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혀
이명원 지음 / 새움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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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패기에 넘치는 젊은 비평가 이명원이 한국문학비평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인 김현, 김윤식, 백낙청, 임화에 오르고자 시도한다. 그 열정과 패기 넘치는 시도 하나만으로 나는 가슴 벅차다. 네 명의 비평가들을 다룬 네 편의 비평 논문들을 읽을 때보다 <‘타는 혀’로 말하기>라는 서문이 더 뜨겁게 느껴진다. 김현과 김윤식과 백낙청과 임화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고, 제대로 모르면서도, 이명원의 이 비평집을 택한 까닭도 거기에 있었기 때문일까. 메타 비평이라는 점에서 후일 읽게 될 네 명의 비평가들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어놓을 가능성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이명원의 눈을 통해서만 비평가들을 해석하게 될 위험을.


첫 번째, 김현에 대한 논문은, 네 편의 논문 중 가장 분량이 많다. 김현의 우상화를 경계하면서 김현을 비판적으로 읽는다. 청년기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 경도되었던 불문학자로서의 섬세한 언어감각과 그로 인한 한계, 4.19세대로서 구세대와의 구별 지으려는 세대론적 인정투쟁의 (실제 문학장 내에서의) 성공과 과도한 세대론적 수사 전략에서부터 생기는 논리의 붕괴 등은 그다지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김현의 비극적 세계관의 뿌리를 “퓨리탄적 세계인식”에서부터 찾는 대목은 흥미로웠다. 그것은 평론가 김현을 학적으로 다룬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 김현”에 대해서 추측한 부분이었기 때문일까. “써먹을 데 없는 문학”이란 김현의 문학관이 그의 부모의 강력한 영향 하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라는 점은 설득력 있다.


두 번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렉스’ 비판>이란 논문. 여기에서 이명원은 김윤식이 임화를 항상 염두에 두고 문학 비평과 연구를 전개해나갔는데 어느새 그의 이식문학론에 동화되어버렸다고 비판한다. 그 결과, 김윤식은 가라타니 고진을 표절하기에 이르렀다고. 임화를 타자로 설정하여 비평가로 자기 정립하려는 대결 의식을 버리고 끝내는 타자에 동화하기에 이른 김윤식.


의도적으로 한국문학비평계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만을 골라서 비판한 이명원의 자기 정립의 노력과 젊은 비평가로서의 패기, 그리고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 대가 비평가와 논문을 통해 대화에 나선 점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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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4-04-02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사서 읽어야겠어요. 역시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부자의 그림일기
오세영 지음 / 글논그림밭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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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만화로 된 만화 이론서인 <만화의 이해(스콧 맥클루드 지음)>를 읽으면, 만화라는 예술 장르(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서 놀라게 된다. <만화의 이해>에 살고 있는 ‘만화’라는 놈은, 활자의 의미와 그래픽의 형상을 아우르면서 상상의 공간을 이리저리 휘젓고 날아다닌다. 그리고, 오세영의 단편만화집인 <부자의 그림일기>을 보자니, 만화는 단지 ‘가능성’에서 머물고 있지는 않다는 걸 확, 실, 히, 알게 된다.

<부자의 그림일기>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높은 평가의 소개를 받아서 기대감이 높았다. 독후감을 서둘러 말하자면, 오세영은 그 기대감 이상으로 나를 만족시켜 주었다. 이 한 권의 만화책을 읽고나니 좋은 만화책을 더 많이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서 만화책 리스트를 만들어두고 꾸준히, 열심히 찾아서 읽어야겠다는.


오세영은 만화를 ‘배운’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림체에서 흔하디흔한 일본만화의 입김도 별로 느낄 수 없다. 오히려 그의 그림체는 독자로 하여금 거칠게, 낯설게 느껴지도록 한다. 그리고 그가 다루는 소재와 이야기와 마무리도 (만화라는 장르임을 생각할 때) 거칠고, 낯설다. 그 거칠고 낯설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한국 단편소설에서의 영향이 아닐까. 그의 여러 단편들에서 이런 생각을 전개시킬 수 있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가난과 역사(전쟁, 분단, 광주…)의 모진 채찍에 나가떨어지는 인간들을 자주 그린 점이나, 방화로 인한 파국적 결말(<불>)이나, 토속적인 관능이라든가. 한국 단편소설들이 지나온 길이 보인다. 물론 그가 단순히 단편소설을 (만화로의) 장르 번역하는 데 끝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을 만화로 옮기거나 문학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는 사실은 오세영의 만화의 문학성을 생각하게 한다. …오세영이 리얼리즘의 만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그것은 환상적이며 동시에 기괴한 리얼리즘이다. 사실을 그려내려고 노력하되, 그 사실은 비틀어진 사실이다. 그래서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난.쏘.공>의 조세희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다. 오세영은, 오세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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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엔데의 마법 학교 푸른숲 어린이 문학 4
미하엘 엔데 지음, 카트린 트로이버 그림, 유혜자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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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어렸을 때, 책읽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같은 반의 한 친구가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책벌레가 된 녀석이었다. 책꽂이 두 개가 전부였던, ‘학급문고’의 최다대출자였던 놈은, 책읽기를 업으로 삼지 않았으며 발랄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내게는 현기증 날 정도로, 책을 많이 읽었다. 놈의 생일날, 생일초대를 받아 집에 놀러갔었다. 별로 크지도 않은 집 안 가득히 책들이 꽂혀있는 걸 보고는 다시 한번 질렸었다. 뒷날, 나는, 놈은 학자의 아들이었기에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자본’이 풍요로웠고 그렇기에 자연스레 독서를 한 것이었으며, 한편, 그런 문화자본이 없었던 내 유년기의 빈곤한 독서史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 친구가 지금은 무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지금 이 시간에도 책을 파먹으면서 학자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려니…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이 엉뚱한 회상과 상상은 미하엘 엔데가 지었다는 <모모>라는 책에서부터 시작됐다. 그 친구가 열심히 읽고나서 내게도 일독을 권했던 동화책 <모모>. 물론, 놀기 바빠 책 따위엔 신경 쓸 시간이 없었던 나는 지금껏 읽지 않았다. 대신 미하엘 엔데가 쓴 <마법 학교>라는 동화책을 읽게 되니, 반갑다.

<해리포터> 시리즈나 <반지의 제왕>으로 판타지 영화나 소설이 아이들에게도 너무도 익숙한 장르로 다가올 것이다. 미하엘 엔데의 이 동화도 그런 요즘 유행에 편승해서 번역 출판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보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동화책에서는 재미와 교훈이 가장 중요한 가치일 텐데(어른 책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야기의 흐름상 이 동화는 교훈들이 앞쪽에 몰려 있고, 재미있는 얘깃거리들이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시절 교훈만을 추출해내는 기괴한 학교 독후감 쓰기에 길들여진 탓인지, 오히려 뒷부분으로 갈수록 나는 좀더 지루해졌다. 이 동화는 작가가(?) 소원 나라라는 곳을 여행하면서 마법학교의 머그와 말리라는 아이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적어낸 이야기이다. <해리포터>에서처럼 머그와 말리도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 마법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데, <해리포터>보다는 더 철학적(?)이다. 담임선생님 로자마리노 질버씨는 처음에는 입바른 구라들만 잘 치는 사기꾼으로 보이는데, 실은 참 스승이다. 내가 보기에, 동화의 초반부에서 질버 씨는 마법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철학이나 교육학 강의를 하고 있다. 심지어는 진학지도까지…. “사실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잘 알아내기만 하면 다른 문제는 저절로 풀린단다. 하지만 자기가 진심으로 바라는 소원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쉽지 않지.”라든가,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은 유명한 의사나 교수 혹은 장관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던 진정한 소원은 평범하고 실력 있는 정원사가 되는 것일 수도 있어. 또 어떤 사람은 돈 많고, 권력도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의 진정한 소원은 서커스의 피에로가 되는 것일지도 모르지.”라든가. 내 유년의 꿈은 내가 설정하지 않았고/못했고 국가가 대신 지정해줬다. 그것은 과학자가 되어 힘센 “나라”를 만드는 것이거나 대통령이 되어 좋은 “나라”를 만드는 두 가지 길이었는데, 나는 멋지게 생긴 로보트를 만드는 과학자가 되길 희망했었다. 물론, 내 또래 아이들도 대부분 그 두 가지 중에서 장래희망을 고르곤 했다. 자기가 진심으로 바라는 소원을 잘 알지 못했다. 제대로 자신의 소원을 몰랐으니 어떠한 초급 마법도 꿈꿀 수 없었다. 머그와 말리는 나중에 마법 대학교에 진학했다고 하던데 그 아이들이 소원을 잘 찾았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내 유년기의 책벌레 친구여, 내가 먼 뒷날에 아이가 생기게 된다면, 반드시 <모모>를 읽혀 내가 못 다한 숙제의 유업을 이루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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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자전적 인생론
함석헌 지음 / 정우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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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석헌은 사상가이며 시인이다. 함석헌의 말과 글의 내용이 ‘씨알사상’이라 부르는 깊디깊은 사유의 강물에 넘실댄다면, 그 강물은 시적 언어의 옷을 입고 있다. 김현은 <행복한 책읽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11시 45분. 왜 갑자기 함석헌의 문체 생각이 났을까. 벌떡 일어나 몇 자 적는다. 함석헌 문체의 특징은 폭포처럼 떨어지는 단문들의 속도감에 있다. 그의 단문들은 접속사에 의해 연결되지 않으며, 주어 역시 되풀이되지 않는다. 되풀이된다면 술어들이다(이 대목은 다시 확인할 것). 그의 단문은 그러나 최인훈의 그것과 다르다. 몰고 가고 채찍질한다. 최인훈의 단문들은 느릿느릿 간다. 반성적이며 지성적이다. 되풀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 함석헌의 어휘들은 초기의 기독교적인 어휘들의 양에 비해 후기에는 노장의 색채를 깊이 띤다. 그러면서도 쏟아져내린다. 반허!” …여러 후학들이 열심히 베껴 쓰고 있는 ‘김현체’의 본래 주인인 문학평론가가 함석헌의 시적인 문체를 입에 담아보고 우물우물 되새김질 해보았던 것 같다. 그 되새김질의 원인은 질투에서였는지, 글을 가늠하는 직업병에서였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가 최인훈의 문체와 비교하는 것으로 함석헌의 문체에 대해 대응했다면, 나는 고등학교 시절 내게 지울 수 없는 감동을 새겨넣어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감동적 힘이 일부분 시적 문체의 아름다운 근육에서 발휘된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 책은 <씨알의 설움>, <하나님, 나의 하나님>, <아름다움에 대하여(이화여대 강연)> 세 편의 짧은 글들로 짜여져 있다. <씨알의 설움>은 “얘, 온 장터에 두루 다녀두, 쌀 사자는 놈은 있어두, 글 사자는 놈은 없더라.”라는 말로 시작한다. 함석헌이 중학교에 진학할 시절, 동무의 아버지가 했던 잊을 수 없는 말이란다. 그러면서 ‘글’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한다. “내 손으로 나와 내 가족의 먹을 것을 벌지 못하고 말을 팔고 글을 팔아먹는 나는 빌어 먹은 것이요, 도둑질을 해먹은 것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래, 함석헌은 바보새다. 가장 높이 난다는 새, 신천옹이란 도가풍 별명의 새, 그러나 보들레르의 어느 시에서처럼 뱃사람에게 놀림 받는 새. 흙밭 대신 글밭을 가꾸는 이 바보새는 글은 원래 씨알의 것이라고 한다. “민중과 한가지 발 벗고 나서지 않은 학자, 문사, 다 절도요 강도다.”라고 말할 때는 사르트르의 몇 마디를 생각나게도 한다. 바보새가,


  원래 글은 씨알의 것이다. 씨알에서 나오고 씨알로 돌아간다. 문명, 문화, 문물이라니, 사람의 지은 모든 것은 결국 한 마디 글월인데, 그 글월을 그리는 바탕을 뭐냐 하면 곧 민(民)이다. 문학만 아니라 정치 교육 예술 종교 모든 것이 결국 민이라는 비단 위에 놓은 무늬다. 그 제도 문물을 세움으로 인하여 민이 한 층 더 빛난다. 그리고 그 무늬 놓은 비단을 입는 거는 누구냐 하면 그 역시 민이다.

  글은 씨알의 하는 소리요, 씨알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씨알의 기도다. 기도는 하나님 들으라고 하지만 또 제가 들으라고 하는 제 소리다. 제가 듣지 못하면 하나님도 못 듣는다. 하나님의 귀가 내 귀 안에 와 있다. 내 귀 아니고는 하나님은 못 듣는다. 자면서 잠꼬대로 한 것은 기도도 아니요, 하나님이 듣지도 않는다.(33)

라고 말할 때, 그 말은 흙(씨알, 民)과 하늘(드높은 정신, 하나님) 모두를 사랑하라고 내게 꾸짖는 듯 하다. 흙에서 살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씨알처럼 그렇게 살라고 꾸짖는 듯 하다. 나는 그저 바보고 바보새가 아니라서, 내 귀는 바보새 앞에서 牛耳가 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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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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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내가 구독하던 신문에 미셀러니를 연재했을 때, 나는 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그 무관심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의 글들은 읽거나 말거나, 였다. 그러던 중, 그가 어쩐 일인지 말단 평기자가 되어 밑바닥과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가 거리에서 써냈을 기사문 중 하나가 나를 놀라게 했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둔 시위대와 전경들의 평온한(?) 점심 식사를 포착해낸 기사 아닌 기사였다. 그 기사는 시위대의 사람들과 전경들 모두를 욕보이는 글이겠지만, 아름다웠다. 주어진 아주 짧은 지면 안에서 자기 글을 이, 착륙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그의 말 때문에, 그가 더 대단해 보였다.

『풍경과 상처』는 기행산문집이란다. 이 글뭉치들을 굳이 ‘기행’산문집이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경숙과 정현종, 천상병 들에 대한 몇몇 글을 빼면 여러 곳의 풍경에 대해 쓴, 기행문집이 맞지만, 실상, 그 글들은 김훈이라는 풍경을 담을 뿐이다. 김훈 특유의 청승맞은 그 풍경스케치들은 그 자신이 고백하듯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란다. “삼인칭을 주어로 삼는 문장을 만들 수가 없”는 그이기에 모든 상처 난 풍경들은 김훈 내면의 풍경이고 언어의 풍경이다. 미문의 힘으로 움직이는 김훈이라는 풍경은, “무의미한 것들에 의미를 가량하는 자들의 시선이 닿을 때, 무의미한 것들은 사물성의 벽에서 풀려나 언어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날아오르기 시작한다.(58)”라는 그 자신의 메아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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