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립간 > 미국 신문에 관한 뼈 있는 농담

* 미국 신문에 관한 뼈 있는 농담


- 월 스트리트 저널 : 미국을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읽는 신문

- 뉴욕 타임스 : 자신들이 미국을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읽는 신문

- 워싱턴 포스트 : 자신들이 미국을 경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읽는 신문

- 유에스에이 투데이 : 자신들이 미국을 경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워싱턴 포스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읽는 신문

- 엘에이 타임스 : 자신들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면, 국가 경영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읽는 신문

- 보스턴 글로브 : 읽는 사람의 부모들이 한때 미국을 움직였던 사람이 읽는 신문

- 뉴욕 데일리 뉴스 : 누가 미국을 움직이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읽는 신문

- 뉴욕 포스트 : 스캔들이 될 만한 일을 할 수 있으면, 누가 국가를 경영하든 상관지 않는 사람들이 읽는 신문

- 샌프란시스코 크러니클 : 미국이란 나라가 누가 경영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읽는 신문

- 마이애미 헤럴드 : 다른 나라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읽는 신문


 원문 : The Wall Street Journal is read by the people who run the country. The New York Times is read by people who think they run the country. The Washington Post is read by people who think they ought to run the country. USA today is read by people who think they ought to run the country, but don't understand the Washington Post. The Los Angeles Times is read by people who wouldn't mind running the country, they could spare the time. The Boston Globe is read by people whose parents used to run the country. The New York Daily News is read by people who aren't to sure who's running the country. The New York Post is read by people who don't care who's running the country, as long as they do something scandalous. The San Francisco Chronicle is read by people who aren't sure there is a country, or that anyone is running it. The Miami Herald is read by people who are running another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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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5-21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널리즘 잘 아시는 분들, 어서 한국 버전으로 써달라~ 써달라~
 

 1.

[서평]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로마제국 말기의 참된 기독교를 정의하기 위한 투쟁

리차드 루벤슈타인 지음, 한인철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392쪽.



오늘날 세상 곳곳의 참혹한 전쟁과 우리 사회의 척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의 부활절이 다가 오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를 가장 사랑한다"는 부시 대통령의 제국주의적 행태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역사상 가장 잔인한 종족학살을 계속해 온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기독교인들의 경우, 그 종교적 확신이 이처럼 증오와 살인, 인종청소와 전쟁으로 표출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한국에서 기독교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에 가깝지만, 기독교인들이 많은 사회적 비리에 연루되어 일반인들의 지탄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예수의 삶을 본받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즉 많은 경우에 기독교인들의 믿음과 생활이 괴리된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의 제국주의적 기독교가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배반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정직하게 직시하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성을 근본적으로 회복할 길이 없을 것이며, 서구 교회의 몰락이 보여주듯 한국 이처럼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으려 하지 않고 그의 십자가의 공로를 단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예수를 배반하게 된 가장 중요한 신학적 근거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에서부터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승격시킨 니캐아 회의(325년)의 결정에 있을 것이다. 즉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을 가진 분"이라고 결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예수는 기독교인들이 본받을 수 없는 분이 되었고, 또한 그를 믿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본받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로마제국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서 예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하나님의 나라, 그 사회적 및 종교적 "브로커가 없는 평등주의적 나라"(크로산)를 바라보고 그 나라를 예수처럼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높이게 되어, 결국에는 예수의 "피의 공로"만을 바라보고 예수의 대안적인 비전을 배반하는 기독교가 된 모습이다.


종교적 갈등 문제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 리차드 루벤슈타인이 쓴 이 책은 로마제국 말기에 예수의 신적인 지위에 관해 벌어진 아리우스 논쟁을 통해,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에 가까운 위대한 인간"에서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고백되게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생생하게 파헤친 책이다. 즉 예수의 신격화 과정의 마지막 순간들에서, 로마제국 말기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어떤 요인들이 작용하여,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본질"로 결정하였는지를 역사적으로 규명한 책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황제들과 성직자들이 얼마나 많은 정치적 야합과 폭동, 살인에 가담했는지를 파헤침으로써, 로마 카톨릭 교회와 대부분의 개신교 종파들이 정통적인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이 니캐아 신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독교의 정통이어야만 하는지를 반성하도록 촉구한다. 21세기 기독교를 위한 새로운 길은 어디에 있는지를 근원적으로 성찰하게 만드는 책이다.


- 김준우 (감신대 초빙교수,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2.

 

먼저 동정녀 마리아에서 빌라도로 직행하는 기독교 신앙고백의 문제를 오늘 성찰해 보겠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교회신앙고백이면서 지난 천년이상 교회의 교리문답의 골간으로 존중되어 온 사도신조를 보면, 거기에는 실물 예수의 모습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허전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기원 5세기 이후 오늘까지 이 신앙고백이 거의 모든 기독교 종파들에 의해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암송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정말 놀랍습니다. 역사의 예수가 없는데도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도무지 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그들의 불감증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모두 역사적 사실(fact)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근본주의자들이 그렇게 말함), 또는 그것이 예수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 교회 공동체의 신앙적 고백의 표현이라 하더라도(실존주의자들이 그렇게 주장함), 그 신앙고백의 내용은 실물 예수의 말씀과 행적과 삶의 주요 부분을 기초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실물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도신경은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계 거의 모든 기독교 교회가 사도신조를 정통적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예수의 현실성(reality)이 실종된 사도신조의 내용을 확인하는 저의 마음은 그간 여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불편을 오늘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 저를 불편하게 하고 놀라게 하는 것은 예수의 실종을 조금도 허전해 하거나 불편해 하거나 놀라워하지 않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그 상투적 평안함, 그 관례적 인식, 그 기독교적 인식이라 하겠습니다.


 실물 예수는 선포자요, 증거자요, 실천가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을 이룩하시기 위해 구체적인 사역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선포자 예수선포된 그리스도로 변하게 되면서 역사의 예수는 지난 이천년 동안 박제화되고 만 것 같습니다. 찬란한 교리의 옷을 입고 있는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의 감동적인 선포와 역동적인 실천과는 무관한 신앙숭배의 대상으로 전락 한 듯 합니다. 예수가 선포자요 실천자라면 그리스도는 더더욱 선포자가 되어야 하고 더 뜨거운 실천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는 실물 예수 이상이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역사의 예수 이하로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세계적인 천주교 신학자요 성서역사 학자인 크로싼(Crossan)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Christ is more than Jesus, but not less than Jesus."


 이 말은 참으로 실물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간의 관계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보다 더 위대한 존재일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역사의 예수 모습을 훼손하거나 축소해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축소되고, 그리스도는 확장되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이어주는 중개인(broker)의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예수는 당시 유대 종교적인 브로커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아빠(Abba) 하나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음을 선포하시고, 무상의 치유행위와 평등한 밥상공동체를 펼쳐 보임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직통으로 체험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종교적 전문 중개인, 교리적 전업 복덕방, 신학적 전문 브로커를 인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뜻에서 실물 예수는 하나님을 항상 직접 체험했던 참으로 영성이 충만한 평신도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제도교회 틀 속에서 교리적 숭배의 대상인 그리스도로 변질되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개하는 독점적 브로커로 전락하게 된 셈이지요. 이렇게 하여 교리의 그리스도는 역사의 예수를 위축 또는 사상시키고 말았습니다.


- 한완상, "예수 없는 기독교: 동정녀와 빌라도 사이의 공백" 中

 


3. 

 

십자가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두 가지 시선, 즉 예수 섬기기와 예수 따르기의 균형이 무너진 것을 교회나 

굳어버린 교리에만 탓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의 서평을 읽으니 이 책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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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문학상 수상작 모음집 1961~1968 - 6~12회
김승옥 외 지음 / 조선일보사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1.

남정현의 <너는 뭐냐>는 세태소설로도, 정치풍자소설로도 읽힌다. 소설은, “아무리 그렇긴 하더라도 제발 똥만은 좀 변소에 가서 싸시는 편이 좋겠다고 또 한번 다짐해보는 관수(寬洙)였다.”로 시작하고 있다. 맑은 아침나절에 번역문학가 관수의 아내가 방에서 요강에 푸더덕 푸더덕 똥을 싸는 게 남정현이 보여주는 첫 장면이다. 남정현은 <분지>라는 소설 제목으로 이름만 듣던 소설가였는데, 똥을 무척이나 좋아하나 보다. 어쩌면 배설의 카타르시스가 그의 문학관인지도 모르겠다. 똥이란 말은 자연스레 풍자나 해학, 폭로, 긴장과 억압의 해소, 저급함 등의 어휘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똥을 통해서 남정현을 더 잘 읽을 수 있을지도. 그렇다면, 이렇게 함부로 막말 해보자. 남정현의 이 소설에는 똥 같은 인물과 똥 같은 세계가 똥 싸기의 과정에 따라 펼쳐지고 있다. 똥 같은 인물들과 세계는 그가 비꼬려는 대상이다. 관수의 아내는 “현대적인 삶”를 부르짖고 남편 앞에서 지금 하고 있는 연애의 경과를 자랑하는 자유연애의 신봉자로 보인다. 그런 아내는 변소가 위생에 좋지 않다고 아침마다 요강에 턱 하니 앉아서 똥을 눈다. 삼류 연예잡지를 경전으로 모시는 식모 애와 라디오 드라마에 죽고 사는 주인집 애들. 관수를 뺀 이들 모두는 관수를 바보 취급한다. 관수의 이름에 벌써 ‘너그러울 관’자가 들어있기는 하지만 관수는 정말 바보가 되어 당하기만 한다. 그러다 결말에 이르러 시위대와 합류한 관수는 신이 나서 함성을 지르다가 미끈한 세단차에 힘 좀 쓰던 권력자로 보이는 놈과 함께 한 아내에게 “너는 뭐냐!”고 호통친다. 관수의 시원한 똥싸기.


전광용의 <꺼삐딴 리>는 중고등학교 시절 문학 시간에 자주 접했던 소설. 친일에서 친러로, 친러에서 친미로, 끊임없이 권력에 붙어서 빌어먹는 인물의 전형인 ‘꺼삐딴 리’. 꺼삐딴 리는 작가의 전적인 상상력에서 탄생한 인물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시공간의 최상부 층계에서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 그들은 메스뿐만 아니라 분필을, 지폐를, 총대를, 그리고  펜까지도 들고 있었다.


2.

소설문학에서 사회와 개인은 어떻게 그려지는가. 이 소설집은 1961년부터 68년에 이르는 6편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다. 아마도, 이 6편의 소설을 두고서 60년대의 소설 경향과 사회 풍경, 개인 의식을 더듬는 일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남정현의 <너는 뭐냐>에서는 늘 당하기만 하고 바보 취급 당하는 관수가 시위대와 만나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개인으로 거듭난다. 4.19 이전과 이후의 인간상이 관수라는 개인의 변화 과정으로 형상화된 것? 혹은,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빌빌대던 지식인들이 4.19를 맞아 얼마나 신나했는지를 보여준 것? 전광용은 주인을 계속 바꿔서 ‘마름 노릇’하는 <꺼삐딴 리>를 통해서 사회 비판적 시선을 날카롭게 내리꽂는다. 송병수의 <잔해>와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에서는 6.25의 기억이 아직도 60년대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잔해>는 기체를 잃고 탈출해서 방황하다 최후를 맞이하는 공군 중위가 주인공이고 <병신과 머저리>의 ‘형’은 6.25를 거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서는 황량한 겨울, 서울 거리에 고독이 홀로 걷고 있다. 고독은 분자화된 인간들이 사는 대도시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며, 문학과 인간사의 오래된 주제지만 그것이 ‘산업화된 대도시에서의 고독’으로 나타난 것이기에 다시 생각해 볼만한 것이다.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는 6.25 전상자 형과 그 이후의 세대인 아우의 환부가 서로 다른 것이라는 것으로 세대론을 제시한다. 이렇게 ‘시간’에 집중해서 소설을 읽어내면 전쟁과 전쟁 이후의 다른 삶(예컨대 형은 전시라는 극한 상황중의 죽음과 인간성의 문제, 동생은 사랑 혹은 결혼의 문제)에 주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예술과 자아에 대한 소설로 읽으면, 이렇게 읽힌다. 예술이 그려내야 할 환부는, 보이는 환부인가 보이지 않는 환부인가, 전쟁과 같은 사회적 역사적 환부인가 사랑의 실패 같은 개인의 환부인가. “망설이기만 할 뿐 한번도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고 남의 행동의 결과나 주워 모아다 자기 고민거리로 삼는 기막힌 인텔리”와 “영영 열리지 않을 문의 성주(城主)”로 대변되는 자아의 문제. 전자는 관념적 지식인(이청준 자신일 수도 있고 소설가 전체일 수도.)의 문제이고 후자는 환부를 모르는 환부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 개개인 전부의 특질이나 혹은 유달리 그런 환부를 지닌 예술가들에 대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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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쎈연필 > 삶의 피안에서 불멸하는 예술가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정신은, 혼은, 하나의 몸에 깃들어 있다. 때론 아주 크고 깊은 정신과 혼을 가진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의 정신과 혼 역시 너무 작은 몸에 갇혀 있다. 몸에 갇힌 심혼은 터져 나올 수밖에 없고 극에 달하면 폭발한다. 세상과 타협을 하면 성자가 되고, 외면하면 세상으로부터 광인으로 몰려 박해 받는다. 주체 못할 광기는 다른 형태로 표출되고, 그 최상의 귀착점은 언제나 예술이다. 광인의 삶을 살았지만 예술의 천재였던 그들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지상은 어두워지고 차가워지며, / 인간의 영혼은 고난으로 쇠약해지리라. / 선량한 신들이 이런 청년들을 이따금씩 지상에 보내어 / 주름진 인간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만 있다면.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훨덜린
   우리 근대 문학사의 박제가 된 천재 이상은 역작 『종생기』에서, 만 이십칠 세를 살다 죽은 자신이 요사(夭死)가 아니라 노사(老死)라고 말했다.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는 「나는 남들이 한 시간을 살 동안 세 시간을 살았다」고 내면 일기에 썼다. 너무 일찍 세상의 이면을 알아 버린 <견자>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겪는다. 보들레르가 존경했던 소설가 에드가 앨런 포 역시 극한의 광기와 무의식의 어두운 지하실, 죽음 충동을 모티프로 다뤘다. 포 또한 그의 재능을 시기하는 문단으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고, 가난과 고독과 마약과 술로 비참한 삶을 살다가 볼티모어의 한 주점에서 쓰러진 지 사흘 만에 죽었다. 시인 이성복이 전공해서 우리나라에도 다소 알려진 네르발은 광기의 기록으로 알려진 『오렐리아』를 썼다. 독일의 노발리스, 영국의 블레이크에 비견되는 네르발 역시 동시대의 독자로부터 외면 받고 20세기 초까지 잊혀진 작가였다. 서른세 살에 정신병을 앓았던 그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후 무일푼으로 방랑하다가 어느 거리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로트레아몽은 스물네 살에 파리의 몽마르트 어느 호텔에서 쓸쓸히 죽었다. 우루과이에서 파리로 꿈을 안고 유학 온 청년 시인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가 죽은 호텔방에 있던 노트가, 내장에서 게워낸 듯한 광기의 울부짖음과 잔인한 이미지의 난장으로 범벅된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이다. 사회로부터 따돌림 당하며 광인 취급 받기는 블레이크도 훨덜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작품 속에 세상은 공통적으로 병들어 있지만, 외려 세상이 그들을 병든 사람 취급했다. 그들은 세상을 온전히 살아 낼 수가 없었다.
   현대의 문화는 이미지의 과잉이다. 도처에서 융기하는 혼란의 이미지들. 카메라는 가능한 모든 이미지들을 담아내고, 그 이미지들을 우리는 소비한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티브이를 통해 전달되고, 우리는 「아, 끔찍해」라는 말과 함께 채널을 돌린다. 마침내는 현대의 전쟁이 가상게임과 같다는 이론까지 등장한다. 미사일 버튼을 누르고 화면으로 확인하기 때문에 가상실재라는 것이다. 가해자의 시선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시뮬라크르의 허를 망각한 채 새로움에만 열광한다. 곳곳에서 발발하는 고통들은 오롯이 타인의 고통일 따름이다. 우리는 연민하는 방법마저 잊고 냉소의 늪에 빠진다. 냉소하는 때야말로 시선이 가장 끔찍한 폭력이 된다. 유례없이 감수성이 절멸된 우리 시대에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세상에 각인시켜야 한다. 18세기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고야는 불혹에 이르러 귀머거리가 된다. 출세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 최고의 지위에 오른 그는 청각을 잃어서야 비로소 심연의 눈을 떴다. 그 전까지의 화려한 색채와 궁정 문화를 모두 버린다. 죽기 전까지 어두운 판화를 그렸으며 그로테스크한 소재에 천착했다. 그러한 그림들은 모두 현실에서 비롯되었다. 『1808년 5월 2일』 『1808년 5월 3일』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마드리드 주민이 프랑스군을 공격한 사건이 첫 번째 작품에서 묘사되었고, 두 번째 작품에서는 민중 봉기했던 5월 2일의 투사들이 프랑스군에 의해 보복 공개 처형당한 사건이 묘사되었다. 그림 속의 처형 집행자들은 얼굴이 없다. 뒷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처형 집행자들의 음침한 색과는 대조적으로, 가열된 것처럼 빛을 내는 밝은 색으로 칠해진 불행했던 민중들은, 불멸의 존재가 되어 아직도 우리에게 1808년 5월 3일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이시켜 준다. 고야는 후에도 『종교재판소 광경』과 판화집 『전쟁의 참화』 등의 그림을 그려 잊을 수 없는 고통을 불멸하는 예술로써 존재케 했다.
   메시아 콤플렉스라는 용어가 있다. 이천 년 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던 청년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던 점에서 이천 년 전의 청년과 이들 예술가들의 운명은 닮았지만, 절대적인 믿음마저 잃은 채 고독하게 죽어갔다는 점에서 예술가들의 운명은 더욱 애달프다. 모질게 버림받고, 철저히 무시당한 채, 오직 작품만이 자신과 세계의 구원이 될 거라 믿었던 그들.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향수』에 등장하는 도메니코라는 사내는 인류가 썩어 파멸할 지경에 처했다고 말한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는 도메니코 자신이 희생해야 하며, 같은 시간에 다른 곳에서 자신을 위한 촛불이 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메니코는 다른 곳에서 자신을 위해 흔들릴 촛불을 위해 온 몸을 불살라 산화한다.
   훨덜린이 비극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으로 승화시킨 바 있는 헬라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의 생애도 도메니코와 다를 바 없다. 고향의 민중들에게 버림 받고, 어지럽혀진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에트나 산의 화구에 몸을 던진다. 그것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세계를 위해 기꺼운 몰락을 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엠페도클레스의 불, 물, 공기, 흙의 4원소 연금술 이론은 심리학자 융과 상상력의 철학자 바슐라르에 의해 거듭 연구되어 예술적 기폭제로 우리의 심혼을 울린다.
   평생을 도박과 간질에 시달렸던 광기의 천재 도스토예프스키의 4대 장편은 인간 심연의 어두운 그림자를 탐색한 대작으로 지금껏 널리 읽히고 있다. 그의 일련 소설들은 온통 광기로 들끓는다. 『죄와 벌』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또한 광기의 사내다. 소설 속 어린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느 날 광장에서 학대 받는 말을 발견하곤 눈물을 흘리며 달려가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단 하나의 심리학자라고 말한 바 있는 철학자 니체는 1888년 이탈리아 토리노의 알베르토 광장에서 채찍질 당하는 말목을 끌어안고 울다가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니체는 서구가 강요해 왔던 <유일무이의 진리>란 관념을 파괴했다. 이성으로 인해 억압된 감각의 자유를 되찾았다. 「니체는 생각을 많이 해서 미쳤다. 나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치지 않을 것이다」고 광기의 일기를 썼던 러시아의 전설적 무용가 니진스키 역시 보름간의 일기를 마치자마자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그 후로 30년을 정신병원에서 살다 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거리의 어린 창녀 소냐의 발에 입 맞추며 「나는 당신에게 절한 게 아니라 온 인류의 고통에 입을 맞춘 거요」라고 말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빌려, 온 인류의 병폐를 끌어안고 권위를 무너뜨렸다. 니진스키 또한 영혼의 병을 앓았다. 그는 썼다. 인류의 모든 고통이 사라질 때에 자신의 병은 나을 것이며, 그때까지 앓을 것이라고. 보들레르와 네르발과 니체와 고흐의 광기 혐의가 사회의 음모라고 비판한 아르토 역시 예술로써 병든 세상을 앓았다. 그는 연극을 페스트에 비유했다. 페스트 환자가 온 힘을 쇠진하여 무기력해지는 순간이 연극의 최고점이며, 페스트가 물러 간 희열을 예술의 절정이라고 말했다. 삶은 궁극적으로 잔혹하므로, 잔혹한 방식의 예술적 치유가 필요하다고 부르짖었다. 고통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극렬한 감정이입을 하는 것. 그 잔혹한 치유를 위해 예술가들은 광기의 열정으로 투신한다. 육체의 지속은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고, 명예에 집착하는 것은 기억의 지속 때문이며, 명작을 창작하는 것이 영혼의 생산이다. 영혼의 생산자들은 작품에서 자신의 예술혼을 불살랐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이 시공간을 초월해 미약한 촛불을 켜리라 믿었다. 불멸의 예술을 느낄 수 있는 축복, 그것이 병든 세상을 구원해 낼 열쇠다. 반 고흐가 밤 풍경을 그리기 위해 모자에 열두 개 초를 매달았던 심정을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의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은 별을 생생히 보게 된다. 아름다움의 어원이 앓음다움인 것은 괜한 말이 아니다. 우리는 그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니진스키의 『영혼의 절규』만큼 예술혼의 고통과 사랑을 잘 나타내는 글은 또 없을 것이다. 비록 불치일지라도 미약한 치유를 위해 우리의 의지로 선택해야 하는 병이다.
   「나는 고통을 느낀다. 내 영혼은 병들었다. 나의 병은 영혼의 병이지 마음의 병이 아니다. 내 병은 쉬이 치유되기엔 너무나 위중하다. 나는 불치이다. 내 영혼은 앓고 있다. 나는 가련하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비참하다. 이 구절을 읽으면 누구나 고통스러워하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다. 나는 신이 되고 싶다. 나는 춤을 추고 싶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나는 피아노를 치고 싶다. 나는 시를 쓰고 싶다. 나는 발레를 창작하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우리는 서로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광기와 예술가, 라는 23.1매짜리 기사다. 30매에서 22매만 쓰기로 하고, 나머지는 다른 기사를 넣기로 했다. 1.1매를 초과해서 200자쯤 줄여야 한다. 아르토에 대한 글도 썼는데, 1.8매를 줄여야 한다. 확실히 내가 고민하고 쓴 문장이라 지우는 게 힘겹다. 명동 캠퍼스에서 수업을 듣고 집 앞에 도착했는데 마침 학보사 선배들과 조우했고, 술을 먹었다. 대뜸 "너 광기에 사로잡혀 일찍 죽고 싶지?" 라고 묻는 선배에게 한사코 아니라고 말했지만 "너의 예술관을 알겠어" 라는 말을 들었다. 다들, 내가 쓴 글은 기사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런 주제를 써 버린 내가 대단하다면서 '광기'랬다. "후배님은 아르토의 친구 같아요. 하지만 저라면 그렇게 쓰진 않았을 거예요" 라고 한 선배가 말했다. 그 애매한 말의 뜻이 헛갈린다. 기사체가 아니지만 어쩌겠나. 학보는 한 달에 한 번 찍고, 조판은 말일인데. 벌써 내일이구만.

ㅇㅈ이가 내 컴을 보더니 파워가 타 버렸단다. 2-3만원쯤 한다나. 나야 당장 급하니, 바가지 쓰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방에서 자주 밥을 얻어 먹는 ㅇㅈ이는 중고를 얻어서  공짜로 주겠단다. 고마운 일이다. 해서, 집에 오는 길, 함께 했던 동기들에게 떡볶이를 샀다. 나는 떡볶이를 내 돈 주고 3천원 이상 먹어 본 적이 없는데, 6천원이 나왔다. 계산할 때, 뱃속에 있던 게 다 꺼지는 듯했다. (成峨야 돼지는 너다)

모두들 기피하는 주제를 쓰느라고 나는 요 며칠 새 엄청난 책들을 속독했다. 나 스스로도 해괴하지만 이틀 동안 뒤적거린 책이 수십 권이다. 때문에 이런 내가 한심스럽기도 하다. 상호텍스트 어쩌고를 떠나서, 내가, 내가, 내가 한심하다. 만약에 내 곁에 책이 없다면…. 읽는 만큼 쓰는 게 안 따른다는 것을 절감하는 요즘이다. 하나를 읽어도 제대로 읽어야 할 텐데. 어쨌거나 한숨 돌리고 나니 조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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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4-29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을 극한까지 심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육체라는 장벽에 이르러 끝끝내 좌절하고야만다. 인간은 몸의 존재이므로... 이런 문제에 직면해서 작가, 학자, 수도자, 예술가 등등은 어떻게 해답을, 아니, 잠정적 결론을 어떻게 내렸을까. 또 그런 대답을 가지고 어찌 살았는가, 심히 궁금하다. 나는 단지 소박하게 '열정'이란 말에 이끌리는 정도이고, 실제로는 게으름 떠는 범인이지만, 심히 궁금타!
 
 전출처 : 갈대 >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中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테세우스  실날 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인생은 살 만한 거지요

오이디푸스  질문이 복합적이군요

피타고라스  만사가 직각처럼 반듯합니다

소크라테스  모르겠소

플라톤  이상적으로 지냅니다

노아  재해 보험 좋은 게 하나 있는데, 알고 계세요?

루시퍼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하느님이 아실 거요

단테  천국에 온 기분입니다

노스트라다무스  언제 말입니까?

데카르트  잘 지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갈릴레이  잘 돌아갑니다

뉴튼  제때에 맞아떨어지는 질문을 하시는군요

비발디  계절에 따라 다르지요

베토벤  소리를 죽이고 지냅니다

쇼펜하우어 잘 지내려는 의지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니체  잘 지내고 못 지내고를 초월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카프카  벌레가 된 기분입니다

다윈  사람은 적응하게 마련이지요

카뮈  부조리한 질문이군요

나폴레옹  유배된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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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4-28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 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추억이... 물론 이 글에서 나타난 것처럼 어느 정도의 지적인 스키마가 있어야 에코를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다. 그때 이해하지 못한 에코의 유머들은 나를 얼마나 쪽팔리게 했던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봐야겠다.

잡담 : 에코에게 기호학을 직접 배웠던 국내의 어느 학자의 기억에 따르면, 에코는 쉬지 않고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단다. 웃음은 삶을 이끄는 강력한 에너지...

연우주 2004-04-29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에코는 그런 사람이군요. 글 잘 봤습니다. 오랜만에 반갑습니다.

비로그인 2004-05-07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빌려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