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수상작 모음집 1956~1960 - 1~5회
서기원 외 지음 / 조선일보사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동인문학상의 1회에서 5회까지의 수상작 모음집.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 1회 수상작가인 김성한의 회고에 따르면, 첫 회 수상식 때에는 <사상계>의 재정이 어려워서 빈 봉투를 주고받기로 하고 실제로 그랬단다. 지금은 조선일보사로 넘어가고 돈 잔치(?)가 되어버린 동인문학상을 떠올려 보면 여러 감정들이 오간다.

김성한의 <바비도>는 ‘1419년 이단으로 지목되어 분형(焚刑)을 받은 재봉직공’ 바비도의 이야기. 바비도의 죄목은 영역 성경을 읽었다는 것. 권력유지를 위해 소수가 독점하던 성경 해석권에 이 가련한 바비도가 도전한 까닭이었다. 우리가 진리를 알아내기 힘든 까닭은 몇몇 소수가 진리를 독점해왔기 때문…? 그런 의미에서 내 머릿속에는, 예수나 바비도나 전태일은 같은 선상에 놓인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바비도>를 읽어보자. 바비도의 이름을 지우고 전태일을, 영역 성경을 지우고 근로기준법이라고 써넣고 다시 읽어보자!

선우휘의 <불꽃>은 일제강점기에서부터 한국전쟁 당시까지를 시적 배경으로 삼아 주인공 ‘현’의 파란한 생을 그린다. 워낙에 그 시절이 찢기고 찢기던 시절이라는 데에는 다들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현의 갈등은 이것이다 : ‘조용한’ 인간 대 광기의 청부업자의 대결. 물론 조용한 인간이야 현 그 자신(확장한다면, 길가에 쓰러져 죽은 어린 병사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까지). 청부업자들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여 연설조로 장황하게 얘기하는 다카다 교수나, 이북 출신의 레드콤플렉스 환자인 교장, 자신들의 “솜옷에 들끓는 이를 퇴치하”지도 않으면서 “인민의 해방이란 방정식에 절대적인 의미를 붙이고 이를 갈고 있는 이들”(=좌파 독립운동가?), “착취 없고 계급 없는 사회의 건설”을 꿈꾸는 옛 친구에서 자신의 추적자가 된 연호. 마지막 장면에서 연호를 피해 달아나 동굴에 숨어있던 현은, 연호를 총으로 쏴죽이고 청부업자들을 거부하기로 다짐한다. 현이 조용한 사람들의 세계를 위해서 조용한 사람이 되기를 포기한 것이다. 이 소설의 쓰이지 않은 뒷부분을 독자들은 현이 광기의 청부업자가 된 것으로 써야 할 듯싶다. 조용한 사람의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광기의 청부업자로 탈바꿈한 현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떠올리며….

자, 그러면 어느 정의(?)의 테러리스트가 나타나서 그를 죽이고 조용한 세계의 평화를 지킬 것인가. 오상원의 <모반>은 테러리스트의 회심을 다룬다.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목표물을 가차 없이 제거해야하는 운명의 테러리스트마저도 인간의 피와 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꽃>과는 대조되는 인간 관찰법이랄까.

손창섭의 <잉여인간>은 만기치과의원을 둘러싼 인간 군상. 서만기라는, 대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면서도 동시에 전인적인 능력과 품성를 지닌 의사가 중간에 서고 그 주위에 비분강개의 인간인 채익준, 실의의 인간인 천봉우, 서만기를 흠모하는 여러 여인들이 둘러싼다. 각각의 인물들의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탈 많고 흠 많은 인간들의 중심에 서만기가 서게 됨으로써 겪게 되는 또 다른 문제. 확실히 인간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다.

이범선의 <오발탄>은 한국영화의 고전이라고 알려진 같은 제목의 영화 <오발탄>의 원작소설. 혹자들은 영화가 원작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하는데, 영화를 보지 않아 확인이 되지 않아 아쉽다. 소설만큼은 뛰어나다. 소설 구성면에서, 치매 걸린 송철호의 어머니의 “가자.”라는 외침을 반복해서 보여준다든가, 마지막에 택시 안에서 철호가 강도와 양공주가 된 동생들과 아이를 낳다 죽어버린 아내를 떠올리면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자꾸 행선지를 바꾸는 모습은 철호와 독자를 한꺼번에 돌아버리게 만들도록 세심하게 배려(?)한다.

서기원의 <이 성숙한 밤의 포옹>에서는 50년대의 전쟁 냄새가 짙게 난다. ‘나’가 전선에서 이탈해 애인을 찾아가지만 그 만남이 두려워 근처의 사창가로 흘러 들어가 겪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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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옆에서 민음사 세계시인선 50
서정주 지음, 이남호 엮음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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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혐오스런 이름을 피해 독서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편 혐오스런 이름을 직접 대면해보고자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라고 변명하자. 그리고는, 서정주를 읽자.

『국화 옆에서』는 평론가 이남호가 서정주의 처녀시집인 <화사집(1941)>에서부터 <노래(1984)>에 이르기까지 서정주의 시세계를 더듬어서 새로 엮은 ‘시선집’이다. 이미 교과서에 실릴 정도의 시인이라면, 우선은 시선을 통해서 시인의 상상세계의 큰 줄기들을 훑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사실 예전의 나는, 이미 여러 평론가들이 달라붙어서 온갖 단물 쓴물을 다 빨아 마신, 그 정도의 가치 검증이 끝난 시인이라면, 전집으로 읽어주는 게 독자된 겸허한 도리가 아닌가, 라고 그렇게 황당하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황당한 생각은 내 안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는데, 한때 <한겨레>에 연재되었던 신경림의 문학칼럼을 읽고 가볍게 폐기해버렸다. 신경림의 말은, 오히려 좋은 시선이 없어서 탈이란 것. 어쨌든 그 이후론 정반대의 독서를 한껏 옹호하게 되었는데, 대가의 시들은 시선으로 먼저 읽는 게 좋겠다, 라는 생각. 전집을 읽자고 다짐할수록 그 ‘전집'이라는 특이한 권위와 신비 때문에 다가가기가 힘들어진다.(마치 ’고전‘이라는 이름처럼!) 그러나, 시선집은 독자를 한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이끈다.

유종호는 “아무 말이나 붙들고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 미당은 정히 부족 방언의 요술사다”라고 미당을 평가한다. 시를 ‘언어미술’로 생각하고 토속어에 끌리는 유종호가 한 말임을 감안해보아도 그렇게 황당한 평가는 아닌 듯 하다. 과문한 탓에 나는 언어의 완성도면에서 서정주를 능가하는 시인을 읽어 본 일이 별로 없다. 그건 불행한 일이다. 정말이지 타락한 시인의 타락한 언어라고 내뱉을 수밖에 없다. 서정주가 구사하는 언어의 관능만큼은 다른 시인들에 비해서 저 멀리로 달아나고 있는 듯 하다.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자화상」)던 미당. 미당 시에 대한 내 독후감이 어리석었던 시절의 짧은 인상으로 전락해버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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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4-03-16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정주의 시는 문학사에 길이길이 남을 만한 책입니다. 그러나 서정주는 정말 창피한 문인입니다. 그 아이러니가 늘 아쉽습니다.

도서관여행자 2004-03-16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인이 좋은 시를 쓴다고 순진하게 믿는 건 아니지만, 저도 그래요. 서정주가 역겹고, 또 아쉽죠.

kitty99 2015-09-30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서 그 사람 선택을 뭐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공산당선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1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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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솔직히 얘기하자면, <공산당선언>을 읽지 않고 청년기를 지나칠 자신이 없었다. 청년기에 맑스를 읽지 않으면 바보라던데 바보가 되긴 싫었다. 그런데 읽고 나서도 여전히 바보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살던 세계를 해석하고 그 해석을 바탕으로 세계를 변혁하고자 한 맑스와 엥겔스의 실천적 사유들은 나를 한없이 작은 존재로,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작은 문고본이지만, 맑스와 엥겔스가 함께 쓴 「공산당선언」과 엥겔스의 「공산주의의 원칙」, 그리고 「공산당선언」의 중판 및 번역본들의 서문과 역자의 해제 「철학자 마르크스, 공산주의에서 공생주의로」가 실려 있어 충실한 느낌을 준다. 맑스를 처음으로 만나보기 원하는 독자에게는 최상의 선택이 아닌가 싶다.

맑스는 그 자신의 말마따나 맑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를 살아있는 텍스트로 제대로 읽기엔 교조주의자가 너무 많다. “마르크스는 ‘이념 속에서 현실’을 탐구했던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현실 속에서 이념’을 찾고자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이러한 의도를 통해 스스로를 독일 관념론과 차별화했다.”(119쪽)고 한다. 맑스를 하나의 굳어버린 관념형이 아닌 살아있는 ‘지금 여기’의 텍스트로 읽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역자에 따르면, 이제 아무도 공산주의를 공포스런 ‘유령’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맑스의 두뇌가 초고속으로 돌아가던 시절에 비해서 작금의 세계는 더욱 복잡하고 난감한 편이다. 어느 누구도 쉽게 세계를 도식화해서 해석하고 실천적 대안을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노예는 한번에 팔려간다. 프롤레타리아는 매일, 매시간 자신을 팔아야 한다.”(67쪽)는 엥겔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게 울린다. 자신을 팔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사회과학적 안목이 부족한 나로선 지금이 어째서 20대 80의 사회인지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인간들의 목을 조르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공산당선언>은 통쾌한 전복적 사유로 세계를 찬찬히 재음미해볼 것, 을 요구한다.

“너희는 우리가 사적 소유를 청산하려 한다고 경악한다. 그러나 너희의 기존 사회에서 사적 소유는 구성원의 10분의 9에게는 이미 폐지되었다. 사적 소유가 10분의 9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사적 소유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너희는 사회의 압도적 다수의 무소유를 필수 조건으로 전제하는 소유를 우리가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36쪽)

다시 한번 붉은 유령이 뜨거운 피와 살을 빌려 부활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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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위한 변명 한마당 글집 1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조영훈 옮김 / 한마당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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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란 무엇인가? 그걸 정의 내릴 수 있는 능력이 내겐 없다. 다만, 야금야금 책읽기를 시작할 때 처음 만난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들과 그 외의 저서들을 통해서, 지식인이란 비판적이며 자기 성찰을 할 줄 아는 지성인으로 생각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비판적, 성찰적 지식인과 그 반대편에 선 이들로 구분해왔다. 비판을 할 줄 모르는 지식인은 지식인이 아니라는 게,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내 생각이다. 강준만적인 생각은 그의 저서를 많이 읽지 않고 있는 요즘에도 완전히 의식의 기저에 깔려 작동하고 있는 모양이다.

최소한, 한국 사회라는 기괴한 현실 속에서 지식인의 성찰과 비판은 배부른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그건 지식인들의 지식인이라 일컬어지는 강준만이 퍼뜨린 '지식인론'의 파장이기도 했지만, 함석헌, 김재준, 안병무, 리영희로부터 홍세화, 진중권, 박노자, 그리고 숱한 인터넷 논객들을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정말 그렇다'라는 강한 긍정일 수밖에 없다.

1965년 9월과 10월에 걸쳐 사르트르가 일본에서 행한 세 차례 동안의 강연을 수록한 이 책은, 물론 한국 사회와 한국의 지식인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지식인론은 사르트르 당대의 사회 현실과 그에 따른 사르트르의 비판적 사고과 선택을 떠나서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점이 너무도 많다.

'지배 계급은 그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인 '이익'에 준하여 실용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의 수를 결정한다. 지배 계급은 동시에, 산업 발전의 정도에 따라, 또 경제 상황과 새로이 등장한 필요에 맞춰, 잉여가치분의 얼마를 그들 전문가의 봉급으로 내줄 것인지를 결정한다. 오늘날, 사태는 명약관화하다. 기업은 대학으로 하여금, 낡아 퇴색한 인문주의(人文主義)를 포기하고, 그 대신 기업진단가나 중간관리자, 전문가 등을 공급해 줄 전문화된 학습을 시행하도록 하기 위해 손을 뻗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30쪽)

놀라지 마시라.(강준만의 말투로!) 이건 한국의 어느 비판적 논객이 게시판에 올려놓은 언사가 아니다. 아마 사르트르가 당대의 프랑스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도 사르트르의 말에는 아직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실상, 이 강연들은 사르트르의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엄살 섞인 목소리로 담아낸 것일 게다. 즉, 나는 많이 아는 놈이다. 나는 부르주아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다. 괴롭다. 으아! 아, 그래. '자기가 사는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단하나, 가장 혜택받지 못한 계층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다.'(72쪽) 십자가를 져라, 이 먹물들아!

자기 분석을 통해서 자기 결단에 이르는 사르트르의 고뇌와 사유, 그리고 삶의 선택의 치열함은 이 책의 두께를 착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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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창비시선 19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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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시들을 독자와 평단 모두 반기는 모양이다. 김선우의 시어들은 관능적일 정도이고, 시적 상상력은 자궁과 꽃잎들과 대지와 바다에 닿아 있다. 첫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관념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한 시어들도 아닌 독특한 언어들로 시적 상상세계를 이루어내고 있다. 그래서 가끔 낯선 시어들은 '평범한 혀'를 가지고 있고 그 혀를 입 속에 가두어 두고 있는 독자를 부끄럽게 만든다.

더욱이 그녀의 상상세계의 뼈대를 이루는 시적 사유들은 거칠게 말해서 몸, 여성, 생태, 윤회 등. 이런 새로운 상상력들은, 문학을 철학이나 사상으로 바꿔 이야기하고 싶은 먹물들의 혀를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하게 한다. 영혼이 아닌 몸, 남성이 아닌 여성, 기계와 도시가 아닌 생태, 직선적인 생이 아닌 윤회는 얼마나 떠벌리기 좋은, 새 이야깃거리인가. 아마도, 김선우 시들로 인해서 많은 혀들이 움직일 것이다.

시집 뒤 표지에 김정환, 나희덕 시인의 몇 마디가 각각 쓰여 있는데, 재미있는 건, 김정환 의 말은 하나마나 한 딴소리이고 나희덕의 것은 들을 만한 것. 왜 그랬을까. 혹시 김정환이 자궁을 직접 말하기가 '거시기'했던 것은 아닐까.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한때 나는 자궁에 집착했었다. 자궁이 없는 수컷이었으므로 처음에 그것은 상당히 관념적인 집착인 셈이었다. 자궁에는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쌍둥이처럼 들어있다. 자궁에서 生의 시작되고, 자궁을 닮은 무덤에서 生은 끝난다. 살고 싶어 미칠 때 나는 자궁 안의 태아가 되었고, '죽고 싶어, 정말!'이라고 내뱉을 때 자궁 안의 주검이 되었다. 자꾸만 자궁 안으로 기어 들어가고 싶었고, 또 자궁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빌어먹을 세상과 삶이 피곤하단 걸 자주 느낀 나는, 두꺼운 이불을 둘러쓰고 자궁 안의 태아처럼 움츠려서 게으른 잠을 청했다. 자궁 속으로 도피했다. 그런 엄마 뱃속의 환상(또는 아주 오래된 기억)을 느끼는 순간에는 정말 그대로 죽어 버리고 싶은 쾌락이 전신을 뒤흔들고 놔두질 않았다. 그리고 다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다시 태어나는 아이가 되곤 했다. 읽는 문학마다 자궁의 이미지가 웅웅거리며 앞으로 튀어나와 보이곤 했다. … 김선우의 시들은 그때와는 다른 자궁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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