 치기 어린 오기에 발동이 걸렸달까. 그 때를 떠올리면서 요즘은 서로 쑥스럽게 웃기도 하지만 아무튼 매일매일이 활화산같았던  한 해였다. 한편, 그러한 잦은 충돌과 상처 속에서 내가 배운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기다림'이었다. 아이들은 대개 뜨겁고 성급하기에 대척점에 있는 어른들은 그만큼 냉정하고 느긋해야 한다는 것. 상대방에 대해서 일정 부분 체념 모드로 돌입했을 때 그를 대함에 있어 차고 게을러지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언제나 일정 비율로 냉정하고 느긋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경지가 아니다. 간혹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언제나 웃는 얼굴로 학생들을 대하시는 연로하신 선생님들에게서 저런 모습을 뵙게 된다. 아직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사랑받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아이들은 금새 알아차린다. 아, 저 선생님은 진심으로 우릴 사랑하시는구나. 가끔 뾰로통한 표정으로 본숭만숭 앉아있던 아이들이 저렇듯 연세 지긋하신 선생님들 팔에 매달려 한껏 친근함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면 과연 그 노하우는 뭘까 궁금했다. 지금껏 관찰해 온 내 짧은 소견으로는 지칠 줄 모르는 '기다림'이란 느낌이 든다.

아이들 하나, 하나를 향해 공평한 웃음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아이들을 현재로 대하기보단 미래로 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은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눈앞에 벌여놓은 사소한 실수들을 서둘러 지적하게 되기 마련이고 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이해하는 건 한바탕 잔소리 뒤의 과정으로 그치는 경우가 사실은 더 흔하다. 대개는 그 자리에서 잘못했다,는 마음에도 없는 한 마디를 받아내기 위해서 앙앙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아이들보다 한 발짝 더 앞선 성급함 때문에 나중에 두고두고 생각하면 할수록 스스로 얼굴 빨개질 짓만 반복하게 되곤 한다. 기다려주고 지켜봐주면 아이들도 오래지 않아 알게 된다. 잘못했다, 는 것을. 내 기분을 통제하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는 것을. 하지만 어떤 경우와 맞닥뜨렸을 때, 그처럼 아이들의 머릿속과 마음속을 오가며 그들의 심중을 헤아리고 가장 현명하고도 효과적인 절차를 떠올린다는 것은, 다 컸다는 어른들에게조차 그다지 호락호락하진 않은 일이다.

T의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T는 작가가 되고 싶어한다. 글 쓰는 것을 다른 어떤 것보다 좋아할 뿐더러, 보통 아이들이 무협지나 환타지 소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때도 세계명작이나 현대소설을 읽으면서 나름의 진지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담임이다보니 대회에 출품할 작품이라든가, 교내에서 열리는 백일장 작품 등, T의 글을 읽게 될 기회가 가끔 있었다. 모든 기교적인 면을 떠나서 우선은,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도 정성 어리고 따스해서 읽고나면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되는 그런 글들이었다. 글은 곧 그 사람이라고 하듯, 항상 인간적인 것에 먼저 시선을 주고 그것을 조곤조곤 상기하며 완성된 한 편의 글로 담아낼 줄 아는 T의 감성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해 왔다. 공부도 곧잘 하면서 좋은 글도 쓸 줄 아는 T에 대해선 그렇듯 만족감만 있을 뿐 별다른 우려를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T의 부모님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상담을 청해오신 T의 어머니는 T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걱정을 하고 계셨다. 진로에 대해 T가 아버지와 심하게 부딪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T의 아버지는 이 근방에서 꽤 유명한 한의사다. 한 지방의 유지로서 T의 아버지가 갖고 있는 꿈은 작지 않은 듯 보였다. 아버지는 T가 대를 이어 한의사가 되길 바라고 있었고 T는 다른 건 몰라도 의사나 한의사는 싫다고 버티고 있었고 어머니는 중간에서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들인 T를 간간히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T가 남자로서의 야망이나 명예에도 눈과 귀를 열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고 T는 국어교사를 하면서 평생 글이나 쓰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니, 뜻이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해마다 일류 대학을 많이 보내고 있는 어느 사립고등학교의 입시 전형에 대해 문의를 해왔고 T가 진로를 바꾸도록 설득해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T는 한의사란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며 싫다는 뜻을 비쳤다. 원체 언어와 문학을 좋아하는 T에게는 의사보다는 국어선생님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머니의 당부를 상기하며 요즘 의사들은 시도 쓰고 수필도 쓰고 소설도 쓴다면서, 진짜 순수전업작가는 아주 드문 경우에 속한다고 말했다. T는 참하고 반듯한 모범생이었지만 모범생 특유의 고집 또한 대단할 것이었다. 무작정 설득한다고 쉽게 뜻을 바꿀 것 같지 않아 예전에 내가 써먹었던 방법을 일러주었다. 아직 생각 중이라고 해. 천천히 생각해 볼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려봐. 아버지와 정면으로 부딪쳐봤자 서로 힘들어지기만 한다. 네가 계속 고집을 부리면 어머니도 힘들어지셔. 대신 공부는 아주 여얼심히 해서 부모님이 너를 마음 놓고 믿으실 수 있게끔 해드려야 돼. 그리고 꿈은 여러번 바뀌는 거야. 너무 빨리 결정지워 놓는 것도 좋지는 않아. T는 그제서야 수긍을 하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나는 누구 한 편의 입장만 옹호할 수가 없었다. T만 따라준다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의사가 되어서 아픈 사람들을 돕는 것도 참 좋은 일이고, 아버지만 이해해 주신다면 국어나 문학 교사가 되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글도 쓰며 사는 삶도 참 좋을 것이었다. 삶을 끝까지 살아보지 않는 한 무엇이 더 좋을 것이라고 그 누가 단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먼저 인생을 사신 부모님은 확률과 통계에 대해 빠삭한 분들이라지만 그 결정이 자녀의 의지와 상반되는 것이라면 무조건 밀어부치기만 해서도 안되는 일일 것이다. 인생은 부모님이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님 뜻을 거슬러서 아무 문제 없이 잘 살게 되고 행복해지는 경우도 흔치는 않다. 결국 나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은 T에게 저만치의 조언을 해주는 것에 그쳤고 나는 그저 T는 잘할 것이고, T의 부모님도 그렇게 답답한 분들은 아니니 분명 서로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막연히 믿어보기만 할 뿐이다.

요즘은 결손가정도 많아졌고 아주 기본적인 생활고를 겪는 아이들도 여전히 적지 않기에 T의 경우엔 어떻게 보면 참 배부르고 행복한 고민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가정사에는 상대적 우월감이나 상대적 박탈감 따윈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한의사를 시키고 싶은데 작가를 꿈꾸는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나, 학업과는 담을 쌓고 오토바이만 몰고 다니는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나 부모에겐 비중의 차이 없이 똑같이 난감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옛말은 하나도 그른 것이 없다. 특히 자식 문제에 대해선 인간적으로 보나, 대외적으로 보나 요만큼의 티끌도 없는 사람들이 간혹 의외의 성급한 면을 보이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나도 예전엔 기다린다고 뭐가 달라져?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전혀 그렇지 않다. 기다릴 줄만 안다면, 사람이 뭔가를 충분히 기다릴 수만 있다면, 좋은 부모, 좋은 교사의 역할을 절반도 넘게 해낸 것이라고 믿고 있다. 빨리 이끌어낸 대답은 정답이 아닐 확률이 더 높다. 정답의 탈을 쓴 오답이랄까.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급하게 지우고 쓴, 지운 흔적 밑으로 원래 썼던 오답이 지저분하게 보이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스스로에게 왠지 모를 슬픔과 창피함을 동시에 느끼는. 그래서 시의적절한 기다림, 질기디 질긴 애정이 뒷받침 된, 능동적인 기다림에 대해서 좀더 알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 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rainy 2006-07-13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글.. 무장해제 되어버리는 심정이네요.. 현장에서 오래 진심으로 생각한 사람만이 해 낼 수 있는 생각들.. 아이는 나날이 커가는데 제 자신이 아직 질풍노도를 못 벗어나서 매일매일이 바람에 펄럭이는 종잇장같은데.. (물론 따스하고 평온한 날도 많지만^^;;) 두고 두고 가끔씩 읽어야겠어요. 이 페이퍼를..

깐따삐야 2006-07-13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ainy님, 반갑습니다. 저 자신도 사시사철 질풍노도랍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하루하루가 외줄타기 같기도 하구요. rainy님 서재로 조만간 구경가겠습니다. ^^

마태우스 2006-07-13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멋진 글이십니다. '파바방'이란 단어도 아주 신선한걸요. 무엇보다 애들에 대한 님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져서 좋습니다. T의 장래가 어찌될지 모르지만 어떤 길을 걷든지 '좋은 사람'이 될 것만은 분명하군요.

깐따삐야 2006-07-1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저도 어떤 길을 걷든, T는 행복해질 수 있는 자질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개츠비 2006-07-14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오즈님)! 개성 가득한 아이들의 성장기를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입니다. 그들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기다릴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신 것도 큰 배움중 하나 같습니다. 곧 방학이군요. 즐겁고 좋은 일들이 많길 바랍니다. ^^

깐따삐야 2006-07-14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retre7님, 격려 감사합니다. 무더운 여름, 즐겁고 건강하게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