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말 그대로 드라마키드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엔 지금처럼 영화관이 보편화되어 있지도 않았고 자라난 곳도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거든요. 요즘이야 케이블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를 골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시절의 저는 다섯 시 즈음, 화면조정 시간을 기다렸다가 '독수리 오형제'나 '베르사유의 장미'부터 시청하곤 했던, 시골의 심심한 아이였어요. '전설의 고향' 하는 날에는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던 겁쟁이기도 했지요. 이제 귀신 안 나와, 해서 빠꼼히 얼굴 내밀면 바로 고 타이밍에 귀신은 저와 눈이 딱 마주쳐 낄낄대더라는. (하나뿐인 저희 오라버니는 애초부터 그런 존재였다는.-_-)
친구도, 놀거리도 부족했던 시골에서 텔레비전은 친근한 벗이었고 그 때 그 시절의 드라마들 속에선 요즘의 가볍디 가벼운 드라마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삶의 진면모를 엿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문득문득 '순심이', '수사반장' 같은 촌스러운 드라마들이 그리울 때가 있답니다. 마침 태그 이벤트 덕분에 그 중 몇 편을 상기하게 되었고, 글을 쓰는 동안 지난날의 제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따듯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 무수리의 정체성 : "아들과 딸"
살짝 과장을 보태자면, 이건 저희 집 이야기였습니다. 후남이의 설움과 종말이의 히스테리, 공감백배 드라마였지요. 남들은 모태신앙이라고 하는데 저는 모태무수리였던 셈이죠. 그래도 남성우월주의 및 가부장제의 화신인 오라버니에게 치여서 막 자란 탓에 아무거나 잘 먹구, 아무데서나 잘 자구, 아무 남자나 좋아하구... (쿨럭;;) 유익한 점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남다른 선견지명으로, 저를 뒤꼍의 잡초처럼 대책없이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만약 요즘에 이러한 소재의 드라마가 나온다면 드라마보다 시청자 게시판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 사춘기의 비망록 : "케빈은 열두살"
땡그란 눈, 부드러운 곱슬머리, 케빈을 기억하시나요? 시청 시각은 아마 오후 여섯 시 무렵으로 기억되는데요. 저녁을 먹을 때 즈음, 평범한 케빈의 일상과 고민을 지켜보며 므흣해지곤 했지요. 저는 꽤나 조숙한 아이였고 사춘기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천재지변 마냥 엄청난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일생일대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일어나리라 고대했죠. 하지만 저의 사춘기는 대체 언제였던 것일까,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세상의 모든 소년소녀는 특별해지길 원하지만 그 바람조차 지극히 평범한, 사춘기에 국경 없다는 진리를 여실히 보여주며 공감을 얻었던, 귀엽고 산뜻했던 드라마라고 생각해요. 개학날 아침, 처음 안경을 벗은 위니의 모습을 보고 뿅~ 마음을 뺏겨버린 케빈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큰 눈망울, 긴 생머리 소녀에 대한 로망 역시 국경이 없나 봅니다. 프란체스카의 인기도 그 이유였을까요.-_-
◆ 이상형의 발견 : "TV 손자병법"
서인석 아저씨 요즘 뭐하시나 모르겠어요. (혹시 아시는 분?) 만년과장 오과장(오현경 분)을 주축으로 한, 어느 회사의 자제과 사무실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요. '유비'로 출연했던 서인석 아저씨는 당시 저의 이상형이었답니다. 원래는 그레고리 펙을 닮은 남궁원 아저씨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박하사탕 같은 서인석 아저씨의 자상함에 홀딱 반해버렸죠. 아마도 사람은 자주 봐야 정드나 봐요. 영화보단 드라마가 더 자주하니깐 빈도수로 어필했다는. 저는 소설 삼국지보다 TV 손자병법을 먼저 보았고, 나중에 소설을 읽을 땐 탤런트들의 특징을 오버랩하게 됐지요. 조조로 나왔던 장용 아저씨, 뺀질거리고 영악스러운 것이 아주 딱이었습니다 그냥. 요즘 젊은 탤런트에게서는 그만한 연기력과 집중력을 볼 수 없어서 참 아쉬워요. 그나저나 장비로 나와서 열연을 펼치셨던 김희라 아저씨가 편찮으시다니 제 마음이 다 아픕니다. 제가 서인석 아저씨 다음으로 좋아했던 분이었는데 말이죠.
◆ 미녀는 혐오식품을 좋아해 : "V"
몸에 착 달라붙는 퓨처리즘 패션에 꿀떡꿀떡 들쥐를 잘도 집어삼키던 다이아나 기억하시죠? 처음 밝히는 건데, 초등학교 때 저의 별명이었답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책걸상을 집어던지며 저와 사투를 벌이던 한 머스마가 그러더군요. "넌 쥐도 먹게 생겼어." "...... 너도 브이 보냐?"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이야기는 언제 봐도 흥미진진해요. 그리고 저는 소머즈도 예뻤지만 성깔 있는 다이아나가 더 미인이라고 생각해요.
◆ 힘맨이냐 히메나냐 : "천사들의 합창"
팔등신의 착한 몸매에 길게 말아올린 속눈썹, 천사처럼 환하게 미소 짓던 히메나 선생님은 당시 모든 남학생들의 우상이었을 겁니다. 저야 물론 시도때도 없이 "넘흐 낭만쩍이야~"를 외치던 식탐공주 라우라와 유사했지만 언젠가는 히메나 선생님처럼 상냥하고 아름다운 선생님이 될거라는 꿈도 못 꾸냐(요). 그나저나 세월이 흘러흘러 선생님이 되긴 되었는데 아이쿠, 히메나가 아니라 힘맨이네요.-_-
◆ 나 돌아갈래 : "전원일기"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드라마죠. 산 69-1번지에서 출생한 저는 외딴집에 사는 산골소녀였답니다. 오죽하면 엄마가 저를 두고 외출하실 때, "엄마 없을 때 누가 오면 그냥 집에 아무도 없는 척 해라." 라고 하셨겠어요. 엄마는 일곱살이 되어 이웃 아이들도 모두 유치원에 가버리고 심심해하던 저에게 단호히 말씀하셨죠. "유치원은 덜 떨어진 애들이 학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공부하러 가는 데야. 넌 똑똑하니깐 그런 데 안가도 돼." 라면서 책만 잔뜩 빌려다주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새농민부터 시작해서 노벨문학상전집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을 섭렵하게 되었고, 농번기가 끝나면 저희 윗방으로 모여드는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를 간식 삼아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제가 어딘가 언발란스하고 그로테스크하다면, 그건 바로 어린시절의 대담한 학습환경 때문일 거에요. 저는 육두문자를 써가며 남편과 시댁 식구들을 욕해대는 아줌마들 틈에 끼어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었으니까요.
◆ 불후의 키스 : "여명의 눈동자"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여옥(채시라 분)과 대치(최재성 분)가 나눴던 절절한 키스씬. 아, 지금 생각해봐도 쵝오입니다. 이데올로기니 그런 어려운 말은 잘 몰랐지만 어린 제 가슴에 오롯이 새겨진 아름다운 장면이었는데 우씨, 나중에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보니 이게 웬일. 날마다 여명의 눈동자더군요. 11시 점오시간만 되면 기숙사 철문이 닫히면서 곧잘 연출되는 염장씬에 눈 버리고 맘 상하고. 안습 패로디 과부하 현상이었죠. 그리고 이건 아주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잘 안 되는 드라마도 채시라가 등장하면 잘 되는 것 같아요. 초콜릿 광고 속의 앳된 그녀는 수줍은 아기사슴 같았는데 해신의 '자미부인'을 보면서 과연 여우로구나~ 했답니다. 스크린의 전도연, 브라운관의 채시라. 제가 손꼽는 쵝오의 여우들입니다.
◆ 떡케익 같은 그녀 : "내 이름은 김삼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으로 비비안 리 이외의 다른 여배우를 떠올릴 수 없듯이, 김선아는 곧 김삼순이었습니다. 그녀는 투실투실한 팔뚝으로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밀가루 반죽 치댔던 그 팔뚝으로 현빈의 등짝을 쩍쩍 후려칩니다. 이제 우리나라 드라마들도 그처럼 진보된(?) 스킨십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구요. 병쭈가리 려원으로부터 현빈을 쟁취해나가는 그 과정이 뭇 신데렐라 드라마들에 비하여 상당히 솔직하면서도 현실적이었기에 삼순이 신드롬이 가능했던 것이겠죠. 가슴을 꽝꽝 때리며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여...라며 눈물짓던 그녀는 곧 저의 모습이자, 또 다른 삼순이들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대관절, 이제는 알아서 굳어가는 우리의 심장을 따듯하게 녹여줄 삼식이는 워디 있다니. 삼식아, 삼식이 이눔아 워딨니. (일용엄니 버전)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데, 위의 오래된 드라마들 속에 저의 분신과 로망들이 숨은그림처럼 숨어 있군요. 혼자 야밤에 빙글빙글 웃음이 납니다.
Why this farce, day after day? (왜 이런 소극들이 나날이 반복되는가?) 오늘 희곡 시간에 읽었던 베케트의 Endgame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연극 속의 주인공들조차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 식상한 소극들에 불만이 있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난해하기 짝이 없는 희곡의 마지막 대사가 압권입니다. You... remain. 삶은 여전히 우리 몫으로 남아있고, 무대 위에 서 있는 우리는 내일의 드라마를 위해 또 다시 열심히 웃고, 울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고로, 인생의 명배우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