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을 주체 확립의 변증법과 동력학(dynamism)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왜 항상 패배자만 고백하고 지배자는 고백하지 않는가. 그것은 고백이 왜곡된 또 하나의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바꿔 말해 이때 고백은 참회가 아니라 고백이라는 나약한 몸짓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할 것, 즉 지배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가라타니 고진은 주장한다. 만일 이러한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를 수용할 경우, 김현 비평에 등장하는 고백체는 자신의 비평적 가설을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적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고백’이라는 형태의 수사전략을 통해 김현은 자신의 내면을 독자들에게 남김 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 강조함으로써 이를 통해 오히려 자신의 비평적 논제를 독자들에게 강제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을 접한 독자는 따라서 김현 비평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고 동화될 수 있는 심리적 기반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저자와 독자와의 객관적 공모가 ‘고백’이라는 제도 속에는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김현이 의식하였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만은 밝혀둘 필요성이 있겠다(‘고백’에 관한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는,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pp. 103-129를, ‘고백’의 철학적 성격에 대해서는, 폴 리쾨르, 『악의 상징』, 양명수 역(문학과지성사, 1994), pp. 17-36을 참조할 것). (230쪽)
...잼있다. 그래도 어쩌랴. 나는 여전히 '고백'체의 글들을 좋아한다. 신변잡기. 잡문. 에세이. 투덜투덜. 넋두리. 이러쿵저러쿵. 웹상에서 굴러다니는 글들... 흠... 이것도 고백의 일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