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건 아이들의 흑단 같은 머리 다발들이었다. 방학 동안 한 번도 안 깎았지 싶었다. 음악다방 DJ 마냥 한 번씩 뒷덜미 쪽으로 털어주는 오버스런 몸짓들 하며, 나이 한 살 더 먹어도 하여간 머스마들 유치한 건 알아줘야 돼. 내가 지난 3년 사이에 이토록 입이 걸어지고 유치빤스만 입게 된 건 다 걔네들 때문이다. 거기다 긴긴 겨울방학 동안 제법 어깨선이 굵어지고 눈빛엔 기름기가 좔좔 흐르면서 된통 능글맞아진 것 같았다. 그냥 예뻐지셨네요, 라고 하면 될 것을 손수 실루엣까지 만들어가며 바디라인이 살아났다느니, 남몰래 한 달을 굶었을 거라면서 쿡쿡대지를 않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은근슬쩍 한 번 훑어내리고는 가소롭게 내려다보는 등, 온갖 추행들이 난무했다. 별달리 새롭지도 않은 풍경인데 개학 첫날이라 그런지 적응하기 어려웠다. 이 세상에 중3 남자 아이들처럼 징그러운 존재들도 없을 것이다. 어른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닌 어중간한 발달 상태, 뿔긋뿔긋, 혹은 노릇노릇 올라오는 여드름과 제딴엔 감는다고 감는대도 뭉텅뭉텅 떡지기 십상인 머리, 닳고 닳아서 빤들거리는 데다 껑충 짧아진 교복, 게다가 입에서 폭발하는 언어들은 대개 87퍼센트 이상 비속어나 인터넷 은어다. 원래 큰 키도 아니지만 방학 동안 비육우처럼 튼실해진 아이들 앞에 서니 나는 그야말로 난쟁이 똥자루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반가운 마음이 일다니 정이 들긴 든 모양이구나 싶다가도, 졸업식을 앞둔 일주일 동안 씨도 안 먹힐 게 뻔한 말들을 해가며 이 넉살 좋고 약삭빠른 녀석들에게 휘둘릴 생각을 하니 갑자기 가슴이 답답했다. 아마도 조물주는 이런 나를 어여삐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엾이 여겨 선뜻 공부할 기회를 주셨나 보다.

  또래 선생님들과의 수다.

  윤샘이 쌍꺼풀 수술을 하고 나타나서 깜짝 놀랐다. 시술하기 전에 나한테 전화만 한 통 했더라면 극구 말렸을텐데. 이지은이나 한지혜, 얼마나 예쁜 눈인가. 쌍꺼풀이 있는 내 눈은 아무런 상상력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그냥 길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무난하고 평범한 눈이다. 그런데 윤샘의 눈은 어딘가 고집스러워 보이면서도 귀염성이 있었고, 작지 않으면서도 쌍꺼풀 없이 동그란 눈은 아담하고 부지런한 윤샘과 잘 어울렸었다. 원래 다른 사람 외모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인데 이번 만큼은 내 일처럼 안타까웠다. 나는 연예인을 포함하여 여성이든 남성이든 쌍꺼풀 없는 눈을 가진 매력적인 마스크를 꼽으라면 수십 명까지 댈 수 있다. 순전히 내 취향 탓일지도 모르지만 주변에서 누가 쌍꺼풀 수술 어쩌고 하면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윤샘 스스로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 같아 더욱 더 안타까웠다. 겉으로야 부기 내리고 자리 잡히면 이쁘겠다, 말했지만 속마음을 자주 들키곤 하는 나는 윤샘과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이야기 하기가 힘들었다. 영리해 뵈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생글거리던 예전의 윤샘이 그리웠다. 몇 개월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러워지겠지. 다른 사람들도 그렇더라. 나 같으면 학교 안 간다고 성질 부리고 재수술이니 어쩌니 했을지도 모르는데 활짝 웃으면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윤샘이라서 보기 좋았다. 그래도.. 쌍꺼풀 없는 눈이 더 예뻤다구.

  홍샘은 입덧 때문에 밥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원래 잘 비벼 먹지 않았는데 오늘은 고추장에 밥을 슥슥 비벼서 억지로 떠넣고 있었다. 만난 지 석 달 만에 결혼하더니 결혼한 지 석 달 만에 임신을 했다. 아마 겁 많고 게으른 나 같았으면 삼 년씩 걸릴 일이었겠지. 저번에 점심을 같이 하면서 친정이고 시댁이고 아기를 빨리 갖기를 원한다길래, 아직 나이도 어린데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아기 가져도 늦지 않는 거 아니냐고 말했었는데 겨울방학이 길긴 길었나. 안그래도 약하고 갸냘픈데 방학 내내 입덧 때문에 변기만 붙들고 살았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다. 쌍춘년에 결혼해서 황금돼지해에 아기를 낳을테니 기막히게 잘 짜여진 극본 같아서 축하인사를 건네면서도 한편으론 가증스럽게도 에구, 난 다행이구나... 싶었더랬다. 일찍 결혼해서 빨리 아이 낳아 키우면 나중에 나이 먹어서 편하다고도 하고, 주변을 둘러봐도 그 말이 맞지 싶기도 한데, 뭐든지 그렇게 결정나버리는 게 아직은 두렵다. 이제는 피도 삭고 기운도 빠져서 누구를 만나도 폭폭 정이 들기는 어려울 듯 한데, 이러다가 사촌 동생이 일촌평에 쓰고 도망친 것처럼 진짜 "허벅지에 비밀이 있는 노처녀"가 되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고나. 홍샘은 새 학기에 다른 학교로 옮겨 가게 될 것 같다. 부디 순산해서 홍샘처럼 착하고 예쁜 아기를 낳았으면 좋겠다.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쓰며 아이들과 대청소를 했고 목이 칼칼하고 코가 맹맹해서 결국 주사를 맞고 왔다. 집에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역시 학교는 내 심신을 사정 없이 갈궈댄다. 쓰레기 버리러 가는데 가위바위보를 하던 그 아해와 그 아해의 얼굴이 떠오른다. 부르르... 몸서리까지 나네. 키는 나보다 훤칠한 것들이 고깟 쓰레기 버리러 가는 데 오판삼승제로 핏대나 세우고. 덩치는 산 만해도 애들은 애들이다.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졸업이다. 이별의 아쉬움이나 세월의 보람, 그런 감상이나 낭만 보다는 어째 아슬아슬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부디 무사태평한 일주일이 되기를, 얼마 남지도 않은 시간인데 서로 얼굴 붉힐 짓은 하지 않았으면, 머리는 보온용이려니 넘어간다지만 실내에서는 제발 실내화만 신었으면, 너희들이 교문을 나서는 그 순간 나는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쾌재를 부를지도 몰라. 오죽하면 그러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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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7-02-10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고등학교 입학하는 이 동네 중3들은 중1때부터 악평이 자자한데, 그 동네도 만만치 않은가봐요. 해마다 아이들 전체 분위기가 달라지니 참 신기하죠. 이번에 고2 올라가는 애들은 아직도 작고 어리버리한데^^

Mephistopheles 2007-02-1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합니다.
저 중3때 생각하면서 잠깐 능글맞게 웃었습니다.(참고로 전 쌍커플 없습니다.!!)

깐따삐야 2007-02-1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얘네들도 중1때부터 악명 높았더랬죠. 얘네들이 중1일이었던 당시, 저는 신규였습니다. 얼마나 엉망진창이었을지 안봐도 비디오지요? 으이구.

메피스토님, 췌... 그랬었었었었군요. (오, 부디 수술 같은 건 생각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