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학술이란 수백년이 흐르면 반드시 변하게 되어 있다. 학술이 장차 변화할 때가 되면 반드시 한두 사람이 나타나 그 단서를 여는데, 이때 수백 수천 사람이 왁자지껄 떠들며 그를 공격한다. 학술의 변화가 고착되면 반드시 한두 사람이 나타나 그간의 성과를 집대성하는데, 그러면 수백 수천 사람이 일시에 그를 추종한다. 왁자지껄 떠들며 공격하는 것은 온 천하가 새로운 학술에서 이상함을 보았기 때문인데, 이때는 아직 새로운 학술의 폐단이 드러나지 않는다. 일시에 추종하는 것은 온 천하가 그 학술이 이상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인데, 이 즈음 그 학술은 폐단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때에 반드시 한두 사람이 나타나 그 폐단을 바로잡으면서 용감하고 굳세게 버틴다. 급기야 학술이 바뀐지 오래되면 국가가 법과 제도로써 그 학술을 규범화하고 이익과 녹봉으로써 사람들을 그 학술로 유도하여, 아이들은 그 학설을 익히고 노인들은 그 학설이 옳은 줄 안다. 그리하여 천하는 편안하다. 천하가 편안한 지 오래되면 다시 어떤 사람이 나타나 학술을 변화시키려고 생각한다. 이상이 바로 천고(千古) 학술의 대요(大要)이다.

아아, 장차 학술이 변하고자 할 때 왁자지껄 떠들며 공격하는 수백 수천의 사람들은 용렬한 자들이며, 학술의 변화가 이미 고착되었을 때 일시에 추종하는 수백 수천의 사람들 역시 용렬한 자들이다. 새로운 학술의 폐단을 바로잡으며 용감하고 굳세게 버티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ㅡ 김정희 (199-200쪽)

학술의 변화 과정에 대한 김정희의 생각이다.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말하는 패러다임이 떠오른다. 수능 문제집의 언어영역 지문으로 지겹도록 많이 등장한 게 패러다임이고 토마스 쿤인데, 실제로 이 책을 읽어본 일이 없어서 더 이상 김정희와 토마스 쿤을 엮어서 궁시렁댈 재량이 없다. (내가 덜떨어진 것은 모두 학교 탓 혹은 부모님 탓이다, 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기존의 시스템의 정점에 오르는 자가 아닌, 기존의 시스템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시스템으로 세상 사람들을 이끄는 - 이른바 천재라는 사람들을, 대단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김정희는, 새로운 변화를 여는 사람보다는 기존 학술의 폐단을 들춰내고 굳세게 버티는 자를 높게 평가한다. 쉽게 말해서 학술의 보수주의랄까? 학술의 급진주의(?)든, 학술의 보수주의(?)든 옛것과 당대 학술의 성과와 병폐를 정확히 가늠해야만 가능하다는 점은 확실하다.

* 결론 : 열공 & 온고지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을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쳤는데 아이들이 읽기 싫어하였다. 그래서 야단을 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늘을 보면 새파란데 하늘 '천'자에는 아무리 봐도 푸른 빛이 없잖아요? 그래서 읽기 싫어요?"

아이들의 이 총명함은 문자를 만든 창힐을 기죽인다.

                                                                                    - (박지원), 173쪽.


... 요즘 한자 공부를 하고 있다. 역시나 한자는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에구, 이 요상시런 그림들을 언제 다 외우나! 깨달은 것은 내 암기력의 한계와 밑도 끝도 없는 게으름이다. 한자 공부보다는 뒹굴거리며 잡생각하는 게 역시나 행복하다. 어제도 그렇게 뒹굴거리다 갑자기 나 자신을 강하게 변호하고 싶어졌다.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건 열정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열정의 과잉 때문일 것이다. 인간들의 저 과도한 열정에서부터 전쟁과 폭력이, 자유의 제한이, 타인에 대한 억압이, 생태계 파괴가 시작됐다. 게으른 자는 방바닥에서 똥배를 두들기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타인을 착취해서 자기 욕망을 채울 겨를이 없다.'

...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어쨌거나 한자 공부는 어렵다. 나는, 그 옛적에 박지원이 살던 동네의 꼬맹이들보다도 총명하지 않으니 이를 어쩌나. 내 게으름과 아둔함은 문자를 만든 창힐을 기살린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녀물고기 2004-04-20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래도 저보다는 훨씬 바지런 하십니다. 한자 공부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입 걱정만 벌써 이백 년째입니다. 게으름에는 이미 익숙해 있어 괜찮은데 괜히 한자 공부 시작했다가 제 아둔함에 땅 치고 망연해질까봐 은글슬쩍 겁이 나네요. 열심히 하시옵!

도서관여행자 2004-04-20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앗, 그런데, 마녀물고기 님은 이백 몇 살이시구나. 최고령 물고기시네요. ^^

연우주 2004-04-20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 존경합니다. 전 한문은 늘 공부한다, 한다하면서 안 합니다...ㅠ.ㅠ

도서관여행자 2004-04-21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억지로 하는 공부는 자기 비하감과 괴로움만 더할 뿐이더군요. 다음엔 즐거운 공부(?)만 하고 싶어요. 아웅~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단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늘 그곳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곳은, 연구공간 ‘수유+너머’. 여러 경로를 통해서 대학이라는 울타리 틀이 얼마나 학문을 억압하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돈이 되지 않는 연구의 어려움, 밥그릇 싸움으로 인한 혹은 전공 이외의 무지로 인한 학제간 연구의 어려움,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파가 아닌 학계 내 파벌 형성, 학연으로 뒤엉킨 교수 사회, 생기를 잃어버린 낡아빠진 강의와 연구, 비판과 새로운 대안이 없는 학회…. 대학과 학자들에게 공부와 연구에 매진하라는 주문을 하기에는 외적인 억압 요인이 너무도 많아 보인다. 어차피 대한민국의 학계인 이상 대한민국의 가장 추악한 모습들을 그대로 떠안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해야할 학자들의 내부마저도 이런 모양이니 무슨 다른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렇다고 해서 ‘수유+너머’와 같은 제도권 외부의 학술연구공간이 대학을 대체해야 한다거나 제도권 교육기관, 학술기관을 모두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수유+너머’의 존재는 그것 자체로서 하나의 대안의 제시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기존의 학계에 반성을 촉구하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귀염둥이가 되지 않을까. 대학이 대학 밖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반대로 대학도 대학 밖에서도 배워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우선, 고미숙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이야기한다. 시골이 고향이었던 터라 특별난 배움의 기회가 없었지만, 아이들과 공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나름대로 세미나(?)를 했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린다. 공부는 우선 즐거워야 하는데 대학은 그런가? 규격화된 논문 쓰기 연습으로 인한 인식의 화석화과 새로운 앎의 세계에 접속하는 어려움…. 대학이나 대학원과 같은 고등교육기관이 유치원 같은 초등교육기관보다 교육과 학습의 등급(질)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교육학적 상식이다. 대학 교수의 학습과 연구보다 유치원생들의 놀이와 연계된 학습이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 ―― 사실, 이 책에서는 그렇게까지 대학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대학에서의 공부와 자신들의 공부를 비판적으로 대비시켜 놓기보다는 수유+너머의 즐거운 일상과 그 즐거움이 가능하기까지의 좌충우돌들을 발랄하게 유쾌하게 그려놓고 있다. 남들을 비판하기보다는 우선 자신들의 삶을 새롭게, 즐겁게 재구성하려는 그 시도! 저자 고미숙이 시종일관 웃음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낙천적 기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웃음의 활력이 이뤄낼 수 있는 놀라운 가능성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유머에 대하여

지난해 말 '기습적으로' 출간된 가라타니 고진의 신작 <유머로서의 유물론>(문화과학사)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온라인 서점의 경우지만, 우리에게 번역 소개된 그의 책들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것이다. 많이 팔리는 만큼 많이 읽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표제글인 '유머로서의 유물론'만큼은 한번쯤 읽히지 않을까 싶다. 8쪽밖에 되지 않는 그 글은 이 책에 묶인 다른 비평문들과 비교할 때 가장 읽기 쉬운 글이기도 하다(게다가 유머러스하다).

고진은 먼저 일본 근대문학에서의 '샤세이분(寫生文)'이 서양의 리얼리즘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지적한다. 샤세이분에서의 객관적인 묘사는 "자기 자신을 높은 곳으로부터 보는 자기의 이중화"(127쪽)를 의미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묘사는 근대소설의 내러티브로써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자기의 이중화'이다. 고진은 그것을 프로이트가 말하는 유머와 연결시킨다. "프로이트가 생각하기에 유머는 자아(아이)의 고통에 대해 초자아(부모)가,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메타 레벨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다."

물론 유머를 그렇게 정의내릴 경우, 또 다른 '자기의 이중화'인 자기 아이러니(self-irony)와 겹칠 수 있는데, 고진에 의하면 이 둘은 같지 않다. "왜냐하면 아이러니가 타인을 불쾌하게 하는 것에 반해, 유머는 왠지 그것을 듣는 타인도 해방하기 때문이다." 고진은 이러한 유머를 보들레르를 인용하면서 다시 한번 정의내리는 바, "그것은 유한적인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는 것인 동시에, 그 일의 불가능성을 고지하는 것이다."(128쪽) 그런 의미에서 유머는 일종의 '정신적 자세'이며 '웃음'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대개의 유머는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고진도 사례로 들고 있지만, 사실 카프카가 자신의 음울한 소설들을 읽어줄 때, 청중은 물론 그 자신도 우스워서 데굴데굴 굴렀다는 건 잘 알려진 일화이다(요컨대 그는 블랙 유머리스트였던 것이다).

이러한 예비적인 고찰에 이어서 고진은 제법 근엄해 보이는 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유머로 우리의 주의를 이끈다. 그는 스피노자의 결정론적 세계인식에서 유머를 발견하며, 칸트의 '초월론적 비판' 또한 유머러스한 것으로 규정짓는다. '초월론적'이란 어떤 종류의 '정신적 태도'이며 '자기 이중화'이기에 유머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머는 마침내 마르크스에게까지 전염된다. 즉 "자기는 세계(역사) 안에 있으며, 그것을 초월할 수 없다, 초월한다는 믿음마저도 그것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초월론적 비판이야말로 '유물론'이며, 이는 그 무엇보다도 유머인 것이다."(131쪽) 그 유머를 유머로서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이념을 맹신하는 민족주의·국가주의·원리주의자가 되거나 이념의 몰락 앞에서 상처받아 어떠한 이념도 경멸하고자 하는 아이러니스트 또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니힐리스트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아무나 유머리스트가 되는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고진이 끝으로 인용하고 있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머적인 정신상태는 귀중한 천분이며 대개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주는 유머적 쾌감을 맛볼 능력조차도 결여하고 있다. 요컨대 고진의 이 유머론에서 당신이 유머적 쾌감을 맛보지 못한다면 당신에겐 정신적 귀족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거나 결여돼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반대로 만약에 당신이 이렇게 요약된 글에서까지 유머를 발견하고 데굴데굴 구를 수 있는 정신상태로 무장돼 있다면, 굳이 개그콘서트를 보지 않더라도 세상이 얼마나 희극적이며 유머러스한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민족시인이라 불리는 소월(1902-1934)의 시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유머를 쉽게 발견한다. 저다병(각기병)으로 고생하던 그는 끝내 아편을 먹고 자살하는데, 그의 아내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말년의 그는 마음 상하고 아프다고 술만 마셨다. 그리고 술잔만 들면 울기만 했다. 그런 그가 생의 막바지에 쓴 시가 <三水甲山>(1934)이다(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시이다).

三水甲山 내웨왔노 三水甲山이 어디뇨
오고나니 崎險타 아하 물도 많고 山첩첩이라 아하하

내고향을 돌우가자 내고향을 내못가네
三水甲山 멀드라 아하 蜀道之難이 예로구나 아하하

三水甲山이 어디뇨 내가오고 내못가네
不歸로다 내고향 아하 새가되면 떠가리라 아하하

님계신곳 내고향을 내못가네 내못가네
오다가다 야속타 아하 三水甲山이 날가두었네 아하하

내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三水甲山이 날가두었네
不歸로다 내몸이야 아하 三水甲山 못버서난다 아하하

三水甲山은 우리 생의 조건이다. 그것은 '지구'라는 '인간의 조건'(한나 아렌트)이면서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조건(하이데거)이다. 그러한 조건 속에서 우리는 不歸로서 현존한다. 나는 이 불귀가 고진이 말하는 유머에 상응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내 고향'이라는 종교 혹은 이념에 의해 구제될 수 있는 이들은, 그래서 三水甲山을 벗어날 수 있는 이들은 굳이 유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하하'라는 웃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장 높이 날면서 가장 멀리 보는 새들이나 본전 생각나면 이동하는 철새들 또한 유머와 무관하다. 유머를 필요로 하는 건 아침마다 꼬꼬댁하고 울어제끼는 촌닭들이나 두렵고 다급할 때마다 고개를 처박는 칠면조 같은 새들이다. 그 칠면조들의 칠면조다운 자기 초월에의 본능, 혹은 '자기 이중화'의 의지야말로 유머에 값한다. 말하자면, 칠면조는 유머를 아는 새이다. 그리고 소월은 우리가 자랑할 만한 칠면조이다.

지난 연말에 나온 '유머북' 가운데 걸작은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푸른숲)이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무용가 니진스키 자신이 정신질환으로 투병하던 말년에 쓴 일기인데, <니진스키의 고백>(문예출판사, 1975)으로 부분 번역되었던 것이 이번에 같은 역자에 의해서 완역돼 나왔다. 이 책 어느 곳을 들춰도 소월의 '三水甲山' 못지 않은 유머들이 넘쳐나는데, 내가 특히 좋아하는 대목은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바라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347쪽)로 시작하는 부분이다. 이 대목의 75년판 번역은 "나는 울고 싶은데 神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치 않는다. 내 처는 줄곧 울고 있다. 나 역시 운다..."(218쪽)이고, 영역은 "I want to cry but God orders me to go on writing. He does not want me to be idle. My wife is crying, crying. I also..."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보다는 '빈들거리는 걸'이란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나 또한 오늘도 빈들거리지 않고 이 글을 쓴다. 이건 신의 명령이자 다 아시겠지만, 유머이다.

2003. 01. 15.
*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서관여행자 2004-04-04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가 생각하기에 유머는 자아(아이)의 고통에 대해 초자아(부모)가,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메타 레벨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다." 이게 뭔말일까? 프로이트 아저씨가 생각하기에, 유머는 고통의 치유자란 말인가. 그냥 그렇게 읽고 싶다... 웃고 가기에도 짧은 生...
 

‘고백’을 주체 확립의 변증법과 동력학(dynamism)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왜 항상 패배자만 고백하고 지배자는 고백하지 않는가. 그것은 고백이 왜곡된 또 하나의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바꿔 말해 이때 고백은 참회가 아니라 고백이라는 나약한 몸짓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할 것, 즉 지배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가라타니 고진은 주장한다. 만일 이러한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를 수용할 경우, 김현 비평에 등장하는 고백체는 자신의 비평적 가설을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적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고백’이라는 형태의 수사전략을 통해 김현은 자신의 내면을 독자들에게 남김 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 강조함으로써 이를 통해 오히려 자신의 비평적 논제를 독자들에게 강제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을 접한 독자는 따라서 김현 비평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고 동화될 수 있는 심리적 기반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저자와 독자와의 객관적 공모가 ‘고백’이라는 제도 속에는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김현이 의식하였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만은 밝혀둘 필요성이 있겠다(‘고백’에 관한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는,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pp. 103-129를, ‘고백’의 철학적 성격에 대해서는, 폴 리쾨르, 『악의 상징』, 양명수 역(문학과지성사, 1994), pp. 17-36을 참조할 것). (230쪽)

 

...잼있다. 그래도 어쩌랴. 나는 여전히 '고백'체의 글들을 좋아한다. 신변잡기. 잡문. 에세이. 투덜투덜. 넋두리. 이러쿵저러쿵. 웹상에서 굴러다니는 글들... 흠... 이것도 고백의 일종인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연우주 2004-04-02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안 읽었는데.. 읽으셨군요!!! ^^
저도 고백투의 글들 좋아해요~~~ 반가워요~

도서관여행자 2004-04-03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 알게 된 후배와 간단하게 인사를 하다가 그 후배도 <타는 혀>를 읽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어찌나 반갑던지. ^^

zaza 2004-05-0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후배란...저 인가요?ㅋㅋ

도서관여행자 2004-05-09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