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문학비평, 그 비판적 대화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
김영건 지음 / 책세상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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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문학자들은 대화와 비판을 그렇게도 강조한다. 그러면, 인문학자들은 얼마나 대화하고 소통하며 또 서로를 비판해주고 있는가? 철학자 김영건에 따르면 그다지 사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문예 장르의 하나이기도 한 문학비평을 인문학이라는 학술적 행위로만 좁게 가둘 수는 없겠지만, 지적인 담론들을 활용한다는 의미에서 인문학의 한 하위 분야라고도 할 수 있다. 문학비평에서 평론가들은 철학적 담론들로 현란하게 글을 장식하곤 하는데 철학자의 눈으로 볼 때는, 그다지 엄밀하지도 않으며 일종의 지적 유행병이 감지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한 가지를 꼽자면 국내 철학계에서 생산되는 학적인 결과물들을 충분히 검토하고 배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인문학의 풍토 속에서 김영건은 철학자의 눈으로 문학비평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문학비평이란 무엇인지 그것의 철학적 의미나 그것이 지향해야할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주로 문학비평에서 쓰이는 철학 담론들이 얼마나 엄밀하게 쓰이고 있으며 그 철학적 담론들이 과연 적절한가를 묻고 있다.


지난 시대에 마르크스의 철학은 ‘진리’로 떠받들어 졌다. 마르크스의 철학이 지닌, 세계에 대한 실천적 해석의 힘과 억압된 사회가 만난 자리에서 그것은 절대 진리가 된 듯이 수많은 지식인들의 머리를 장악했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르크스는 곧 폐기되고 현란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들어앉았다. 김영건은 이것을 ‘젊은 비평가들의 지적 사대주의 또는 문학적 상업주의’라는 장에서 비판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으로 간주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정말 이 이론을 우리 사회를 조망하고 해명하는 진정한 대안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한갓 지적 과신과 현란한 현시의 겉모습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순수한 지적 호기심인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 문학에 대한 근대성과 탈근대성에 대한 논의는 피곤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피곤함은 거기에 동원된 여러 이론들이 주는 것일 수 있지만, 살아 있는 문제가 아니라 유행을 타기 위해 만든 문제라는 데서 오는 피곤함일 수 있다.”(54쪽)


한편,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비평가 김윤식의 철학 이해는 어떨까. 김영건에 따르면, 김윤식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해서 논하는데, 이때의 비트겐슈타인은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이해한 비트겐슈타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진이 이해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철학자의 눈으로 보기엔 뛰어난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김윤식의 비트겐슈타인 철학도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 김윤식은 국내 철학자들이 연구해서 소개한 비트겐슈타인 관련 저술을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이외에도 생태문학 담론과 김우창의 ‘심미적 이성’ 개념에 대해 다루면서 문학비평에서의 철학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김영민의 ‘논문 중심주의 비판’에 관련된 글도 하나 있는데 이것이 문학비평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글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논문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은연중에 논문 자체에 대한 비판처럼 들리는 김영민의 글을 비판하는 김영건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 인문학계의 풍토에 대해서 조금 더알게 되었다. 김영민의 논문 중심주의 비판 담론들(탈식민주의 글쓰기)은,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에서 한국의 자생이론 20선에서 첫 번째로 꼽혔었다. 김영민의 비판이 치밀하지 못했다하더라도 그의 비판이 그렇게까지 강한 공감을 얻은 까닭을 생각해보면, 한국 지식인들의 반성이 그만큼 절실했다는 뜻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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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24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 추천 하나^^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
전재호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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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박정희라는 이름의 유령이. 박정희라는 이름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일 것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제 성장의 신화로 연결되는 카리스마적 영웅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우리는 역사책에서 지울 수 없으며, 그 과거는 현재와 연결된 과거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와 같이 박정희를 단순히 영웅으로, 감정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일정한 의미를 지닌 사회적 현상의 하나이긴 하지만, 그것이 옳다고 볼 수는 없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를 막강한 리더십을 지닌 정치지도자로, 한국 경제 성장의 근원적인 힘으로만 쉽게 연결짓게 된 데에는, 박정희를 옹호하면 자신들에게 간접, 직접의 정치, 경제적 이익이 돌아오게 되는 집단들의 박정희 신화 유포가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이미 국민들에 대한 정권의 정당화 작업이 강력하게 있어왔지만, 지금의 언론과 정치인들, 그리고 지식인들까지 여기에 가담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가 박정희에 대해 정확히 알려는 노력 이전에 부풀려진 박정희 신드롬을 먼저 철저히 분석해야만 한다. 내가 박정희를 그렇게 생각하게 된 까닭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 라고.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는 <박정희 체제의 민족주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치학자, 전재호가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해서 쓴 책이다. 교사를 하다 “긴 칼 차고 싶어” 관동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가 되고, 남로군에 가담했다가 배신한 박정희라는 인물의 카멜레온에 가까운, 기회주의적 행태는 그것 자체로 매우 흥미롭고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박정희 개인의 행적을 꼼꼼히 추적한 인물 평전이라기보다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추진된 정책들을 중심으로 주로 논하고 평가했다.


저자 전재호는,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를 서구의 근대성이 지닌 진보성, 혁명성, 합리성, 민주성이 거세된 성격의 ‘반동적 근대주의Reactionary modermism'으로 지칭한다. 반동적 근대주의란 19세기 말 이래 독일에서 진행된 파시즘적 근대화 과정을 지칭하는 역사학자인 제프리 허프Jeffrey Herf의 용어이다. 다른 제3세계 국가들과 같이 한국도 기술과 경제에 대한 과도한 광신과 함께 권위주의, 전체주의, 국가주의로 오염되었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그의 독서일기 <행복한 책읽기>에서 박정희를 일컬어, “그는 상징적 히로뽕 판매자였다!”라고 한 말은, 바로 이러한 배경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먼저 저자는, 자신의 박사논문 탐구주제이기도 한, 박정희와 민족주의와의 관계를 고찰한다. 논자들에 따라서 박정희는 반민족주의자, 민족주의자, 민족주의자에서 반민족주의자로 변신이라는 세 가지의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정의 자체가 모호한 것으로 다른 특정 이데올로기와 쉽게 결합할 수 있고, 타민족을 억압하는 논리와 피압박 민족을 해방시키는 진보적 논리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렇기에 박정희가 민족주의자냐 아니냐의 문제는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박정희 정권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에 민정 이양이라는 약속을 깨고 계속 집권하게 된다. 그리고 ‘민족적 민주주의’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허황된 이름 아래에 반-민주주의적 군사 독재를 행한다. 그러면 박정희 정권의 경제 정책은 어떤가?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이전에 이미 민주당에 의해 착수되었던”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한다.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기에 정통성이 부재했으므로 그들은 경제 성장에 집중했다.


“박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은 그 내용과 실행에서 케네디 행정부의 대한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발전의 시대Decade of Development'라는 구호를 내걸고 제3세계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우월성을 군사력이 아닌 경제 부흥을 통해 입증하기를 원했다. 이는 직접 침략보다 경제 실정에 따른 불만과 이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이 공산주의의 토양이 된다는 사고에 기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미국이 제3세계에 자금(경제 원조), 기술(장기 경제개발 계획, 지역 개발 등), 사상(민주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선전과 교육)을 투입하여 전통사회가 근대사회로 급속히 이행하도록 체계적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1쪽)


또한 북한에 비해 매우 열등한 당시 남한의 경제 상황은 박정권이 체제 경쟁적으로 경제 성장에 몰두해야 했던 이유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따라서 “박정희=한국 경제성장의 기원”이란 공식은 타당성이 부족하다. 반인권적인 독재자보다는 그 정권 시절에 세계최장시간의 고통스러운 노동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을 기억해야 마땅할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대국민 훈육에 대해 다루었다. 대표적 예를 들자면, 이 기간에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신격화되어 영웅사관이 복원되었다. 호국 무장 이순신의 신격화는 군인 출신인 박정희에 대한 충성과 존경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박정희 이외에 나라를 구할 사람 없다” 식의 무의식을 불어넣기에 좋은 것이다. 세종대왕도, 박정권 시대를 세종대왕과 같은 태평성대, 문화융성기로 포장하기 위해 “동원”당한 것이다. 이순신, 세종대왕은 현재에도 거의 모든 한국 국민이 우상시하는 역사 인물이다. 게다가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정권 시절의 국가주의, 군사주의를 깔끔하게 떨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박정희 시대가 아직도 지금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박정희는 아직도 살아있는 유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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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10-08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만으로도 책 한 권을 읽은 것 같네요. 그나저나 논리적으로 글 참 잘 쓰십니다^^

도서관여행자 2004-10-0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정희를, 저는 그저 감정적으로 혐오하는 수준에서 여겨왔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읽은 책거든요. 덕분에 박정희 정권 시절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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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의 <책과 세계> 강의노트의 맨 처음에 이런 말이 나온다 : “엄밀히 말해서 이 책은 고전 해설서가 아니라 이전에 쓴 《서양문명의 기반》(도서출판 미토, 2003)을 사상적 측면에서 압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종의 간략한 서양 사상사 또는 지성사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것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구조를 가질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산해서 만들어진 책이다. 디자인에 관여할 수는 없었지만 그 이외의 부분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고전 해설서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이 고전 해설서라고 생각하기에 좋게 엮여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도 책에서 다루고 있는 서양 고전들은, <길가메쉬 서사시>와 <모세 5경>에서부터 그리스 비극들과 플라톤의 <국가>를 거쳐 <군주론>, <국부론>, <종의 기원>에 이르른다. 그러나 이 책은 93쪽의 많지 않은 분량이므로, 몇 수십 권의 서양 고전들을 백과사전 식으로 요약하는 무리를 범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서양 고전 하나를 붙잡고 거기에 자세한 각주와 해설을 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 강유원의 저술 의도는 그것이 아닐 것이며, 독자 역시 이 책에서 그러한 것을 얻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의 미덕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내가 <책과 세계>를 읽고서 얻은 것은 고전 몇 종류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책을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었던 점이다. 텍스트는 텍스트를 산출해낸 컨텍스트, 즉 책이 쓰이던 시기의 사회 환경과 조건을 갖는다. 텍스트 읽기는 컨텍스트 읽기와 함께 이루어질 때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컨텍스트의 품안에서 잉태되어 저자의 손끝에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텍스트는 역으로 컨텍스트였던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고전’을 열심히 읽으려 들고 ‘지성사’의 흐름도 그려보려는 것이 아닌가.


강유원의 <책과 세계>는 가벼운 책이다. 서양 지성사를 산책하는 즐거움으로 이 책의 독서를 마쳐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단한 책이다. 간결한 문체와 짤막한 글들이 빈틈없이 엮였다.  다른 공부와 고전 읽기의 출발점으로 삼아도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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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문학상 수상작 모음집 1985~1989 - 17~20회
정소성 외 지음 / 조선일보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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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17회에서부터 20회에 이르는 동인문학상 수상 소설들은, 분단의 상처와 그에 대한 극복의지를 다룬 두 소설(17, 18회)과 자꾸만 우리의 꿈을 배반하는 지독한 현실의 진창에서 희망을 껴안고 뒹구는 두 소설(19, 20회)로 나뉜다. 분단과 생활현실이라는 이 투박하고 섬세하지 못한 소설 주제 구분은 별로 쓸모없는 것이지만, 1985년에서 1989년에 쓰여진 소설들이 무엇을 담고자 했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정소성의 <아테네 가는 배>는 표제에서 드러나듯 소설의 배경도 한국을 벗어나 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도 한국인 유학생, 중국인 학자, 동독 아가씨, 그리스인 등등이다. 아마도, 작가인 정소성의 유학 시절과 해외여행 체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이 소설의 배경은 외양상 ‘국제적’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한국적’인 소설 주제의 무대를 꾸며주기 위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사학을 전공하는 프랑스 유학학생 종식이 중심인물이 되어 자신과 그들의 여로를 관찰하는데, 그러면서 그는 신화와 역사[과거]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동행자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고 듣기도 한다. 종식의 가장 중요한 관찰대상은 주하라는 유학생이다.

“주하는 물론 신체적 불구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구를 의식하지 않으려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정신의 불구를 극복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참 딱합니다.”
“이굉석씨, 무슨 소리요? 정신의 불구자라니? 좀 괴짜스런 데가 있긴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 주하의 아버지는 북에, 어머니는 남에 살고 계시다는 거지요. 그분들이 지상의 삶을 다할 때까지 서로 얼굴을 대면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놓고 주하의 지팡이는 뛰고 있습니다.”
“…….”(39쪽)

한반도는 분단으로 인해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체적 불구가 되었다. 동시에 그 반도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정신의 불구가 되었다. 그 ‘정신의 불구됨’은 유재용의 <어제 울린 총소리>에서 다시 한번 만나볼 수 있다. 조한세 노인에게 계속되는 총소리 환청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에게만 들리는 총소리를 고쳐보기 위해서 이비인후과를 찾은 조한세 노인은 의사에게서 신경정신과의원을 소개받는다. 문제는 귀가 아니라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조한세씨는 문득 정신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저어 눈앞에 머릿속에 떠오른 아버지의 얼굴과 아들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총소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야. 조한세씨는 고집하듯 정리하듯 그렇게 생각하며 뒤늦게 김부일씨 말에 대답했다.
“나두 자네같이 생각하겠네. 총소리 따위, 날래믄 나래지. 제풀에 주저앉을 날이 있겠지 뭐.”
조한세씨가 말을 끝낸 순간이었다. 따, 따, 따, 탕, 탕! 총소리가 울렸다. 대기의 진동이 손가락 끝에 찌르르 와 닿았다. 조한세씨는 김부일씨의 얼굴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하지만 김부일씨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얼굴로 걸음을 옮겨놓기만 했다. 조한세씨는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어쨌든 고향에 남으신 부모님이나 이민 떠난 아들네 식구와 총소리는 아무런 상관두 읎어.’
조한세씨는 완강하게 고집 부리듯 그렇게 생각하며 김부일씨와 나란히 걸음을 옮겨놓았다.(134-135쪽)

분단의 고통과 상처는 이토록 오래 남는 것인데, 그에 대한 반응은 강한 극복의지가 아니라 강한 회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찢어져 있지 않다. 나는 불구가 아니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누구든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조한세씨뿐만 아니라 우리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제 울린 총소리는 오늘도 계속 울리고 있다는 걸. 따, 따, 따, 탕,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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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문학상 수상작 모음집 1979~1984 - 13~16회
조세희 외 지음 / 조선일보사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혁명가가 바다로 띄워 보낸 비망록


1.


제13회 동인문학상의 수상작은, 이미 고전의 고전이 되어버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평론가들마저도 <난.쏘.공>을 논할 때는 평론이 아니라 독후감을 쓰곤 한다. “이 소설책을 총 몇 번 읽었는데, 첫 번째는 어떠어떠한 감동이었으며, 그 다음의 독서는…” 이런 식인데, 이 소설집의 해설을 쓴 방민호도 여러 권의 <난.쏘.공>을 가지고 있다며 개인적인 독서체험을 이야기한다. 다치바나는 고전을 두고서 “그 저서(고전)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 자체가 토론의 대상이 되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의 소재로 활용되기에 적절한 책만이 결국 진정한 의미의 고전으로서 살아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55쪽)라고 말했다. 그렇다. 실상, 특정한 텍스트가 고전이나 정전으로 채택되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그 텍스트의 내적인 가치가 귀중한 것으로 판명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많은 이들의 입과 귀에서 끊이지 않고 얘깃거리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텍스트의 내용보다 그 텍스트와 관련된 독서체험이나 심경변화를 이야기하는 일이 더 벌어지는 것은, 이미 그 텍스트의 품질을 보장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명품의 디자인이나 기능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명품 자체에 얽힌 이야기를 즐기는 것과 같다.


나는 불우(?)하게도 중학 시절에 필독도서의 하나로 <난.쏘.공>을 읽어야만 했다. 필독도서로 억지로 읽는 책이었으므로, 그것은 짜증과 지루함으로부터 시작되어 감동으로 끝난 독서였다. 그러나 스무 살이 넘은 뒤에 읽은 <난.쏘.공>은 그때와는 또 다른, 더 깊은 감동을 주었다. 사회과학과 역사 책으로 더 정밀하게, 더 구체적으로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겠지만, 문학 읽기를 통한 세계 인식은, 삶의 인식은, 이와는 또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이나 역사와는 다른 문학만의 감동과 전율이 있기 때문이다. <난.쏘.공>의 경우, 시적인 문체와, 현실과 환상이 포개어지는 매혹적인 구성 등이 독자들을 사로잡는 것이고, 여전히 고전의 고전으로 칭송받는 까닭일 것이다.


2.

제13회에서 16회에 이르는 동인문학상 수상작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와 소재들은 각기 다채롭다. 13회 수상작 <난.쏘.공>에서 ‘난장이’로 상징되는 억압적인 시대상과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제목에서도 드러나는 ‘차마 버리지 못하는, 또는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되는, 작은 희망과 의지’의 혼재의 고통을 독자들은 즐거이 받아들여야 한다. 14회 수상작인 전상국의 <우리들의 날개>는 동생의 존재 때문에 가족들이 비극을 겪게 된다는 운명의 망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모습을 그린다. 인간이 운명(이것의 실체도 정작 모르면서!)을 받아들이거나 비극의 원인을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내는 까닭은 무얼까. 15회 오정희의 <동경>은 죽음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가는 노부부의 일상을 그려낸다. 오정희의 섬세한 문체가 그려내는 구체적 일상들은, 어린 아이의 거울 장난이 오히려 늙은 부인의 노쇠를 조롱하는 것처럼, 얄밉게 반짝인다. 16회 수상작 이문열의 <금시조>는 일종의 예술가 소설이다. 금시조의 비상을 보고픈, 예술의 극점에 다다르려는 한 서화가의 일생과 갈등이 <금시조>의 세계다. 예술가 소설로는 특별히 도드라진 점은 없겠지만, <금시조>에서 마음에 든 점은 주인공 고죽의 일상적 삶이 천재들의 불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당히 불우하고 적당히 평범하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드라마틱한 삶이 예술가의 삶은 아니니까. 16회 수상작, 김원일의 <환멸을 찾아서>는 현대 한국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분단 문제에 천착한다. 어느 좌천당한 혁명가의 북에서 띄워 보낸 비망기를, 역시나 분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실향민 아버지가 바다에서 습득하게 되고, 시인이자 교사인 아들이 이것을 가족들에게 전해준다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영동행각’이란 제목으로 일곱 편의 시를 썼던 울진 출신의 젊은 시인은 전쟁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였으나, 시대의 앞뒤를 두루 살펴 그 불가해한 상처의 뿌리를 노래했다. 그는 ‘다시 영동에서’란 시의 마지막 연을 이렇게 썼다.


한 생애가 눈물 가득 찬 물결로도 출렁이고

서러울수록 그 위에 엎어져 함께 흐느껴 가면

어둠 속을 더욱 넓어지는 소리의 한없는 두런거림

여기서 자라 이 물결에 마음붙인

사람들의 오랜 고향을 나는 안다.(342쪽)


전쟁을 겪지는 않았으나 총성이 들리지 않는 전쟁, 즉 분단 상황하에서 살고 있으며 여전히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는 삶의 바다에서 길어올린 이 쓰라린 편지를 어느 곳으로, 누구에게 배달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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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za 2004-08-17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찬제도 난.쏘.공의 해설을 독후감으로 시작하고 있더군요...^^
어두웠던 팔십년대를 경제학도로 살았던 그에게 난.쏘.공이 던져준 인상은 각별한 것이었겠죠.

도서관여행자 2004-08-17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아마, 내가 그 해설을 두고 얘기한 걸꺼야.
이미 난.쏘.공에 대한 2차텍스트들은 숱하게 쓰여졌을테니, 다른 얘기를 하는 게 독자들을 덜 지루하게 만드는 게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