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갈대 > INTP
대학교 1학년 2학기에 교양과목으로 심리학을 신청했다. 이 과목은 대단히 인기가 있어서 수강신청이 시작되고 몇시간만에 꽉 차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학교측에서 자리를 늘려주어 신청할 수 있었다. 수업은 기대했던 것처럼 재밌지는 않았지만 다른 수업보다는(미적분학, 경제성공학 등등) 훨씬 들을만했고 그수업으로 나는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프로이드의 성에 기반을 둔 성장단계별 설명은 납득할 수 없었지만 학기 중간에 실시했던 융의 MBTI 성격검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재미삼아 하는 심리테스트와 MBTI는 완전히 달랐다.
바보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스스로의 성격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내성적이고 말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유별난 점을 찾기는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원인이 학교생활에 있지 않았나 싶다. 고등학교시절 새벽같이 등교해 늦은 시각까지 50명이 넘는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정해진 규칙대로 살다보니 개인의 성격은 억압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한국의 학생들은 대학생이 된 후에 제 2의 사춘기를 겪게 되는게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이런 불확신은 성격겁사를 할 때도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어 둘 중 어느곳에 체크를 해야할지 애매한 경우가 많았다. 고등학교시절의 나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하지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선택할 것인가? 결국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확신은 없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INTP라는 결과가 나왔는데 이는 전 세계 인구의 1%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즉 100명에 한명 있을까 말까 한 성격이었다. MBTI에 16개의 성격유형이 있으니 평균적으로 본다면 한 유형당 6%를 차지해야 한다. 하지만 자연은 이런식의 균등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ISTJ.라는 유형은 10%가 넘는 점유율을 보이고 있었고 3%가 안되는 유형도 INTP를 포함해서 3가지가 있었다. 나는 이런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그때까지 별다른 문제없이 평범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가장 희귀한 유형이라는 사실은 놀라우면서도 당혹스러운 것이었다.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결과는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INTP는 흔히 '사회의 부적응자'로 불린다. INTP라는 사실은 단순히 희귀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생각해볼 때 이는 매우 치명적인 결점이 될 수 있다. INTP가 이렇게 적은 이유도 진화적으로 부적합하기 때문에 줄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만도 하다. 왜 부적응자로 불리는 지는 INTP의 특성을 살펴보면 이해가 쉽다. 이들은 밖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보다는 집에서 혼자 자신만의 관심사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하고 극단적인 경우 자폐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또 스스로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으며 술자리, 파티장 등 사람들이 많고 왁자지껄한 곳을 매우 싫어한다. 타인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보이는 경우도 드물고 설령 마음이 있더라도 행동으로 표출되는 일은 거의 없다. INTP에게 특별한 용무없이 일상적인 전화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들이 말이 많아지는 경우가 있는데 상대방이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을 때이며 상대방은 사실 이들이 대단히 말을 잘한다는 사실에 놀란다. 이정도면 왜 부적응자인지에 대한 이유는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INTP를 절망적인 사람들로 볼지도 모르겠지만 단점 못지 않게 장점도 많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는 불리하지만 이들은 혼자 하는 일에서는 두곽을 나타낸다. 특히 논리적 순수성에 대한 욕구가 대단하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아인슈타인과 뉴턴, 과학의 혁명을 이끈 두 사람 모두 INTP라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자신의 관심영역에 대해서는 놀라운 직관력과 독창성을 보이는 것도 이들의 특징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중에 INTP의 비율이 무척 높다는 사실은 이들이 얼마나 오류를 잘 찾아내는지를 보여준다. 앞에서 말한 논리적 순수성을 추구한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틀린 부분을 잘 찾아낸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이들은 학창시절 성적이 상위권일 가능성이 높다. 자식이 이 성격이라면 부모는 높은 성적을 기대해도 좋다. 다만 자신이 하는 공부가 바보같다고(혹은 선생이) 느낄 때는 최악의 결과를 기대해도 좋다 -_-;;
전 세계 교수 중 80%가 INTJ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단히 높은 것은 사실이다. ) INTP만큼 희귀한 INTJ가 교수 중에 그렇게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INTP와 INTJ의 차이는 바로 P와 J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P의 특징은 자유분망함이고 J의 특징은 성실함, 정리정돈이다. 즉 한가지 주제에 대해 높은 집중력과 직관으로 꾸준히 연구할 수 있는 것이 INTJ의 특징이다. 반면 INTP는 흥미 있는 일에 대해서 시작은 비슷하지만 추진력이 부족하다. 즉 흥미가 사라져버리면 노력 역시 사라지게 되는 경향이 강하다. 어쩌면 꾸준히 노력할 수 있는 성격 자체가 이미 대단한 능력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극단적인 INTP는 아니다. 나에게 아인슈타인만큼의 번뜩이는 직관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최근 아인슈타인이 자폐증상을 보였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극도로 기피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이 두가지 경향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나는 내 성격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 스스로를 규정짓는 순간 발전의 가능성 역시 막혀버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MBTI테스트를 만든 융 역시(그도 INTP이다) 타고난 성격이 바뀔 수는 없지만(다른 성격유형으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의미) 어느정도 중화 혹은 완화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내성적인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느정도 외향적으로 바뀐다. INTP라는 성격에서 얻어낼 수 있는 장점들은 발전시키고 단점들은(없앨 수는 없지만) 완화시켜 가는 것이 나의 평생 과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