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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잘 쇠셨기 바란다.

시간이 남는다. 여유로워 좋다. 오늘은 새로 버린 책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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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많다. 망설였던 것이 이기영의 <민촌>과 이기서의 <강릉 선교장>. 이기영은 뭐 말 할 필요 없는 작가의 명품 리얼리즘 작품. 강릉의 선교장은 나 어렸을 적에 직접 그 집에서 자본 적이 있어 남다른 추억이 있는 곳이라 더욱 그랬다. 연못 정자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속 이주사, 정여사의 젊은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굳이 옛 앨범을 들춰보기는 싫다.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앨리 스미스의 <호텔 월드>, 르 클레지오가 쓴 <허기의 간주곡>, 그리고 우리말 제목을 워낙 후지게 달아서 오히려 진가를 가려버린 푸엔테스 작 <미국은 섹스를 한다> 외에도 홀링허스트, 사라마구, 셀린느, 매컬러스, 새라 워터스, 심지어 루슈디와 브레드버리, 요사, 드릴로, 커포티 등등 싹 버렸다. 마음이 편했을 수는 없었겠지?



이번에는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버려? 남겨둬? 이거 하고 에코의 두 작품, 그리고 한 때 책 좀 읽는 사람들 입끝에 올랐던 장왕록 번역의 포크너 <압살롬, 압살롬>이 문제였다. 포크너는 당시에 나더러 책을 줄 수 없겠느냐고 하는 분도 있었는데 싹 안 된다고 거절했던 거다. 사람이 이러면 안 된다. 결국 버릴 책을 하잘것없는 욕심 때문에 여태 이고 지고 있다가 결국 이꼴이 뭐냐고.

독일까지 가 무질을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딴 안병률 사장이 직접 번역한 <특성없는 남자>도 다시 읽을 거 같지 않아서 던졌다. 돈이 아깝지만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 민음사 모던클래식 시리즈의 애트우드는 <도둑신부>말고 <고양이 눈>을 남기기로 했다. 우엘벡도 버리고 존 파울즈도 버리고, 파울즈는 결국 <마법사> 한 작품만 남길 생각이지만 하여간, 쿤데라도 목록에 나왔다. 게다가 이제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하는 대산세계문학총서, 즉 현재 발간중인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도 눈에 들어왔다.



이 목록에서는 좋은 작품은 아니지만 하인리히 만이 쓴 <앙리4세>를 제일 고민했다. 백낙청의 기념비적 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도 이제는 꼴 보기 싫어서 던져버렸다. 드디어 화이트헤드, 백대가리 선생의 <관념의 모험>, 한길사가 야심차게 펴낸 그레이트북 시리즈 1번에 빛나는 책을 서슴없이 던졌다.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철학이라는 학문이 누구나 알 수 있는 말을 어떻게 하면 어렵게 설명하느냐를 공부하는 학문이라는 걸 배운 것으로 만족한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보다 볼라뇨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야만스러운 탐정들> 한 편으로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 라고 여겨서 다른 작품은 싸그리 버렸거나 버릴 예정이다. 이거 딱 한 번 읽고 버리는 책들이라 당근에 내놔도 돈 좀 받을 수 있겠는데, 귀찮다. 걍 버렸다.

오정희는 나이를 먹으면서 확연히 총기가 떨어져갔다. 내가 이이의 책을 버리는 날이 올 줄은 나도 몰랐다.

르메트르의 삼부작도 남아나지 못했다. 재미 있는 건 확실하지만 오래 보관할 만하지 않잖아? 두 번 펴보지 않을 듯한 책들. 이런 면에서 아까운 작가가 모옌이다. 좋아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시간이 나면 또 들춰볼 만하건만 사실 시간이 나면 그 시간에 다른 책을 찾을 듯해서 아쉬워도 그냥 보냈다.

그리고 초판본 한강의 <여수의 사랑>. 아무리 우리나라가 배출한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라고 해도 안 맞는 걸 억지로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장한몽>은 아깝고 아깝다. 근데 내가 읽지 않으면 가족 가운데 아무도 읽지 않을 듯. 예전에 나온 금속활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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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위에 쌓은 제3세대 한국문학전집. 198X년 처음 취직해서 봉급받아 처음으로 산 책. 학교 다닐 때 읽고 이런 전집은 꼭 한 질 갖고 싶어하다가 내 돈 벌어 산 책. 그래서 정이 남다르다. 웃긴 것이, 그렇게 갖고 싶었지만, 학창시절에 이미 다 읽은 책인데다가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을 만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라 반도 못 읽고 처분하게 됐다는 거. 40년이 지나서 말이지. 뭐 이게 다 사는 일이기는 하지만. 초봉이 25만원 할 시절이었으니 저 전집 사려고 죽을 똥을 쌌다는 건 짐작 하시겠지?

그리고 꼭 해야 할 말. 포드 메독스 포드의 네 권짜리 대표작 <퍼레이즈 엔드>와 조지 엘리엇의 네 권짜리 <다니엘 데론다>. 이 두 작품은 한국문화사라는 개떡같은 출판사에서 찍었다. 책값 할인도 전혀 안 해주는 배짱 좋은 회사인데 둘 다 교정 교열이 개판무인지경이다. 그래서 그걸 지적하면 댓글을 달아 생 지랄을 해 그게 드러워서 독후감을 삭제하기도 했다. 이 책들 말고 페터 바이스의 책도 마찬가지였다. 하여간 얼마 남지 않은 독서생활 동안 절대로 피해야 할 출판사다. 이건 전적으로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절대로 동의하지도 마시고, 참고도 하지 마시라. 괜히 다 늙어 고소당하고 싶지 않다. 세상에나, 포드 매독스 포드와 조지 엘리엇 만한 영어 소설가가 몇이나 있다고 그걸 그 지랄로 책을 만드냐는 말이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피해가지 못했다. 앞으로 <전쟁과 평화>를 또 읽고 싶으면 도서관을 이용하려고. 다른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책 표지가 하도 구려서. 뭐 내 마음이니까.

홍성원의 <남과 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쟁문학이라는 데는 백퍼 동의한다. 근데 또 읽을 거 같지 않아서. 비슷한 논조의 작품이 <남과 북>이후에 이미 많이 나왔다.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의 <라일라>도 버리느냐고? 그렇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은 감명깊게 읽었지만 <라일라>는 내 수준에 과하게 철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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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9-26 2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석 연휴에 책 정리하셨군요.
저도 요즘 책을 많이 정리하고 있어요.
집착이란 것이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Falstaff 2026-09-27 05:51   좋아요 1 | URL
지금은 요즘 알라딘 분들이 읽기 붐이 인 것 같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창석 번역을 버릴까 말까 하는 겁니다. 이걸 버려야 수십년 끈 책 정리에 진짜 의미가 생길 것도 같고, 이렇게 생각하는 게 오만인 것도 같고, 하이고,,, 거 참 생각이 많습니다.

자목련 2026-09-27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제가 모르는 책들이 정말 많네요. 버리는 것도 일인데, 몇 번을 왔다 갔다 하셨겠네요. 이제 소장할 책 목록 올라오는 건가요?

Falstaff 2026-09-27 19:53   좋아요 0 | URL
버리는 것도 정말 일이더라고요. ㅎㅎㅎ
갖고 있을 책은 뭐... 그거 참.... ^^;;

망고 2026-09-27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왜 우리동네에 안 사시는 거죠? 싹 다 주워오고 싶어요ㅠㅠ

Falstaff 2026-09-27 19:54   좋아요 1 | URL
에휴, 별 거 없습니다. 방에 책이 별로 없으니까 깔끔하니 아주 좋은 걸요. ㅎㅎ

살리에르 2026-09-27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정리에 망설이는 저에게 상콤한 충격을 주는 글이네요^^ 진짜 방이 안 읽은 책으로 가득차서 늘 한숨만 쉬고 있습니다. 진짜 좀 정리해야 하는데 책도 안 읽으면서 늘어나기만 하니 스트레스에요 ㅎㅎ

Falstaff 2026-09-28 04:58   좋아요 0 | URL
책을 정말 버리려고 하면 어느 순간의 자극과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하더라고요.
저는 한 순간, 과연 이것들 가운데 다시 읽을 책이 몇 권이나 될까, 이런 생각이 들었고, 제일 중요한 건 넘치는 책장이 한 순간에 꼴 보기 싫어졌습니다. ㅎㅎㅎ

잠자냥 2026-09-28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위험한 책> 읽고 있다더니 이 냥반이... 책을 다 버리네! ㅋㅋㅋ

<퍼레이즈 엔드> 살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너무 비싸서 안 샀지만...) 안 사길 잘했군요....
저한테 저기서 딱 한 권만 가져가라면... <압살롬, 압살롬> 고를 거 같은데!
그걸 버리시네!

Falstaff 2026-09-28 18:57   좋아요 0 | URL
<위험한 책> 생각보다 괜찮더군요. 게다가 무척 짧기도 하고 말입죠.
장왕록 <압살롬, 압살롬>은 금속활자 본에 글씨 크기가 작습니다. 21세기 사람이 읽으려면 쉽지 않을 듯합니다.

잠자냥 2026-09-29 10:25   좋아요 0 | URL
<위험한 책>... ㅋㅋㅋ 책에 관한 집착을 내려놓게 하는 데 일조하는 책입죠....
근데 이걸 오래전에 읽어서 다 까먹고는 제가 여전히 책에 집착하고 있는가 봅니다.
 
맨 끝줄 소년
후안 마요르가 지음, 김재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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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안 마요르가는 5년 전에 두 편이 실린 희곡집 《비평가 / 눈송이의 유언》으로 처음 만났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설마 우리말로 인사했을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미 정치적으로 웬만큼 민주화되고, 옛 시절의 악연마저 어느 정도 수습을 한 상태에서 등장한 스페인 86세대는 우리나라와 달리 다양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구나. 거 참 부럽네. 프랑코 개자식들로부터 그들의 파시즘을 전수받지 않을 수 있었으니 지금 권력을 잡았을 스페인 86세대들은 마드리드에 있는 대통령 궁에서 여전히 죽창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느라 목에 핏대를 세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아니 부러운가.

  마요르카는 이제 달랑 두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좋다. 이제 도서관에서 POD 책은 사 주지 않겠다고 하니, 악마같이 비싸게 책값을 책정하는 지만지드라마의 희곡을 사 읽을 수도 없고, 도서관에다 사달라고 할 수도 없어 앞으로 마요르가의 다른 작품을 읽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아쉽지만, 세상에 아쉬운 일이 하도 쌔고 쌔서 뭐 그런가보다 하고 살아야지 별 수 있간디?


  책을 열면 제일 먼저 작가가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글이 들어 있다.

  자신은 한 번도 한국의 교실과 가정에 가보지 않았다는 것으로 시작해, 전제가 한국의 교실과 가정이 아마도 스페인과 다르면서도 비슷하리라, 만남과 헤어짐, 화합과 갈등이 벌어지는 공간이라고 추측한다. 근데 이거 조금 아니지 않은가? 중고등학교 교실에서 생활해본지 하도 오래라서 라떼와도 다르겠지만 여전히 지금의 한국 교실과 서유럽의 교실은 거의 딴 판으로 다르지 않을까 싶다. 근데 한 편으로는 조금 안 좋은 쪽으로 교실 역시 세계화되어 거기가 거기일 것 같은 생각도 들고. 그래도 스페인의 고등학교 교실 분위기가 오직 대학입시에 초점이 모이는 우리나라 교실하고는 많이 다를 것 같은, 아니면 말고.

  후안 마요르가는 스페인 국립연구원, 파리와 베를린의 뮌스턴 대학, 국립원격교육대학 등을 거쳐 긴 가방끈을 가졌지만 중고등학교 교사 생활도 제법 하는 바람에 당시 한 학생과의 작문에 얽힌 기억으로 <맨 끝줄 아이>를 썼다고 한다. 수학 교사였는데, 시험 볼 때, 한 학생이 답안지에 이렇게 썼다나?

  “선생님, 저는 공부를 하지 않아서 문제를 전혀 풀 수가 없어요. 하지만 최근에 저는 테니스를 아주 잘 쳐서 일요일에는 마르카 스포츠 신문에서 주최하는 대회에 나갔어요. 등등.”

  이때 마요르카가 얻은 힌트. 학생이 시험시간의 시험지/답안지를 통해 자기 이야기를 교사한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


  <맨 끝줄 소년>은 말 그대로 학급의 제일 끝줄에 앉은 클라우디오라는 이름의 가난한 학생을 말한다. 수학과 과학 실력이 돋보이는 반면 철학과목에서는 비실비실하다. 같은 반에 라파라는 애칭의 부잣집 아들이 있었는데 얘는 또 철학 점수는 좋지만 수학은 거의 까막눈 신세다. 그래서 클라우디오는 라파는 서로 모자란 과목을 보충해주면서 함께 공부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합의한다. 공부할 장소는 물론 훨씬 잘 사는 라파의 집이 되겠지.

  이 두 아이를 가르치는 작문 또는 국어 교사가 헤르만. 헤르만은 요즘 학생들의 작문 실력에 거의 절망을 하고 있던 터. 주말 이틀 동안 있었던 일을 써보라는 콩트를 냈는데 거의 다 이런 식이다.

  “토요일에 나는 테레비를 봤다. 일요일에는 피곤해서 아무것도 안 했다.”

  딱 두 문장. 30분 동안에 메꾼 답안지. 이런 답지도 있다.

  “난 일욜이 실타. 토욜은 좋다. 하지만 이번 토욜에는 아버지가 나가지 못하게 하고 핸드폰을 빼섰다.”

  교사라는 직장인으로 헤르만은 절망할 수밖에. 그런데 갑자기 눈앞이 훤하게 밝아지는 답안지가 있었으니 바로 클라우디오 가르시아가 쓴 작문이다.


  “토요일에 난 라파엘 아르톨로 집에 공부하러 갔다. 그 아이디어는 내 머리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난 그집에 들어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략) 라파에게 돌아가려고 할 때 어떤 향기가 내 주의를 끌었다. 혼동할 수 없는, 중산층 여자의 향기다. 그 향기에 이끌려 난 거실까지 가게 되었다. 거기서, 소파에 앉아 인테리어 잡지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이 집 여주인을 발견했다. (후략)”

  상당한 글솜씨의 고등학생. 헤르만은 속으로 ‘아주 만족!’을 외치고 있었을 터. 그는 진짜 오랜만에 기쁨이 터져 마침 옆에 앉아 있는 아내 후아나한테 답지를 건네고 읽어보라 권한다.

  후아나는 불편하다. 남편한테 말한다.

  “나라면 이 글을 교장한테 가져가겠어.”

  친구의 엄마를 “혼동할 수 없는 중산층 여인의 향기”라고 하는 등 글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을 비웃고 있다면서. “얘는 도대체 자기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왜, 교실에서 큰 소리로 읽히고 라파가 그 친구 뺨을 한 대 갈기는지 보지 그래?”

  이젠 더 열을 받았는지 작문 교사인 남편 헤르만까지 볶는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남자 아이 열일곱 살. 내가 여자였던 적이 없어서 열일곱 살 먹은 여자 아이는 모르겠고, 남자애 열일곱이면 이게 말이 청소년이지 거의 완전한 성인이다. 백년 전만 해도 전쟁 터지면 제일 먼저 지원해 참전했다가 죽거나 평생 불구가 되어 돌아올 아이들. 열일곱 살이면 친구의 엄마일지언정, 그녀에게 욕정만 품지 않는다면, 사실 나이 든 엄마뻘 여성에게 욕정을 품는 소년은 내 평생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드물지만, 하여간 그렇기만 하면 친구 엄마 가까이에서 “혼동할 수 없는 중산층 여인의 향기” 운운한 게 뭐가 문제인지, 나는 모르겠다.

  게다가 클라우디오는 겁나게 가난한 집의 아이로, 집안에서는 식용유 찌든 냄새, 고기의 비계 냄새, 뭔가 희미한 부패 향기와, 빼놓을 수 없는 곰팡이 냄새에 익숙할 터, 새롭게 환한 비누와 세제와 분과 비싼 데오도란트 향기가 넘실거리면 얼마든지 그렇게 쓸 수 있는 거 아닌가? 하여간 나는 헤르만의 아내 후아나의 발언을 통해 이이의 전작 가운데 한 편인 <비평가>가 저절로 떠오르더라니까.

  그런데 후안 마요르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이런 비평 또는 검열 한 가지가 아니었다. 작품을 읽어가다보면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는 걸 알 수 있다. 헤르만은, 보통의 남편들이 그렇듯이, 아내의 의견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내한테 비슷한 의견이 나오지 않을 쪽으로 아이를 지도하게 되고, 아이 클라우디오는 이런 선생 헤르만에게 반발하기 시작한다.

  근데 여기까지는 후안 마요르카가 “한국의 독자에게”에서 밝힌 두 가지 공간 가운데 교사-학생의 관계만 이야기한 것이다. 하나가 더 남았다. 가정 속 이야기. 라파와 라파의 부모로 이루어진 공통체와 클라우디오의 갈등. 헤르만은 클라우디오가 라파와 계속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위하여 절대 하면 안 될 부정한 짓을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게 뭔지는 알려드리지 않겠지만, 넷플릭스 TV 드라마 교권수호국인가 뭔가에서 나온다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커넥션, 비슷하기는 하지만 절대 대가 없는 커넥션도 등장한다.

  내 경우에는 많은 문제 제기 가운데 헤르만이 아니라 교사 사모인 후아나가 벌이는 작문에 대한 검열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당신은 어떤 이슈를 재미있게 읽을 지 모르겠다. 후안 마요르카, 이 65년 뱀띠 아저씨, 거 참 재미있게 쓰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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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라, 모세여 ㅣ 서커스 세계문학 시리즈
윌리엄 포크너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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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포크너의 중단편 <곰>은 두세 번? 서너 번? 읽은 거 같다. 그럼에도 <곰>이 윌리엄 포크너 스스로 연작 장편이라고 주장하는 《내려가라 모세여》의 일곱 중단편 가운데 다섯 번째 작품이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다. 이제 새롭게 《내려가라 모세여》를 읽으니 <곰>이 1863년 1월 1일, 미국의 노예해방 이전, 그러니까 아무리 늦어도 1862년 이전부터 20세기 1940년대까지 아우르는 한 일가의 대하 가운데 한 편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읽힌다.

  작품의 중심지는 당연히 요크나파토파 지역과 제퍼슨 시.

  이 연작 장편을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떠올렸다. 포크너가 없었으면 마르케스가 마콘도라는 가상의 지역 또는 마음의 고향을 만들 수 있었겠으며, 백년이 넘는 가계도를 이루는 <백년의 고독>을 생산해낼 수 있었을까? 있었겠지. 있었겠다고 믿기는 하지만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태까지 백범 작이라고 알았는데 사실은 서산대사 휴정이라는 중이 지은(지었다고 하는) 오언절구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今日我行跡 須作後人程“ 오늘 내 행적이 뒤에 올 사람의 발길이 되리라, 하듯,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와 제퍼슨 시가 없었더라면 마르케스가 마콘도를 만들기도, <백년의 고독>을 쓰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여길 수밖에 없다.

  아니, 어딜. 세상에 마르케스밖에 없나? 아마도 20세기 중후반부터 소설작업을 해 온 무수한 소설가 가운데 한 발짝 앞에 나서서, “나는 윌리엄 포크너의 그늘 덕을 조금도 받지 않았소!”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작가가 몇 퍼센트나 될까? 서양 작가만 국한해 묻는 것도 아니다. 동양, 더 쉽게 한, 일, 중 세 나라의 잘 나가는 작가들도 포함해서. 오에 겐자부로? 모옌? 당연히 뛰어나고, 내가 존경하는 작가들이지만 이들 역시 포크너의 서늘한 그늘 덕을 전혀 보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걸 근거로 이렇게 얘기하는지 더 따지지 마시라. 방금 오에와 모옌한테 전화 걸고 이야기하는 중이니까.


  작지 않은 대하는 루시어스 퀸터스 캐러더스 매캐슬린이라는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제일 선대 사람. 그래서 ‘늙은 캐스’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작품 속에 살아있는 등장인물로는 나오지 않는다. 이이가 요크나파토파 소재 농장의 농장주. 생몰이 1772~1837. 평생 흑인 노예를 소유하고 살았던 전형적인 백인 농장주이지만, 숱한 작품에서 늘 보던 악랄한 백인 지주와는 비슷하지도 않았다. 나름대로 선한 인간형이랄 수 있는 농장주. 이이는 결혼해 아들 둘, 딸 하나를 두었으니, 쌍둥이 형제 시어필러스(애칭 벅)과 애머디어스(애칭 버디),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 딸이었다. 이 가운데 벅이 다 늙어 낳은 아들 아이작 매캐슬린, 애칭 ‘아이크 삼촌’이 연작 장편의 가장 중심적인 축을 만드는 인물.

  늙은 캐스는 사랑 또한 넘치는 인물이라 아내 말고도 자기가 소유한 노예 여인 유니스 사이에 딸 토마시나를 만들었다. 토마시나 역시 당연히 노예였으며, 자기 딸인 줄 알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훗날 토마시나하고도 관계를 맺어 아들 터렐, 속칭 ‘토미네 털’을 두었다. 이 관계를 지금 21세기 시점으로 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쇼킹이겠지만 미국 노예시대에 이런 일은 그저 있을 수 있는 경우에 불과했다. 물론 거꾸로, 즉 흑인 남자 노예와 백인 농장주의 부인과의 사이에 생식이 벌어졌으면 죽고 사는 참극이 수반되었겠지만 하여간 그때는 그랬다는 거.

  그래서 늙은 캐스의 아들이기도 하고 손자이기도 한 노예 토미네 털이 첫 작품 <옛 일>의 중요한 등장인물이 된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토미네 털은 쌍둥이 형제 벅과 버디 삼촌네 노예. 근데 족보로 보면 배 다른 형제이자 조카. 형제라고 하면 나이 차이가 무려 서른네 살. 늙은 캐스는 벌써 주님의 안식을 찾아 떠난 시절이고, 토미네 털은 바야흐로 청춘시기를 맞아 불타오르는 심정으로 또다시 농장에서 탈출을 해버렸다. 근데 이게 습관적 탈출. 쉬운 얘기로 자유를 찾기 위한 도망이 아니라 DNA의 명령에 따라 세상에 둘도 없는 짝을 찾아 이웃한 농장의 노예 아가씨 테니 비첨의 방향芳香, 일종의 페로몬을 찾아 가는 거였다. 벅과 버디 삼촌도 토미네 털이 어디로 간 줄 다 아니까 별로 서둘지도 않고 털을 찾아 나서는데 이번에는 연작 장편의 첫 작품이 되려니까 이 수순이 결코 호락호락 넘어갈 수는 없겠지? 그리하여 노예 아가씨 테니의 주인과 벅, 벅이 쫄리니까 나중엔 버디 삼촌까지 나서서 크게 한 판 도박을 벌이는데, 이게 영 재미있더라는 말이지.


  물론 재미로 치면 첫 작품 <엣일>보다 두번째 작품 <불씨와 화덕>이 한 수 윗길이다. 즉, 책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 보면, 이거 뭐 읽을수록 점입가경, 점점 더 흥미의 수준이 높아가니 그저 즐거울 수밖에.

  제목이 <불씨와 화덕>인 것은, 흑인 노예들이 시집 장가가서 거의 관습적으로 해야 했던 것이 화덕에 불씨를 붙이면 죽음이 갈라놓아 둘의 혼인상태가 해체될 때까지 화덕에서 불씨를 꺼뜨리지 않아야 했던 것을 빗댄 거다. 뭐 굳이 미국의 흑인 노예들만 그랬을까. 우리나라에서도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궁이의 불씨를 보존하는 거였다고 최명희의 미완성 명작 <혼불>에서 나온다. 나 어려서도 외숙모가 연탄불 꺼트리면 외갓집 특히 여성 구성원들의 뒷담화가 찬란무비했던 기억이 난다. 그건 그거고. 사실 그건 그게 아니라 결국 화덕에서 불씨를 꺼트리는 일까지 몽땅 나오기는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앞의 작품 <옛일>에서 중요한 조연이었던 토미네 털이, 벅과 버디 삼촌의 맹활약 덕분에 테니 비첨을 아내로 얻고, 심지어 매캐슬린 농장의 노예로 데려올 수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 이 노예 부부 사이에 아들-딸-아들이 생겼으니 막둥이 루카스 퀸터스 캐러더스 매캐슬린 비첨이 <불씨와 화덕>에서 찬란한 주인공이자 설레발꾼이자 포복절도의 사기꾼, 아니, 똘똘이 스머프로 등장한다.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똘똘이 스머프.

  루카스의 아내 이름은 몰리. 둘 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노예제도는 사라진 시절이었다. 어엿한 자유인. 그러나 흑백 차별의 유구한 전통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던 시절. 아다시피 루카스는 저 꼭대기 할아버지 캐러더스 매캐슬린, 캐스 노인과 노예 여성 사이에서 이룬 가계이다. 백인 아내로 이어진 가계 가운데 남자 항렬, 쉽게 말해 매캐슬린 가계는 벅과 버디 삼촌에 이어 벅의 아들 아이작 매캐슬린에서 끊기고, 이름도 나오지 않은 딸 하나가 에드먼즈 가문으로 시집가 손자 재커리를 낳았는데 이이가 주인공 루카스와 동갑내기였다. 1898년에 재커리 애드먼즈가 아들을 얻었지만 난산 끝에 아내가 죽어, 루카스의 아내 몰리, 그리고 몰리가 낳은 루카스의 아들을 집에 데려와 젖어미 역할을 하면서 두번째 명품 익살극을 시작한다.


  루카스 입장에서 아무리 흑백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애먼 마누라가 백인 아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젊은 농장주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 살고 있으니 눈이 돌아가는 건 당연하다. 루카스가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물론 매캐슬린 가문의 훈훈한 가풍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노예 해방과 동시에 선대 매캐슬린은 흑인 피가 흐르는 후손들에게도 결코 적지 않은 재산을 남겨 주어 제퍼슨 시내에 있는 은행에 만만하지 않은 현금을 보관중이건만 절대 있는 척을 하지 않는다. 아, 이건 나중 일이긴 하다. 거기까지는 이야기하지 못할 거 같으니 그냥 그런 줄 아시면 되겠다.

  루카스가 열을 받아 백인 조카(뻘)에게 달려가 아내 몰리를 데려왔는데, 이때 젖먹이 홀로 홀아비한테 맡겨 둘 수 없어 함께 데려왔으니, 얘 이름이 로스인데, 아이가 점점 커짐에 따라 이집 저 집을 다니며 함께 자기도 하고, 먹는 건 물론이고, 장난도 치고, 뭐 그렇게 컸겠지? 커가면서 사달이 없을 수 없었을 테니까 점점 흑인 아저씨, 사실은 할아버지 항렬 댁에는 점점 뜸해졌을 것이고, 아버지가 죽어 이제 자기가 후대 농장주가 되었으니 아무래도 루카스하고는 좀 멀어지기는 했을 터. 그래도 자기를 키워준 몰리 할머니와의 정리 때문에 매사 야박할 수도 없었을 건 안 봐도 뻔하다.

  루카스도 나이를 먹어 이제 벌써 육십대 중후반에 이르러, 막내딸 넷을 시집보내야 할 처지. 넷이 벌써 1923년생, 그간 세월도 무척 많이 갔다. 하지만 나이로는 자식 뻘, 족보로 보면 증손 또는 손자 뻘인 로스 에드먼즈가 여전히 루카스더러 ‘자네’라고 부를 정도의 시절임을 감안하자. 그렇다고 로스가 악당? 천만의 말씀. 당시 시선으로 (내가)보면 세상에 그런 백인도 별로 없었을 듯. 더군다나 KKK가 난무했던 1930년대 미국 남부에서. 넷이 다 커서 시집을 가야 할 거 아녀? 그리하여 조지 윌킨스라고 하는 흑인 남자를 골랐는데, 당연히 여기서 문제가 터진다. 1930년대 금주령 시절. 조지가 완전히 질 낮은 옥수수 위스키를 만들어 팔려고 시도하는 것. 여태까지 루카스가 지역에서 독점하고 있던 사업인데 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위짜리를 혼내기 위하여 자기 증류기를 땅에 숨기고 신고를 하려 마음을 먹어, 캄캄한 밤에 진흙 땅을 파다가 뭔가가 손에 잡혀 이게 뭘꼬, 쳐다보니까 글쎄 금화였던 거다. 분명히 누군가가 이 근처에 금화가 잔뜩 든 자루 또는 궤짝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고 여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그걸 찾아야 하고, 제일 빨리 파내기 위해서는 최첨단 금속 탐지기가 필요할 터.

  3백 달러에 이르는 금속 탐지기를 손에 얻는 스토리를 읽으면서 얼마나 웃었든지, 윌리엄 포크너가 이렇게 희극적으로 재미있어도 되는 거야?

  그런데 사실 이런 희극 또는 익살극은 이 두 편이 전부이고, 포크너 특유의 스토리 텔링은 새롭게 시작하니 특별히 당신이 인상깊게 읽었을 명작 <곰>을 기억하면서 연작 장편을 읽으면 첫 작품 <옛일>부터 전작을 관통하는 대하를 짐작하실 수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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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한가운데 1 ㅣ 시대의 여성 시리즈
패트릭 화이트 지음, 박유진 옮김 / 잔상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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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전에 <전차를 모는 기수들>을 읽고 쓴 독후감을 보면 패트릭 화이트가 “유머, 화려한 문체, 서술의 전환, 의식의 흐름을 특징으로” 하는 작가라고 전에 어디서 주워들었던 모양이다. 당시 <전차를…>을 아주 인상깊게 읽었는데, 작품에서 그의 특징이라고 하는 유머, 화려한 문체, 서술의 전환은 그리 자주 보이지 않았고, 의식의 흐름은 어느 구석에 있는 지 찾아낼 주제가 되지 못하여 화이트에 관한 세간의 평이 조금 이상하다고 여기고 넘긴 적 있다. 이번에 독후감 쓰기 전에 다시 화이트를 검색해보니, <전차를…>이 1961년, <폭풍 한가운데>는 이이가 노벨문학상을 탄 1973년 발표작인데, 이번에 <폭풍…>을 읽어보니 유머, 화려한 문체, 서술의 전환을 이이의 특징으로 짚는 건 확실하게 이해하겠다. 내가 뭘 알건디? 그저 초창기 작품<전차를…>과 소설집 《불타버린 사람들》만 읽고 한 작가를 단정하려 했던 거겠지.

  위키피디아를 보면, 화이트가 1969년부터 계속 노벨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속으론 은근히, 그리고 열렬히 바랐을 거 아녀? 1969, 70년 두 해를 기다렸다가 1971년 세 번째 해에 접어들어서도 칠레의 국민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상을 받게 되니까 못내 섭섭했던지 다시는 노벨상 이야기를 듣지 않게 되기 바란다는 코멘트를 날렸단다. 그러다 한 해 쉬고 다음다음 해인 1973년에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니까, 이거 상 받으러 가기 좀 쑥스럽지 않았겠어? 그래서 결국 화이트 본인은 건강이 안 좋다는 핑계 또는 이유로 스웨덴 스톡홀름의 콘서트홀에 가지 않았단다.

  그런데, 이렇게 큰 상을 받은 작가 가운데 몇 명은 노벨상이란 것이 자신의 질곡이 되어 이후 시답지 않은 작품만 몇 개 발표하고 그걸로 작가 생명을 마감한 이들이 제법 있다. 이이도 그랬을까? 61세에 상을 받았으니 이미 문학적으로도 전성기는 지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폭풍…> 이후에 그리 명성을 떨친 작품은 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거 그냥 내 짐작이다. 인용하지 마시라. <폭풍…>이 노벨상을 탄 해 여름, 오스트레일리아(이하 “호주”)에서는 겨울에 출간했고, 수상자 발표는 11월에 해서 그랬는지 화이트 관련해서 뒤져보면 대개 이 <폭풍…>을 그의 대표작품으로 꼽는다. 나는 당연히 <전차를…>를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니까 그런가보다, 하면서 넘어간다.


  <폭풍…>은 확실히 곳곳에 BW, 즉 Black/White 유머가 매복해 있고, 등장인물 A의 입장에서 서술하다가 갑자기 B의 시각에 입각한 내레이션이 나오는 등 서술의 전환이 자유롭게 등장한다. 작품도 86세 먹은 호주 부르주아 노 부인의 죽음의 침상 몇 달이지만 당연히 주인공 엘리자베스 헌터 부인과 부인의 (출생 순서대로) 아들, 딸과 이미 죽은 남편, 부인이 유혹해 한 번 자빠뜨린 성실한 전담 변호사, 세 명의 간호사와 요리사, 가정부 등의 회상이 빼곡해서 950쪽에 육박하는 장편소설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니까 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는 말이다. 즉 죽어야 끝나는 소설. 살면서 행했던 별의 별 에피소드를 망라하면서 결국 ①인생무상이나, ②그래도 사랑이 제일이야, 영탄하거나 ③누가 뭐라해도 일단 살아볼 일이라는 주제이기 십상인데 <폭풍…>은 어떤 결말로 치고 갈까?

  엘리자베스 헌터의 결혼 전 이름은 엘리자베스 셀켈드. 이이는 몇 달 있으면 죽을 예정인데,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기를, “아무래도 난 속물이었던 모양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탓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 받은 가정교육도 문제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살한 것도.” (p.142)

  그러니까 부모한테 물려받은 건 딱 하나. 지금이야 이 모양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시드니에 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와 몸을 지녔다는 것. 그려, 여자나 남자나 잘 생기면 일단 유리한 자리를 꿰 차는 거다. 엘리자베스 셀켈드 양은 이런 하드웨어는 물론이고 자신의 하드웨어를 이용하여 몇 단계 계급을 올려 버렸으니,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알프레드 헌터 씨와의 결혼에 성공해서, 부와 미모로 시드니 사교계를 단숨에 정복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속물이라고? 맞다, 속물. 그것도 대단한 속물.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해야 하며, 이들과의 사이에 누가 있어서 그걸 방해한다면 방해물이 친자식이 되었더라도 일단 없애 버려야 마땅하다. 정말? 그렇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좀 긴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그런 거 다 소개하자면 끝도 한도 없다. 그냥 지나가자.


  근데 죽은 남편 알프레드는 진심으로 엘리자베스를 사랑했다. 부인이 생각해봐도 그렇다. 남편은 아내한테 자유를 주기 위하여 시드니에서 멀리 떨어진 가상 지역 고공 주의 가상 커뮤니티 쿠저리 소재 농장에서 머물고, 아내는 시드니 저택에서 살았다. 아들과 딸도 어린 시절을 쿠저리 농장에서 지내다가 아들은 영국으로 가 작위를 받은 연극배우 바질 경이 되었으나 이젠 연극계의 늙은 퇴물로 지방 순회공연을 전전하고 있으며, 딸은 프랑스의 나이든 라스카반 공작과 결혼해 프랑스 공작비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지만 라스카반 공작은 새로 생긴 애인과 살림을 차렸고, 가톨릭 때문에 이혼을 하지 못해 그저 공작비라 불리는 것만 기쁨으로 알고 사는 중이다.

  바질 경은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첫째 아내의 딸은, 바질의 딸인 줄 알았다가 더 알고 보니까 다른 남자의 아이였으며, 같이 연극 배우를 하던 둘째 아내는 결혼하자마자 끝냈다고 봐도 별 이상 없다. 라스카반 공작비는 집을 나서면서 라스카반 집안의 보석들만 잔뜩 얻어냈을 뿐 이젠 새로운 사치는 엄두도 내지 못할 처지. 둘 다 이름만 비까번쩍하고 속은 거의 거렁뱅이다. 이때 주의할 점. 살기를 부르주아로 나서 그렇게 크고,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이 생각하기에 거렁뱅이지, 우리가 아는 그런 진짜배기 거렁뱅이는 절대로 아니라는 점.

  이 아들과 딸한테 인생에 딱 한 번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엄마가 죽어가고 있는 것.

  아버지가 장인을 흉내내 스스로 목숨을 끝내면서, 자기 전 재산은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내 소유로 있다가, 아내가 죽으면 아들과 딸한테 정확하게 반반씩 유증하겠다고 유언장에 박아 놓았다. 유언에 따라 그동안 엄마한테 죽기전에 재산 상속 좀 해달라고 입도 벙긋하지 못한 처지. 그나마 엄마하고는 정도 없다. 엄마 성격이 하도 자기만 아는 인간이라 어린 시절부터 엄마보다는 아빠하고 훨씬 가까웠으며 엄마와는 서로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게 일상이었으니 어느 정도인지 이해는 간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동몽선습과 소학을 공부하지 않은 서양 것들이니, 나 어릴 때 그렇게 했지, 늙어서 보자, 앙심만 쌓였을 수도 있고. 그러나 알고 보면 자식들도 전부 엄마 닮았다. 바질과 도로시가 정말 오랜만에 한 5년 만에 편지를 해서, 엄마 요새도 건강하시고 연애도 잘 하시고, 하인들도 잘 갈구시지요? 안부를 물으면 이게 곧 용돈 좀 달라는 뜻이었고, 그걸 칼같이 알아들은 엘리자베스 헌터 여사는 그때마다 일정 금액의 수표를 보냈으니, 그래도 자식들이 엄마를 함부로 하지 못했던 건 당연했겠지.


  이런 상태에서 엄마가 죽어가니 새끼들 입장에서 말로는 못하지만 경사라도 난 거 같은 기분이다. 이걸 패트릭 화이트는 그의 주특기라고 알려진 유머와 화려한 문체로 써 놓았는데, 아뿔싸, 이 책이 나온 것이 1973년, 지금부터 무려 53년 전이다.

  그러니 어떻겠어? 이미 꼰대가 된 내가 읽어도 세상에, 이런 아재 개그가 또 없다. 당시엔 화려한 문장이었어도 지금 읽어보면 그냥 밋밋한 수준의 문장들. 그래서 1권을 읽을 때는 그렇게 지루할 수 없었는데, 2권 들어가 본격적으로 아들과 딸, 바질과 도로시, 이름도 참 후지지 바질과 도로시가 언제 적 이름이야? 지금 젊은이들 가운데 바질이나 도로시라고 이름 지으면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하여간 남매가 본격적으로 유산쟁탈전의 진검승부를 겨루기 시작할 즈음이면, 그리하여 하루라도 엄마를 빨리 보내기 위하여, 그동안 경비를 줄이려는 속셈도 있고, 해서, 생전 존경하지 않았던 미운 엄마를 ‘쏘로굿 빌리지’라고 하는 부르주아 노인네들 요양원으로 보내려는 촌극이 정점에 오르기 시작할 때부터는 아이고, 또 무척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독후감을 짧게 끝내기 위하여, 빼놓을 수 없는 출연진들, 간호사 세 명과 요리사, 가정부, 그리고 변호사부부를 소개하지 않아 유감스럽다. 기회가 닿으면 읽어보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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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6-09-23 0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권 3별. 2권 4별. 다 합해 4별
다른 번역이 혹시 나오면 또 읽어봐야 할 작품. 즉, 좀 아쉽다.

잠자냥 2026-09-23 11:11   좋아요 0 | URL
으흠.... 제가 이 책 읽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일단 미룬 이유가... 바로 이것! ㅎㅎㅎ 다른 번역이 나올지 모르겠네요...

Falstaff 2026-09-23 21:25   좋아요 0 | URL
출판사 일을 몰라서 아닐 수도 있는데, 다른 번역은 한참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zlfkzlfk 2026-09-23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소녀는 따로 자란다 ㅣ 위픽
안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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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담. 처음 듣는 이름. 책의 앞날개에 작가 소개가 있다. 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출생. 이후 좀 헛갈리는데,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이 문장에서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돈” 사람이 안담은 아닐 것 같다.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고 말했고, 자랐다는 말은 어린 시절부터 어른 또는 청소년 시절까지 성장했다는 말이니, 소녀 안담을 봉고 차에 태우고 전국을 떠돈 인물은 안담의 부모, 또는 부모 가운데 한 명, 아니면 안담을 키워주기로 한 후견인일 것 같다. <소녀는 따로 자란다>를 읽어보면 전국을 떠돌 때 안담을 데리고 다닌 사람 가운데 엄마는 있었을 듯하다.

  대학에서는 미학을 전공했단다. 그러면 서울대, 홍익대, 영남대 가운데 한 학교의 졸업생. 대학 졸업하고 예술 언저리에서 서성였다고. 직업 가운데 하나가 스탠딩 코미디언도 들어있다. ‘무늬 글방’이란 걸 열어서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고 있단다. 책방인 것도 같지만 책방을 핑계로 모임 장소를 두어 하여간 문학 언저리의 것을 궁리하는 소모임의 두목 정도가 아닐까 싶다. 아니면 말고.

  하여간 이렇게 문학을 포함한 “예술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사람으로 현재는 은평구에 사는 개 산책자. 마음에 드는 건, 주머니에 들어가는 작은 품종의 강아지가 아니라 성질나면 사람도 간혹 깨물 것 같은 늠름한 사냥개 종류처럼 보이는 중형 개를 키운다는 점. 은평구에서 달리거나 걷다가 안담 만나면 까불지 마라. 여차하면 사냥 당하는 수가 있으리니.

  안담은 특별히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작가란다. 나름대로 문학판에 아는 사람도 있고, 빽도 있고, 돈도 좀 있는 거 아냐? 짐작이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니까 믿지도 말고 어디 가서 진짜인 척 얘기도 하지 말자. 정말로 <소녀는 따로 자란다> 읽어 보시라. 글이 만만하지 않다. 나도 이 책을 읽은 후에야 안담이라는 이름을 알았는데,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 검색해보니 이 작은 단편 하나 실은 책이 2023년에 꽤 주목을 받았다. 흠. 이 정도면 나도 안목이 있는 편이군.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

  책방 검색을 해보니까 소설은 위픽 시리즈의 단편 <소녀는 따로 자란다> 이거 딱 한 권. 본문이 59페이지에서 끝나고, 다 읽는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겁나게 짧은 단편 하나. 등단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소설가가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이 작품도 오래 전에 무슨 마감이 있어서 쓴 것이 아니라 살면서 한 번 써본 것이란다. 그러니 사실 알고 보면 별 거 없는 ‘작가’가 되기 위해 머리 터지게 습작을 쓰고, 학생, 교수들의 얼토당토 않는 비평을 들으며 절망하면서 무슨 문학상 비슷한 것만 보이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투고를 하는 시절을 어쩌면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거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글만 잘 쓰고, 그게 마음에 들기만 하면 독자는 읽으니까.


  초등학교 고학년 여자 아이 이야기.

  내겐 완전하게 신세계. 나 초등학교 시절도 생각나지 않는데 더구나 여자 아이의 어린 시절과 딱 그 때 감각과 생각과 느낌 같은 것은, 정말로 한 번도 궁금해본 적조차 없는 거 같다. 나도 남자형제 가운데 둘째고, 아이도 아들만 둘 있어서 더 그랬던 것이겠지. 발 한 번 딛지 않은 벌판의 언덕 위에서 처음으로 바라보는 듯한 느낌. 이게 이 책, 50쪽짜리 읽고 ‘책’이라 말하기도 좀 어색하지만, 하여간 이 단편을 읽은 감상이다.

  더구나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괜히 폼잡지 않고, 질질 짜지도 않으면서 그냥 슬슬 지나치듯 할 말 다 하는 아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이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꼬마도 아닌 사춘기 바로 전 단계.

  잘 읽었다. 소설도 좀 더 자주 썼으면 좋겠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겠다. 무대 예술도 해야 하고, 돈을 좀 번다는 ‘무늬 글방’ 주인도 해야 하고, 개 산책도 시키면서 소설까지 쓰기는 쉽지 않을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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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9-22 0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위픽시리즈 계속 읽고 있는데 괜찮더라고요.
이 소설도 읽어 보겠습니다.

Falstaff 2026-09-23 05:45   좋아요 1 | URL
흠. 재미있게 읽으셔야 할 텐데요. ㅎㅎ

yamoo 2026-09-2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단하지 않은 사람이 그냥 취미로 쓴 글이 만만치 않다는 게 좀처럼 어떤건지 모르겠네요. 여러가지 하는데, 소설까지 잘 쓰면 사기캐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92년 생이면 젊은편인디...궁금하네요~

Falstaff 2026-09-23 05:46   좋아요 0 | URL
설마 취미로 쓰기야 했겠습니까. 뭐 다른 이유가 있겠지요. 즐기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