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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잘 쇠셨기 바란다.
시간이 남는다. 여유로워 좋다. 오늘은 새로 버린 책 이야기해보자.

좋은 책 많다. 망설였던 것이 이기영의 <민촌>과 이기서의 <강릉 선교장>. 이기영은 뭐 말 할 필요 없는 작가의 명품 리얼리즘 작품. 강릉의 선교장은 나 어렸을 적에 직접 그 집에서 자본 적이 있어 남다른 추억이 있는 곳이라 더욱 그랬다. 연못 정자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속 이주사, 정여사의 젊은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굳이 옛 앨범을 들춰보기는 싫다.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앨리 스미스의 <호텔 월드>, 르 클레지오가 쓴 <허기의 간주곡>, 그리고 우리말 제목을 워낙 후지게 달아서 오히려 진가를 가려버린 푸엔테스 작 <미국은 섹스를 한다> 외에도 홀링허스트, 사라마구, 셀린느, 매컬러스, 새라 워터스, 심지어 루슈디와 브레드버리, 요사, 드릴로, 커포티 등등 싹 버렸다. 마음이 편했을 수는 없었겠지?

이번에는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버려? 남겨둬? 이거 하고 에코의 두 작품, 그리고 한 때 책 좀 읽는 사람들 입끝에 올랐던 장왕록 번역의 포크너 <압살롬, 압살롬>이 문제였다. 포크너는 당시에 나더러 책을 줄 수 없겠느냐고 하는 분도 있었는데 싹 안 된다고 거절했던 거다. 사람이 이러면 안 된다. 결국 버릴 책을 하잘것없는 욕심 때문에 여태 이고 지고 있다가 결국 이꼴이 뭐냐고.
독일까지 가 무질을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딴 안병률 사장이 직접 번역한 <특성없는 남자>도 다시 읽을 거 같지 않아서 던졌다. 돈이 아깝지만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 민음사 모던클래식 시리즈의 애트우드는 <도둑신부>말고 <고양이 눈>을 남기기로 했다. 우엘벡도 버리고 존 파울즈도 버리고, 파울즈는 결국 <마법사> 한 작품만 남길 생각이지만 하여간, 쿤데라도 목록에 나왔다. 게다가 이제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하는 대산세계문학총서, 즉 현재 발간중인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도 눈에 들어왔다.

이 목록에서는 좋은 작품은 아니지만 하인리히 만이 쓴 <앙리4세>를 제일 고민했다. 백낙청의 기념비적 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도 이제는 꼴 보기 싫어서 던져버렸다. 드디어 화이트헤드, 백대가리 선생의 <관념의 모험>, 한길사가 야심차게 펴낸 그레이트북 시리즈 1번에 빛나는 책을 서슴없이 던졌다.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철학이라는 학문이 누구나 알 수 있는 말을 어떻게 하면 어렵게 설명하느냐를 공부하는 학문이라는 걸 배운 것으로 만족한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보다 볼라뇨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야만스러운 탐정들> 한 편으로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 라고 여겨서 다른 작품은 싸그리 버렸거나 버릴 예정이다. 이거 딱 한 번 읽고 버리는 책들이라 당근에 내놔도 돈 좀 받을 수 있겠는데, 귀찮다. 걍 버렸다.
오정희는 나이를 먹으면서 확연히 총기가 떨어져갔다. 내가 이이의 책을 버리는 날이 올 줄은 나도 몰랐다.
르메트르의 삼부작도 남아나지 못했다. 재미 있는 건 확실하지만 오래 보관할 만하지 않잖아? 두 번 펴보지 않을 듯한 책들. 이런 면에서 아까운 작가가 모옌이다. 좋아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시간이 나면 또 들춰볼 만하건만 사실 시간이 나면 그 시간에 다른 책을 찾을 듯해서 아쉬워도 그냥 보냈다.
그리고 초판본 한강의 <여수의 사랑>. 아무리 우리나라가 배출한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라고 해도 안 맞는 걸 억지로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장한몽>은 아깝고 아깝다. 근데 내가 읽지 않으면 가족 가운데 아무도 읽지 않을 듯. 예전에 나온 금속활자본이다.

제일 위에 쌓은 제3세대 한국문학전집. 198X년 처음 취직해서 봉급받아 처음으로 산 책. 학교 다닐 때 읽고 이런 전집은 꼭 한 질 갖고 싶어하다가 내 돈 벌어 산 책. 그래서 정이 남다르다. 웃긴 것이, 그렇게 갖고 싶었지만, 학창시절에 이미 다 읽은 책인데다가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을 만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라 반도 못 읽고 처분하게 됐다는 거. 40년이 지나서 말이지. 뭐 이게 다 사는 일이기는 하지만. 초봉이 25만원 할 시절이었으니 저 전집 사려고 죽을 똥을 쌌다는 건 짐작 하시겠지?
그리고 꼭 해야 할 말. 포드 메독스 포드의 네 권짜리 대표작 <퍼레이즈 엔드>와 조지 엘리엇의 네 권짜리 <다니엘 데론다>. 이 두 작품은 한국문화사라는 개떡같은 출판사에서 찍었다. 책값 할인도 전혀 안 해주는 배짱 좋은 회사인데 둘 다 교정 교열이 개판무인지경이다. 그래서 그걸 지적하면 댓글을 달아 생 지랄을 해 그게 드러워서 독후감을 삭제하기도 했다. 이 책들 말고 페터 바이스의 책도 마찬가지였다. 하여간 얼마 남지 않은 독서생활 동안 절대로 피해야 할 출판사다. 이건 전적으로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절대로 동의하지도 마시고, 참고도 하지 마시라. 괜히 다 늙어 고소당하고 싶지 않다. 세상에나, 포드 매독스 포드와 조지 엘리엇 만한 영어 소설가가 몇이나 있다고 그걸 그 지랄로 책을 만드냐는 말이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피해가지 못했다. 앞으로 <전쟁과 평화>를 또 읽고 싶으면 도서관을 이용하려고. 다른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책 표지가 하도 구려서. 뭐 내 마음이니까.
홍성원의 <남과 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쟁문학이라는 데는 백퍼 동의한다. 근데 또 읽을 거 같지 않아서. 비슷한 논조의 작품이 <남과 북>이후에 이미 많이 나왔다.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의 <라일라>도 버리느냐고? 그렇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은 감명깊게 읽었지만 <라일라>는 내 수준에 과하게 철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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