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금방 비나 눈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는데 오늘 아침은 자욱했던 구름이 걷히고 반짝 햇볕이 난다. 라디오에서는 벌써 겨울 노래들이 흘러나온다. 몇 년 전 이맘때는 건스앤로지스의 November rain을 참 열심히 들었는데. 싱글인 친구들은 서울로 조만간 그들의 내한공연을 보러 간단다. H가 새로 산 차로 직접 운전을 하고 기타를 치는 K선배까지 동행한다고. 요즘 애들 말로 완전 대박. 부럽지만 별 수 있나. 묘사 잘하는 E에게 전해 듣는 수밖에.

  E는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단짝이었다. 미니홈피에 이상한 글을 써 놓아서 근황을 물었더니 “아 놔. 나는 왜 이렇게 애프터가 없지. 이젠 부모님까지 창피해 하신다.” 그런 말을 한다. 상대가 마음에 들던, 마음에 들지 않던, 일단 애프터는 받아야 안심이 되는 남녀생활백서에나 나올 법한 여자 심리. E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막상 누군가를 사귀기 시작해도 그다지 좋아하는 것을 못 보았다. 온몸에서 발산하는 빛으로 나 연애하고 있소, 라고 사방팔방 표내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나도 한때는 나 자신, 연애와 잘 맞지 않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노랫말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나와 다른 누군가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한 사람을 마음에 두면 성실히 몰두하는 타입이었지만 그만큼 사소한 일에 쉽게 지치기도 했다. 들끓던 감정이 차가운 이기심으로 변질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나 이외에는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었다.

  그런 고민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 만남이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래 가고픈 인연일수록 더 그랬던 것 같다. 좋은 사람이라면 무턱대고 좋아하기부터 했던 과거와는 달리 좋은 사람일수록 조금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사랑을 하는 나 자신도, 사랑 자체도 믿지 못했기에 그만큼의 만남까지 망치게 될까봐 마음 단속을 철저히 했다. 그러다보니 상대의 감정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모르는 채, 내 마음 역시 확실히 드러내지 않은 채, 놓아버린 인연도 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도 잘한 것이 없다. 내 나이 서른, 여전히 젊은 나이인데 그때 좀 더 불태웠어야 했다. 그 무렵 나를 향한 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등장한 사람이 남편이었다. 그가 두터운 콩깍지를 덮어쓴 채 내게 올인하지 않았다면, 둘 다 뜨뜻미지근한 감정이었다면, 만남이 인연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E는 시큰둥해할지 모르겠지만 사람 앞에 소심 가득한 것보다는 사랑 앞에 수심 가득한 편이 낫다. 이것은 결혼한 자의 호기가 아니라 이미 품절된 자의 질투 어린 조언이다. 가끔 거리를 지날 때 손을 잡지 않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는 남녀를 보곤 한다. 주변을 아우르는 아우라로 보건대 사랑할락 말락 할 즈음의 커플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 챈다.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좋았던 것 같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눈빛 한 점까지 조심스러웠지만 스멀스멀 차오르는 감정까지는 숨기지 못하던 그때. 막상 결혼을 하면 점점 능숙한 생활인으로 변모해가는 것을 피할 수 없고 그것이 꼭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을 보면 부러움만큼이나 그리움이 앞선다. 살아가는 동안 그렇듯 기억할만한 설렘은 생각만큼 흔하지 않다.

  나는 이제 모험이 두렵다 하고 남편은 모험이 귀찮다 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점점 더 그리 될 것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E의 푸념이 신선하게 들릴 정도라니 그새 확 늙어버린 느낌. 이쯤 되면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노화가 진행되는 사고가 문제다. 이것저것 가늠하느라 E가 불현듯 찾아오는 감정에 대해 저어하지 않았으면 한다. 미실은 사랑이란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라 했다. 셸 실버스타인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무엇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내 안에 너무 많은 나 때문에 많이 주고 많이 빼앗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연애도 화장품 지르듯 과감하게 해보라구. 화장품 덜 써도 젊어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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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1-17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분에게 요즘 소지섭씨가 출연하는 뱅뱅 청바지 CF를 필독하시라고 전해주세요.

깐따삐야 2009-11-19 14:00   좋아요 0 | URL
소지섭 보면 눈만 더 높아집니다. 안 그래도 심각한데. ㅋㅋ

2009-11-17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9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엊그제 마트에 들러 보니 수능 대박 기원 초콜릿 홍보가 한창이었다. 빼빼로데이까지 겹쳐 그 어느 때보다도 전시가 화려했다. 남편이 고3 담임인지라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았다. 남학생들이니 먹으면 든든한 초코바 같은 게 어떻겠냐고 이야기했고 남편도 그럴까, 동의한다. 그런데 새로 나온 BALLI라는 초콜릿이 눈에 띈다. 포장도 예쁘고 맛도 괜찮다. 아이들 몫을 사고 우리 것도 몇 개 더 샀다. 남편은 오늘 수험표와 함께 초콜릿을 나누어주었다고 했다. 열아홉 살, 수능만 끝나면 다시는 수능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팔자라는 게 그렇지가 못하다.

  그 날 역시 수능한파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꽁꽁 추웠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나는 수능 전날 집으로 돌아왔고 거의 한숨도 못 잔 채 일찍 일어났다. 허기도, 피곤도 느껴지지 않는 긴장된 아침이었다. 아침밥을 반 공기쯤 먹고 나서 보온도시락과 준비물들을 챙겼다. 제대를 했던 오빠와 근처에 살던 사촌오빠가 시험장까지 나와 동행했다. 기숙사 후배가 응원 선물로 준 목도리를 칭칭 싸매고 교실로 들어섰다. 같은 학교 친구들 몇몇과 함께 그 학교 음악실에서 시험을 봤다. 별실인데다 맨 끝 반이다보니 다른 반보다 인원이 적었고 쉬는 시간에도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시험이 시작되자 긴장했던 마음은 도리어 편안해졌다. 수리탐구1 시간에 옆 분단 아이 하나가 답안지를 밀려 썼다고 울상을 짓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미 종이 친 다음이라 감독관도 어쩌지를 못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황급히 답안지를 확인했고 이어지는 점심시간. 숱한 모의고사에 단련된 덕분에 다들 조용히 수다를 떨며 여유 있게 도시락을 먹었다. 남은 3, 4교시도 순탄하게 흘러갔고 마지막 시험을 마치는 종이 울리자 학교 전체가 웅성웅성. 생각보다 시험이 쉬웠는지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 표정이 밝았다.

  나를 발견한 오빠가 수고했다, 시험은 어땠느냐고 물었고 나는 답을 맞춰보기가 겁난다고 말했다. 시원섭섭한 마음이 딱 그 마음일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ebs에서 하는 수능해설방송을 보며 가채점을 했다. 다른 아이들은 수험표 여백에 답을 적어가기도 하던데 그럴 정신이 없어서 그냥 푼대로 채점을 했다. 나중의 결과는 수리1에서 한 문제를 더 맞힌 것으로 나왔다. 그래도 원하는 학교에 가기엔 아쉬운 점수였다. 당시 나는 오빠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오빠는 며칠을 컴퓨터 앞에서 고심하더니 학교는 아쉽지만 전공은 바꾸지 말라고 했다. 원서도 오빠가 넣고 왔다. 결과는 합격이었지만 발표가 예정보다 늦게 나는 바람에 면접을 준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짜증났던 순간도 떠오른다.

  남편이 근무하는 학교는 우리 집과 같은 동네에 있다. 친정 바로 부근이다 보니 근처를 자주 지나게 되는데 밤 열한 시가 넘도록 온 교실에 불이 환하다. 마치 푸른 죄수복처럼 보이는 교복을 입고 이른 아침, 늦은 밤,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로 가득이다. 선배들에게 농구장을 내준 저학년 아이들이 옆에 있는 중학교 농구장에 와서 농구를 하는 모습도 본다. 운동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얼굴이 검은 아이를 발견하기란 어렵다. 그 점은 내가 근무하는 중학교도 마찬가지다. 치아와 눈의 흰자만 하얀 양궁부 아이들을 빼놓곤 다들 창백한 편. 커튼 친 교실, 야간 학습에 길들여진 탓에 노랗게 뜬 잎새들 같다.

  나 역시 고3을 힘들게 보냈지만 요즘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그때의 나보다 훨씬 더 힘들어 보인다. 우리들 중 아무도 반드시 학원에 다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았다.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였다. 대개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당연시 했던 것 같다. 교사가 된 후 내가 놀랐던 사실 중 하나는 자율학습 시간에도 자율학습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 관해서이다. 시험이 코앞인데도 책상 위를 깨끗이 비워놓고 멍하니 앉아 있는 아이들을 종종 본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새것과 다름없는 교과서는 치워두고 학원에서 뽑아준 예상문제만 열심히 푸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가 질문을 해오면 우선 교과서부터 다 읽고 나서 문제를 풀라고 해도 들은 척 만 척이다. 그러다보면 매일 저녁을 컵라면이나 닭꼬치로 때우며 엄청난 학습량과 피로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심신만 허약해질 뿐, 학년이 올라갈수록 좌절감은 는다.

  곁에서 보면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실로 엄청나다. 혼자 공부하다가 뭔가 잘 안 풀려서 받는 스트레스와 외부 요인들에 의해서 받는 스트레스의 갭은 크다. 공부도 재능이고 기술인데 다른 분야에 재능이 있어도 일단 학원은 다니고 본다. 이유를 물어보면 다른 아이들도 다 다니고 있고, 그나마도 안 하면 안 될 것 같고... 그런 말들이 돌아온다. 작금의 현실을 볼 때 그 말이 어찌 틀렸다고 할 수 있겠나 싶다. 무기력한 아이들을 보며 혀를 내두르기 전에 그 불안의 원천이 바로 어른들의 잘못이란 걸 인정한다면 말이다.

  그 와중에도 이미 교사가 가르칠 범위를 넘어선 뛰어난 아이들부터, 이 손 저 손에 이끌려 다니며 스트레스만 잔뜩 학습한 딱한 아이들까지, 어쨌든 내일 한 날 한 시에 시험을 친다. 청춘불패라는 말은 그냥 멋들어진 위로가 아니다. 수능에서도, 수능이 끝나서도, 계속 힘을 내시라. 누구든 자기 몫의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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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9-11-12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만큼은 속시원한 해방감에 푹잤으면 좋겠어요. 모든 수험생들이..



깐따삐야 2009-11-16 16:44   좋아요 0 | URL
그랬겠죠? ^^
 


  원래 개봉시기에 맞춰 영화를 보는 편은 아니다. 좋은 영화는 언제 봐도 긴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즘 같아선 영화관 출입도 꺼려져 철지난 영화들을 찾아서 보는 중이다. 첫 느낌만으로 좋아질 것 같은 영화도 있는데 이 영화가 그랬다. 스토리도 그렇고 신민아, 공효진이라는 두 여배우의 이미지도 한몫했다.

  학부 시절, 교양철학 시간에 ‘안토니아스 라인’이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적이 있다. 모계 가족 형태를 보여주는 특이한 작품이었는데 이 영화는 어쩐지 그 영화를 떠올리게 했다. 처음엔 아버지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두 자매가 서로 화해의 순간에 이르는 평범한 로드무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의 절정 부분에 이르러 상상치도 못했던 서늘한 반전을 보여준다. 명은(신민아 분)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되짚어가고 관객은 몇 가지 복선들을 알아차리며 속았다, 라기 보다는 아, 그랬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그 이후 안쓰럽지도, 호들갑스럽지도 않은 담담한 재회. 이 장면에서 배우 신민아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자매는 없고 오빠가 하나 있다. 그런데 오빠와 여동생의 관계란 나이를 먹을수록 아버지와 딸 같은 관계로 화해가는 면이 크다. 주변에서 언니나 여동생이 있는 친구들을 보기는 하지만 내 일이 아니기에 자매라는 관계를 실감하기는 어렵다. 올케와 시누이도 있지만 같은 여성으로서 동지 의식을 느끼는 순간보다는 오빠의 아내이자, 남편의 동생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사회에 나와 언니처럼 대하게 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깊숙한 속내까지 드러낼 일은 거의 없다.

  그나마 간접경험이라면 엄마와 이모들의 관계를 통해서이다. 엄마 곁에는 네 명의 개성 뚜렷한 자매들이 있다. 현명하신 큰 이모, 천사병 둘째 이모, 셋째인 엄마, 깍쟁이 넷째 이모, 오지랖 넓은 막내 이모, 마지막 자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상냥하고 자상한 외삼촌까지. 그 가운데 엄마가 가장 솔직해지는 상대는 큰 이모다. 엄마는 큰 이모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꼭 한 가지씩은 배우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반면에 둘째 이모에 대해서는 엄마의 언니임에도 불구하고 탐탁찮아 하신다. 엄마의 말을 빌자면, 혼자 고상한 척 하면서 주변사람 고생시키는 타입이라고. 넷째 이모는 조카인 내가 봐도 보이는 그대로가 전부인 사람. 복잡한 것 싫어하고 실리를 중시한다. 어쩐지 드러내놓고 깍쟁이 짓을 해도 귀여운 면이 있다. 막내 이모는 그 나이 먹도록 엄마한테 가끔 혼이 나는데 구박을 받아도 심신에 밴 오지랖 병은 잘 고쳐지지 않는 것 같다.

  이모들이 모이면 정말 접시가 깨진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왁자지껄하다. 집안에 경조사가 있을 때 서로 뭉치는 걸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자매들이 부럽다. 순전히 나의 이기심일까. 지금은 여자로서 겪어야 할 모든 일을 엄마와 상의하지만 점점 쇠약해지는 엄마에게 미안할 때, 그리고 언젠가 엄마가 없을 때, 엄마가 이모에게 하는 것처럼 함께 수다를 떨며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자매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나처럼 어딘가 엄마의 모습을 닮아 있고, 엄마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엄마의 솜씨를 어설프게나마 흉내 낼 줄 아는 자매 말이다. 애증 섞인 대화를 남발하다가도 끝에 가서는 그래도 언니밖에 없어, 그래도 내 동생이 최고야, 서로를 다독일 수 있는.

  영화 속 명주와 명은의 모습에서 이율배반적인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는 명은처럼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주변 사람과 스스로를 학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명주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냥 그렇게 사는 거야, 라고 웃으며 이야기하기도 한다. 내 고통에만 눈이 팔려 가까운 가족의 상처쯤은 안중에 없을 때도 있고, 사는 일이 문득 지겨워져 술이나 마셨으면, 할 때도 있다. 그렇듯 내가 느끼는 삶이란 것도 한 뱃속에서 나왔지만 색깔이 다른 두 자매와 같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해 못할 것도 없는 이상한 삶과 화해할 수 있을까. 그런 자매애를 느낄 수 있는 날이 오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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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이 테니스 대회에 나간단다. 아이들 수능이 끝나는 다음 주로 일정이 잡혔다. 남편 후배 말에 따르면 ‘저 형이 운동을 하다가 죽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남편은 한때 운동에 미쳐 있었단다. 실제로 결혼을 해보니 입고 나설만한 외출복은 별로 없는데 고가의 트레이닝복은 숱했다. 테니스만 치는 줄 알았는데 수영복에 수영 모자도 있었다. 스포츠양말은 왜 이렇게 많은 거냐고 했더니 옷이나 용품을 사면 거저 주는 것이라 했다. 나도 그가 얼마나 테니스를 좋아하는 지는 사귈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결혼 전부터 내게 전문적인 레슨을 권유했었다. 지난 여름에는 여성용 테니스 라켓을 사갖고 와서 나한테 구박을 듣기도 했다. 7만원 하는 배드민턴 라켓도 큰마음 먹고 구입했던 나로서는 그 놀라운 가격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운동인데 연애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눈치 보랴, 고3 담임하랴, 마음껏 즐기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운동을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자기 딴엔 나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이 곧 나를 위한 일이라고 착각했는가 보다. 그런 귀찮은 오해는 그만두라고, 아이들 수능 끝나면 여유가 생길 테니 시간 내서 운동도 하고 그러라고 했더니만 무척 좋아한다. 말을 그리 해놓고 옷장을 둘러보니 트레이닝복이 거의 낡거나 오래된 것들뿐이라 한 벌 사주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브랜드는 주로 테니스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브랜드인데 얼마 전까지 없던 매장이 우리 동네에도 생겼다. 야자 감독이 없는 저녁, 남편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매장도 작고 종류도 많지 않은 편이지만 남편 말로는 여기 옷이 질도 좋고 편하단다. 남편이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주인아주머니가 테니스를 잘 치시나 봐요, 하신다. 대회 나가면 트로피는커녕 휴지 두 통 타오는 게 전부인데 이번에도 휴지 타오라고 운동복까지 새로 사 입힌다고 했더니 막 웃으신다. 아주머니 남편도 대회만 나가면 무조건 파트너가 잘못해서 등수 안에 못 들었다고 불평하신다고.

  카탈로그에서 본 것만큼 간지 좔좔은 아니었지만 입고 나온 모습은 깔끔하니 괜찮았다. 세일기간이 아니어서 생각보다 비싸긴 했지만 일단 마음에 드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솔솔. 트럭에서 오징어, 쥐포 등등 건어물을 팔고 있었다. 예전에 추운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쥐포 사먹던 생각이 나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먹고 싶다고 하자 남편이 쥐포를 한 묶음 샀다. 장사하는 청년은 프라이팬에 구워 드시라고 했지만 나는 그냥 가스 불에 직접 구워 먹는 걸 좋아한다. 옆에서 대리만족이라도 해야겠다며 쥐포를 굽고 냉장고에 있던 병맥주를 꺼냈다. 맥주는 남편이 마시고 나는 쥐포를 우유와 함께 먹었다. 맥주가 그렇게 시원해 보일 수가 없었지만 쥐포와 우유도 궁합이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듯.

  남편은 새 옷을 고마워하면서도 자기는 원래 옷 여러 벌 걸어놓고 입는 편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망설이지 말고 예전에 입던 것은 버리라고 했다. 트레이닝복은 비교적 유행을 덜 타지만 이제는 색도 바라고 담가 놓았다 손빨래를 해도 제 빛이 안 난다. 혼자 사는 남자의 관리 소홀도 한몫 했을 것이다. 남편과 사는 동안, 가끔 그가 혼자 살던 풍경이 상상이 될 때가 있다. 퇴근 후 테니스를 치고 땀에 흠뻑 젖어 불 꺼진 집으로 돌아와 세탁기를 돌리며 저녁을 먹는 남자. 냉장고를 뒤져서 있는 거 다 넣고 부대찌개를 해먹거나 있는 거 다 넣고 볶음밥을 해먹거나, 이도저도 귀찮으면 파도 계란도 없이 라면을 끓이는. 특별한 약속이 없는 밤에는 맥주 한 캔 하면서 테니스나 축구를 보다 잠들었겠지. 문득문득 외로움을 동반했을 너무 많은 자유.

  그렇다 해도 나는 종종 결혼 전의 내 모습, 싱글인 친구들이 부러운데 남편은 어떠한가. 남편도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던 날,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흘러가더라고 말해서 나한테 맞을 뻔 했다. 그래도 그는 지금이 더 좋단다. 좋기는 한데 자기가 왠지 지고 사는 느낌이 든다고 말해서 나한테 맞았다. 예전에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맞지요, 라고 점잖게 말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억울해진 거냐고, 그리고 당신이 지는 게 대체 뭐가 있냐고 난리를 쳤더니 생각해보면 내 말이 맞는단다. 내가 내 뜻대로 못하고 사는 것도 없는데 왜 져주는 느낌이 들지? 이러고 앉았다. 나는 그런 느낌이 들게 하다니 내가 당신을 잘 못 다루는 모양이라고 자학했다. 비싼 옷 사 입히고 나서 고작 그런 말이나 듣다니. 부들부들.

  겉으로는 그렇듯 고래고래 질러댔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을 전혀 모르지는 않는다. 가깝게 지내던 후배들 말로는 별명이 대마왕이었다니 과연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젊은 날의 긴 시간을 그리 보냈던 사람이 나라는 여자와 남은 생을 공유하려 하니 얼마나 양보한단 느낌이 들겠는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는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아끼던 책들에 먼지가 쌓여가도 오늘의 밥 짓기를 내일로 미룰 수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시시때때로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가만 생각해보면 서로 져준다는 느낌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형국이라니 각자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사랑에서였든, 연민에서였든 그만큼 서로에게 양보하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태릉인도 아니면서 삶의 낙을 운동으로 알고 살았던 남편과 작가도 아니면서 책보다 나은 동반자가 없다고 자신하던 나. 두 사람이 만나 살다보니 테니스 실력은 예전만 못해지고 책 읽는 속도 또한 과거에 한참 못 미치지만 지난 일 년 동안 우리가 헛살지는 않았으려니 한다. 서로 양보한다는 착각 속에서 혼자일 때는 결코 배울 수 없었고, 배우기 싫으면 안 배워도 그만이었던, 공존의 룰 같은 것을 익혀왔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어서 컴퓨터를 끄고 양보하는 마음으로 저녁을 준비해야 하고. 퇴근한 그는 양보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먹은 뒤 설거지를 해야 하고. 트레이닝복 사줬으니 트로피 타오라고 잔소리를 하게 될 것이고. 그는 파트너만 잘하면 된다고 큰소리를 칠 것이고. 결국 트레이닝복에 먼지만 잔뜩 묻혀서 기념품 수건 한 장 달랑 들고 와도 양보하는 마음으로 이해해야 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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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9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11-0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깐따삐야 2009-11-09 09:46   좋아요 0 | URL
^^;

2009-11-07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9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벌써 11월.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남편 출근하는데 도톰한 재킷을 챙겨주고 나는 집에서 쉬고 있다. 병가 기간이 끝나 일주일간 다시 학교에 나갔지만 곧바로 산전휴직을 다시 받았다. 아이들이 기침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 그냥 다 접고 쉬어야겠단 결심을 했다. 예방접종도 믿을 수 없고 타미플루도 미심쩍은 고위험군, 의심 많은 임산부인지라 두문불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뉴스를 보니 오늘부터 신종플루가 ‘심각’ 단계로 격상되었단다. 각급 학교장에게 떠밀던 휴교 조치도 적극적으로 고려되고 있는가 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반 학생 하나도 확진 판정을 받아서 내가 있는 동안 얼굴을 못 봤다. 다른 반은 확진 및 의심 환자가 더욱 많을뿐더러 선생님 한 분도 확진 판정을 받아 병가를 내셨다. 얼마 전, 출산한 선생님도 내게 전화를 주셨다. 본인도 아이 때문에 무척 조심하고 있다면서 산전휴직을 당겨썼다고 하니 정말 잘했다고 하신다. 날씨는 점점 추워질 텐데 이 공포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걱정이다.

  나의 건강과 안위에 이렇게 신경써가며 살아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주변에 송구하고,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또 당연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 돌아왔을 때, 두 분의 선생님이 유산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를 많이 기다리셨던 분들이라 그만큼 안타까움이 컸다. 입덧 때문에 뱃속의 아이를 미워하고 무거워지는 몸 때문에 종종 신경질을 부리긴 했지만 그래도 잘 쉬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의 인연은 하늘의 뜻이지만 아이를 지키는 것도 엄마의 의무라는 결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육아 책이나 인터넷을 보니 태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특별히 시작한 건 없다. 십자수나 뜨개질을 권하기도 하던데 그냥 걸레질 열심히 하는 게 더 쉽고, 클래식을 들으면 정서안정에 좋다는데 내가 그다지 당기지를 않으니 잘 안 듣게 된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일도 어쩐지 낯간지러워서 평소처럼 소설책 등등을 읽고 있다.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이 있다면 먹거리. 잃었던 입맛이 차츰 돌아오면서 한식 위주의 식사를 하고 있다. 입덧이 심할 때는 밥 익는 냄새만 나도 메스꺼웠는데 요즘은 밥이 가장 맛있다. 특히 동치미나 냉이나물처럼 상큼하거나 향긋한 반찬들이 구미를 당긴다. 나중에 세상에 나와서도 우리 음식을 고루 즐길 줄 아는 아이였음 좋겠다.

  하긴 지금 같아선 아무런 욕심도 안 생긴다. 학교에 돌아가 아이들을 보니 모두가 소중하다. 눈이 두 개, 코가 하나, 손가락, 발가락이 멀쩡한 것도 신기하고 다행스럽다. 아이의 행동은 미워해도 아이는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이해가 된다. 아이들을 저만큼 아무 탈 없이 키워낸 부모님들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입으로는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며 잔소리를 하지만 감기 안 걸리고 건강하게 학교에 나오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그 외 나머지는 다 욕심이란 생각도 든다. 딱 이만큼의 마음으로 살면 참 행복하련만 부모 욕심이 어디 그런가. 나 역시 장담할 수 없지만 지금은, 딱 그만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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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1-02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상적인 임신과 출산~ 최고의 건강 유지 비결이랍니다.
제가 에너지 여사로 사는 것도 삼남매의 정상적인 임신과 출산 덕이라 생각해요.
잘 먹고 욕심내지 않는 평상심이 최고의 태교겠지요.^^

깐따삐야 2009-11-04 10:2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순오기님처럼 건강하고 씩씩한 엄마가 되고 싶어요. 아이는 어떤 태교를 하든 결국 저와 제 남편을 닮았으려니 합니다.^^

레와 2009-11-02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같이 건강 조심해요! ^^

깐따삐야 2009-11-04 10:21   좋아요 0 | URL
넵! 레와님도 감기 조심.^^

무스탕 2009-11-02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로 임산부들은 특히나 몸 사려야해요. 이렇게 뒤숭숭한 시국에 말이에요..
건강 잘 살피세요~

깐따삐야 2009-11-04 10:2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무스탕님도 건강 유의하세요~

비로그인 2009-11-0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 달을 품어 밖으로 끄집어내서, 희노애락을 지켜보는 존재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습니까. 사랑과 믿음은 만들어지고 채워지는 것 같아요. 나와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에 놀라는 순간이 많아요.

깐따삐야 2009-11-04 10:30   좋아요 0 | URL
지금은 그저 건강하고 평범한 아기였으면, 하고 바랄 뿐이에요. 모든 아이들이 엄마의 이런 바람 속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겸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