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수상작 모음집 1985~1989 - 17~20회
정소성 외 지음 / 조선일보사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제17회에서부터 20회에 이르는 동인문학상 수상 소설들은, 분단의 상처와 그에 대한 극복의지를 다룬 두 소설(17, 18회)과 자꾸만 우리의 꿈을 배반하는 지독한 현실의 진창에서 희망을 껴안고 뒹구는 두 소설(19, 20회)로 나뉜다. 분단과 생활현실이라는 이 투박하고 섬세하지 못한 소설 주제 구분은 별로 쓸모없는 것이지만, 1985년에서 1989년에 쓰여진 소설들이 무엇을 담고자 했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정소성의 <아테네 가는 배>는 표제에서 드러나듯 소설의 배경도 한국을 벗어나 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도 한국인 유학생, 중국인 학자, 동독 아가씨, 그리스인 등등이다. 아마도, 작가인 정소성의 유학 시절과 해외여행 체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이 소설의 배경은 외양상 ‘국제적’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한국적’인 소설 주제의 무대를 꾸며주기 위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사학을 전공하는 프랑스 유학학생 종식이 중심인물이 되어 자신과 그들의 여로를 관찰하는데, 그러면서 그는 신화와 역사[과거]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동행자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고 듣기도 한다. 종식의 가장 중요한 관찰대상은 주하라는 유학생이다.

“주하는 물론 신체적 불구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구를 의식하지 않으려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정신의 불구를 극복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참 딱합니다.”
“이굉석씨, 무슨 소리요? 정신의 불구자라니? 좀 괴짜스런 데가 있긴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 주하의 아버지는 북에, 어머니는 남에 살고 계시다는 거지요. 그분들이 지상의 삶을 다할 때까지 서로 얼굴을 대면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놓고 주하의 지팡이는 뛰고 있습니다.”
“…….”(39쪽)

한반도는 분단으로 인해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체적 불구가 되었다. 동시에 그 반도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정신의 불구가 되었다. 그 ‘정신의 불구됨’은 유재용의 <어제 울린 총소리>에서 다시 한번 만나볼 수 있다. 조한세 노인에게 계속되는 총소리 환청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에게만 들리는 총소리를 고쳐보기 위해서 이비인후과를 찾은 조한세 노인은 의사에게서 신경정신과의원을 소개받는다. 문제는 귀가 아니라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조한세씨는 문득 정신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저어 눈앞에 머릿속에 떠오른 아버지의 얼굴과 아들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총소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야. 조한세씨는 고집하듯 정리하듯 그렇게 생각하며 뒤늦게 김부일씨 말에 대답했다.
“나두 자네같이 생각하겠네. 총소리 따위, 날래믄 나래지. 제풀에 주저앉을 날이 있겠지 뭐.”
조한세씨가 말을 끝낸 순간이었다. 따, 따, 따, 탕, 탕! 총소리가 울렸다. 대기의 진동이 손가락 끝에 찌르르 와 닿았다. 조한세씨는 김부일씨의 얼굴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하지만 김부일씨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얼굴로 걸음을 옮겨놓기만 했다. 조한세씨는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어쨌든 고향에 남으신 부모님이나 이민 떠난 아들네 식구와 총소리는 아무런 상관두 읎어.’
조한세씨는 완강하게 고집 부리듯 그렇게 생각하며 김부일씨와 나란히 걸음을 옮겨놓았다.(134-135쪽)

분단의 고통과 상처는 이토록 오래 남는 것인데, 그에 대한 반응은 강한 극복의지가 아니라 강한 회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찢어져 있지 않다. 나는 불구가 아니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누구든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조한세씨뿐만 아니라 우리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제 울린 총소리는 오늘도 계속 울리고 있다는 걸. 따, 따, 따, 탕,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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