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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레시피 - 39 delicious stories & living recipes
황경신 지음, 스노우캣 그림 / 모요사 / 2011년 5월
평점 :
사실 사춘기소년은 커녕 풋풋한 대학생도 아닌, 나이도 제법 먹은 후줄근한 남정네가 황경신의 광팬이라고 말하는건 조금 민망한 일이다. 마치 평소 엄숙한 분위기의 머리 벗겨진 회사의 중년 부장님이 회식자리에서 "사실 나의 취미는 헬로우키티용품 수집하는 거랍니다"라고 팀원들한테 수.줍.게. 고백하는것 처럼.
그만큼 그녀의 글들은 심하게 여성취향이고 감성적이고 말랑말랑하다. 하지만 그녀의 글들이 재밌는걸 어떡해. 아무튼 지금까지 난 그녀의 책을 전부 읽어왔으며(심지어 동화책이나 인터뷰집까지) 당연히 지금도 모두 가지고있다.
솔직히 가끔 약간은 실망스런 책들도 있었지만 책 구석구석에서 툭툭 마주치는 황경신 특유의 문장들이 좋아서 책 나올때 마다 반갑고 늘 사게된다. 그리고 읽던 책이 있어도 잠시 접고 그녀의 책부터 읽게 된다.
설마 이책의 제목 때문에 요리책으로 오해하는 분들은 안계시겠지? (물론 요리 만드는 황경신만의 몇몇 비법(?)들이 살짝 공개되기는 한다).
대부분 역시 황경신이야,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재미있고 따뜻한 요리(아니 요리는 너무 거창하고 그냥 먹을 거리라는 표현이 더 낫겠다)에 얽힌 추억담들이다.
MT가서 며칠간 폭우에 갇혀 돈과 음식은 다 떨어졌을때 해먹은 소금과 밀가루만 들어간 수제비 얘기를 읽으며 나도 대학시절 MT 추억이 저절로 떠올랐다.
"...... 밀가루 반죽을 조금씩 뜯어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수제비. 도대체 무슨 맛이 있었겠느냐마는 나는 지금도 그 뜨거운 국물 맛과 부드러운 밀가루의 맛을 기억해낼 수있다. 그것은 아주아주 슬픈 날, 눈물을 펑펑 흘리고 난 후, 누군가가 잡아준 따뜻한 손처럼 다정했다. 근본적으로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우리는 폭신한 이불에 싸인 아기처럼 순해져서, 그날 밤 어느 때보다 특별하고 소중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물과 밀가루와 소금으로 만든 그 초라한 수제비 속에는, 비바람 치는 날 동굴속에 웅크리고 모여 앉아 서로의 털을 골라주는 아기곰들의 천진한 우정 같은 것이 녹아 있었다는 생각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떠올랐다." - 25쪽
기숙사시절 밤마다 끓여먹었다는 라면얘기는 갑자기 라면생각이 나게했으며, 외할머니와 전복죽 이야기 읽다가는 잠시 코끝이 찡하기도 했다. 하여간 이런류의 음식에 얽힌 에피소드들이 스노우캣의 그림과 잘 버무려져 있다.
아마 황경신이 알라디너였다면, 그래서 그녀의 글들이 종종 알라딘서재에 올라왔다면, 그때마다 추천과 댓글이 수십개씩은 늘 달렸을게다.
책에서 고매한 문학성이나 엄청 대단한걸 추구하는 분들껜 비추고, 가볍게 읽으면서 잠시 마음이 따뜻해지고 싶은, 특히 먹는것 밝히는 분들껜 강추다.
갑자기 나도 학교 다닐때 자주 이용하던, 종합관 옆 '평화의 집'(나중엔 외국어학당에 있다가 공학관으로 이사간)에서 팔던 세계 최고의 순두부찌개가 몹시도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