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자전적 인생론
함석헌 지음 / 정우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석헌은 사상가이며 시인이다. 함석헌의 말과 글의 내용이 ‘씨알사상’이라 부르는 깊디깊은 사유의 강물에 넘실댄다면, 그 강물은 시적 언어의 옷을 입고 있다. 김현은 <행복한 책읽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11시 45분. 왜 갑자기 함석헌의 문체 생각이 났을까. 벌떡 일어나 몇 자 적는다. 함석헌 문체의 특징은 폭포처럼 떨어지는 단문들의 속도감에 있다. 그의 단문들은 접속사에 의해 연결되지 않으며, 주어 역시 되풀이되지 않는다. 되풀이된다면 술어들이다(이 대목은 다시 확인할 것). 그의 단문은 그러나 최인훈의 그것과 다르다. 몰고 가고 채찍질한다. 최인훈의 단문들은 느릿느릿 간다. 반성적이며 지성적이다. 되풀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 함석헌의 어휘들은 초기의 기독교적인 어휘들의 양에 비해 후기에는 노장의 색채를 깊이 띤다. 그러면서도 쏟아져내린다. 반허!” …여러 후학들이 열심히 베껴 쓰고 있는 ‘김현체’의 본래 주인인 문학평론가가 함석헌의 시적인 문체를 입에 담아보고 우물우물 되새김질 해보았던 것 같다. 그 되새김질의 원인은 질투에서였는지, 글을 가늠하는 직업병에서였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가 최인훈의 문체와 비교하는 것으로 함석헌의 문체에 대해 대응했다면, 나는 고등학교 시절 내게 지울 수 없는 감동을 새겨넣어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감동적 힘이 일부분 시적 문체의 아름다운 근육에서 발휘된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 책은 <씨알의 설움>, <하나님, 나의 하나님>, <아름다움에 대하여(이화여대 강연)> 세 편의 짧은 글들로 짜여져 있다. <씨알의 설움>은 “얘, 온 장터에 두루 다녀두, 쌀 사자는 놈은 있어두, 글 사자는 놈은 없더라.”라는 말로 시작한다. 함석헌이 중학교에 진학할 시절, 동무의 아버지가 했던 잊을 수 없는 말이란다. 그러면서 ‘글’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한다. “내 손으로 나와 내 가족의 먹을 것을 벌지 못하고 말을 팔고 글을 팔아먹는 나는 빌어 먹은 것이요, 도둑질을 해먹은 것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래, 함석헌은 바보새다. 가장 높이 난다는 새, 신천옹이란 도가풍 별명의 새, 그러나 보들레르의 어느 시에서처럼 뱃사람에게 놀림 받는 새. 흙밭 대신 글밭을 가꾸는 이 바보새는 글은 원래 씨알의 것이라고 한다. “민중과 한가지 발 벗고 나서지 않은 학자, 문사, 다 절도요 강도다.”라고 말할 때는 사르트르의 몇 마디를 생각나게도 한다. 바보새가,


  원래 글은 씨알의 것이다. 씨알에서 나오고 씨알로 돌아간다. 문명, 문화, 문물이라니, 사람의 지은 모든 것은 결국 한 마디 글월인데, 그 글월을 그리는 바탕을 뭐냐 하면 곧 민(民)이다. 문학만 아니라 정치 교육 예술 종교 모든 것이 결국 민이라는 비단 위에 놓은 무늬다. 그 제도 문물을 세움으로 인하여 민이 한 층 더 빛난다. 그리고 그 무늬 놓은 비단을 입는 거는 누구냐 하면 그 역시 민이다.

  글은 씨알의 하는 소리요, 씨알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씨알의 기도다. 기도는 하나님 들으라고 하지만 또 제가 들으라고 하는 제 소리다. 제가 듣지 못하면 하나님도 못 듣는다. 하나님의 귀가 내 귀 안에 와 있다. 내 귀 아니고는 하나님은 못 듣는다. 자면서 잠꼬대로 한 것은 기도도 아니요, 하나님이 듣지도 않는다.(33)

라고 말할 때, 그 말은 흙(씨알, 民)과 하늘(드높은 정신, 하나님) 모두를 사랑하라고 내게 꾸짖는 듯 하다. 흙에서 살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씨알처럼 그렇게 살라고 꾸짖는 듯 하다. 나는 그저 바보고 바보새가 아니라서, 내 귀는 바보새 앞에서 牛耳가 돼버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