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
전재호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박정희라는 이름의 유령이. 박정희라는 이름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일 것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제 성장의 신화로 연결되는 카리스마적 영웅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우리는 역사책에서 지울 수 없으며, 그 과거는 현재와 연결된 과거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와 같이 박정희를 단순히 영웅으로, 감정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일정한 의미를 지닌 사회적 현상의 하나이긴 하지만, 그것이 옳다고 볼 수는 없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를 막강한 리더십을 지닌 정치지도자로, 한국 경제 성장의 근원적인 힘으로만 쉽게 연결짓게 된 데에는, 박정희를 옹호하면 자신들에게 간접, 직접의 정치, 경제적 이익이 돌아오게 되는 집단들의 박정희 신화 유포가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이미 국민들에 대한 정권의 정당화 작업이 강력하게 있어왔지만, 지금의 언론과 정치인들, 그리고 지식인들까지 여기에 가담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가 박정희에 대해 정확히 알려는 노력 이전에 부풀려진 박정희 신드롬을 먼저 철저히 분석해야만 한다. 내가 박정희를 그렇게 생각하게 된 까닭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 라고.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는 <박정희 체제의 민족주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치학자, 전재호가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해서 쓴 책이다. 교사를 하다 “긴 칼 차고 싶어” 관동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가 되고, 남로군에 가담했다가 배신한 박정희라는 인물의 카멜레온에 가까운, 기회주의적 행태는 그것 자체로 매우 흥미롭고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박정희 개인의 행적을 꼼꼼히 추적한 인물 평전이라기보다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추진된 정책들을 중심으로 주로 논하고 평가했다.


저자 전재호는,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를 서구의 근대성이 지닌 진보성, 혁명성, 합리성, 민주성이 거세된 성격의 ‘반동적 근대주의Reactionary modermism'으로 지칭한다. 반동적 근대주의란 19세기 말 이래 독일에서 진행된 파시즘적 근대화 과정을 지칭하는 역사학자인 제프리 허프Jeffrey Herf의 용어이다. 다른 제3세계 국가들과 같이 한국도 기술과 경제에 대한 과도한 광신과 함께 권위주의, 전체주의, 국가주의로 오염되었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그의 독서일기 <행복한 책읽기>에서 박정희를 일컬어, “그는 상징적 히로뽕 판매자였다!”라고 한 말은, 바로 이러한 배경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먼저 저자는, 자신의 박사논문 탐구주제이기도 한, 박정희와 민족주의와의 관계를 고찰한다. 논자들에 따라서 박정희는 반민족주의자, 민족주의자, 민족주의자에서 반민족주의자로 변신이라는 세 가지의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정의 자체가 모호한 것으로 다른 특정 이데올로기와 쉽게 결합할 수 있고, 타민족을 억압하는 논리와 피압박 민족을 해방시키는 진보적 논리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렇기에 박정희가 민족주의자냐 아니냐의 문제는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박정희 정권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에 민정 이양이라는 약속을 깨고 계속 집권하게 된다. 그리고 ‘민족적 민주주의’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허황된 이름 아래에 반-민주주의적 군사 독재를 행한다. 그러면 박정희 정권의 경제 정책은 어떤가?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이전에 이미 민주당에 의해 착수되었던”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한다.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기에 정통성이 부재했으므로 그들은 경제 성장에 집중했다.


“박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은 그 내용과 실행에서 케네디 행정부의 대한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발전의 시대Decade of Development'라는 구호를 내걸고 제3세계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우월성을 군사력이 아닌 경제 부흥을 통해 입증하기를 원했다. 이는 직접 침략보다 경제 실정에 따른 불만과 이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이 공산주의의 토양이 된다는 사고에 기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미국이 제3세계에 자금(경제 원조), 기술(장기 경제개발 계획, 지역 개발 등), 사상(민주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선전과 교육)을 투입하여 전통사회가 근대사회로 급속히 이행하도록 체계적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1쪽)


또한 북한에 비해 매우 열등한 당시 남한의 경제 상황은 박정권이 체제 경쟁적으로 경제 성장에 몰두해야 했던 이유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따라서 “박정희=한국 경제성장의 기원”이란 공식은 타당성이 부족하다. 반인권적인 독재자보다는 그 정권 시절에 세계최장시간의 고통스러운 노동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을 기억해야 마땅할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대국민 훈육에 대해 다루었다. 대표적 예를 들자면, 이 기간에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신격화되어 영웅사관이 복원되었다. 호국 무장 이순신의 신격화는 군인 출신인 박정희에 대한 충성과 존경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박정희 이외에 나라를 구할 사람 없다” 식의 무의식을 불어넣기에 좋은 것이다. 세종대왕도, 박정권 시대를 세종대왕과 같은 태평성대, 문화융성기로 포장하기 위해 “동원”당한 것이다. 이순신, 세종대왕은 현재에도 거의 모든 한국 국민이 우상시하는 역사 인물이다. 게다가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정권 시절의 국가주의, 군사주의를 깔끔하게 떨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박정희 시대가 아직도 지금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박정희는 아직도 살아있는 유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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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10-08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만으로도 책 한 권을 읽은 것 같네요. 그나저나 논리적으로 글 참 잘 쓰십니다^^

도서관여행자 2004-10-0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정희를, 저는 그저 감정적으로 혐오하는 수준에서 여겨왔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읽은 책거든요. 덕분에 박정희 정권 시절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