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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문학상 수상작 모음집 1961~1968 - 6~12회
김승옥 외 지음 / 조선일보사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1.
남정현의 <너는 뭐냐>는 세태소설로도, 정치풍자소설로도 읽힌다. 소설은, “아무리 그렇긴 하더라도 제발 똥만은 좀 변소에 가서 싸시는 편이 좋겠다고 또 한번 다짐해보는 관수(寬洙)였다.”로 시작하고 있다. 맑은 아침나절에 번역문학가 관수의 아내가 방에서 요강에 푸더덕 푸더덕 똥을 싸는 게 남정현이 보여주는 첫 장면이다. 남정현은 <분지>라는 소설 제목으로 이름만 듣던 소설가였는데, 똥을 무척이나 좋아하나 보다. 어쩌면 배설의 카타르시스가 그의 문학관인지도 모르겠다. 똥이란 말은 자연스레 풍자나 해학, 폭로, 긴장과 억압의 해소, 저급함 등의 어휘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똥을 통해서 남정현을 더 잘 읽을 수 있을지도. 그렇다면, 이렇게 함부로 막말 해보자. 남정현의 이 소설에는 똥 같은 인물과 똥 같은 세계가 똥 싸기의 과정에 따라 펼쳐지고 있다. 똥 같은 인물들과 세계는 그가 비꼬려는 대상이다. 관수의 아내는 “현대적인 삶”를 부르짖고 남편 앞에서 지금 하고 있는 연애의 경과를 자랑하는 자유연애의 신봉자로 보인다. 그런 아내는 변소가 위생에 좋지 않다고 아침마다 요강에 턱 하니 앉아서 똥을 눈다. 삼류 연예잡지를 경전으로 모시는 식모 애와 라디오 드라마에 죽고 사는 주인집 애들. 관수를 뺀 이들 모두는 관수를 바보 취급한다. 관수의 이름에 벌써 ‘너그러울 관’자가 들어있기는 하지만 관수는 정말 바보가 되어 당하기만 한다. 그러다 결말에 이르러 시위대와 합류한 관수는 신이 나서 함성을 지르다가 미끈한 세단차에 힘 좀 쓰던 권력자로 보이는 놈과 함께 한 아내에게 “너는 뭐냐!”고 호통친다. 관수의 시원한 똥싸기.
전광용의 <꺼삐딴 리>는 중고등학교 시절 문학 시간에 자주 접했던 소설. 친일에서 친러로, 친러에서 친미로, 끊임없이 권력에 붙어서 빌어먹는 인물의 전형인 ‘꺼삐딴 리’. 꺼삐딴 리는 작가의 전적인 상상력에서 탄생한 인물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시공간의 최상부 층계에서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 그들은 메스뿐만 아니라 분필을, 지폐를, 총대를, 그리고 펜까지도 들고 있었다.
2.
소설문학에서 사회와 개인은 어떻게 그려지는가. 이 소설집은 1961년부터 68년에 이르는 6편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다. 아마도, 이 6편의 소설을 두고서 60년대의 소설 경향과 사회 풍경, 개인 의식을 더듬는 일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남정현의 <너는 뭐냐>에서는 늘 당하기만 하고 바보 취급 당하는 관수가 시위대와 만나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개인으로 거듭난다. 4.19 이전과 이후의 인간상이 관수라는 개인의 변화 과정으로 형상화된 것? 혹은,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빌빌대던 지식인들이 4.19를 맞아 얼마나 신나했는지를 보여준 것? 전광용은 주인을 계속 바꿔서 ‘마름 노릇’하는 <꺼삐딴 리>를 통해서 사회 비판적 시선을 날카롭게 내리꽂는다. 송병수의 <잔해>와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에서는 6.25의 기억이 아직도 60년대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잔해>는 기체를 잃고 탈출해서 방황하다 최후를 맞이하는 공군 중위가 주인공이고 <병신과 머저리>의 ‘형’은 6.25를 거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서는 황량한 겨울, 서울 거리에 고독이 홀로 걷고 있다. 고독은 분자화된 인간들이 사는 대도시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며, 문학과 인간사의 오래된 주제지만 그것이 ‘산업화된 대도시에서의 고독’으로 나타난 것이기에 다시 생각해 볼만한 것이다.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는 6.25 전상자 형과 그 이후의 세대인 아우의 환부가 서로 다른 것이라는 것으로 세대론을 제시한다. 이렇게 ‘시간’에 집중해서 소설을 읽어내면 전쟁과 전쟁 이후의 다른 삶(예컨대 형은 전시라는 극한 상황중의 죽음과 인간성의 문제, 동생은 사랑 혹은 결혼의 문제)에 주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예술과 자아에 대한 소설로 읽으면, 이렇게 읽힌다. 예술이 그려내야 할 환부는, 보이는 환부인가 보이지 않는 환부인가, 전쟁과 같은 사회적 역사적 환부인가 사랑의 실패 같은 개인의 환부인가. “망설이기만 할 뿐 한번도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고 남의 행동의 결과나 주워 모아다 자기 고민거리로 삼는 기막힌 인텔리”와 “영영 열리지 않을 문의 성주(城主)”로 대변되는 자아의 문제. 전자는 관념적 지식인(이청준 자신일 수도 있고 소설가 전체일 수도.)의 문제이고 후자는 환부를 모르는 환부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 개개인 전부의 특질이나 혹은 유달리 그런 환부를 지닌 예술가들에 대한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