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마지막으로 학교에 갔다. 부장 선생님이 김치찜을 준비해 오신다길래 나도 계란말이와 더덕구이 같은 밑반찬을 좀 해가지고 가서 출근하신 선생님들과 나눠 먹었다. 보조 아가씨는 밥을 해오랬더니 아예 압력밥솥을 들고 와서 한바탕 소풍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금방 해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밥이라 맛있기도 했고 선생님, 따듯한 밥을 드셔야지요...하는 말에 마음까지 훈훈해졌다. 그 마음씀이 고마워서 모처럼 과식을 했다. 식구처럼 지내던 사람들과 이제 헤어져야 하지만 교직이라는 것은 사람들끼리 돌고 돌게 마련인지라 이별이 아주 슬프거나 하지는 않다.

  2월, 6월, 11월은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시기다. 완전 비호감까지는 아니지만 이 시기가 엄습해 오면 나는 간혹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모하곤 한다. 2월은 강박의 달이다. 뭔가를 정리해야 할 것 같은 한 편, 뭔가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서 쉽사리 벗어나질 못한다. 6월은 짜증의 달이다. 더위가 스멀스멀 밀려오면서 금방이라도 발화를 할 듯한 짙푸른 녹음과 여름 초엽의 알싸한 향기가 곧 나를 질식시킬 것만 같다. 11월은 불안의 달이다. 거리는 연갈색과 무채색으로 뒤덮이고, 그 스산함은 함부로 내 옷깃을 파고들며 심신을 춥춥하게 만든다. 아무에게나 손을 내밀고 어깨를 빌려달라 하게 될까봐 모든 문을 꼭꼭 걸어잠근 채, 건샌로지스의 November rain이나 들으며 온종일 나를 감금시킨다. 내곁에 누가 있느냐, 있지 않느냐, 하는 물리적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나는 늘상 저런 모양새로 지겨운 계절을 버티었다.

  요즘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읽고 있다. 다른 책을 훑어보러 갔다가 충동구매를 했다. 유명한 책이니 만큼 익히 들어온 제목이었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언젠간 읽게 되리라 막연히 생각했지만 저런 식으로 무턱대고 사들일 줄은 몰랐다. 이게 다 지금이 2월이기 때문이다. 3월 1일에만 갔어도 훨씬 계획성 있는 구매를 했을텐데. 책의 내용마저 부실했다면 2월과 완전 등질 뻔 했지만 다행히 큼큼거리는 호기심을 갖고 즐겁게 읽고 있다. 콜린 윌슨은 이 책을 스물넷에 써서 하룻밤 사이 유명해졌다는데 그 나이답잖은 방대한 독서량과 지식 수준에 한 번 놀라고, 그 모든 사상과 인물들을 아웃사이더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통합해내는 통찰력에 두 번 놀라고 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적확한 단어가 과연 이것 뿐이랴, 하고 의구심을 자아내는 아리송한 번역인데 역자는 소심하거나 혹은 친절하게도, 어려운 부분은 한 번 더 읽어보면 명확해질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노파심에 풋, 하고 웃음이 나면서도 이해되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정규교육 제대로 받은 작가들의 체계적인 글에 비하면 이처럼 한 구절, 한 구절이 쓴 사람만 알거나, 혹은 쓰면서도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라고 머리를 긁적였을 법한, 번뜩이는 아포리즘 천지인 글을 번역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매끈한 독서가 되고 있진 못하지만 이 책의 가치를 못 알아볼 만큼은 아니다.

  아웃사이더, 라기에 생각났는데 극과 극은 통한다고, 너무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이랬나. 내가 아는 아웃사이더들은 대개 평범한 생활인이 되었다. 아니면 그들은 애초에 아웃사이더가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대학 동기 J는 오로지 드럼을 배우고 싶어 교회에 다닌 케이스였다. 강의 빼먹고 드럼을 치러 가는 일이야 다반사였고 칸막이가 있는 어학실 구석 자리에 앉아서 양손에 볼펜을 들고 투닥거리는 풍경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다들 외국어나 컴퓨터 과목을 교양으로 선택할 때 그와 나는 수강생이 채 열 명도 안되는 철학 강의를 들으러 인문대로 건너가곤 했는데 '이지 라이더'라는 영화를 보던 어느 날엔,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여자친구를 강의실로 데려와 우리를 경악시킨 적도 있었다. 강의가 슬슬 지겨워지는 오후에는 언제나 그렇듯, 자아도취에 빠진 교수님에게 J가 빨리 딴지를 걸어서 이 지루한 수업 시간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 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우리는 그를 군대에 보내면서도 다들 불안해 했지만 J는 능글맞고 얄짤없는 군바리가 되어 군생활을 너무나 잘 즐겨주는 바람에 다들 약간씩 실망했다. 졸업을 한 후로는 그를 잊고 지냈는데 얼마전 K가 텝스시험장에서 그를 봤다며 소식을 전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고 열심히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시험장에 양복을 입고 온 그는 삼십대처럼 보였단다. 왠지 배신당한 듯한 기분이 잠시 스쳤지만 그의 궤도가 현실로 돌아왔음에 안도했다.

  동아리 선배 M은 순수한 괴짜였다. 겉과 속이 자로 잰 듯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H와 그 선배가 싸우던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다른 선배와 이야기를 하느라 신경 쓰지 않던 사이, 소주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선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몇 마디 거친 욕이 들렸고 H는 발악발악 대들며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옹 대접을 받았던 몇몇 나이 많은 선배들이 서둘러 싸움을 말렸고 아쉽게도 나는 기숙사 점오시간 때문에 마무리 씬을 못 보고 돌아와야 했다. 물론 그 후에도 그들은 아주 잘 지냈다. 아니, 외관상으로만 보기엔 전보다 더 잘 지냈다. 아무튼 M 선배는 그처럼 못 말리는 다혈질이었다. 직선적으로 말했고 노골적으로 행동했다. 낄낄거리며 담배를 피워 물 때는 영락없는 폐인인데 그가 쓴 글은 아름답고 솔직했다. 선배는 졸업 후 고향의 군청 공무원이 되었고 얼마 전 결혼을 했다. 신혼인데 매일 야근이라며 툴툴거리더니 자기 동생을 소개시켜주겠다며 한 번 생각해 보란다. 손사래를 치며 선배 같은 시아주버니는 사양하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감정의 촉수가 옛날 같지는 않지만 뭔가를 받아들이거나 해석하는 이해력 만큼은 옛날보다 나아졌는지 모른다. 더 이상 신선하지도 않지만 더 이상 막무가내도 아니다. 2월이 그냥 싫어, 라고 말해버리면 모든 것이 암막으로 가리워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내가 왜 2월을 싫어하냐면, 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나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생각할 시간을 주게 된다. 변명을 위한 망설임이 아니다. 내치지 않고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계절이든. 2월 때문이다, 라고 하기에 사실 나는 내 강박과 짜증과 불안의 원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달력을 한 장 찢거나 넘겼고 오늘 하늘은 그야말로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들쭉날쭉한 감정의 파고와는 상관 없이 2월은 소리소문 없이 가고 있고 수선을 맡긴 봄옷들을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겨울을 나면서 3kg이 빠졌다. 올 겨울 나기가 유난히 힘들었다고 고백해야 할까. 하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내 궤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웃사이더가 예술가일 수는 있지만, 예술가가 반드시 아웃사이더인 것은 아니다, 라는 콜린 윌슨의 말은 옳다. 정기적으로 영어시험장을 찾는 양복 차림의 삼십대. 그들도 한 때는 아웃사이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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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7-02-28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3월이 코앞이에요. 여행을 좀 다녀왔는데 갔다 오니 그 뿐, 또 그 자리네요. 오히려 여행이 헛헛해질 만큼. 저는 3월이면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하지 않으면서도 3월에 해야할 일을 2월에 미리 차곡차곡 정리하기도 해요. 3월 1일이 되면 짠, 하고 일을 시작할 것 처럼요.

깐따삐야 2007-02-28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다예요님, 달력의 숫자들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사는 방법은 없을까요? 열심히 살다보면 달력의 숫자들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걸까요? 계획하고 구상했던대로 짠, 하고 시작해서 짠, 하고 마무리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2007-02-28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7-02-28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하핫, 그쵸. 한 가족이 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니 말예요.^^

마늘빵 2007-02-28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기억에서 제 동기와 선배와 제 모습들을 찾게 되는군요.

BRINY 2007-02-28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시는군요! 지난 가을 모 경시대회때 학생 데리고 찾았던 교원대 모습이 새롭습니다.

깐따삐야 2007-03-01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음.. 님도 분명 괴짜 기질이 있으세요. 좀더 어릴 때는 더하셨죠? ^^

BRINY님, 그동안 오랫동안 공부를 놔서, 학생 노릇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님도 힘차게 새학기 출발하시길!
 



  아름다운 비욘세 말고도 볼 것이 많은 영화였다. '사운드 오브 뮤직' 정도에 견줄 만한 스케일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갖출 것을 제대로 갖췄다 싶을 만큼 웰메이드 뮤지컬 영화였다. 무엇보다 두 시간 남짓의 러닝타임 동안 절절하고도 감미로운 흑인 음악을 실컷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평소에 리듬 앤 블루스나 재즈 등의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내 취향과는 별도로, 음악과 체육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검은 피부의 활약상은 역시나 놀라운 것이다. 대개 그냥 말할 수 있는 것도 노래로 말하면 쿡, 하고 웃음이 삐져 나올 때가 있는데 드림걸즈의 주인공들이 대사를 노래로 대신할 때, 관객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나는 사실 영화를 보는 동안 누가 웃으면 어떡하나, 속으로 쓸데없는 걱정까지 했더랬다. 상대방이 무슨 일인가로 흥분하거나 실망해서 진지한 대사를 읊고 있는데 그 면전에다 대고 워우워우워, 한다는 건 자칫하다간 비극적인 상황도 희극적으로 보이게 만들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짓을 벌이다가 본의 아니게 망신당한 적도 있고. 하지만 드림걸즈의 출연진들은 죄다 사람이 노래인지, 노래가 사람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심신 전체가 하나의 거대하고 매력적인 소리통이 되어 가슴을 파고들고 머리를 관통했다. 감정의 오버라고 해도 좋다. 나는 그녀들의 노래를 듣던 도중에 잠깐 울 뻔 했다.

  그들만의 음반을 내기 위해 뭉친 트리오, 디나(비욘세 놀즈 분), 에피(제니퍼 허드슨 분), 로렐(에니카 노니 로즈 분)은 어느 오디션 현장에서 쇼 비즈니스계의 매니저 커티스(제이미 폭스 분)로부터 가수 제임스 얼리(에디 머피 분)의 코러스로 활동해 줄 것을 제안받는다. 처음엔 다른 가수의 코러스나 하고 있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에피의 반대로 무산될 조짐이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세 사람은 믿고 따라온다면 머잖아 음반을 내주겠다는 커티스의 약속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후 그녀들은 제임스 얼리의 공연을 따라다니며 쇼 무대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되고, 커티스는 리드보컬 자리를 에피에서 디나로 바꿈으로서 드림걸즈의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려 한다. 음악적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에피는 크게 반발하게 되고, 연인이었던 커티스의 애정마저 디나에게로 쏠리자 팀을 탈퇴하고 만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점점 더 화려한 상품으로 변모되어 가던 디나는 매니저인 커티스와 결혼함으로서 음악을 위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성 댄스 가수로 색깔을 굳혀가게 된다. 성공에 눈이 먼 커티스는 재기를 위해 준비했던 에피의 노래마저 가로채기하고 이에 반발한 에피와, 점점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 환멸을 느끼던 디나는 서로 화해의 계기를 맞게 된다. 조종당하는 인형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색깔을 찾기로 결정한 그녀들은 드림걸즈의 마지막 공연에서 화려하게 재회한다.

  머라이어 캐리를 무척 좋아하던 아이가 전에 '글리터'란 영화 시디를 주었고, 가수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가 대개 그렇듯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몹시 실망하며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무대에서의 카리스마는 간데온데없이 영화 속의 그녀는 딱 김빠진 사이다 같았다. 김빠진 사이다는 밍밍하긴 해도 미약하게나마 단맛이라도 남으니, 그 흔한 비유조차 아까울 지경이었다. 한 가지 발견이라면, 그녀의 상대역이었던 '맥스 비슬리'라는 배우였는데 머라이어 캐리의 아둔한 연기력 때문에 멋진 남자배우 하나 애먹였다, 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가수로서의 그녀는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 한 시절을 풍미했던 휘트니 휴스턴, 타고난 음폭으로 자유자재로 노래를 부르는 셀린 디옹과 더불어 팝계의 3대 디바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가수로서 무대를 꽉 채우던 그녀는 영화 속 어느 장면에서도 나는 머라이어 캐리다, 라고 말하지 못했다. 드림걸즈에는 비욘세가 나온다길래 나는 사실 비슷한 지레짐작을 했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싶었던 건 에디 머피를 보면서 실컷 웃고 싶었고,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에 구미가 당겼고, 스토리와 메시지가 있는 영화보다는 그런 건 다소 뻔해도 좋으니 편히 앉아서 화려한 쇼와 흥겨운 노래를 감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쉽게 가자, 였다. 대충 예고편과 홍보기사만 훑어도 감이 왔다. 드림걸즈가 지닌 상업성과 음악성, 그 점에 이끌렸다.

  변덕스런 흥 이면에 감춰진 무기력한 절망을 연기했던 에디 머피나, 온몸을 울리는 듯한 파워풀하고 개성 넘치는 가창력을 선보였던 제니퍼 허드슨,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자연과 본성 그대로의 검은 피부인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고혹적인 이집트 여인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갖춘 비욘세와, 궁리가 많은 눈빛을 한 채 영리하고 계산적인 매니저 역할을 선보인 제이미 폭스는 오히려 제조된 케릭터처럼 평범했다. 고의적인 구도이자 설정일테지만, 나는 에디 머피나 제니퍼 허드슨을 보기 위해 영화관에 온 것 같았다. 비욘세는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예쁘고, 영화의 흐름이 진행될수록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점점 더 아름다워진다. 연기도 글리터의 머라이어 캐리에 비하면 훨씬 더 진정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56%에 머물러 있다. 아마도 가장 많이 팔리는 맛. 그래도 길들여졌기에 가장 먹을만하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실제로 제니퍼 허드슨의 절창이 이어질 때조차, 예쁜 비욘세는 언제 나오나, 하고 잠깐씩 생각하기도 했다. 바비인형 같은 백인 여가수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고 말할 틈조차 주지 않고 그녀는 참 예뻤다. 대사를 노래로 전달하는 장면에서 혼자 웃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느슨한 마음으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픈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본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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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7-02-27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이 뭔가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귀가 솔깃하는데, 이 영화도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왜 56%를 보니 드림카카오가 먼저 생각이 날까요? ^^

마태우스 2007-02-2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욘세의 미모에는 동의하는데요...전 이 영화가 내내 혼란스러웠어요 뭐가 선이고 악인지가 헷갈렸고, 또 주인공이 일정하지가 않아서 집중이 잘 안됐어요 다만... 음악은 좋았고, 싸우는 것도 노래로 하는 게 신선하더이다.

깐따삐야 2007-02-27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적파시오나리아님, 반갑습니다. 드림카카오 맛을 연상하며 쓴 것 맞아요. ^^

마태우스님, 아무래도 유명 가수를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들은 대개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노래 나올 때만 좋다는 거. ㅋㅋ

Mephistopheles 2007-02-2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철수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에서 이 영화의 실존그룹 "슈프림스"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하더군요..결국 리더자리를 빼았긴 후 그룹 해체 후 에피는 페렴으로 새상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프로듀서와 메니저 격인 커티스는 상당히 잔인한 면모를 지닌 냉정한 사람이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세계적인 뮤지션으로써의 인정을 받진 못하지만 슈프림스도 비틀즈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넘버 원 싱글 힛트는 비틀즈보다 많다고 하네요..^^

레와 2007-02-27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고싶은 영화가 속속 개봉하고 있다는 반가운 뉴스가 또 하나!

행복한 날들입니다.^^*

깐따삐야 2007-02-27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흑인 뮤지션에 대한 천대라든가, 쇼비즈니스계의 어두운 면을 엿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했어요. 역시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냉정했겠죠.

레와님, 레와님은 참 밝은 성품이신 것 같아요. 즐거운 봄 맞으시길.
 

  또 한 번의 졸업식. 교사가 된 후 어제로써 두 번, 아이들을 떠나보냈다. 이번 아이들은 나와 인연이 깊다면 깊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맨 처음 만났던 아이들이었고 그 때 우리는 모두 새내기였다. 1학년 신입생과 신규 교사로 만나 온갖 시행착오와 악다구니 속에서 겁나먼 일 년을 보냈다. 어리버리한 교사와 천방지축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이란 매일매일이 거침없이 하이킥, 이었다. 선배 선생님들은 처음 가르쳤거나 처음 졸업을 시킨 아이들은 평생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지만 아이들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 속에서는 우리 그만 잊기로 해요, 라는 절절한 목소리만 되돌아왔다. 그런데 한 해 동안 학년이 엇갈려 떨어져 지내다가 3학년이 된 아이들을 다시 만났을 때, 서로 뭔가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곳이 남자중학교라지만 어쩐지 이제는 서로를 향해 마음의 여백이 생긴 것 같았다. 어제 Y는 편지에 그런 말을 썼더랬다. 선생님이 다시 우리를 가르치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걱정했는데 재작년과는 달리 수업시간에 웃음도 많아지고 재미있어서 좋았노라고. S의 편지를 읽고 났을 땐 낯이 뜨거워졌다. 우리를 가르치실 때는 별로 웃지도 않고 혼내시기만 했는데 작년에 3학년 형들한테는 많이 웃고 잘 대해주시는 것 같아서 화도 나고 질투도 났었다고. 하지만 왠지 1학년 때의 선생님 모습이 더 좋았다고. 나는 사실 그 동안 아이들의 이런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헤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진심을 전하는 그 마음까지도 알 것 같다. 서로 아옹다옹하면서 소진했던 일 년이었지만, 훨씬 여유로워지고 화기애애해진 현재보다 왜 그 때를 그리워하는지도. 굽힐 줄 모르는 자존심과 넘어질 듯한 열정으로 오해의 벽과 이해의 문 사이를 들락거리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때, 아이들이 내게 바랬던 것은 특별한 게 아니었다. 진정한 이해, 라는 것도 결국 타이밍의 문제다. 

  졸업식과 종례를 마치고 누나와 함께 우리 교실로 찾아온 W는 급기야 내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몰라보게 훌쩍 자란 녀석이 훌쩍거리니 당최 마음의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순간적으로 코끝이 찡해왔지만 잘 달래서 보내야 한다, 는 생각만 계속 났다. W는 1학년 때 내가 담임을 했던 아이다. 반 배정을 마치고 교실에 들어와 일단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의자가 불편했던 모양인지 빼빼하고 예쁘장한 아이가 계속 몸을 비틀며 눈에 띄도록 인상을 쓰고 있었다. 곱게 자란 예민한 아이구나. W에 대한 첫인상은 그랬다. 나중에 알고보니 역시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귀한 아들이었다. 잘 먹지 않아서 몸이 약한 편이었고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W는 쉬는 시간에도 열심히 만화를 그렸고 나는 점심시간에 교실에 들를 때마다 W의 만화노트를 보며 칭찬을 해주기도 하고 이어질 내용을 함께 구상해 보기도 했다. 말수가 적고 몹시 까다로운 아이였는데도 처음부터 쉽게 말을 붙이고 폭폭 안겨오는 아이들에 비해서 왠지 더 정이 가곤 했다. 교사에게는 아이들을 향한 호오의 감정이 있어서도 안되고 그것을 결코 밖으로 드러내서도 안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정이 가거나 매력을 느끼는 케릭터가 존재한다는 건 다른 모든 인간관계와 다르지 않다. 

  아팠다기 보다는 무슨 일인가로 마음이 너무 상해서 학교에 나가지 못했을 때 W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찾아왔었다. 간식을 좀 내어오자 맛있게 먹는가 싶더니 방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손으로 꼭꼭 찍어서 다시 쟁반에 털어놓던 모습이 떠오른다. 깔끔한 녀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고싶었어요, 라고 말하는데 속으로 문득 놀랐고 굉장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아프면 그 집의 아이들이 풀이 죽는 것처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 앞에서 만큼은 계속 씩씩해야겠구나, 다짐하기도 했다. 3학년이 되어서 아이들의 장난에 맥을 놓고 있던 내게 편지를 써서 마음을 풀어주려 했던 것도 W였다. 하지만 그 반 아이들이 다시 안심하고 난리를 피울까봐 나는 일부러 W를 포함한 그 반 아이들 모두를 담담하고 차갑게 대했다. 어제서야 비로소 그런 내 마음을 전했다. W는 수줍은 표정을 짓더니 인사를 하고 돌아서다 걸음을 잇지 못한 채 꺼억꺼억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선생님과 헤어지는 것이 서운해서 울어본 기억이 없다. 교생실습 마지막 날, 작년의 졸업식에서도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쉽고 서운한 분위기야 있었지만 이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나는 나보다 훨씬 키가 큰 W의 등을 토닥이며 선생님은 멀리 가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돌아오면 네 소식 누구한테라도 꼭 물어볼테니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등등 그 때 그 때 생각나는 모든 말을 해가며 W를 달랬다. 그 눈물이 무척 고맙고도 미안했다. 한 치의 티끌도 섞일 틈이 없는, 순도 백퍼센트의 고마움과 미안함이 있다면 바로 어제의 내 마음이었을 것이다. W의 이야기를 하자 엄마는 W의 어머니가 예전에 보내주셨던, 깨농사를 직접 지어 짠 참기름과 들기름을 기억해내셨다. 농사를 짓듯 아이들에게도 꾸준히 정성을 기울이는 부모님과 참하고 다정한 누나가 곁에 있으니 W는 잘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도 알고 스스로를 아낄 줄도 안다.

  신규였을 때 내가 감당할 수 있었던 아이들의 폭은 딱 우리 학급 뿐이었고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에게 만큼은 지금 생각해봐도 참 잘해주었다. 처음이었으니까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오버로 인해 우리 반 아이들은 다른 반 아이들의 질투를 샀고 그럴수록 내가 다른 반 수업에 들어가면 교실은 고의적인 장난들로 난장판이 되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착하고 말 잘 듣는 우리 반 아이들이 더 고맙고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그런 마음을 표현하면 할수록 다른 반 아이들은 더욱 더 심술궂고 교활해졌다. 아무리 처음이라고 해도 제 무덤 파는 격으로 나는 참 미련하고 어리석었다. 그렇듯 악순환만 되풀이 하다가 앙금만 잔뜩 맺혀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아이들이 어제의 졸업생들이다.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아이들이 다시 우리 반이 되기도 했고 나와 매일매일 다정하게 속닥거리던 아이들이 자주 마주치지 못하는 맨 끝 반 교실로 배정되기도 했다. 학년별 교과 담당 교사를 발표하던 조회 시간에 내 이름이 강당에 울려퍼지자 여기저기서 고함과 휘파람이 섞여 나오는 등, 우스운 진풍경이 벌어졌고 영문을 모르는 다른 선생님들은 내가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줄로만 아셨다. 하지만 그건 환영이 아니라 어이없음, 이었다. 아무튼 그 어이없는 인연의 사슬에 매여 다시 일 년을 보냈고 재작년의 끔찍한 악몽에 비하면야 그 정도만 해도 무릉도원에서 노니는 격이었지만 그렇다고 쉽지는 않았다. 자잘한 사건사고가 끊일 새 없는 나날을 보내는 동안 3년만 채우고 어디로든 갈 것이다, 가야만 한다, 가고야 말 것이다, 라고 늘 생각했으니까. 올해 나는 여기에 없다. 발령 통지를 받았고 다른 학교로 가시는 몇몇 선생님들과 함께 나도 떠난다. 올해에도 여기 계실 거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공부 좀 하고 오겠다고 했더니 노처녀 되기 전에 결혼이나 하시라는 둥, 공부라니 징글맞지도 않느냐는 둥, 선생님은 확실히 공부 좀 더 하고 오셔야 된다는 둥, 별별 녀석들이 다 있었다. 괴짜들 덕분에 힘들었지만 즐거웠다. 아이들로부터 배운 것도 많았고 이런 감정이 보람이라면, 보람도 느낀다. 그리워질 무렵이면 다시 돌아오겠지.

  그 눈물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고, 지쳐 있을 때마다 나를 웃겨 주려 했던 너희들의 마음씨 또한 그럴거야. 고백하건데, 속으로는 킥킥대고 얼굴로는 근엄하느라 나도 힘들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마냥 순수할 수만은 없겠지만 너무 빨리 철이 들지는 말기를. 졸업과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너희들이 장난 칠 때마다 선생님이 잘하던 말 있지. 그러니까 좋아? 재밌어? 행복해? 그렇듯 내내 좋고 재미있고 행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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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1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깐따삐야 2007-02-18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봄봄 2007-02-19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이해, 라는 것..시차의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님도 재미난 새해 맞으시길..

깐따삐야 2007-02-20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봄님, 때가 되면 이해하게 되곤 하죠. 님도 즐거운 한 해 보내세요.^^

레와 2007-02-23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앙..

오늘, 멋찐 제자들과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깐따삐야 2007-02-23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제자들이 멋지게 성장하고, 저도 제발 훌륭한 선생님이 되라고 빌어주세요. ^^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건 아이들의 흑단 같은 머리 다발들이었다. 방학 동안 한 번도 안 깎았지 싶었다. 음악다방 DJ 마냥 한 번씩 뒷덜미 쪽으로 털어주는 오버스런 몸짓들 하며, 나이 한 살 더 먹어도 하여간 머스마들 유치한 건 알아줘야 돼. 내가 지난 3년 사이에 이토록 입이 걸어지고 유치빤스만 입게 된 건 다 걔네들 때문이다. 거기다 긴긴 겨울방학 동안 제법 어깨선이 굵어지고 눈빛엔 기름기가 좔좔 흐르면서 된통 능글맞아진 것 같았다. 그냥 예뻐지셨네요, 라고 하면 될 것을 손수 실루엣까지 만들어가며 바디라인이 살아났다느니, 남몰래 한 달을 굶었을 거라면서 쿡쿡대지를 않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은근슬쩍 한 번 훑어내리고는 가소롭게 내려다보는 등, 온갖 추행들이 난무했다. 별달리 새롭지도 않은 풍경인데 개학 첫날이라 그런지 적응하기 어려웠다. 이 세상에 중3 남자 아이들처럼 징그러운 존재들도 없을 것이다. 어른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닌 어중간한 발달 상태, 뿔긋뿔긋, 혹은 노릇노릇 올라오는 여드름과 제딴엔 감는다고 감는대도 뭉텅뭉텅 떡지기 십상인 머리, 닳고 닳아서 빤들거리는 데다 껑충 짧아진 교복, 게다가 입에서 폭발하는 언어들은 대개 87퍼센트 이상 비속어나 인터넷 은어다. 원래 큰 키도 아니지만 방학 동안 비육우처럼 튼실해진 아이들 앞에 서니 나는 그야말로 난쟁이 똥자루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반가운 마음이 일다니 정이 들긴 든 모양이구나 싶다가도, 졸업식을 앞둔 일주일 동안 씨도 안 먹힐 게 뻔한 말들을 해가며 이 넉살 좋고 약삭빠른 녀석들에게 휘둘릴 생각을 하니 갑자기 가슴이 답답했다. 아마도 조물주는 이런 나를 어여삐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엾이 여겨 선뜻 공부할 기회를 주셨나 보다.

  또래 선생님들과의 수다.

  윤샘이 쌍꺼풀 수술을 하고 나타나서 깜짝 놀랐다. 시술하기 전에 나한테 전화만 한 통 했더라면 극구 말렸을텐데. 이지은이나 한지혜, 얼마나 예쁜 눈인가. 쌍꺼풀이 있는 내 눈은 아무런 상상력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그냥 길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무난하고 평범한 눈이다. 그런데 윤샘의 눈은 어딘가 고집스러워 보이면서도 귀염성이 있었고, 작지 않으면서도 쌍꺼풀 없이 동그란 눈은 아담하고 부지런한 윤샘과 잘 어울렸었다. 원래 다른 사람 외모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인데 이번 만큼은 내 일처럼 안타까웠다. 나는 연예인을 포함하여 여성이든 남성이든 쌍꺼풀 없는 눈을 가진 매력적인 마스크를 꼽으라면 수십 명까지 댈 수 있다. 순전히 내 취향 탓일지도 모르지만 주변에서 누가 쌍꺼풀 수술 어쩌고 하면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윤샘 스스로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 같아 더욱 더 안타까웠다. 겉으로야 부기 내리고 자리 잡히면 이쁘겠다, 말했지만 속마음을 자주 들키곤 하는 나는 윤샘과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이야기 하기가 힘들었다. 영리해 뵈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생글거리던 예전의 윤샘이 그리웠다. 몇 개월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러워지겠지. 다른 사람들도 그렇더라. 나 같으면 학교 안 간다고 성질 부리고 재수술이니 어쩌니 했을지도 모르는데 활짝 웃으면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윤샘이라서 보기 좋았다. 그래도.. 쌍꺼풀 없는 눈이 더 예뻤다구.

  홍샘은 입덧 때문에 밥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원래 잘 비벼 먹지 않았는데 오늘은 고추장에 밥을 슥슥 비벼서 억지로 떠넣고 있었다. 만난 지 석 달 만에 결혼하더니 결혼한 지 석 달 만에 임신을 했다. 아마 겁 많고 게으른 나 같았으면 삼 년씩 걸릴 일이었겠지. 저번에 점심을 같이 하면서 친정이고 시댁이고 아기를 빨리 갖기를 원한다길래, 아직 나이도 어린데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아기 가져도 늦지 않는 거 아니냐고 말했었는데 겨울방학이 길긴 길었나. 안그래도 약하고 갸냘픈데 방학 내내 입덧 때문에 변기만 붙들고 살았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다. 쌍춘년에 결혼해서 황금돼지해에 아기를 낳을테니 기막히게 잘 짜여진 극본 같아서 축하인사를 건네면서도 한편으론 가증스럽게도 에구, 난 다행이구나... 싶었더랬다. 일찍 결혼해서 빨리 아이 낳아 키우면 나중에 나이 먹어서 편하다고도 하고, 주변을 둘러봐도 그 말이 맞지 싶기도 한데, 뭐든지 그렇게 결정나버리는 게 아직은 두렵다. 이제는 피도 삭고 기운도 빠져서 누구를 만나도 폭폭 정이 들기는 어려울 듯 한데, 이러다가 사촌 동생이 일촌평에 쓰고 도망친 것처럼 진짜 "허벅지에 비밀이 있는 노처녀"가 되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고나. 홍샘은 새 학기에 다른 학교로 옮겨 가게 될 것 같다. 부디 순산해서 홍샘처럼 착하고 예쁜 아기를 낳았으면 좋겠다.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쓰며 아이들과 대청소를 했고 목이 칼칼하고 코가 맹맹해서 결국 주사를 맞고 왔다. 집에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역시 학교는 내 심신을 사정 없이 갈궈댄다. 쓰레기 버리러 가는데 가위바위보를 하던 그 아해와 그 아해의 얼굴이 떠오른다. 부르르... 몸서리까지 나네. 키는 나보다 훤칠한 것들이 고깟 쓰레기 버리러 가는 데 오판삼승제로 핏대나 세우고. 덩치는 산 만해도 애들은 애들이다.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졸업이다. 이별의 아쉬움이나 세월의 보람, 그런 감상이나 낭만 보다는 어째 아슬아슬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부디 무사태평한 일주일이 되기를, 얼마 남지도 않은 시간인데 서로 얼굴 붉힐 짓은 하지 않았으면, 머리는 보온용이려니 넘어간다지만 실내에서는 제발 실내화만 신었으면, 너희들이 교문을 나서는 그 순간 나는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쾌재를 부를지도 몰라. 오죽하면 그러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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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7-02-10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고등학교 입학하는 이 동네 중3들은 중1때부터 악평이 자자한데, 그 동네도 만만치 않은가봐요. 해마다 아이들 전체 분위기가 달라지니 참 신기하죠. 이번에 고2 올라가는 애들은 아직도 작고 어리버리한데^^

Mephistopheles 2007-02-1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합니다.
저 중3때 생각하면서 잠깐 능글맞게 웃었습니다.(참고로 전 쌍커플 없습니다.!!)

깐따삐야 2007-02-1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얘네들도 중1때부터 악명 높았더랬죠. 얘네들이 중1일이었던 당시, 저는 신규였습니다. 얼마나 엉망진창이었을지 안봐도 비디오지요? 으이구.

메피스토님, 췌... 그랬었었었었군요. (오, 부디 수술 같은 건 생각하지 마시길!)
 

  아무도 인터뷰를 하러 오지 않아 혼자 백문백답 목록을 가지고 논다. 엉터리 같은 질문들. 그래도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묘한 오기가 생긴다.

 

* Pretty

1. 예쁜 남자에 대한 생각 : 고맙지, 뭐.

2. 길거리에서 예쁜 여자를 볼 때 하는 생각 : 췌, 예쁘군.

3. 내 친구가 엄청난 미녀라면 : 비결을 물어보겠어.

4. 성형수술을 하고 싶을 때는 : 지대루 업그레이드 된 사람을 볼 때.

5. 꼭 고치고 싶은 부위는 : '꼭' 고치고 싶진 않구.

6. 안 예뻐서 생긴 에피소드는 :  내 어린 시절부터 오라버니 曰, "넌 안 예쁘니깐 공부라도 잘해야 된다." 

7. 예쁜 사랑을 해 본 적은 : 예쁜 사랑은 모조품 같아.

8. 요즘 가장 관심 있는 물건 :  전자수첩

9. 정말 예쁜 물건을 발견한다면 :  예쁘기만 한 건 안 사.

10. 내가 하루 아침에 예뻐져서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면 : 입 벌리면 다 알아보게 되어 있어.

11. 예쁘게 사랑하는 법 : 시의적절한 가식.

12. 예쁜 사랑이란 : 질문하고는. 예쁜 사랑은 니미럴.

 

* Cute

13. 가장 귀여운 동물은 : 태어나서 두 주 정도 지난 발바리 새끼.

14. 귀여운 남자가 좋은가 : 귀엽기만 한 건 싫어. 애완동물이냐.

15. 좋아하는 사람이 귀여운 여자를 좋아한다면 귀여운 척 할 수 있는가 :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는데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때.

16. 친구가 심하게 귀여운 척을 한다면 : 위로가 필요한 게야.

17. 난 애교가 많은 여자? : 여자들한테만. 비극이지.

18. 난 귀여운 편? : 남들은 귀엽대.

19. 어린 아이가 길을 잃어버려 울고 있다면 : 길치지만 으른이니깐 도와줘야지.

20. 귀여운 강아지가 우리집 앞에 있다면 : 귀여운 강아지라며. 주인이 곧 데려가겠지.

21. 귀여운 아이라도 때릴 수 있는가 : 이쯤되면 막가자는 건가.

22. 난 귀엽다는 말이 좋다 : 별로.

23. 잘생긴/귀여운/능력 있는/ 중에 한 가지를 고르면 : 능력 있는!

24. 이성이 귀여워 보일 때 : 둘러댈 말을 못 찾아 안절부절할 때.

25. 애교 많은 남자친구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 : 애교로 모든 걸 커버하려는 가련한 행태와 맞닥뜨렸을 때.

26.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지만 애교 없이 무뚝뚝한 남자는 : 모든 조건...! 애교를 발굴하겠어.

 

* Smart

27. 멋있는 남자/착한 남자 : 일단은 멋있는 쪽.

28. 가장 멋있어 보이는 가수 : 비, MC몽.

29. 못생긴 남자가 멋있는 옷을 입었을 때 : 다 제멋에 사는거야.

30. 멋있는 척 하는 사람을 보면 : 대략 역겨워.

31. 남자가 멋있는 말을 하면 : 꿍꿍이가 뭐길래.

32. 능력이 좋은데 옷을 못 입는 남자는 : 능력이 좋은...! 잘 입히면 돼.

33.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프로포즈를 한다면 : 고맙지, 뭐.

34. 예전에 나한테 고백을 했던 코찔찔이가 멋있어져서 돌아왔다면 : 췌, 유치한 복수.

35. 난 쿨하게 잊어주는 사람? : 쿨하게 헤어지기만.

36. 멋있는 사랑이란 :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랑.

37. 멋있는 남자란 : 성실한 남자.

38. 멋있는 연예인 : 윤도현, 존 쿠삭.

39. 기억에 남는 멋진 멘트 : Life is not what one has lived, but what one remembers and how one chooses to tell it.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40. 멋있다고 생각하면서 본 영화 : Once upon a time in America

41. 현재 내 눈에 가장 멋져 보이는 사람 : 현재 없다.

42. 현재 내겐 멋진 남자친구가 있다 : 현재 없다구.

43. 외모가 멋진 사람, 마음이 멋진 사람 : 유치하다, 유치해. 마음이 멋져야 남자지.

44. 멋있는 노래 : Creep / Radiohead

45. 쿨하게 헤어지는 사람은 멋진 사람? : 쿨한 것과 싸가지 없음의 차이가 하도 미묘해서리.

46. 사랑한다면 해야 할 멋진 일 : 손수 도시락을 싸는 거지. 밥정이 무서운 게야.

47. 멋있게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 Do Your Best!

 

* Sad

48. 가장 슬펐던 기억 : 엄마가 편찮으셨을 때.

49. 길거리에서 우는 여자를 본다면 : 마음이 짠하겠지.

50. 남자의 우는 모습은 : 때로 멋지고, 때로 구차해.

51. 울고 싶을 때는 : 이따금, 불현듯.

52. 사랑 때문에 운 기억 : 너라면 없겠니. 없다면 독한 것...

53. 주로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가 : 스스로가 꼴도 보기 싫어지거나, 뭔가 디게 미안하거나.

54. 눈물을 뭐라고 생각하는가 : 불가사의한 분비물.

55. 사랑은 슬픈 것? : 때로 그래.

56. 슬픈 로맨스에 대한 기억 : 기억은 담담해.

57. 울고 난 후의 후유증 : 머리가 디게 아퍼.

58. 날 가장 많이 울린 사람 : 초딩 때 그 배 나온 머스마.

59. 내가 울려 본 사람은 있는가 : 셀 수 없을 정도야.

60. 있다면 몇 명 : 손, 발가락으론 부족해.

61. 최근 울어 본 기억 : 얼마 안 됐어.

62. 사랑은 돌아오는 것? : 돌아버리는 거지.

63. 눈물을 참기 위해 해 본 것 : 눈을 감아버리거나, 밥을 크게 한 술 떠 넣거나.

64. 난 눈물이 많은 편/적은 편 : 여전히 많아.

 

* Purity

65. 순수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 소설 <소나기>의 소년, 소녀처럼.

66. 난 순수한 여자? : 맹하다는 걸 꼭 그런 식으로 돌려말해 주드라.

67. 순수한 남자에 대한 생각 : 고맙지, 뭐.

68. 순수한 것과 착한 것의 차이점 : 순수한 건 사심이 없는 것. 착한 건 사심이 있더라도 감추는 것.

69. 사람이 가장 순수해 보일 때 : 코... 자고 있을 때.

70. 남자친구가 내게 순수해지길 원한다면 : 미친X. 더 이상 뭘 더 바라냐고 하겠지.

71. 순수한 줄 알고 좋아했는데 알고보니 카사노바였다면 :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돌아서야지 뭐.

72. 다 갖춰진 남자인데 순수함이 없다면 : 다 갖춰진...! 순수함을 발굴하겠어.

73. 이성이 순수하게 보일 때는 :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집중력. 나를 기다리고 있는 눈빛.

74. 바보 같은 것은 무슨 뜻일까 : 사랑에 빠진 나 같은 것.

75. 순수한 여자가 간절히 되고 싶을 때 : 간절히 되고 싶은 게 퍽도 음따.  

76. 섹시/순수 나한테 더 가까운 것 : 섹시는 증말이지 아닌 것 같다.

77. 내가 좋아하는 옷 스타일은 순수? : 알아, 내가 촌스럽다는 거.

78. 순수한 남자/터프한 남자 중에 택하라면 : 섞어봐, 좀.

 

* Ordinary

79. 평범이란 : 무난한 거.

80. 난 현재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 대체로 그래.

81. 슬픈 사랑, 멋진 사랑보다 평범한 사랑을 하고 싶다 : 응. 피곤해.

82. 앞으로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 : 응. 피곤하거든.

83. 연예인이 결혼하자고 한다면 : 안 해. 피곤하다니깐.

84. 난 평범한 얼굴인가 : 응. 지극히 동양 여자.

85. 잘생긴 남자/평범하게 생긴 남자 : 물으나 마나 한 걸. 잘생기면 고맙지.

86. 재벌2세와 결혼한다면 : 뭐가 달라져?

87. 난 특별한 일상을 누리고 싶다 : 가끔. 피곤하지만 않으면.

88. 화려한 옷 스타일을 좋아하는가 : 대놓고 화려한 건 싫어.

89. 평범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 난리부르스 추지 않고 담백한 거.

90. 평범한 사랑을 해 본 적은 있는가 : 아니, 죄다 이상했어.

91. 드라마 같은 삶을 살고 싶다 : '전원일기' 정도면 괜찮아.

92. '평범하다'라는 말의 뜻을 설명하자면 : 물은 거 또 묻고 그래. 튀지 않는 거. 남들 가는 데로 가는 거.

93. 난 평범하단 소리를 자주 듣는다 : 특이하단 소리를 더 자주 들어.

94. 평범한 사람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면 : 불만하지 말고 남들 가는 데로 가는 거.

 

* Unique

95. 독특하다는 건 : 남다른 개성이 있다는 거지.

96. 나는 독특하단 소리를 자주 듣는다 : 응. 그 점이 의아해.

97. 지금껏 만났던 사람 중 독특했던 사람은 : 라면 먹을 때 우유 섞는 사람. 맛있어?

98. 평범한 남자보다는 개성 뚜렷한 남자에게 끌리는가 : 예전에는 그랬지.

99. 조만간 해보고 싶은 비범한 행동이 있다면 : 개학 날 땡땡이 치는 거.  

100. 평범하게 끝인사 한 마디 : 내가 왜 이런 걸 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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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2-06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라하기 1번 ^^

깐따삐야 2007-02-0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해보셈, 의외로 잼나요.

Mephistopheles 2007-02-07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5번은...마님이 저에게 자주쓰는 수법 중에 하나군요..ㅋㅋㅋ
따라해보고 싶은데...사무실에선 불가능해요...^^

깐따삐야 2007-02-07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