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창비시선 19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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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시들을 독자와 평단 모두 반기는 모양이다. 김선우의 시어들은 관능적일 정도이고, 시적 상상력은 자궁과 꽃잎들과 대지와 바다에 닿아 있다. 첫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관념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한 시어들도 아닌 독특한 언어들로 시적 상상세계를 이루어내고 있다. 그래서 가끔 낯선 시어들은 '평범한 혀'를 가지고 있고 그 혀를 입 속에 가두어 두고 있는 독자를 부끄럽게 만든다.

더욱이 그녀의 상상세계의 뼈대를 이루는 시적 사유들은 거칠게 말해서 몸, 여성, 생태, 윤회 등. 이런 새로운 상상력들은, 문학을 철학이나 사상으로 바꿔 이야기하고 싶은 먹물들의 혀를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하게 한다. 영혼이 아닌 몸, 남성이 아닌 여성, 기계와 도시가 아닌 생태, 직선적인 생이 아닌 윤회는 얼마나 떠벌리기 좋은, 새 이야깃거리인가. 아마도, 김선우 시들로 인해서 많은 혀들이 움직일 것이다.

시집 뒤 표지에 김정환, 나희덕 시인의 몇 마디가 각각 쓰여 있는데, 재미있는 건, 김정환 의 말은 하나마나 한 딴소리이고 나희덕의 것은 들을 만한 것. 왜 그랬을까. 혹시 김정환이 자궁을 직접 말하기가 '거시기'했던 것은 아닐까.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한때 나는 자궁에 집착했었다. 자궁이 없는 수컷이었으므로 처음에 그것은 상당히 관념적인 집착인 셈이었다. 자궁에는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쌍둥이처럼 들어있다. 자궁에서 生의 시작되고, 자궁을 닮은 무덤에서 生은 끝난다. 살고 싶어 미칠 때 나는 자궁 안의 태아가 되었고, '죽고 싶어, 정말!'이라고 내뱉을 때 자궁 안의 주검이 되었다. 자꾸만 자궁 안으로 기어 들어가고 싶었고, 또 자궁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빌어먹을 세상과 삶이 피곤하단 걸 자주 느낀 나는, 두꺼운 이불을 둘러쓰고 자궁 안의 태아처럼 움츠려서 게으른 잠을 청했다. 자궁 속으로 도피했다. 그런 엄마 뱃속의 환상(또는 아주 오래된 기억)을 느끼는 순간에는 정말 그대로 죽어 버리고 싶은 쾌락이 전신을 뒤흔들고 놔두질 않았다. 그리고 다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다시 태어나는 아이가 되곤 했다. 읽는 문학마다 자궁의 이미지가 웅웅거리며 앞으로 튀어나와 보이곤 했다. … 김선우의 시들은 그때와는 다른 자궁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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