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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베를린 천사의 시 (Wings Of Desire, Der Himmel Ueber Berlin, 1987)

 

어느 겨울날, 베를린에 내려온 두 천사(다미엘과 가서엘)가 인간 세계의 여러 면을 두루 살펴보는 줄거리와 2차대전 직후(45년) 독일 출신 미국인이 형사 콜롬보를 유명한 피터 포크를 형사(사설탐정)로 채용하여 자기 동생의 자식을 찾으러 보내는 내용의 영화를 베를린에서 실제 촬영하는 두 스토리가 하나로 용해되어 진행된다. 그 위에 인간의 모습이 천사에 가장 가까왔던 어린 시절의 특징을 천사 다니엘의 내면의 소리로 간간히 들려줌으로써 이 영화의 주제를 강조하는가 하면, 각기 맡은 구역의 인간 세계를 돌아본 두 천사가 다시 만날때는 지구의 역사를 훑어보기도 하고, 서구의 불멸의 서사시인 호메로스를 등장시켜, 세상이 변화된 모습에 대한 회한을 드러내는 가운데 인간들이 이야기를 잃어버렸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형사 피터 포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는 설정과 더불어 천사 다니엘이 어느날 서커스단의 여자 공중곡예사 마리온이 겪는 고독과 인생살이와 실직에 대한 두려움, 예인의 길의 어려움 등을 내면 깊이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다니엘이 천사의 직분을 버리고 인간화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카시엘의 경고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여인 마리온의 반려가 되고 자신의 존재를 알아본 피터 포크의 촬영현장으로 찾아가 도움을 받는 한편, 그 역시 전에는 천사였다는 사실과 인간화된 천사가 적지 않음을 알게 된다. 결국 카시엘은 천사의 직분을 다하고 다시 승천하게 되나 다니엘은 한 여인의 남자로 남게되고, 인류의 영원한 이야기꾼이요 노래꾼인 호메로스는 인간들이 자신을 다시 찾아줄 날을 기대하며 지상을 떠난다.

어느날 동생이 이 영화는 반드시 봐야 한다면서 비디오로 봤던가, 티비에서 봤던가 했던 영화다.

꼭 봐야 한다는 건 추리소설 빼고는 그다지 안보는데 동생이 같이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시작하고 십분만에 동생은 잤다.

나는 끝까지 봤다.

누가 이 영화 어떠냐고 물으면... 음... 할 말이 없다.

내겐 너무 어렵고 버거운 영화였다.

하지만 이 작품을 시티 오브 엔젤인가 뭔가로 리메이크했을때

나, 헐리우드 망해라... 외쳤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좋은 영화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생각나는 건 없지만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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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에밀 졸라의 소설론

프랑스의 저명한 지식인이자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1840-1902)의 소설론 <실험소설 외>(책세상, 2007)가 출간됐다. 표제작을 따라 '실험소설론'이라고도 많이 알려진 그의 '자연주의' 소설론 전반을 훑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소개에 따르면 "총 8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첫 번째 글 '실험소설'은 졸라가 주창한 자연주의 소설 이론의 핵심을 보여준다. 이어서 '현실 감각'이란 제목의 글은 작가의 기본 자질에 대해 역설하며, '묘사에 대하여'에서는 단순한 배경 묘사가 아니라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환경 묘사를 강조한다. '사실주의'는 자연주의자 졸라의 문학 이론을 보완하는 글이다."

역자는 국내에 많지 않은 것으로 아는 졸라 전공자 유기환 교수이고, 이미 드레퓌스 사건의 기폭제가 됐던 <나는 고발한다>(책세상, 2005)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내가 아는 또다른 졸라 전공자는 원로 불문학자인 정명환 선생으로 <졸라와 자연주의>(민음사, 1982)란 저작이 있다. 염상섭과 졸라를 비교하는 평문 등을 쓰기도 했다(일견 서로 모순돼 보이는 자연주의자 졸라와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졸라의 책은 지난주에 구내서점에서 나온 걸 확인하고 아직 구입하지는 않았는데, 주말의 언론리뷰에서 너무 소략하게 다루어진 감이 있어서(문고본이기도 하지만) 이런 자리를 마련한다. 드물게도 이 책에 주목한 한겨레 고명섭 기자의 소개를 잠시 옮겨오면:  

졸라가 말하는 실험소설을 난해한 현대소설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는 문학에서의 상징주의나 심리주의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졸라의 실험소설론은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의학 연구 입문>이라는 의학서의 결정적인 영향 아래 입안된 것으로 자연과학적 접근을 커다란 특징으로 한다. ‘과학적 실험을 수단으로 해서 일정한 유전 조건과 환경 속에 놓인 인간의 운명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 실험소설의 핵심이 된다. “실험소설은 추상적 인간, 형이상학적 인간의 연구를 물리화학적 법칙에 따르고 환경의 영향에 의해 결정되는 자연적 인간의 연구로 대체한다.”(37쪽)

졸라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일정한 조건 아래 놓으면 그들의 향후 반응과 행동, 운명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무생물을 다루는 화학자와 물리학자, 생물을 다루는 생리학자와 마찬가지로 작가도 자연과학적 방법으로써 살아 있는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사적 상식으로 '자연주의'란 (쇼핑몰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이 유전과 환경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는 작가적 세계관과 창작방법론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영국의 토마스 하디, 그리고 프랑스의 에밀 졸라(이미지는 마네가 그린 초상화 1868)와 기 드 모파상 등이 있고, 드라마작가로는 헨릭 입센이 자연주의의 거장이다. 그 정도의 상식을 갖고서 졸라를 검색해보면 빈곤한 리스트에 좀 실망하게 된다.

 

 

 

 

당대의 벽화를 꿈꾼 그의 필생의 대작 '루공 마카르 총서' 가운데 <목로주점>이나 <나나> 같은 대표작 정도만 중복 번역돼 있으며 <제르미날> 등을 포함하여 몇몇 더 소개된 작품들 대부분은 품절이거나 이미 절판된 상태이다. 새삼스럽진 않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읽거나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닌 것이다.

개인적으론 에밀 졸라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목로주점>이고, 르네 클레망의 영화 <목로주점>(1956)이다(영화의 원제는 여주인공의 이름을 딴 <제르베즈>이다). "1850년 파리의 뒷골목 사업에 실패하고 술독에 빠진 남편 때문에 가난에 찌들리며 살아가는 여인의 슬픈 삶을 그린 멜로물"인데. 억척스런 연기를 펼치던 마리아 쉘(1926-2005)이 기억에 남는다. 찾아보니 이 영화로 당시 영화제의 연기상들을 휩쓸었었군. 하지만, 그녀의 시대도 이미 떠나버렸다... 

07.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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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삶을 감상에서 구제하는 법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쓴 글을 하나 옮겨놓는다. 원래 제목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혹은 삶을 감상에서 구제하는 법'이었고 한 잡지의 청탁을 받아서 3배쯤 되는 초고를 쓴 이후에 다시 줄인 것이다(초고는 모스크바 통신에 올려놓았었다). 7월말쯤에 씌어졌지만 9월호에 맞추기 위해서 릴케의 '가을날'을 떠올렸고 자연스레 <두이노의 비가>에 대해 몇 마디 주절거리게 되었던 것인데, 책이 기억에는 8월 중순쯤 나왔을 법하다. 아직은 무더위가 기승이지만, 조금 앞당겨서 이 글을 호출한 이유이기도 하다. 곧 가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여, 마침내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시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시 '가을날'이다.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시는 그의 대표작 <두이노의 비가>이다. 그리고 이 <비가>를 읽어보기 위해서 얼마전 러시아어로 번역된 릴케시 선집을 한 권 샀다. 칸딘스키의 그림들이 표지와 속지 군데군데에 들어가 있는 손바닥만한 포켓북이다.

내가 제일 처음 읽은 <두이노의 비가>는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통해서였는데, 그게 벌써 17년 전이다. 무엇보다는 인상적이었던 건 <비가1>의 시작부분이었는데, 가령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같은 시구를 당신은 접해본 적이 있으신지? 당시에 나는 이런 걸 어떻게들 이해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나게 감동적이었고 아직도 감동적이다. 왜 그런가? 일단 처음 두 구절을 옮겨본다(번역은 우리말 번역본들과 러시아어본을 참조하여 조합한 것이다).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설혹 한 천사가 있어 갑자기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 해도,
그 강한 존재로 말미암아 나는 스러지고 말리라.

릴케의 시구이면서 동시에 그의 것만도 아닌(그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리를 받아적었다고 했다) 이 첫 시구에는 <비가> 전체를 이끌고 가는 핵심적인 모티브들이 포함돼 있다. 대표적인 건 '천사’인데, 이 시의 기본축은 ‘강한 천사’와 ‘연약한 인간’의 대비이다. 흔히 말해지듯이, 인간은 짐승도 아니지만, 천사도 못 된다. 유한한 존재이자, 필멸적 존재인 인간, 그래서 맨날(은 아니더라도) ‘울부짖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그 ‘어중간함’이 릴케 시의 숙고의 대상이다(죽음의 관점에서는 ‘너무 이른 죽음’. 릴케는 그걸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런 어중간한 인간은 무엇으로 구원 받는가?

지상적 존재인 우리가 아무리 울부짖더라도 천상적 존재인 천사들은, 혹은 신은 눈도 꿈쩍하지 않으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건 ‘계’가 다르고 ‘질서’가 다르며, 존재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사들의 무관심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은 유치하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으로 더 무서워할 만한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이라고 릴케는 말한다. 우리의 울부짖음을 불쌍히 여겨 설혹 한 천사가 우리를 껴안아준다 해도 문제는 우리가 그걸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질 거라는 것. 천사는 너무도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조야한 비유이지만, 가령 백일도 안 지난 아이한테 보약을 먹인다고 해보자. 그건 약이 아니라 독이며, 아이가 견딜 수 없는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천사의 관심과 사랑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실제로 엄마의 젖가슴에 눌려 질식사하는 아이들도 있다지 않는가?). 그러니 어찌 함부로 관심을 구하겠는가, 사랑을 구걸하겠는가?

간혹 밥 먹듯이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정말로 사랑을 견딜 수 있는 건지? 가슴이 터질 듯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슴이 터져 스러지지 않(았)을까? 사랑이란 ‘연약한’ 우리가 견뎌내기에는 너무 강한 정념이기 때문이다(나는 밥 먹으면서 사랑하고, 이 닦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활화산처럼 터져버리는, 그런 사랑”(혜은이)은 얼마나 무서운/두려운 사랑인가?

그건 ‘진리’나 ‘복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맨정신으로 대문자 ‘진리’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런 ‘진리’를 견딜 수 있을까? 살아남는 일은 왜 많은 거짓말을 필요로 할까? 그건 진리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럼, 복음은 어떤가? 만약에 당신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당신은 ‘복음’을 견뎌낼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견뎌낼 수 있는가? 그의 ‘기적’은 어떤가? 혹은 ‘재림’은? ‘종말’은?..



해서, 릴케의 <비가>는 시작부터 많은 걸 ‘평정’하게 해준다. 내가 17년 전에 인생에 대해서 뭔가 깨달은 바가 있다면, 그건 릴케의 이 시 구절을 읽은 덕분이다.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 허무와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가끔은 골방에서 이 시구를 되뇌어보시라. 다소간 위로가 되고, 구제가 될는지 모른다(물론 구원은 턱도 없다. 우리는 연약하기만 한 게 아니라 천박하기도 하므로!).

하여간에 사정이 그러하니, 우리는 공연한 관심과 사랑, 진리와 복음을 구걸하지 말고, 그저 대충 울부짖는 데 만족할 일이다. 울다 보면 속이 후련해지고, 내가 또 언제 울어보겠냐는 생각도 들 테니까. 가을날, 우리의 삶은 그런 울음과 울부짖음 속에서도 딴은 탐스럽게 익어가나니...(<삶과 꿈>, 2004년 9월호)

 

 

 

 

04. 07. 26./ 06.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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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je0525 > 근대라는 형식의 수용과 번역어
번역어 성립 사정
야나부 아키라 지음, 서혜영 옮김 / 일빛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한자문명권을 형성하고 있던 동아시아 삼국(한중일)은 조화로운 정치 역학을 유지하면서 중세를 보냈다. 그러나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서구와의 충돌을 경험하면서 이 조화는 깨어지고 동아시아의 삼국도 분열을 겪게 된다. 서구 문명과의 접촉에 있어 조선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너무 준비가 없었고 그 결과는 그 이후 전개된 역사가 증거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의 번역어란 기본적으로 개화된 문명의 언어를 반개 또는 미개의 언어 체계 속으로 불러들이는 구조적 체계의 전이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카세트(보석함) 효과', 즉 내용을 알지 못하면서도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신비감, 그것이 일본 번역어의 성립 사정이라는 것이다. 도입된 언어에 1:1로 대응하는 언어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경우 대안으로서 모색되는 것이 신조어와 전래어의 대입이다. 신조어의 경우는 해당 번역어에 합당한 의미 내용을 가진다고 하기 보다는 모호한 의미 내용으로 뭔가 있을 것 같은 카세트 효과를 발휘하게 한다.

전래어의 경우는 전래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 내용과 번역 대상어의 의미 내용이 길항하면서 새로운 제 3의 의미를 만들어 냄으로써 앞의 신조어와 마찬가지의 카세트 효과를 만들어 낸다. 번역어란 이처럼 그 의미 내용의 모호성을 특징으로 함으로써 역으로 어떤 새로운 기능을 의도한다. 예컨데 번역어는 창조하고자 하는 근대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써 활용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사회', '개인', '근대', '미', '연애', '존재', '자연', '권리', '자유', '그/그녀'라는 어휘들의 번역어 성립과정을 탐색함으로써 번역어 성립의 사정과 그 내적인 성격을 밝히고 있다. 서구 근대를 받아들이는 태도라든가, 그 받아들임의 과정의 혼란을 번역어의 성립과정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번역어란 것이 결국은 일본의 그것에 다름아니라는 사실, 그것을 알면서도 국어 정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본식 한자조어의 폐기만을 부르짖는 열혈 민족주의자들의 비합리적 행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무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철저히 함으로써 현재의 우리 삶의 풍요로움을 이끌어 낼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시대 언어의 흔적은 말소되어야 할 부끄러운 무엇이 아니라 성찰해야 할 과거의 기억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성찰이 재미를 앞서는 이번 독서의 참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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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다시 보는 필화사]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대한민국의 문화적 소양과 예술가의 운명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위지혜] 2005-12-26 오전 11:12:57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작가 장정일 /사진제공 <데일리서프라이즈>
▲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작가 장정일 /사진제공 <데일리서프라이즈>

안타깝게도 지금 내 손에는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없다. 구입하려고 해도 구입할 수가 없고, 학교 도서관의 자료를 검색해도 도대체 나오지가 않는다. 공권력의 가공할 위력이다. 그러니 새롭게 읽지 못한 상태에서 기억에 의존하여 글을 써 내려갈 도리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96년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출판되었을 때 재빨리 책을 사서 읽었다는 사실이다. 『아담이 눈뜰 때』를 접한 직후부터 장정일은 관심이 많이 가는 작가였기에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넓게 펼쳐 나갔던 기억이 새롭다.

내가 샀던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아마 강준만 교수가 소장하고 있을 것이다. 음란성 여부로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작가 장정일이 재판을 받을 무렵 강준만 교수는 장정일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강 교수는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한 논의를 제대로 펼칠 수 없다고 적어 두었다. 책을 구할 수 없었던 까닭에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내 생각은 이러했다.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는 강준만 교수가 이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부각시키면 좋겠군. 法典과 예술의 거리를 자리매김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렇다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내 수중에 있는 것보다 강준만 교수에게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우편으로 강 교수에게 부쳤던 이유다.

먼저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재판 관련 일지를 보자. 이 일지는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행복한 책읽기, 2001)의 「변론기: 장정일을 위한 변론」이라는 글 뒤에 붙어 있다. 「변론기」를 쓴 사람은 훗날 법무부장관을 역임하게 된 강금실 변호사다. 당시 강금실 변호사가 장정일의 변호를 맡았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를 끄는 바 있다.

1996. 10. 10 김영사에서 출간
1996. 10. 31.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관계당국에 제재권고 결정
1996. 11. 14. 김영사 상무이사 김영범 씨, 음란물판매죄로 구속
1996. 12. 30. 벌금 700만원 선고
1996. 12. 31. 장정일 씨,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자진출두
1997. 1. 7. 검찰은 장정일 씨에 대하여 구속영장을 청구하였으나 신형근 판사는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
1997. 1. 13. 장정일 씨, 음란문서제조죄 등으로 불구속 기소
1997. 5.30. 서울지방법원 김형진 판사는 작가 장정일 씨의 1심 재판(97고단172호) 선고기일에 실형 10월을 선고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법정구속
1997. 7. 23. 항소심재판부(97노4055호, 재판장 한정덕 부장판사)는 장정일 씨에 대한 보석결정하여 석방
1998. 2. 18. 항소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의 선고를 받고 상고
2000. 7. 상고심(대법원 98도679호)에서 상고기각 확정

논란은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외설을 형법에서 규정하는 ‘음란’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를 두고 벌어졌다. 38세의 유부남과 18세의 여고생이 벌이는 가학/피학적인 성행위라든가 폰섹스, 구강성교, 항문성교 따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익숙한 사고방식과 기성논리를 통렬하게 넘어서고 있다. 그러므로 예술의 범주에서 이해해야 한다.”라거나 “성을 통한 자기모멸을 시도함으로써 경쟁사회로부터 면책과 휴식을 꿈꾸는 한 인간의 심리적 정황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으므로 예술 장르 속에서 접근해야 한다.”라는 것이 당시 문학계의 입장이었다. 물론 완고한 법원이 이를 제대로 이해했을 리 만무하다.

나의 경우라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으며 장정일 식의 강렬한 사회성을 느낄 수 있었다. 가부장적인 체제가 어떻게 재생산되는가가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면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의 면모를 장정일 식으로 드러내는 데 필요했던 방식이 포르노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신분석학적인 방법을 도입해서 접근한다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이런 측면이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라캉을 공부하면서 내내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새삼스럽게 떠올렸던 까닭도 여기서 기인한다. 혹 관심이 있으시다면 과도한 훈육(체벌)과 가학/피학적인 인간의 생산 관계에 대해 공부를 해 보시라. 그리고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으시라. 짚이는 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측면이 제대로 이야기되었더라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장정일도 이런 측면을 의도했던 듯하다. 『장정일의 독서일기』(하늘연못, 1997)의 187쪽부터 193쪽까지는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해 바로 말함」이란 쓸데없는 글”인데, 거기에는 자신의 “소설이 끈질기게 천착했던 두 개의 사항”이 소개되어 있다. “하나는 이번 소설에서처럼 나라는 개체를 낳아 준 아버지를 씹새끼로 만드는 것으로 다른 또 하나는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에서 시험된 ‘그는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탁자에 놓았다’ 식의 구문은 물론이고 이야기가 지탱해야 하는 최소한의 개연을 파괴함으로써 나의 실존과 호구의 근거가 되는 소설의 모든 형식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는 작가의 이 말에 동의한다. 또한, “한 마디로 이 소설은 성을 주제로 하지 않는다”라면서 “소설 속에 가장 많이 언급된 묘사가 곧바로 그 소설의 주제를 이루지는 않는다”라는 발언에도 동의한다.

그런데, 준엄하신 법관 나리들이 나와 같을 리 없다. 가부장의 자리에 올라서고 싶은 그들이 어떻게 가부장적인 사회를 부정하겠는가. 그들이 ‘체제/아버지/선생님’의 질서와 맞대면하여 그 질서를 균열시키는 데 동의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가. 그들이 어느 세월에 정신분석학을 공부하여 한 인간의 상처와 내면을 이해하려 들 것이며, 만에 하나 그러한 방법론을 공부했다고 한들 무리 없이 작품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 그저 법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단죄’하면 간단할 것을!

우리 사회엔 문화적으로 소양이 부족한 이들이 너무도 많다. 이것도 심각한 문제인데, 더 심각한 일은 이를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 꼴사납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을 가끔 목도하곤 하는데, 『내게 거짓말을 해봐』 필화 사건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이 나라가 나름의 세련을 구가하려면 오랫동안 지긋지긋한 시간을 기다려야겠군. 이게 정신 박힌 예술가의 운명이군.’ 아마 운명이란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게 맞을 거다.   

홍기돈 (문학평론가)

출처 : 컬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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