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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꽤 흥미롭게 읽었던 <예수는 신화다>에 관한 글을 읽었다. <당대비평>의 편집주간인 김진호 목사의 글.

http://saegil.or.kr/quaterly/sg03s/08church.html

전체적으로『예수는 신화다』의 주장에 대한 기독교 측의 가장 진지한 태도는 역사적인 접근을 하는 예수 연구자들에게서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역사의 예수’ 연구가 거둔 근대의 성과들을 요약 정리하면서 그 책은 19세기 예수 연구의 일부분이 범한 잘못을 답습한 데 불과하다는 주장을 폈다. 즉 예수 이야기가 신화라는 주장은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를 통해 이미 극복된 것이라는 얘기다.

 

『예수는 신화다』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퍽 취약한 책이다. 왜냐하면, 신비주의 연구자라는 저자들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책의 내용은 비약과 아마추어적 논변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기독교계에 던져주는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부터 이미 배제의 대상이 되어버린 일련의 신비주의 텍스트들을 예수 담론에서 대거 복원시키려 한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책을 재밌게 읽은 독자라면 아래 책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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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등록금이, 또, 올랐다.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에 등록금 인상에 대한 의견에 있다. 너무도 동의할 만한 견해!

  나는 사립대학을 다녔는데, 대부분의 사립대학은 학생들의 등록금이 없으면 운영을 하지 못한다. 이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학생들은 거의 해마다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 등을 벌이면서 재단 전입금을 확충하라고 난리를 치지만 이는 뭔가 잘못 알고 하는 짓이다. 현재의 사립대학은 학생들이 낸 등록금으로 운영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대학 교수건, 총장이건, 직원이건 학생들에게 월급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는 사립대학의 주인은 학생들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주인답지 못한 짓을 할 필요가 없다. '뭘 해달라'고 요구하기 보다는 '뭘 하라'고 지시를 하는 것이 옳다. 이런 발상의 전환이 없다면 해마다 반복되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재단 전입금이 많이 들어오게 되면 주인 노릇을 할 수가 없다. 차라리 지금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지식인은 어떻게 먹고 사는가,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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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해외 연수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7월 초에 일본에 가게 되었다.

'일본과 한국 근대문학'이라는 주제 하의 연수이기 때문에
일본 문학, 그리고 일본과 관련된 한국 문학을 미리 읽어보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읽을 예정이고,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는 현재 읽고 있는 중이다.

복거일의 소설은, 안중근이  이또 히로부미를 살해하지 못하여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상태라는 가정의 대체 역사 소설이다. 예상보다 박진감은 떨어지지만 (주인공이 군인이나 첩보원이 아닌, 회사원-시인이다. 그래서 통속으로 가지 않고 문학적 품격을 지닌 소설이 되었다는 장점은 있다.) 정치적, 역사적 맥락과 엮어서 매우 흥미진진한 논의가 가능할 텍스트로 보인다. 더불어 복거일 특유의 독특한 발언들과 연관지으면 재미있을 듯 보인다.

일본 갈 날이 멀지 않았는데 소세키와 류노스케를 서둘러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도쿄 가이드도 조금은 뒤적여 봐야겠는데....
게으르게 살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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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6-06-28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팟팅~! 좋은 데 많이 탐방해서, 나중에 나한테도 소개 시켜 줘어~~~!

도서관여행자 2006-06-28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 일단 공식 일정으로는 일본 근대문학박물관이랑, 소세키, 류노스케, 야나기 무네요시 박물관/기념관 들를 거에요. ^^
 

오늘, 장자의 일부분을 읽다가 무용지용(無用之用)이란 표현을 보았다.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

그 부분을 읽자 마자 떠오른 건, 김현의 문학론이었다. 
쓸데 없는 문학의 쓸모를 말하는 그의 문학론은 확실히 장자의 언어를 빌린 것이었다.

[행복한 책읽기]에서 인가 몇년간이나 김현이 집안에 들어박혀서 노장만 읽었다는 게 기억난다.
집안에 틀어박혀서 노장 따위나 읽는 짓, 무위지위...
그리고 무용지용.

확실히 쓸모 없음도 쓸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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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인권위에 다니는 삼촌이 오셨다. 티비에서는 마침 9시 뉴스가 나올 때. 모 대학의 사회학 교수의 인터뷰가 흐르고 있었다. 삼촌, 웃으며 하시는 말 ;

"야, 저 교수 입술 쪽에 상처 보이지? 대학의 선배 교수에게 얻어 맞았다고 하던데... 선배가 버릇 없다고 한 대 쳤겠지. 저 교수가 인권위 심사위원 하고 있는 교수라 알고 있거든. 허허."

삼촌이 그저 우스개로 한 소리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정말이라면, 결코 웃지 못할, 인권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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