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평]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로마제국 말기의 참된 기독교를 정의하기 위한 투쟁
리차드 루벤슈타인 지음, 한인철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392쪽.
오늘날 세상 곳곳의 참혹한 전쟁과 우리 사회의 척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의 부활절이 다가 오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를 가장 사랑한다"는 부시 대통령의 제국주의적 행태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역사상 가장 잔인한 종족학살을 계속해 온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기독교인들의 경우, 그 종교적 확신이 이처럼 증오와 살인, 인종청소와 전쟁으로 표출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한국에서 기독교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에 가깝지만, 기독교인들이 많은 사회적 비리에 연루되어 일반인들의 지탄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예수의 삶을 본받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즉 많은 경우에 기독교인들의 믿음과 생활이 괴리된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의 제국주의적 기독교가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배반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정직하게 직시하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성을 근본적으로 회복할 길이 없을 것이며, 서구 교회의 몰락이 보여주듯 한국 이처럼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으려 하지 않고 그의 십자가의 공로를 단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예수를 배반하게 된 가장 중요한 신학적 근거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에서부터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승격시킨 니캐아 회의(325년)의 결정에 있을 것이다. 즉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을 가진 분"이라고 결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예수는 기독교인들이 본받을 수 없는 분이 되었고, 또한 그를 믿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본받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로마제국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서 예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하나님의 나라, 그 사회적 및 종교적 "브로커가 없는 평등주의적 나라"(크로산)를 바라보고 그 나라를 예수처럼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높이게 되어, 결국에는 예수의 "피의 공로"만을 바라보고 예수의 대안적인 비전을 배반하는 기독교가 된 모습이다.
종교적 갈등 문제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 리차드 루벤슈타인이 쓴 이 책은 로마제국 말기에 예수의 신적인 지위에 관해 벌어진 아리우스 논쟁을 통해,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에 가까운 위대한 인간"에서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고백되게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생생하게 파헤친 책이다. 즉 예수의 신격화 과정의 마지막 순간들에서, 로마제국 말기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어떤 요인들이 작용하여,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본질"로 결정하였는지를 역사적으로 규명한 책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황제들과 성직자들이 얼마나 많은 정치적 야합과 폭동, 살인에 가담했는지를 파헤침으로써, 로마 카톨릭 교회와 대부분의 개신교 종파들이 정통적인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이 니캐아 신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독교의 정통이어야만 하는지를 반성하도록 촉구한다. 21세기 기독교를 위한 새로운 길은 어디에 있는지를 근원적으로 성찰하게 만드는 책이다.
- 김준우 (감신대 초빙교수,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2.
먼저 동정녀 마리아에서 빌라도로 직행하는 기독교 신앙고백의 문제를 오늘 성찰해 보겠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교회신앙고백이면서 지난 천년이상 교회의 교리문답의 골간으로 존중되어 온 사도신조를 보면, 거기에는 실물 예수의 모습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허전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기원 5세기 이후 오늘까지 이 신앙고백이 거의 모든 기독교 종파들에 의해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암송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정말 놀랍습니다. 역사의 예수가 없는데도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도무지 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그들의 불감증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모두 역사적 사실(fact)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근본주의자들이 그렇게 말함), 또는 그것이 예수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 교회 공동체의 신앙적 고백의 표현이라 하더라도(실존주의자들이 그렇게 주장함), 그 신앙고백의 내용은 실물 예수의 말씀과 행적과 삶의 주요 부분을 기초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실물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도신경은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계 거의 모든 기독교 교회가 사도신조를 정통적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예수의 현실성(reality)이 실종된 사도신조의 내용을 확인하는 저의 마음은 그간 여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불편을 오늘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 저를 불편하게 하고 놀라게 하는 것은 예수의 실종을 조금도 허전해 하거나 불편해 하거나 놀라워하지 않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그 상투적 평안함, 그 관례적 인식, 그 기독교적 인식이라 하겠습니다.
실물 예수는 선포자요, 증거자요, 실천가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을 이룩하시기 위해 구체적인 사역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선포자 예수가 선포된 그리스도로 변하게 되면서 역사의 예수는 지난 이천년 동안 박제화되고 만 것 같습니다. 찬란한 교리의 옷을 입고 있는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의 감동적인 선포와 역동적인 실천과는 무관한 신앙숭배의 대상으로 전락 한 듯 합니다. 예수가 선포자요 실천자라면 그리스도는 더더욱 선포자가 되어야 하고 더 뜨거운 실천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는 실물 예수 이상이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역사의 예수 이하로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세계적인 천주교 신학자요 성서역사 학자인 크로싼(Crossan)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Christ is more than Jesus, but not less than Jesus."
이 말은 참으로 실물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간의 관계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보다 더 위대한 존재일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역사의 예수 모습을 훼손하거나 축소해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축소되고, 그리스도는 확장되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이어주는 중개인(broker)의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예수는 당시 유대 종교적인 브로커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아빠(Abba) 하나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음을 선포하시고, 무상의 치유행위와 평등한 밥상공동체를 펼쳐 보임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직통으로 체험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종교적 전문 중개인, 교리적 전업 복덕방, 신학적 전문 브로커를 인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뜻에서 실물 예수는 하나님을 항상 직접 체험했던 참으로 영성이 충만한 평신도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제도교회 틀 속에서 교리적 숭배의 대상인 그리스도로 변질되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개하는 독점적 브로커로 전락하게 된 셈이지요. 이렇게 하여 교리의 그리스도는 역사의 예수를 위축 또는 사상시키고 말았습니다.
- 한완상, "예수 없는 기독교: 동정녀와 빌라도 사이의 공백" 中
3.
십자가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두 가지 시선, 즉 예수 섬기기와 예수 따르기의 균형이 무너진 것을 교회나
굳어버린 교리에만 탓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의 서평을 읽으니 이 책 읽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