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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마른 등을 만질 때 -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엄마 그리고 나
양정훈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3월
평점 :
#오늘의책 #하리뷰 #도서제공
아픔에 아픔을 잇고, 슬픔에 슬픔을 포개는 글
엄마의 암 투병, 그 마지막 3년을 기록한 아들의 이야기
#엄마의마른등을만질때
#양정훈
#수오서재
2024년의 시작은 건강이 최고라는 너무나 진부하고 당연한 말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살아오면서 큰 병뿐만 아니라 잔병치레도 거의 없었던 나는 올해 건강한 몸을 잃었다. 아프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함부로 쉽게 얻어지는 것 또한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작가의 엄마는 유방암에 이어 자궁암 진단을 받았고 그 곁을 지키던 아들은 엄마를 기록하기로 한다. 암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겨낸 기적같은 결말을 바라며 그렇게 글을 썼다. 책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읽기가 쉽지 않았다. 작가의 문장은 아름다웠고 엄마에 대한 사랑이 애틋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어서 그토록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견디고 병원을 전전했지만 결국 엄마는 떠났다. 하필이면 희소암이었고 육종암이었으며 코로나시기였다. 소중한 가족의 투병은 일상을 무너뜨린다. 잠깐의 입원이 아닌 반복적인 입원과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마음을 다잡고 견뎌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엄마의 투병 이후에야 엄마의 삶이 보였다는 작가의 말이 아프다. 우리는 곁에 있을 때 그것을 모르고 뒤늦게야 후회한다. 최선을 선택이었을까, 후회하고 모든 것 자신의 탓인 것만 같은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무심하고 불친절한 병원의 태도에 상처받으며 원망하기도 한다. 희망이 보일 때의 생기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무심한 의사의 말에 순식간에 무너진다. 우리를 살게하는 것은 작은 손길, 작은 희망일텐데.
담담하지만 슬픔이 짙게 묻어난 글들이 아파서 자주 멈춰야 했다. 결국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사랑을 아끼지 말자. 곁에 있을 때의 소중함을 잊지 말자.
P. 12 사랑하는 이를 결국 떠나보낸 사람들이 일관되게 말하는 게 있다. 우리는 무지하고 사랑할 시간은 많지 않다는 것. 더 귀한 것과 덜 의미 있는 걸 언제나 헷갈렸다고. 한정 없이 사랑하는 이의 등을 쓰다듬을 시간은, 눈을 들여다보고 같이 웃고 울 시간은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았더라고.
한번 부고를 전한 사람들은 다시 글을 올리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그리움에 허덕이거나 구멍 같은 시간을 헤매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을 보내고 나서야 마침내 배운 것들, 지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하여 돌아간 것이라고 믿는다.
P. 66 나는 엄마의 마른 허벅지와 마른 발과 거기 켜켜이 얹힌 주름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복숭아 씨앗 같은 팔꿈치가 드러나고, 겨드랑이 아래로 길게 베인 칼자국과 깊은 주름이 같이 흘렀다. 뼈 모양을 훤히 드러낸 주름이 한 사람을 채 덮을 수 없는 홑이불 같았다.
엄하고 단단하던 사람은 어떻게 이 작고 무른 노인이 되었는가
P. 87 “같이 아프면 오래 못 가.”
엄마의 맞은편 침대에 있던, 벌써 네 번이나 암이 재발했다는 환자의 보호자가 들려줬던 말에 반박하려다 실패하고 말았다. 한 사람의 통증이 폭풍처럼 몰려올 때. 그의 슬픔이 폭설로 쏟아질 때. 같이 울고 같이 다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그때 그 보호자는 얼마나 따라 울다 알았을까.
P. 149 다른 듯 닮은 슬픔. 당신의 저림을 알 것도 같아서 우리는 함부로 위로하지 않았다. 서로에 반사되는 고통이 있었다. 통증은 아무래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작아지지도 않는다. 단지 아픔과 아픔을 이을 뿐. 슬픔에 슬픔을 포갤 뿐. 모두 다 아픈 것을 알고는 마음의 모서리 하나가 몽톡해졌다. 눈 덮인 밤의 숲을 서로 발자국을 겹치며 나란히 걷는 기분이었다.
P. 183 엄마는 자꾸 머리를 빗어보며 머리카락 빠지는 개수를 확인했다. 그러며 여러 번 말했다. 아프지 말고 딱 10년만 더 살 수 있다면 바랄 게 없겠어. 이런 말도 했다. 언젠가 죽는다면 정말 고통 없이 죽었으면 좋겠어. 또 이리 말하기도 했다. 너무 억울해서 못 죽겠어. 견디기 힘든 통증과 신음, 연민과 슬픔, 절망과 분노가 끊임없이 다녀가는 밤이었다.
P. 228 예전에도 몇 번 이런 적이 있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는 꿈. 꿈마다 매번 마지막 몇 걸음을 뗄 수 없어서 엄마에게 닿지 못했다. 그럴 때면 전화해서 크게 소리 내 울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내가 우는 소리만으로 당신을 잃는 꿈 때문인 줄 엄마는 신기하게 다 알았다.
튼튼해야지. 무너지지 말아야지. 언젠가 그날이 오면 어깨를 펴야지. 엄마를 잘 보내야지. 꿈에라도 그래야지. 몇 번을 다짐해도, 아무리 굳게 마음먹어도 나는 매번 실패하고 말았다.
P. 236 나는 기억을 헤집어 우리가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순간들을 끄집어낸다. 암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번져 수술을 다 하지 못하고 배를 닫아야 했던 순간을, 희소암을 알게 되던 순간을, 재발을 진단받던 순간을 떠올렸다. 매번 위기였다. 매번 고비였다. 그래도 엄마는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었으니까. 또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힘든 일이래도 당신이라면 할 수 있다.
P. 306 나처럼 어디에서 당신도 울었고 당신처럼 어디에서 나도 울지 못했다고. 우리가 그이를 너무 사랑하고 너무 사랑하지 못한 것이 꼭 같다고. 그것으로 조금 덜 외로우면 바랄 게 없겠다. 이 말도 해주고 싶다. 사람을 잃는 것 못지않게 슬픈 일은 기억을 잃는 것이다. 그를 우리가 오래 아주 오래 기억할 테니 전부 말고 부디 절반만 슬퍼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