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테니스 대회에 나간단다. 아이들 수능이 끝나는 다음 주로 일정이 잡혔다. 남편 후배 말에 따르면 ‘저 형이 운동을 하다가 죽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남편은 한때 운동에 미쳐 있었단다. 실제로 결혼을 해보니 입고 나설만한 외출복은 별로 없는데 고가의 트레이닝복은 숱했다. 테니스만 치는 줄 알았는데 수영복에 수영 모자도 있었다. 스포츠양말은 왜 이렇게 많은 거냐고 했더니 옷이나 용품을 사면 거저 주는 것이라 했다. 나도 그가 얼마나 테니스를 좋아하는 지는 사귈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결혼 전부터 내게 전문적인 레슨을 권유했었다. 지난 여름에는 여성용 테니스 라켓을 사갖고 와서 나한테 구박을 듣기도 했다. 7만원 하는 배드민턴 라켓도 큰마음 먹고 구입했던 나로서는 그 놀라운 가격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운동인데 연애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눈치 보랴, 고3 담임하랴, 마음껏 즐기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운동을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자기 딴엔 나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이 곧 나를 위한 일이라고 착각했는가 보다. 그런 귀찮은 오해는 그만두라고, 아이들 수능 끝나면 여유가 생길 테니 시간 내서 운동도 하고 그러라고 했더니만 무척 좋아한다. 말을 그리 해놓고 옷장을 둘러보니 트레이닝복이 거의 낡거나 오래된 것들뿐이라 한 벌 사주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브랜드는 주로 테니스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브랜드인데 얼마 전까지 없던 매장이 우리 동네에도 생겼다. 야자 감독이 없는 저녁, 남편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매장도 작고 종류도 많지 않은 편이지만 남편 말로는 여기 옷이 질도 좋고 편하단다. 남편이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주인아주머니가 테니스를 잘 치시나 봐요, 하신다. 대회 나가면 트로피는커녕 휴지 두 통 타오는 게 전부인데 이번에도 휴지 타오라고 운동복까지 새로 사 입힌다고 했더니 막 웃으신다. 아주머니 남편도 대회만 나가면 무조건 파트너가 잘못해서 등수 안에 못 들었다고 불평하신다고.

  카탈로그에서 본 것만큼 간지 좔좔은 아니었지만 입고 나온 모습은 깔끔하니 괜찮았다. 세일기간이 아니어서 생각보다 비싸긴 했지만 일단 마음에 드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솔솔. 트럭에서 오징어, 쥐포 등등 건어물을 팔고 있었다. 예전에 추운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쥐포 사먹던 생각이 나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먹고 싶다고 하자 남편이 쥐포를 한 묶음 샀다. 장사하는 청년은 프라이팬에 구워 드시라고 했지만 나는 그냥 가스 불에 직접 구워 먹는 걸 좋아한다. 옆에서 대리만족이라도 해야겠다며 쥐포를 굽고 냉장고에 있던 병맥주를 꺼냈다. 맥주는 남편이 마시고 나는 쥐포를 우유와 함께 먹었다. 맥주가 그렇게 시원해 보일 수가 없었지만 쥐포와 우유도 궁합이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듯.

  남편은 새 옷을 고마워하면서도 자기는 원래 옷 여러 벌 걸어놓고 입는 편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망설이지 말고 예전에 입던 것은 버리라고 했다. 트레이닝복은 비교적 유행을 덜 타지만 이제는 색도 바라고 담가 놓았다 손빨래를 해도 제 빛이 안 난다. 혼자 사는 남자의 관리 소홀도 한몫 했을 것이다. 남편과 사는 동안, 가끔 그가 혼자 살던 풍경이 상상이 될 때가 있다. 퇴근 후 테니스를 치고 땀에 흠뻑 젖어 불 꺼진 집으로 돌아와 세탁기를 돌리며 저녁을 먹는 남자. 냉장고를 뒤져서 있는 거 다 넣고 부대찌개를 해먹거나 있는 거 다 넣고 볶음밥을 해먹거나, 이도저도 귀찮으면 파도 계란도 없이 라면을 끓이는. 특별한 약속이 없는 밤에는 맥주 한 캔 하면서 테니스나 축구를 보다 잠들었겠지. 문득문득 외로움을 동반했을 너무 많은 자유.

  그렇다 해도 나는 종종 결혼 전의 내 모습, 싱글인 친구들이 부러운데 남편은 어떠한가. 남편도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던 날,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흘러가더라고 말해서 나한테 맞을 뻔 했다. 그래도 그는 지금이 더 좋단다. 좋기는 한데 자기가 왠지 지고 사는 느낌이 든다고 말해서 나한테 맞았다. 예전에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맞지요, 라고 점잖게 말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억울해진 거냐고, 그리고 당신이 지는 게 대체 뭐가 있냐고 난리를 쳤더니 생각해보면 내 말이 맞는단다. 내가 내 뜻대로 못하고 사는 것도 없는데 왜 져주는 느낌이 들지? 이러고 앉았다. 나는 그런 느낌이 들게 하다니 내가 당신을 잘 못 다루는 모양이라고 자학했다. 비싼 옷 사 입히고 나서 고작 그런 말이나 듣다니. 부들부들.

  겉으로는 그렇듯 고래고래 질러댔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을 전혀 모르지는 않는다. 가깝게 지내던 후배들 말로는 별명이 대마왕이었다니 과연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젊은 날의 긴 시간을 그리 보냈던 사람이 나라는 여자와 남은 생을 공유하려 하니 얼마나 양보한단 느낌이 들겠는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는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아끼던 책들에 먼지가 쌓여가도 오늘의 밥 짓기를 내일로 미룰 수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시시때때로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가만 생각해보면 서로 져준다는 느낌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형국이라니 각자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사랑에서였든, 연민에서였든 그만큼 서로에게 양보하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태릉인도 아니면서 삶의 낙을 운동으로 알고 살았던 남편과 작가도 아니면서 책보다 나은 동반자가 없다고 자신하던 나. 두 사람이 만나 살다보니 테니스 실력은 예전만 못해지고 책 읽는 속도 또한 과거에 한참 못 미치지만 지난 일 년 동안 우리가 헛살지는 않았으려니 한다. 서로 양보한다는 착각 속에서 혼자일 때는 결코 배울 수 없었고, 배우기 싫으면 안 배워도 그만이었던, 공존의 룰 같은 것을 익혀왔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어서 컴퓨터를 끄고 양보하는 마음으로 저녁을 준비해야 하고. 퇴근한 그는 양보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먹은 뒤 설거지를 해야 하고. 트레이닝복 사줬으니 트로피 타오라고 잔소리를 하게 될 것이고. 그는 파트너만 잘하면 된다고 큰소리를 칠 것이고. 결국 트레이닝복에 먼지만 잔뜩 묻혀서 기념품 수건 한 장 달랑 들고 와도 양보하는 마음으로 이해해야 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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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17: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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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9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11-0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깐따삐야 2009-11-09 09:46   좋아요 0 | URL
^^;

2009-11-07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9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