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가라, 모세여 ㅣ 서커스 세계문학 시리즈
윌리엄 포크너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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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포크너의 중단편 <곰>은 두세 번? 서너 번? 읽은 거 같다. 그럼에도 <곰>이 윌리엄 포크너 스스로 연작 장편이라고 주장하는 《내려가라 모세여》의 일곱 중단편 가운데 다섯 번째 작품이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다. 이제 새롭게 《내려가라 모세여》를 읽으니 <곰>이 1863년 1월 1일, 미국의 노예해방 이전, 그러니까 아무리 늦어도 1862년 이전부터 20세기 1940년대까지 아우르는 한 일가의 대하 가운데 한 편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읽힌다.

  작품의 중심지는 당연히 요크나파토파 지역과 제퍼슨 시.

  이 연작 장편을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떠올렸다. 포크너가 없었으면 마르케스가 마콘도라는 가상의 지역 또는 마음의 고향을 만들 수 있었겠으며, 백년이 넘는 가계도를 이루는 <백년의 고독>을 생산해낼 수 있었을까? 있었겠지. 있었겠다고 믿기는 하지만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태까지 백범 작이라고 알았는데 사실은 서산대사 휴정이라는 중이 지은(지었다고 하는) 오언절구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今日我行跡 須作後人程“ 오늘 내 행적이 뒤에 올 사람의 발길이 되리라, 하듯,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와 제퍼슨 시가 없었더라면 마르케스가 마콘도를 만들기도, <백년의 고독>을 쓰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여길 수밖에 없다.

  아니, 어딜. 세상에 마르케스밖에 없나? 아마도 20세기 중후반부터 소설작업을 해 온 무수한 소설가 가운데 한 발짝 앞에 나서서, “나는 윌리엄 포크너의 그늘 덕을 조금도 받지 않았소!”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작가가 몇 퍼센트나 될까? 서양 작가만 국한해 묻는 것도 아니다. 동양, 더 쉽게 한, 일, 중 세 나라의 잘 나가는 작가들도 포함해서. 오에 겐자부로? 모옌? 당연히 뛰어나고, 내가 존경하는 작가들이지만 이들 역시 포크너의 서늘한 그늘 덕을 전혀 보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걸 근거로 이렇게 얘기하는지 더 따지지 마시라. 방금 오에와 모옌한테 전화 걸고 이야기하는 중이니까.


  작지 않은 대하는 루시어스 퀸터스 캐러더스 매캐슬린이라는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제일 선대 사람. 그래서 ‘늙은 캐스’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작품 속에 살아있는 등장인물로는 나오지 않는다. 이이가 요크나파토파 소재 농장의 농장주. 생몰이 1772~1837. 평생 흑인 노예를 소유하고 살았던 전형적인 백인 농장주이지만, 숱한 작품에서 늘 보던 악랄한 백인 지주와는 비슷하지도 않았다. 나름대로 선한 인간형이랄 수 있는 농장주. 이이는 결혼해 아들 둘, 딸 하나를 두었으니, 쌍둥이 형제 시어필러스(애칭 벅)과 애머디어스(애칭 버디),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 딸이었다. 이 가운데 벅이 다 늙어 낳은 아들 아이작 매캐슬린, 애칭 ‘아이크 삼촌’이 연작 장편의 가장 중심적인 축을 만드는 인물.

  늙은 캐스는 사랑 또한 넘치는 인물이라 아내 말고도 자기가 소유한 노예 여인 유니스 사이에 딸 토마시나를 만들었다. 토마시나 역시 당연히 노예였으며, 자기 딸인 줄 알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훗날 토마시나하고도 관계를 맺어 아들 터렐, 속칭 ‘토미네 털’을 두었다. 이 관계를 지금 21세기 시점으로 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쇼킹이겠지만 미국 노예시대에 이런 일은 그저 있을 수 있는 경우에 불과했다. 물론 거꾸로, 즉 흑인 남자 노예와 백인 농장주의 부인과의 사이에 생식이 벌어졌으면 죽고 사는 참극이 수반되었겠지만 하여간 그때는 그랬다는 거.

  그래서 늙은 캐스의 아들이기도 하고 손자이기도 한 노예 토미네 털이 첫 작품 <옛 일>의 중요한 등장인물이 된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토미네 털은 쌍둥이 형제 벅과 버디 삼촌네 노예. 근데 족보로 보면 배 다른 형제이자 조카. 형제라고 하면 나이 차이가 무려 서른네 살. 늙은 캐스는 벌써 주님의 안식을 찾아 떠난 시절이고, 토미네 털은 바야흐로 청춘시기를 맞아 불타오르는 심정으로 또다시 농장에서 탈출을 해버렸다. 근데 이게 습관적 탈출. 쉬운 얘기로 자유를 찾기 위한 도망이 아니라 DNA의 명령에 따라 세상에 둘도 없는 짝을 찾아 이웃한 농장의 노예 아가씨 테니 비첨의 방향芳香, 일종의 페로몬을 찾아 가는 거였다. 벅과 버디 삼촌도 토미네 털이 어디로 간 줄 다 아니까 별로 서둘지도 않고 털을 찾아 나서는데 이번에는 연작 장편의 첫 작품이 되려니까 이 수순이 결코 호락호락 넘어갈 수는 없겠지? 그리하여 노예 아가씨 테니의 주인과 벅, 벅이 쫄리니까 나중엔 버디 삼촌까지 나서서 크게 한 판 도박을 벌이는데, 이게 영 재미있더라는 말이지.


  물론 재미로 치면 첫 작품 <엣일>보다 두번째 작품 <불씨와 화덕>이 한 수 윗길이다. 즉, 책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 보면, 이거 뭐 읽을수록 점입가경, 점점 더 흥미의 수준이 높아가니 그저 즐거울 수밖에.

  제목이 <불씨와 화덕>인 것은, 흑인 노예들이 시집 장가가서 거의 관습적으로 해야 했던 것이 화덕에 불씨를 붙이면 죽음이 갈라놓아 둘의 혼인상태가 해체될 때까지 화덕에서 불씨를 꺼뜨리지 않아야 했던 것을 빗댄 거다. 뭐 굳이 미국의 흑인 노예들만 그랬을까. 우리나라에서도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궁이의 불씨를 보존하는 거였다고 최명희의 미완성 명작 <혼불>에서 나온다. 나 어려서도 외숙모가 연탄불 꺼트리면 외갓집 특히 여성 구성원들의 뒷담화가 찬란무비했던 기억이 난다. 그건 그거고. 사실 그건 그게 아니라 결국 화덕에서 불씨를 꺼트리는 일까지 몽땅 나오기는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앞의 작품 <옛일>에서 중요한 조연이었던 토미네 털이, 벅과 버디 삼촌의 맹활약 덕분에 테니 비첨을 아내로 얻고, 심지어 매캐슬린 농장의 노예로 데려올 수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 이 노예 부부 사이에 아들-딸-아들이 생겼으니 막둥이 루카스 퀸터스 캐러더스 매캐슬린 비첨이 <불씨와 화덕>에서 찬란한 주인공이자 설레발꾼이자 포복절도의 사기꾼, 아니, 똘똘이 스머프로 등장한다.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똘똘이 스머프.

  루카스의 아내 이름은 몰리. 둘 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노예제도는 사라진 시절이었다. 어엿한 자유인. 그러나 흑백 차별의 유구한 전통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던 시절. 아다시피 루카스는 저 꼭대기 할아버지 캐러더스 매캐슬린, 캐스 노인과 노예 여성 사이에서 이룬 가계이다. 백인 아내로 이어진 가계 가운데 남자 항렬, 쉽게 말해 매캐슬린 가계는 벅과 버디 삼촌에 이어 벅의 아들 아이작 매캐슬린에서 끊기고, 이름도 나오지 않은 딸 하나가 에드먼즈 가문으로 시집가 손자 재커리를 낳았는데 이이가 주인공 루카스와 동갑내기였다. 1898년에 재커리 애드먼즈가 아들을 얻었지만 난산 끝에 아내가 죽어, 루카스의 아내 몰리, 그리고 몰리가 낳은 루카스의 아들을 집에 데려와 젖어미 역할을 하면서 두번째 명품 익살극을 시작한다.


  루카스 입장에서 아무리 흑백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애먼 마누라가 백인 아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젊은 농장주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 살고 있으니 눈이 돌아가는 건 당연하다. 루카스가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물론 매캐슬린 가문의 훈훈한 가풍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노예 해방과 동시에 선대 매캐슬린은 흑인 피가 흐르는 후손들에게도 결코 적지 않은 재산을 남겨 주어 제퍼슨 시내에 있는 은행에 만만하지 않은 현금을 보관중이건만 절대 있는 척을 하지 않는다. 아, 이건 나중 일이긴 하다. 거기까지는 이야기하지 못할 거 같으니 그냥 그런 줄 아시면 되겠다.

  루카스가 열을 받아 백인 조카(뻘)에게 달려가 아내 몰리를 데려왔는데, 이때 젖먹이 홀로 홀아비한테 맡겨 둘 수 없어 함께 데려왔으니, 얘 이름이 로스인데, 아이가 점점 커짐에 따라 이집 저 집을 다니며 함께 자기도 하고, 먹는 건 물론이고, 장난도 치고, 뭐 그렇게 컸겠지? 커가면서 사달이 없을 수 없었을 테니까 점점 흑인 아저씨, 사실은 할아버지 항렬 댁에는 점점 뜸해졌을 것이고, 아버지가 죽어 이제 자기가 후대 농장주가 되었으니 아무래도 루카스하고는 좀 멀어지기는 했을 터. 그래도 자기를 키워준 몰리 할머니와의 정리 때문에 매사 야박할 수도 없었을 건 안 봐도 뻔하다.

  루카스도 나이를 먹어 이제 벌써 육십대 중후반에 이르러, 막내딸 넷을 시집보내야 할 처지. 넷이 벌써 1923년생, 그간 세월도 무척 많이 갔다. 하지만 나이로는 자식 뻘, 족보로 보면 증손 또는 손자 뻘인 로스 에드먼즈가 여전히 루카스더러 ‘자네’라고 부를 정도의 시절임을 감안하자. 그렇다고 로스가 악당? 천만의 말씀. 당시 시선으로 (내가)보면 세상에 그런 백인도 별로 없었을 듯. 더군다나 KKK가 난무했던 1930년대 미국 남부에서. 넷이 다 커서 시집을 가야 할 거 아녀? 그리하여 조지 윌킨스라고 하는 흑인 남자를 골랐는데, 당연히 여기서 문제가 터진다. 1930년대 금주령 시절. 조지가 완전히 질 낮은 옥수수 위스키를 만들어 팔려고 시도하는 것. 여태까지 루카스가 지역에서 독점하고 있던 사업인데 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위짜리를 혼내기 위하여 자기 증류기를 땅에 숨기고 신고를 하려 마음을 먹어, 캄캄한 밤에 진흙 땅을 파다가 뭔가가 손에 잡혀 이게 뭘꼬, 쳐다보니까 글쎄 금화였던 거다. 분명히 누군가가 이 근처에 금화가 잔뜩 든 자루 또는 궤짝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고 여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그걸 찾아야 하고, 제일 빨리 파내기 위해서는 최첨단 금속 탐지기가 필요할 터.

  3백 달러에 이르는 금속 탐지기를 손에 얻는 스토리를 읽으면서 얼마나 웃었든지, 윌리엄 포크너가 이렇게 희극적으로 재미있어도 되는 거야?

  그런데 사실 이런 희극 또는 익살극은 이 두 편이 전부이고, 포크너 특유의 스토리 텔링은 새롭게 시작하니 특별히 당신이 인상깊게 읽었을 명작 <곰>을 기억하면서 연작 장편을 읽으면 첫 작품 <옛일>부터 전작을 관통하는 대하를 짐작하실 수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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