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가라, 모세여 ㅣ 서커스 세계문학 시리즈
윌리엄 포크너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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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포크너의 중단편 <곰>은 두세 번? 서너 번? 읽은 거 같다. 그럼에도 <곰>이 윌리엄 포크너 스스로 연작 장편이라고 주장하는 《내려가라 모세여》의 일곱 중단편 가운데 다섯 번째 작품이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다. 이제 새롭게 《내려가라 모세여》를 읽으니 <곰>이 1863년 1월 1일, 미국의 노예해방 이전, 그러니까 아무리 늦어도 1862년 이전부터 20세기 1940년대까지 아우르는 한 일가의 대하 가운데 한 편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읽힌다.

  작품의 중심지는 당연히 요크나파토파 지역과 제퍼슨 시.

  이 연작 장편을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떠올렸다. 포크너가 없었으면 마르케스가 마콘도라는 가상의 지역 또는 마음의 고향을 만들 수 있었겠으며, 백년이 넘는 가계도를 이루는 <백년의 고독>을 생산해낼 수 있었을까? 있었겠지. 있었겠다고 믿기는 하지만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태까지 백범 작이라고 알았는데 사실은 서산대사 휴정이라는 중이 지은(지었다고 하는) 오언절구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今日我行跡 須作後人程“ 오늘 내 행적이 뒤에 올 사람의 발길이 되리라, 하듯,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와 제퍼슨 시가 없었더라면 마르케스가 마콘도를 만들기도, <백년의 고독>을 쓰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여길 수밖에 없다.

  아니, 어딜. 세상에 마르케스밖에 없나? 아마도 20세기 중후반부터 소설작업을 해 온 무수한 소설가 가운데 한 발짝 앞에 나서서, “나는 윌리엄 포크너의 그늘 덕을 조금도 받지 않았소!”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작가가 몇 퍼센트나 될까? 서양 작가만 국한해 묻는 것도 아니다. 동양, 더 쉽게 한, 일, 중 세 나라의 잘 나가는 작가들도 포함해서. 오에 겐자부로? 모옌? 당연히 뛰어나고, 내가 존경하는 작가들이지만 이들 역시 포크너의 서늘한 그늘 덕을 전혀 보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걸 근거로 이렇게 얘기하는지 더 따지지 마시라. 방금 오에와 모옌한테 전화 걸고 이야기하는 중이니까.


  작지 않은 대하는 루시어스 퀸터스 캐러더스 매캐슬린이라는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제일 선대 사람. 그래서 ‘늙은 캐스’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작품 속에 살아있는 등장인물로는 나오지 않는다. 이이가 요크나파토파 소재 농장의 농장주. 생몰이 1772~1837. 평생 흑인 노예를 소유하고 살았던 전형적인 백인 농장주이지만, 숱한 작품에서 늘 보던 악랄한 백인 지주와는 비슷하지도 않았다. 나름대로 선한 인간형이랄 수 있는 농장주. 이이는 결혼해 아들 둘, 딸 하나를 두었으니, 쌍둥이 형제 시어필러스(애칭 벅)과 애머디어스(애칭 버디),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 딸이었다. 이 가운데 벅이 다 늙어 낳은 아들 아이작 매캐슬린, 애칭 ‘아이크 삼촌’이 연작 장편의 가장 중심적인 축을 만드는 인물.

  늙은 캐스는 사랑 또한 넘치는 인물이라 아내 말고도 자기가 소유한 노예 여인 유니스 사이에 딸 토마시나를 만들었다. 토마시나 역시 당연히 노예였으며, 자기 딸인 줄 알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훗날 토마시나하고도 관계를 맺어 아들 터렐, 속칭 ‘토미네 털’을 두었다. 이 관계를 지금 21세기 시점으로 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쇼킹이겠지만 미국 노예시대에 이런 일은 그저 있을 수 있는 경우에 불과했다. 물론 거꾸로, 즉 흑인 남자 노예와 백인 농장주의 부인과의 사이에 생식이 벌어졌으면 죽고 사는 참극이 수반되었겠지만 하여간 그때는 그랬다는 거.

  그래서 늙은 캐스의 아들이기도 하고 손자이기도 한 노예 토미네 털이 첫 작품 <옛 일>의 중요한 등장인물이 된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토미네 털은 쌍둥이 형제 벅과 버디 삼촌네 노예. 근데 족보로 보면 배 다른 형제이자 조카. 형제라고 하면 나이 차이가 무려 서른네 살. 늙은 캐스는 벌써 주님의 안식을 찾아 떠난 시절이고, 토미네 털은 바야흐로 청춘시기를 맞아 불타오르는 심정으로 또다시 농장에서 탈출을 해버렸다. 근데 이게 습관적 탈출. 쉬운 얘기로 자유를 찾기 위한 도망이 아니라 DNA의 명령에 따라 세상에 둘도 없는 짝을 찾아 이웃한 농장의 노예 아가씨 테니 비첨의 방향芳香, 일종의 페로몬을 찾아 가는 거였다. 벅과 버디 삼촌도 토미네 털이 어디로 간 줄 다 아니까 별로 서둘지도 않고 털을 찾아 나서는데 이번에는 연작 장편의 첫 작품이 되려니까 이 수순이 결코 호락호락 넘어갈 수는 없겠지? 그리하여 노예 아가씨 테니의 주인과 벅, 벅이 쫄리니까 나중엔 버디 삼촌까지 나서서 크게 한 판 도박을 벌이는데, 이게 영 재미있더라는 말이지.


  물론 재미로 치면 첫 작품 <엣일>보다 두번째 작품 <불씨와 화덕>이 한 수 윗길이다. 즉, 책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 보면, 이거 뭐 읽을수록 점입가경, 점점 더 흥미의 수준이 높아가니 그저 즐거울 수밖에.

  제목이 <불씨와 화덕>인 것은, 흑인 노예들이 시집 장가가서 거의 관습적으로 해야 했던 것이 화덕에 불씨를 붙이면 죽음이 갈라놓아 둘의 혼인상태가 해체될 때까지 화덕에서 불씨를 꺼뜨리지 않아야 했던 것을 빗댄 거다. 뭐 굳이 미국의 흑인 노예들만 그랬을까. 우리나라에서도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궁이의 불씨를 보존하는 거였다고 최명희의 미완성 명작 <혼불>에서 나온다. 나 어려서도 외숙모가 연탄불 꺼트리면 외갓집 특히 여성 구성원들의 뒷담화가 찬란무비했던 기억이 난다. 그건 그거고. 사실 그건 그게 아니라 결국 화덕에서 불씨를 꺼트리는 일까지 몽땅 나오기는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앞의 작품 <옛일>에서 중요한 조연이었던 토미네 털이, 벅과 버디 삼촌의 맹활약 덕분에 테니 비첨을 아내로 얻고, 심지어 매캐슬린 농장의 노예로 데려올 수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 이 노예 부부 사이에 아들-딸-아들이 생겼으니 막둥이 루카스 퀸터스 캐러더스 매캐슬린 비첨이 <불씨와 화덕>에서 찬란한 주인공이자 설레발꾼이자 포복절도의 사기꾼, 아니, 똘똘이 스머프로 등장한다.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똘똘이 스머프.

  루카스의 아내 이름은 몰리. 둘 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노예제도는 사라진 시절이었다. 어엿한 자유인. 그러나 흑백 차별의 유구한 전통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던 시절. 아다시피 루카스는 저 꼭대기 할아버지 캐러더스 매캐슬린, 캐스 노인과 노예 여성 사이에서 이룬 가계이다. 백인 아내로 이어진 가계 가운데 남자 항렬, 쉽게 말해 매캐슬린 가계는 벅과 버디 삼촌에 이어 벅의 아들 아이작 매캐슬린에서 끊기고, 이름도 나오지 않은 딸 하나가 에드먼즈 가문으로 시집가 손자 재커리를 낳았는데 이이가 주인공 루카스와 동갑내기였다. 1898년에 재커리 애드먼즈가 아들을 얻었지만 난산 끝에 아내가 죽어, 루카스의 아내 몰리, 그리고 몰리가 낳은 루카스의 아들을 집에 데려와 젖어미 역할을 하면서 두번째 명품 익살극을 시작한다.


  루카스 입장에서 아무리 흑백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애먼 마누라가 백인 아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젊은 농장주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 살고 있으니 눈이 돌아가는 건 당연하다. 루카스가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물론 매캐슬린 가문의 훈훈한 가풍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노예 해방과 동시에 선대 매캐슬린은 흑인 피가 흐르는 후손들에게도 결코 적지 않은 재산을 남겨 주어 제퍼슨 시내에 있는 은행에 만만하지 않은 현금을 보관중이건만 절대 있는 척을 하지 않는다. 아, 이건 나중 일이긴 하다. 거기까지는 이야기하지 못할 거 같으니 그냥 그런 줄 아시면 되겠다.

  루카스가 열을 받아 백인 조카(뻘)에게 달려가 아내 몰리를 데려왔는데, 이때 젖먹이 홀로 홀아비한테 맡겨 둘 수 없어 함께 데려왔으니, 얘 이름이 로스인데, 아이가 점점 커짐에 따라 이집 저 집을 다니며 함께 자기도 하고, 먹는 건 물론이고, 장난도 치고, 뭐 그렇게 컸겠지? 커가면서 사달이 없을 수 없었을 테니까 점점 흑인 아저씨, 사실은 할아버지 항렬 댁에는 점점 뜸해졌을 것이고, 아버지가 죽어 이제 자기가 후대 농장주가 되었으니 아무래도 루카스하고는 좀 멀어지기는 했을 터. 그래도 자기를 키워준 몰리 할머니와의 정리 때문에 매사 야박할 수도 없었을 건 안 봐도 뻔하다.

  루카스도 나이를 먹어 이제 벌써 육십대 중후반에 이르러, 막내딸 넷을 시집보내야 할 처지. 넷이 벌써 1923년생, 그간 세월도 무척 많이 갔다. 하지만 나이로는 자식 뻘, 족보로 보면 증손 또는 손자 뻘인 로스 에드먼즈가 여전히 루카스더러 ‘자네’라고 부를 정도의 시절임을 감안하자. 그렇다고 로스가 악당? 천만의 말씀. 당시 시선으로 (내가)보면 세상에 그런 백인도 별로 없었을 듯. 더군다나 KKK가 난무했던 1930년대 미국 남부에서. 넷이 다 커서 시집을 가야 할 거 아녀? 그리하여 조지 윌킨스라고 하는 흑인 남자를 골랐는데, 당연히 여기서 문제가 터진다. 1930년대 금주령 시절. 조지가 완전히 질 낮은 옥수수 위스키를 만들어 팔려고 시도하는 것. 여태까지 루카스가 지역에서 독점하고 있던 사업인데 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위짜리를 혼내기 위하여 자기 증류기를 땅에 숨기고 신고를 하려 마음을 먹어, 캄캄한 밤에 진흙 땅을 파다가 뭔가가 손에 잡혀 이게 뭘꼬, 쳐다보니까 글쎄 금화였던 거다. 분명히 누군가가 이 근처에 금화가 잔뜩 든 자루 또는 궤짝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고 여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그걸 찾아야 하고, 제일 빨리 파내기 위해서는 최첨단 금속 탐지기가 필요할 터.

  3백 달러에 이르는 금속 탐지기를 손에 얻는 스토리를 읽으면서 얼마나 웃었든지, 윌리엄 포크너가 이렇게 희극적으로 재미있어도 되는 거야?

  그런데 사실 이런 희극 또는 익살극은 이 두 편이 전부이고, 포크너 특유의 스토리 텔링은 새롭게 시작하니 특별히 당신이 인상깊게 읽었을 명작 <곰>을 기억하면서 연작 장편을 읽으면 첫 작품 <옛일>부터 전작을 관통하는 대하를 짐작하실 수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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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한가운데 1 ㅣ 시대의 여성 시리즈
패트릭 화이트 지음, 박유진 옮김 / 잔상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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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전에 <전차를 모는 기수들>을 읽고 쓴 독후감을 보면 패트릭 화이트가 “유머, 화려한 문체, 서술의 전환, 의식의 흐름을 특징으로” 하는 작가라고 전에 어디서 주워들었던 모양이다. 당시 <전차를…>을 아주 인상깊게 읽었는데, 작품에서 그의 특징이라고 하는 유머, 화려한 문체, 서술의 전환은 그리 자주 보이지 않았고, 의식의 흐름은 어느 구석에 있는 지 찾아낼 주제가 되지 못하여 화이트에 관한 세간의 평이 조금 이상하다고 여기고 넘긴 적 있다. 이번에 독후감 쓰기 전에 다시 화이트를 검색해보니, <전차를…>이 1961년, <폭풍 한가운데>는 이이가 노벨문학상을 탄 1973년 발표작인데, 이번에 <폭풍…>을 읽어보니 유머, 화려한 문체, 서술의 전환을 이이의 특징으로 짚는 건 확실하게 이해하겠다. 내가 뭘 알건디? 그저 초창기 작품<전차를…>과 소설집 《불타버린 사람들》만 읽고 한 작가를 단정하려 했던 거겠지.

  위키피디아를 보면, 화이트가 1969년부터 계속 노벨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속으론 은근히, 그리고 열렬히 바랐을 거 아녀? 1969, 70년 두 해를 기다렸다가 1971년 세 번째 해에 접어들어서도 칠레의 국민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상을 받게 되니까 못내 섭섭했던지 다시는 노벨상 이야기를 듣지 않게 되기 바란다는 코멘트를 날렸단다. 그러다 한 해 쉬고 다음다음 해인 1973년에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니까, 이거 상 받으러 가기 좀 쑥스럽지 않았겠어? 그래서 결국 화이트 본인은 건강이 안 좋다는 핑계 또는 이유로 스웨덴 스톡홀름의 콘서트홀에 가지 않았단다.

  그런데, 이렇게 큰 상을 받은 작가 가운데 몇 명은 노벨상이란 것이 자신의 질곡이 되어 이후 시답지 않은 작품만 몇 개 발표하고 그걸로 작가 생명을 마감한 이들이 제법 있다. 이이도 그랬을까? 61세에 상을 받았으니 이미 문학적으로도 전성기는 지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폭풍…> 이후에 그리 명성을 떨친 작품은 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거 그냥 내 짐작이다. 인용하지 마시라. <폭풍…>이 노벨상을 탄 해 여름, 오스트레일리아(이하 “호주”)에서는 겨울에 출간했고, 수상자 발표는 11월에 해서 그랬는지 화이트 관련해서 뒤져보면 대개 이 <폭풍…>을 그의 대표작품으로 꼽는다. 나는 당연히 <전차를…>를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니까 그런가보다, 하면서 넘어간다.


  <폭풍…>은 확실히 곳곳에 BW, 즉 Black/White 유머가 매복해 있고, 등장인물 A의 입장에서 서술하다가 갑자기 B의 시각에 입각한 내레이션이 나오는 등 서술의 전환이 자유롭게 등장한다. 작품도 86세 먹은 호주 부르주아 노 부인의 죽음의 침상 몇 달이지만 당연히 주인공 엘리자베스 헌터 부인과 부인의 (출생 순서대로) 아들, 딸과 이미 죽은 남편, 부인이 유혹해 한 번 자빠뜨린 성실한 전담 변호사, 세 명의 간호사와 요리사, 가정부 등의 회상이 빼곡해서 950쪽에 육박하는 장편소설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니까 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는 말이다. 즉 죽어야 끝나는 소설. 살면서 행했던 별의 별 에피소드를 망라하면서 결국 ①인생무상이나, ②그래도 사랑이 제일이야, 영탄하거나 ③누가 뭐라해도 일단 살아볼 일이라는 주제이기 십상인데 <폭풍…>은 어떤 결말로 치고 갈까?

  엘리자베스 헌터의 결혼 전 이름은 엘리자베스 셀켈드. 이이는 몇 달 있으면 죽을 예정인데,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기를, “아무래도 난 속물이었던 모양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탓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 받은 가정교육도 문제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살한 것도.” (p.142)

  그러니까 부모한테 물려받은 건 딱 하나. 지금이야 이 모양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시드니에 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와 몸을 지녔다는 것. 그려, 여자나 남자나 잘 생기면 일단 유리한 자리를 꿰 차는 거다. 엘리자베스 셀켈드 양은 이런 하드웨어는 물론이고 자신의 하드웨어를 이용하여 몇 단계 계급을 올려 버렸으니,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알프레드 헌터 씨와의 결혼에 성공해서, 부와 미모로 시드니 사교계를 단숨에 정복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속물이라고? 맞다, 속물. 그것도 대단한 속물.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해야 하며, 이들과의 사이에 누가 있어서 그걸 방해한다면 방해물이 친자식이 되었더라도 일단 없애 버려야 마땅하다. 정말? 그렇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좀 긴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그런 거 다 소개하자면 끝도 한도 없다. 그냥 지나가자.


  근데 죽은 남편 알프레드는 진심으로 엘리자베스를 사랑했다. 부인이 생각해봐도 그렇다. 남편은 아내한테 자유를 주기 위하여 시드니에서 멀리 떨어진 가상 지역 고공 주의 가상 커뮤니티 쿠저리 소재 농장에서 머물고, 아내는 시드니 저택에서 살았다. 아들과 딸도 어린 시절을 쿠저리 농장에서 지내다가 아들은 영국으로 가 작위를 받은 연극배우 바질 경이 되었으나 이젠 연극계의 늙은 퇴물로 지방 순회공연을 전전하고 있으며, 딸은 프랑스의 나이든 라스카반 공작과 결혼해 프랑스 공작비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지만 라스카반 공작은 새로 생긴 애인과 살림을 차렸고, 가톨릭 때문에 이혼을 하지 못해 그저 공작비라 불리는 것만 기쁨으로 알고 사는 중이다.

  바질 경은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첫째 아내의 딸은, 바질의 딸인 줄 알았다가 더 알고 보니까 다른 남자의 아이였으며, 같이 연극 배우를 하던 둘째 아내는 결혼하자마자 끝냈다고 봐도 별 이상 없다. 라스카반 공작비는 집을 나서면서 라스카반 집안의 보석들만 잔뜩 얻어냈을 뿐 이젠 새로운 사치는 엄두도 내지 못할 처지. 둘 다 이름만 비까번쩍하고 속은 거의 거렁뱅이다. 이때 주의할 점. 살기를 부르주아로 나서 그렇게 크고,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이 생각하기에 거렁뱅이지, 우리가 아는 그런 진짜배기 거렁뱅이는 절대로 아니라는 점.

  이 아들과 딸한테 인생에 딱 한 번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엄마가 죽어가고 있는 것.

  아버지가 장인을 흉내내 스스로 목숨을 끝내면서, 자기 전 재산은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내 소유로 있다가, 아내가 죽으면 아들과 딸한테 정확하게 반반씩 유증하겠다고 유언장에 박아 놓았다. 유언에 따라 그동안 엄마한테 죽기전에 재산 상속 좀 해달라고 입도 벙긋하지 못한 처지. 그나마 엄마하고는 정도 없다. 엄마 성격이 하도 자기만 아는 인간이라 어린 시절부터 엄마보다는 아빠하고 훨씬 가까웠으며 엄마와는 서로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게 일상이었으니 어느 정도인지 이해는 간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동몽선습과 소학을 공부하지 않은 서양 것들이니, 나 어릴 때 그렇게 했지, 늙어서 보자, 앙심만 쌓였을 수도 있고. 그러나 알고 보면 자식들도 전부 엄마 닮았다. 바질과 도로시가 정말 오랜만에 한 5년 만에 편지를 해서, 엄마 요새도 건강하시고 연애도 잘 하시고, 하인들도 잘 갈구시지요? 안부를 물으면 이게 곧 용돈 좀 달라는 뜻이었고, 그걸 칼같이 알아들은 엘리자베스 헌터 여사는 그때마다 일정 금액의 수표를 보냈으니, 그래도 자식들이 엄마를 함부로 하지 못했던 건 당연했겠지.


  이런 상태에서 엄마가 죽어가니 새끼들 입장에서 말로는 못하지만 경사라도 난 거 같은 기분이다. 이걸 패트릭 화이트는 그의 주특기라고 알려진 유머와 화려한 문체로 써 놓았는데, 아뿔싸, 이 책이 나온 것이 1973년, 지금부터 무려 53년 전이다.

  그러니 어떻겠어? 이미 꼰대가 된 내가 읽어도 세상에, 이런 아재 개그가 또 없다. 당시엔 화려한 문장이었어도 지금 읽어보면 그냥 밋밋한 수준의 문장들. 그래서 1권을 읽을 때는 그렇게 지루할 수 없었는데, 2권 들어가 본격적으로 아들과 딸, 바질과 도로시, 이름도 참 후지지 바질과 도로시가 언제 적 이름이야? 지금 젊은이들 가운데 바질이나 도로시라고 이름 지으면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하여간 남매가 본격적으로 유산쟁탈전의 진검승부를 겨루기 시작할 즈음이면, 그리하여 하루라도 엄마를 빨리 보내기 위하여, 그동안 경비를 줄이려는 속셈도 있고, 해서, 생전 존경하지 않았던 미운 엄마를 ‘쏘로굿 빌리지’라고 하는 부르주아 노인네들 요양원으로 보내려는 촌극이 정점에 오르기 시작할 때부터는 아이고, 또 무척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독후감을 짧게 끝내기 위하여, 빼놓을 수 없는 출연진들, 간호사 세 명과 요리사, 가정부, 그리고 변호사부부를 소개하지 않아 유감스럽다. 기회가 닿으면 읽어보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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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6-09-23 0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권 3별. 2권 4별. 다 합해 4별
다른 번역이 혹시 나오면 또 읽어봐야 할 작품. 즉, 좀 아쉽다.

잠자냥 2026-09-23 11:11   좋아요 0 | URL
으흠.... 제가 이 책 읽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일단 미룬 이유가... 바로 이것! ㅎㅎㅎ 다른 번역이 나올지 모르겠네요...

Falstaff 2026-09-23 21:25   좋아요 0 | URL
출판사 일을 몰라서 아닐 수도 있는데, 다른 번역은 한참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zlfkzlfk 2026-09-23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소녀는 따로 자란다 ㅣ 위픽
안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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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담. 처음 듣는 이름. 책의 앞날개에 작가 소개가 있다. 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출생. 이후 좀 헛갈리는데,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이 문장에서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돈” 사람이 안담은 아닐 것 같다.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고 말했고, 자랐다는 말은 어린 시절부터 어른 또는 청소년 시절까지 성장했다는 말이니, 소녀 안담을 봉고 차에 태우고 전국을 떠돈 인물은 안담의 부모, 또는 부모 가운데 한 명, 아니면 안담을 키워주기로 한 후견인일 것 같다. <소녀는 따로 자란다>를 읽어보면 전국을 떠돌 때 안담을 데리고 다닌 사람 가운데 엄마는 있었을 듯하다.

  대학에서는 미학을 전공했단다. 그러면 서울대, 홍익대, 영남대 가운데 한 학교의 졸업생. 대학 졸업하고 예술 언저리에서 서성였다고. 직업 가운데 하나가 스탠딩 코미디언도 들어있다. ‘무늬 글방’이란 걸 열어서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고 있단다. 책방인 것도 같지만 책방을 핑계로 모임 장소를 두어 하여간 문학 언저리의 것을 궁리하는 소모임의 두목 정도가 아닐까 싶다. 아니면 말고.

  하여간 이렇게 문학을 포함한 “예술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사람으로 현재는 은평구에 사는 개 산책자. 마음에 드는 건, 주머니에 들어가는 작은 품종의 강아지가 아니라 성질나면 사람도 간혹 깨물 것 같은 늠름한 사냥개 종류처럼 보이는 중형 개를 키운다는 점. 은평구에서 달리거나 걷다가 안담 만나면 까불지 마라. 여차하면 사냥 당하는 수가 있으리니.

  안담은 특별히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작가란다. 나름대로 문학판에 아는 사람도 있고, 빽도 있고, 돈도 좀 있는 거 아냐? 짐작이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니까 믿지도 말고 어디 가서 진짜인 척 얘기도 하지 말자. 정말로 <소녀는 따로 자란다> 읽어 보시라. 글이 만만하지 않다. 나도 이 책을 읽은 후에야 안담이라는 이름을 알았는데,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 검색해보니 이 작은 단편 하나 실은 책이 2023년에 꽤 주목을 받았다. 흠. 이 정도면 나도 안목이 있는 편이군.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

  책방 검색을 해보니까 소설은 위픽 시리즈의 단편 <소녀는 따로 자란다> 이거 딱 한 권. 본문이 59페이지에서 끝나고, 다 읽는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겁나게 짧은 단편 하나. 등단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소설가가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이 작품도 오래 전에 무슨 마감이 있어서 쓴 것이 아니라 살면서 한 번 써본 것이란다. 그러니 사실 알고 보면 별 거 없는 ‘작가’가 되기 위해 머리 터지게 습작을 쓰고, 학생, 교수들의 얼토당토 않는 비평을 들으며 절망하면서 무슨 문학상 비슷한 것만 보이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투고를 하는 시절을 어쩌면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거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글만 잘 쓰고, 그게 마음에 들기만 하면 독자는 읽으니까.


  초등학교 고학년 여자 아이 이야기.

  내겐 완전하게 신세계. 나 초등학교 시절도 생각나지 않는데 더구나 여자 아이의 어린 시절과 딱 그 때 감각과 생각과 느낌 같은 것은, 정말로 한 번도 궁금해본 적조차 없는 거 같다. 나도 남자형제 가운데 둘째고, 아이도 아들만 둘 있어서 더 그랬던 것이겠지. 발 한 번 딛지 않은 벌판의 언덕 위에서 처음으로 바라보는 듯한 느낌. 이게 이 책, 50쪽짜리 읽고 ‘책’이라 말하기도 좀 어색하지만, 하여간 이 단편을 읽은 감상이다.

  더구나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괜히 폼잡지 않고, 질질 짜지도 않으면서 그냥 슬슬 지나치듯 할 말 다 하는 아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이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꼬마도 아닌 사춘기 바로 전 단계.

  잘 읽었다. 소설도 좀 더 자주 썼으면 좋겠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겠다. 무대 예술도 해야 하고, 돈을 좀 번다는 ‘무늬 글방’ 주인도 해야 하고, 개 산책도 시키면서 소설까지 쓰기는 쉽지 않을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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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9-22 0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위픽시리즈 계속 읽고 있는데 괜찮더라고요.
이 소설도 읽어 보겠습니다.

Falstaff 2026-09-23 05:45   좋아요 1 | URL
흠. 재미있게 읽으셔야 할 텐데요. ㅎㅎ

yamoo 2026-09-2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단하지 않은 사람이 그냥 취미로 쓴 글이 만만치 않다는 게 좀처럼 어떤건지 모르겠네요. 여러가지 하는데, 소설까지 잘 쓰면 사기캐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92년 생이면 젊은편인디...궁금하네요~

Falstaff 2026-09-23 05:46   좋아요 0 | URL
설마 취미로 쓰기야 했겠습니까. 뭐 다른 이유가 있겠지요. 즐기시면 좋겠습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아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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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은 대개 비극 아니면 희극, 이렇게 나뉘는데, <끝이 좋으면 다 좋아>는 거참, 애매모호하다. 확실히 비극은 아니다. 그렇다고 희극이라고 하기도 뭐하다. 엘리자베스1세 시절의 시대극이라고도 할 수 없겠다.

  하여간 좋은 희극이 되기 위한 고전적 방법. 그건 비극의 등장인물 못지 않은 악당이 나와 나름대로 치밀한 계략을 펼치다가 극의 뒤로 가서 결정적으로 쌍코피를 흘리며 주인공 커플의 아름다운 결말을 맺어주어야 하는 법. <끝이 좋으면 다 좋아>에서는 주인공인 루시용의 젊은 백작 버트럼이 바로 그 악당이다. 당연히 주인공은 나중에 대오각성해서 선한 인물이 되어야 하니 조연 가운데 한 명에서도 악당이 등장해야 하는 바, 허풍 가득하고 말과 달리 무척 겁이 많으며, 하루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버트럼의 추종자 겸 껄떡쇠 겸, 사기꾼이라 결국 고전극의 천하 진리인 “악당은 지옥으로”를 이루어 줄 것처럼 보이는 늙은 건달 파롤.

  아, 지금 내가 뭐라고 했지? 악당이 지옥으로 간다고 한 거 아니다. 고전 희극에 등장하는 악당들이 종종 지옥에 간다고 했을 뿐. 셰익스피어는 좀 다르지? 욕심장이 술꾼이자 사기 기질이 농후한 귀염둥이 악당 폴스타프가 곤욕을 치루기는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이 악당을 지옥으로 떨어뜨리지는 않았던 것처럼, <끝이 좋으면 다 좋아>의 누더기 악당, 개전의 정이 안 보이는 파롤이 지옥으로 떨어질지, 아닐지는 직접 읽어보고 알아내시면 좋겠다.


  셰익스피어라면 고전 시대의 가장 훌륭한 시인이자 극작가로 알려져, 정말 셰익스피어를 읽지 않아도 대표작 몇 편의 스토리는 각종 영상 컨텐츠를 통해 대충은 알고 있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작가의 책을 읽어보려 하지 않는 독자가 많은 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베니스의 상인>을 정말로 책으로 읽어본 독자는 별로 없을 걸? 그러나 내용을 모르는 중졸 이상 우리나라 시민들도 별로 없을 걸? 이런 식이다. <로미오…>, <베니스…>에서 진보한 독자 군群도 마찬가지로 두 작품의 자리에 <햄릿>,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를 가져다 놓으면 비슷할 것이고. 하물며 <끝이 좋으면 다 좋아>을 읽어본 독자는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도 이제서야 이 작품을 읽어보았다.

  다만 다른 건, 사극이 아닌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스토리조차 거의 알지 못했던 작품이라는 점. 그랬으니 책을 읽으며 종종 놀랄 수밖에.

  뭐,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가끔 외설적인 장면이나 단어가 출몰하는 거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아>는 왕립극장에서 엘리자베스1세 앞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을까, 처녀왕이 공연을 즐거이 보고 “잉글랜드의 셰익스피어는 영국과도 바꾸지 않겠다.”라고 선언했을까, 하는 게 의심스러웠을 만큼, 지금 시각으로는 껌이지만, 1603년에 여왕이 엇다 잘했다, 칭찬 한 마디 했을까? 뭐 그런 장면도 들어 있다는 것이지, 그게 매력적이기 때문에 직접 읽어보시라는 말은 아니다.


  사랑 이야기.

  루시용의 백작 가문에는 가히 화타華陀는 아닐지언정, 길평吉平 정도의 주치의가 있었는데, 아무리 높은 의술을 가지고 있어도 세월 이기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라 나이가 들어 자기 갈 길 갔다. 이 의사한테 딸이 하나 있었으니, 누구냐 하면 이름이 헬레나. 무서운 이름이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을 일으키게 만든 바로 그 여인은 아니고 그냥 같은 이름을 지녔다. 이 의사가 루시용 가문과 하도 좋은 인연으로 맺어져, 죽어가면서 백작부인에게 자기 딸을 키워달라고 부탁했고, 부인이 아름다운 헬레나를 기꺼이 맡아, 정말로 자기 딸처럼 키우고 있었다.

  죽은 백작의 아들 버트럼이 이제 젊은 백작이 되어 병이 깊은 왕을 알현하기 위하여 파리로 간다. 문제는 연극이니까, 헬레나는 당연히 주위에서 가장 멋있는 남자 버트럼을 연모하다가 속으로 진짜 사랑의 꿈을 꾸고 있었던 반면에, 버트럼은 그깟 의사의 딸, 당시만 해도 의사라는 직업은 가끔 이발사를 겸하는 중인 계급이었을 뿐, 신분의 차이는 헬레나의 아름다움과 조신한 행동, 착한 마음씨 같은 것을 대폭 할인해서 보게 만들었고, 그리하여 버트럼 기준으로 헬레나를 보면 볼품없는 촌년 그 자체였다.

  오히려 헬레나의 가치를 알아본 이는 백작 부인. 부인은 기꺼이 자기 아들 버트럼을 헬레나한테 장가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버트럼이 파리를 향해 떠났고, 때를 맞추어 왕은 병이 깊어 아직은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모든 궁정의사들이 냉정히 판단한 결과 그저 최선을 다해 고통 없는 죽음을 기다리시라, 하는 조언을 할 뿐이었다. 의사 한두 명이 그러는 게 아니고 모든 의사가 똑같이 말하니 환자인 프랑스 왕 역시 자기가 당연히 죽어야 할 처지에 당한 줄 알고 있었다. 증세가 중한 피부 궤양. 지금 같으면 페니실린 계열의 항생제 주사 몇 방이면 금세 치료할 수 있는 병변이었는데 그걸 하지 못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터.

  여기에 아름다운 헬레나가 뜬다. 아버지가 의사질을 하면서 시간 날 때마다 몇 가지 특효약과 처방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 가운데 제일 확실하게 알려준 처방이 바로 지금 왕이 앓고 있는 병. 이런 우연이 어디 있느냐고? 희극에 못 이루어지는 일이 뭐가 있는 데? 그리하여 헬레나는 백작부인에게 부탁하여 자기가 왕의 병을 고치려 버트럼이 간 파리의 왕궁으로 쫄랑쫄랑 따라가기에 이른다. 각기 다른 마차를 타고,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둔 채로.


  왕을 만난 젊은 루시용의 백작 버트럼은 무공을 올리기 위하여 피렌체 전투에 참전하려 한다. 바로 이때 헬레나가 소개장을 들고 왕을 만나니, 왕조차 네가 루시용 백작 가문의 전설적인 명의의 딸이라고? 하며 환대하고,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기꺼이 헬레나의 처방을 허락하기에 이른다. 당연히 왕은 완치되고, 헬레나한테 소원을 무엇이든 들어줄 터이니 하나만 말해 보아라, 했겠다.

  헬레나 역시 “기초 극작법 ABC” 3장 5절에 나오는 대로, “루시용 백작한테 시집가고 시포요.” 수줍게 소원을 말하니, 왕은 왕의 권한으로 자기가 직접 헬레나의 지참금을 보태 루시용 백작과 즉시 결혼을 명령한다. 결혼도 명령을 받아 하느냐고? 그럼. 원래 귀족들이 그렇다. 걔네들의 결혼은 거의 다 정략결혼. 절대 사랑을 매개로 결혼하는 게 아니었다. 아마도 주례는 가톨릭 붉은 제복을 입은 추기경쯤이 했겠지만 득달같이 식을 올려 그날로 당장 첫날밤을 지내야 했을 걸?

  천만의 말씀. 평소 헬레나를 호환, 마마로 알고 있던 버트럼은 신방에 들기도 전에, 새신부한테 키스 한 번도 안 해주고 피렌체 전장으로 도망쳐 버리면서 아내 헬레나에게 편지만 한 쪼가리 남겼으니 이렇게 쓰여 있구나.

  “당신이 내 손가락의 이 반지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당신 몸에서 내 아이를 낳아 내게 보여 줄 수 있다면, 그때 날 남편이라고 불러도 좋소. 하지만 그때는 결코 오지 않을 거요.”

  그리고 노 백작부인한테도 편지 한 장을 남겼으니,

  “아내가 있는 한 프랑스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까지가 5막 가운데 3막 전반부. 근데 주인공 버트럼은 물론이고 독자까지 모르고 있던 것이 하나 있다. 왕이 자기 목숨을 살려준 헬레나에게 보답을 하기 위하여, 헬레나의 지참금까지 두둑하게 주었다는 건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왕실이 소유하고, 바로 몇 초 전까지 왕이 직접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던 프랑스의 국보급 보석을 장인이 초절정의 세금기술로 세팅한 반지도 헬레나한테 주었다는 거. 그건 5막에 가서야 나올 터인데, 누가 가지고 있느냐 하면, 바로 젊은 루시용 백작.

  결론은, 희극이라 할 수 있으니 당연히 헬레나 입장에서 해피 엔드. 버트럼 입장에서는 그러면 비극? 아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아>을 희극이라고 내가 말하는 건, 버트럼은 끝내 개과천선, 중인 계급의 딸년에 불과한 아름다운 헬레나의 진면목을 알아채지 못하게 한 선입견을 물리치고, 헬레나의 진가를 알아보아 정식 아내로 받아들여, 진짜로 그렇게 되었는지, 살다가 별의 별 지랄을 다 했는지는 몰라도, 한 평생 부부로 살기로 결심을 했다는 이야기.

  희극을 더 재미있게 하는 악당이 한 명 등장한다고 했지? 버트럼 백작의 수하로 백작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니며 자신의 겁 많음과 거짓말과, 젊은 백작에게 끊임없이 아가씨들, 기왕이면 그것도 숫처녀 아가씨들만 조달해주는 크나큰 사명을 띠고 함께 전장에 나간 파롤. 심지어 헬레나한테도 껄떡대던 늙은이. 이 악당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쯤에서 독후감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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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주일 만에 또 버렸다. 

  명작도 꽤 들어 있다. 그러면 뭐해. 앞으로 안 읽을 거 같은 책, 미련두지 않았다. 제일 아래 사진의 오른쪽 제일 밑에 깔린 책, 패트릭 화이트가 쓴 <인간의 나무>는 사고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읽지도 않았으면서 버렸다. 활자가 너무 작아 읽기에 버겁다. 어느 새 나의 세월이 이렇게 됐다. 저 오래 전, 글자가 보이지 않아 책을 못 읽겠다는 정여사의 말씀이 그저 하는 얘긴 줄 알았는데, 웃기다. 사람 사는 일이지. 자기는 절대 그렇게 늙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랄까 확신으로 차 있던 시절. 

  <홍루몽>도 <봉신연의>도 버렸다. 플라톤, 그르니예도 오늘 아침에 재활용 쓰레기 더미에 던져 넣었다. 어찌 마음이 좋을 수 있었겠나. 아깝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고, 그래도 확 버렸다. 다른 건 몰라도 속 하나는 시원하다.

  아직도 간행하고 있는 고전문학 시리즈의 책들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창비 세계문학전집이 제대로 걸렸다. 이 시리즈에서 몇 권이나 더 버려질 지는 나도 모른다. 그래도 제법 남았다. 절대로 안 버릴 창비 시리즈는 알베르 코엔의 <주군의 여인>, 헤르만 브로흐 <현혹>, 요제프 로트 <라데츠키 행진곡>, 토머스 핀천 <바인랜드>, 표도르 솔로구프 <허접한 악마> 등등.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사부작은 하다못해 당근에라도 내 놓으면 빵이라도 좀 사먹을 수 있을 터인데 귀찮아 그냥 던졌다. 피터 애크로이드는 <혹스무어>와 <플라톤의 반란>만 남겨 놓았다. 차페크도 남아나지 않았는데 다른 작가들이야 말 해 뭐하겠는가. 

  살면서 욕심이 너무 과했다. 이럴 필요 없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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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9-20 14: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의 <이 책은 절대 못 버려> 시리즈가 나오는 순간, 만인의 장바구니가 터지겠죠? 아, 고프다... (꿀꺽)

다락방 2026-09-20 15:19   좋아요 1 | URL
오! 너무 재밌겠어요!!

coolcat329 2026-09-20 16:14   좋아요 1 | URL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ㅋㅋㅋ

페넬로페 2026-09-20 19:12   좋아요 1 | URL
만인의 장바구니!
캬, 맞습니다!

Falstaff 2026-09-20 19:45   좋아요 2 | URL
어머나! 아하, 그것 참.... 한 번 페이퍼 써봄 직도 하네요. ㅎㅎㅎ 쉽지는 않겠지만 말씀입니다.

coolcat329 2026-09-20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들 누가 가져갈 지 그 분 정말 대박 행운입니다. 제가 사놓고 안 읽은 책들도 꽤 많이 있네요.
이젠 더 안 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제 마음이 아픈지요. ㅠㅜ

Falstaff 2026-09-20 19:46   좋아요 1 | URL
쐬주 사러 마트 가다가 슬쩍 곁눈질 했더니, 진짜 다행으로 이번엔 누가 가져간 거 같더라고요. 저도 가져간 사람이 고맙습니다. ^^

페넬로페 2026-09-20 1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는 받고싶은 책이 너무 많은데요!
아까워요
집착 버렸는데 저 역시 만인의 장바구니에 동참하나요?

Falstaff 2026-09-20 19:48   좋아요 1 | URL
아이고, 기대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보실 것도 사실 없을 거예요. ㅜㅜ

wayfar 2026-09-20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날 눈으로만 봽다가 불쑥~ 버려지는 게 아직은 아까워 고개 디밉니다!

Falstaff 2026-09-20 19:48   좋아요 0 | URL
앞에 댓글에서 썼듯이 이번엔 다행스럽게 어느 이웃이 가져간 듯해서 마음이 좋습니다.

wayfar 2026-09-20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럴 땐 옆 집 살면 딱 좋겠다며 지나갑니다. 나이로야 저도 이제 버려야될 때고 말고지만요~

Falstaff 2026-09-20 19:50   좋아요 1 | URL
다음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율리시스> 전권을 버리느냐 하는 게 목하 고민 중입니다. 다시 일지 않을 것 같기는 한데, 혹시 손주들이 읽을지 몰라서 말입죠.
도서관 다니셔요. 저도 도서관 다닌 다음부터는 거의 책을 사지 않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이 도서관이더라고요. ㅎㅎ

천학비재 2026-09-21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합니다,버린 책,버릴 책,소장할 책,또,별점 별 도서 리스트 등등,,

Falstaff 2026-09-21 10:38   좋아요 0 | URL
아이구, 황감합니다. 기다리지 마셔요. 별 거 없습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