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 아침 떡국을 끓일 고기를 사기 위해 엄마와 마트에 갔었다. 세상 모르고 집구석에만 있다가 나가보니 딴 세상마냥 정말 춥더라. 정처없이 싸댕기지 말고 후딱후딱 집으로 들어가라는 하늘의 명령이냐. 우편함엔 연하장 분위기로 제작된 청첩장이 와 있었고 왜 아니겠는가. 엄마의 구박 리플레이. 다들 가는구만. 넌 왜 못 가고 난리냐. 못 가다뉘. 안 가는 거지. 자존심마저 버리면 더 궁색해질까봐 아둥바둥. 근데 못 가는 것도 당연하긴 해. 내 딸이지만 너 같은 애를 누가 데려다 어따 쓴다냐. 하긴 그래. 하핫! 3초도 안 되어서 인정해버리고 마는 허약한 자존심. 이제는 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어서, 마침내 결혼한다는 게 매우 당연한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다른 일들은 계획을 세우고, 최선을 다하며, 그에 걸맞는 노력을 하면 가시적인 성과를 이룰 수도 있지만 사람과 관련된 일들은 성격이 좀 다르지 않던가. 나에겐 하여간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곤란한 문제다. 새해를 앞두고 있다보니 마음가짐은 새로워지는데 영 자신은 없단 말이지. 어쩌면 완벽하게 계산적인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데 얼마나 속 편할까 싶다. 그치만 성격이 팔자 만든다고 속 편하게끔 타고나야 속도 편한거다. 내 경우엔 또 다르겠지. 내키지 않는 자리에 가봤자 여기가 아닌가 보이- 하면서 얼마나 또 투덜대고 방황하겠냐구. 암튼 참말로 어렵다. 어떨 땐 요런 생각 자체가 귀찮다요. 그래도 내년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다, 고 말해보는 뻔뻔함이란.
#
수료만 하지 말고 기왕이면 학위를 받아 졸업해야겠다. 1월 중에 교수님을 한번 찾아뵙기로 했는데 빈 손으로 갈 수야 없지 않는가. 작품도 좀더 읽어보고 얼개라도 대강 정리해서 가야지. 순수한 마음으로 읽지 않고 자꾸만 뭔가를 발굴하겠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대하다보니 오히려 더 까막눈이 되어가는 것 같다. 영리한 활자들이 내 사심을 알아챈 것처럼 행간 사이로 미로게임 하면서 도망치는 듯한 느낌. 내가 선택한 이상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자세로 임하고는 있지만 그 의무감에 짓눌려 본래의 즐거움이 희석된달까. 너무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몰아세우지 말고 한발짝 떨어져서 생각해봐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시간 지나면 다 써지게 되어 있다는 선배들의 조언처럼 뭐 어떻게든 글이 되어 나오지 않겠나 싶다가도, 남이 했던 좋은 말 인용만 하다가 일년을 보낼 것 같아 조금 불안하기도 하다. 고작 그러려고 여기에 온 건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지난 일년을 성실하게 보내지 못했다는 반증인지도 모른다. 시간 많을 때, 강의 들으면서 머리 팽팽 돌아갈 때, 그냥 접지 말고 좀더 끈기있게 매달렸어야 하는데. 이궁... 당장 1월부터라도 잘하자.
#
근래들어 축시를 좀 써보겠다고 책장을 뒤적이다 보니 참 다양하게도 읽었고 많이도 모았더라는. 지금은 더 이상 그 시집이나 책들을 뒤적여보지 않게 되었고 예전만큼 책도 다량으로 구입하지 않는다. 관심은 있는데 열정이 식었다. 좋아하긴 하지만 열렬히는 아니고. 그래도 예년과 다름없이 새해엔 좋은 책을 더 많이 읽자고 다짐한다. 좀더 어릴 땐 전작주의라고, 한 작가의 책을 모조리 섭렵하는 데 재미를 붙인 적도 많았건만 요즘은 독서습관 자체가 느슨해지고 얄팍해졌다. '고호의 불꽃 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 될 것이 없다 말한다' 신해철 노래 중에 요런 말이 나오는데 현실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거야 예전이라고 안 그랬나? 내가 변했다면 변한거지. 그 아름다움을 몰라서가 아니다. 잠시 잊어버린 거다. 어쩌다 보이- 그래서 사랑도 노력이라고들 말하나 보다. 열정이 빠져나간 자리, 노력에 의해 다시 차오르는 무엇. 그 무엇이야말로 꾸준한 애정을 가능케 하는 진짜배기 같은 거겠지. 사람과 책과 나의 관계도 그럴 수 있었음 좋겠다. 항상 겸허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읽고 또 읽자.
#
새해에 꼭 버리고 싶은 습관 하나로 정리벽을 꼽는다. 물건 정리라든가, 갖가지 약속 및 계획에 대해서 좀 강박적인 면이 있는데 나야 워낙에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나서 별로 힘든 줄을 모르지만,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피곤하게 한다. 다른 사람들이 두루뭉술 흘리는 말에 대해 민감한 편이고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는 갓길 없는 성품이 내 인생에선 완전히 마이너스다. 오죽하면 아빠가 너 계속 그런 식이면 너랑 같이 살 남자 없다, 라고까지 말씀하셨겠는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있어야 할 그 자리, 그 시간 속에 없으면 마음부터 초조해지고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공적인 일을 위한 계획이나 약속이 아니라 여러가지 변수가 작용하는 사적인 영역이라면, 내 마음의 넓이부터 여유롭게 넓혀가야지 싶다. 실은 오래 전부터 심각하게 고민해왔던 문제인데 나이를 먹어가며 심성이 굳어진 탓인지. 잘 안 바뀌더라는. 그냥 어른들 말씀대로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구나, 라고 마음 편히 생각해야 할텐데 말이다. 오늘도 마트 다녀온 뒤 포인트카드와 현금영수증카드가 엄마 지갑 속에 제대로 들어있는지 재차 확인하는 등 또 쓰잘데기없이 예민하게 굴었다. 싱크대 수납장의 그릇 종류도 엄마보다 내가 더 잘 안다면 말 다했지. 참 피곤한 인간이다. 정말.
#
가을의 끄트머리에서 조금 힘들었던 나에게 이 공간이 웃음을 찾아주었다. 알라딘과 친해지기까지 2년이라는 긴 시간을 소요했다니. 소소한 해프닝들과 댓글놀음을 통해서 아,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였구나, 하는 당연한 깨달음. 처음엔 온라인 공간에 대한 편견, 나만의 비밀스런 아지트였으면 하는 바람이 아주 없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문서로 저장, 혼자 열람하지 않고 이처럼 열린 공간에 올린다는 행위 자체가 내심 소통을 원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의 대화가 나와 그들 사이의 대화로 확장된 느낌. 본래 사람 관리(?)에 소홀하고 무심한 탓에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새해에도 소통은 계속 되리라. 나보다 더 바쁘고 힘든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예쁜 복주머니가 그려진 이모티콘을 보내준 지인들이 있었고, 매년 새해덕담을 먼저 받기만 하는 처지라서 그 점 미안했다. 일단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잘 챙겨야겠다는, 별로 새삼스럽지도 못한 다짐을 또 하고 있다. 아빠 이해해 드리기, 엄마랑 싸우지 말기, 오빠한테 순종하기, 올케한테 상냥하기. (가정 내 평화를 위하여 이 한몸 굽신굽신!) 항상 12월 31일이나 1월 1일과 같은 마음가짐으로만 산다면 일년 365일이 36.5도C련만.
코앞의 무자년입니다.
복 많이 받으시고 소원 성취 하세요! 찍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