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母
문태준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산이 일곱 가지 빛깔로 물들 때
허만하
가을 산이 일곱 가지 빛깔로 물들 때
숲은 능선에서 펄펄 날고 있는
낙타색 바람을 생각한다
우리의 무지개는 언제나 일곱 가지 색이지만
영어권 무지개는 여섯 가지 색으로 나타난다
그들 말이 잃어버린 한 가지 색은 슬프다
이승에 태어나지 못한 한 빛깔의 행방을
가로등 불빛을 적시는 는개는 모른다
한 해 내내 눈바람 흩날리고
얼음덩이 표류하는 지대가 지상에 있듯
슬프다는 말이 없는 언어를 가진
종족이 지구별 어디엔가 있다고 한다
슬픔을 모르는 정신이 있다는 사실이
낯선 도시 젖은 별빛보다 슬프다
피아골 물소리가 일곱 가지 빛깔로 물들 때
숲은 서리 내린 겨울 들녘 새벽을 생각한다
한겨울에 싱싱한 물이 오르는 실가지 끝
천을 헤아리는 싹과 같은 숫자의 잎이 피지만
낙엽은 벌써 같은 수의 목숨을 잊고 있다
이제 우리는 숲을 생각해야 할 때다
지는 잎이 기름진 부식토 윤기를 머금고 있는
직박구리 은빛 지저귐이 앞뒤에서 날고
바람에서 진초록 풀숲 냄새 물씬거리는
원시의 숲을 생각할 때다
지구에 최초의 인간이 출현하기 이전의
야생의 숲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내 애인 데카르트
그이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대답했다.
집어쳐요, 그딴 말
생각하지 않고 사랑할 순 없어요?
그러자 그는 심각해졌다.
방금 그 말, 생각해 볼 문제야!
<주목을 받다>
장정일 / 김영사 / 2005
같은 자궁 속에 살면서
― 함민복
집채만한 폭탄
폭탄에 어머니라 부르는
폭탄에도 어머니가 있다니
어머니란 말을 폭탄에도 붙이다니
충격과 공포스런 그들
유크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
문명의 발상지를 폭격하는
잔혹함 쪽으로만 진화한,
폭력의 극점인,
무기들을 신봉하는
악의, 페스티벌
저 섬광만 버린다면
우주는 평화로운 자궁
악동이 태어나 혼자 포식하려고
지어미 자궁 속에서 포크질만 하지 않는다면
물어 뜯는다
입을 틀어막는
모래바람의 경고
질겅질겅 씹어
너덜거리는 자궁에 뱉으며
양팔 잘린, 두개골이 함몰된, 어린 생명들의
눈물, 성공적으로 빨고 있다고 자찬하는
경박하고 소갈딱지 없어 보이는 눈빛
주둥이에 묻은 핏방울 쓱쓱 닦는
부시시한 고양이 한 마리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의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