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변주곡 - 김수영 시선집 창비시선 68
백낙청 엮음 / 창비 / 198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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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면서 김수영을 읽는다. 시, 지하철, 김수영. 이런 생각이 든다. 전에 장정일이 했던 말. 시를 읽는 것은 나르시시즘이라고. 그렇다. 시는 나르시시즘이다. 시 읽기는 나르시시즘의 정점이다. 나는 시를 그냥 받아들이려 한다. 시에 대한 문학적 지식이 별로 없다는 때때로 자유로운, 그래서 즐거운 시 읽기를 허락하게 한다. 누구나 음악도나 음악평론가처럼 지식으로, 음악을 듣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귀에 들리는 아름다운 선율이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이 좋은 음악이란 것이다. 물론 이것도 음악 감상의 하나일 뿐이다. 시가 노래라면, 그리고 문학이 음악이라면, 시 읽기도 부담스런 지식의 배경 아래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시에는 녹여진 형태로, 형태 없는 형태로 역사와 논리와 철학이 담겨지지만 그것의 원상태로의 복원과 추출만이 시 읽기의 전부는 아니다. 형태 없는 형태의 오롯한 감상이야말로 시 읽기의 가장 살 떨리는 즐거움일 것이다.

그 느낌의 감상법을 주장하다보니 그 감상법의 한계를 보고만 나의 고백이 있어야겠다. 시를 읽어보자고 그리고 되도록 치열한 김수영의 시를 읽어보자고 했건만 성공하지 못했다. 교과서에서 접하고, 또 인터넷 사이트에서 몇몇을 접한 때보다 느낌이 덜했다. 느낌에만 시의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일까. 그래도, 김수영은 역시 김수영. <거대한 뿌리>나 <폭포>, <풀>, <눈>, <性> 등의 충격적 감동은 여전했다. 모두들 김수영의 시집을 읽기 전에 접했던 시들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절망하기는 했지만. 백낙청이 엮었다는 이 시선집의 미덕은 첫째로 한자를 줄였다는 점이다.

김수영 시 전집을 사두고 1년여를 넘도록 한자의 장벽에 막혀서 썩힐 수밖에 없었던 기억. 한자의 벽 너머의 김수영을 만나게 해준 시선집은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김수영 시의 특질인 속도감을 더욱 느끼게 될 것이란 백낙청의 말은 신뢰감이 있다. 백낙청의 이름과 해설은 시선집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이 시선집을 읽고 나서 자연스럽게 전집을 읽으라는 백낙청 말마따나 다음 번에 김수영을 전집을 통해 만날 것이다. 그때는 지금의 시의 불감증을 극복할 수 있을까? 김수영을 다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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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 Kim 2011-12-27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기막힌 영감이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