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톈우의 수기 ㅣ 묘보설림 12
솽쉐타오 지음, 박희선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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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솽쇄타오. 한자어를 우리말로 발음하면 쌍설도雙雪濤 선생. 1983년 랴오링성의 성도 심양에서 태어나 지린대학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지만 판검사, 변호사가 되지 않고, 중국개발은행에 취직해 근무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다가 2010년에 아파트 계약금이 부족해 ‘중국어 세계 영화 소설상’에 <날개 달린 귀신翅鬼(시귀)>를 급하게 써서 응모했다가 장원을 먹는 바람에 엉겁결에 등단한 작가. 이때의 조강지처는 얼마 가지 못해 이혼하고 지금은 작가인 둘째 아내 장위란張悅然과 산다. 아마 베이징에서 살 거 같다. 이이의 작품 상당수가 TV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었으니 돈 좀 벌지 않았겠나. 아니면 말고.

  한 번 터진 상복은 연달아 터져서 2012년에는 장편소설 <녹아 사라지는 도시>를 써서 타이페이 문학상 연금부문을 수상하는 세 명의 제안자로 선정되어 20만 타이완 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여기서 잠깐. 세 명의 선정자들은 1년 동안 작품을 써서 세 작품 가운데 하나가 최종 문학상 수상자가 되어 다시 40만 타이완 달러를 추가 상금을 받는 제도이다. 책방이나 출판사 광고를 읽어보면 마치 솽쉐타오가 당선자인 것처럼 읽히게 작가 소개를 써 놓았는데 굳이 순위를 정하자면 영광의 공동 은메달 수상자라는 말씀. 하여간 졸지에 적지 않은 상금을 챙긴 솽쉐타오는 마음을 다져 먹고 일찌감치 전업작가로 나선 존경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선례를 밟아 잘 다니던 중국개발은행에 사직서를 써 던지고 본격적인 전업작가의 길로 접어든다. 근데 이게 소위 신의 한 수. 이후 쓰는 족족 베스트셀러요, 곧바로 TV 드라마로 만들거나 영화로 해보자는 제안을 받기 시작했으니 입꼬리가 귀에 걸리게 생긴 것.

  하여간 이때 20만 타이완 달러를 받게 해준 작품 <녹아 사라지는 도시>를 책으로 출간했을 때의 제목이 바로 <형사 톈우의 수기>이다.


  왜 위 문단에서 “존경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썼느냐 하면, 쇤네가 무라카미의 작품을 거의 읽지 않는다는 걸 감안하면 굉장히 어색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솽쉐타오가 무라카미 상さん을 흠모해 마지않았다고 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도 무라카미가 쓴 <1Q84>에 헌정하는 마음으로 쓴 거 같다. 두 개의 달이 뜨는 평행 우주는 아니어도,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공간과, 중화인민공화국 S시와 타이완의 타이페이 시라는 장소의 공간이 평행하게 놓여 있으며, 결국 이 세 공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주인공 리톈우가 <1Q84>에서 두 세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주인공 푸른 콩靑豆, 아오마메와 비슷한 처지이다. 즉 디테일에서는 다르지만 전체 플롯을 감안하면 <1Q84> 없이 <형사 톈우의 수기>가 나오기는 쉽지 않았을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리톈우는 노동자 부모를 둔 서른 살 먹은 청년. 부모는 3층 높이는 될 정도의 큰 기계를 조립하는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근검절약하고 정부시책에 맞추어 아들 톈우 하나만 낳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아끼면서 살다가, 아버지가 슬슬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게 되면서 술만 마셨다 하면 아내와 아들을 두드려 패고, 집안의 돈이라면 그게 몇 푼이건 간에 무조건 들고 나가 술로 바꾸어 인생을 탕진하기 시작했다. 어린 톈우는 다른 건 몰라도 성실 하나는 확실하게 타고 나, 천재급은 아니지만 학업에 노오오오오력을 해서 반에서는 줄곧 1등, 학교 전체에서도 3등 안에 드는 우등생으로 자라,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S시에서 제일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해 2학년까지 마쳤다. 3학년 들어 학급에 (오래 전에는 ‘학습지진아’라고 했는데) 부진아 여학생 안거(安歌)가 들어와 톈우의 옆자리에 앉으면서 일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한다. 이걸 다 설명하자면 끝도 없어서, 하여간 둘은 의지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기로 약속, 아니, 맹세를 하는데, 바로 다음날 안거가 실종되면서 톈우는 평생 안거를 찾는 데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안거를 가장 효과적으로 찾기 위하여 톈우가 선택한 건 경찰. 안거 때문에 거의 바닥까지 곤두박질 친 톈우는 실종사건 이후 곧바로 성적이 수직 상승해서 오히려 눈높이를 낮추어 경찰학교에 지원해 수석합격한 것으로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하여간 경찰학교 수료과목 거의 전부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뛰어난 형사가 된다. 경찰학교를 수석합격에 최우등 졸업한 유능한 형사. 그래. 중국 형사들이 나오는 소설에선 항상 비슷하더라고. 수석 입학을 하던, 수석 졸업을 하던 간에 무조건 신출귀몰한 포도청 순사가 되는 거 말이지.

  그런데 이 비범한 형사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베테랑 형사가 있었으니 이름을 장부판張不凡이라고 했다. 장부판은 톈우처럼 청렴하지는 않지만 S시의 거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숨은 실력자이면서, 사법과 정의의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근본은 사법질서의 수호자이니까 쉽게 부패 형사 정도로 매도하면 섭섭한 인물. 사실이 그렇다. 이름부터 그렇지 않은가? 不凡. 평범하지 않음. 이이는 톈우에게 세 가지를 훈시한다.

  첫째. 모든 사고는 전부 서둘러서 생기는 것. 둘째, 총알은 내가 장전한 만큼 있는 것이지 몇 개가 있어야 한다는 건 헛소리. 셋째, 경찰학교 학생 냄새를 빨리 빼 버려야 몇 년이라도 더 살 수 있음. 그리고 기타 한 가지를 추가하기를, 좋은 경찰한테는 총알이 필요 없음. 그렇다고 아예 장전하지 말라는 건 아님. 멋있지? 소설에서 베테랑 형사들은 늘 그렇다.

  그런데 사법과 범죄에 다 달통한 장부판에게는 당연히 적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땅 넓이만큼 다양한 악당들이 모인 중국에서도 최고 수준의 흉악범을 덮치려 잠복해 있는 장부판과 그의 조수 톈우. 이때 누군가 차창을 똑똑 두드린다. 범죄자. 창을 내리자 하는 말이, 추운데 들어가서 기다리시지요? 오히려, 그리고 드디어 이들이 범죄자에 의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이른 순간이다.


  갑자기 눈을 뜨니 타이페이 거리. 허리에는 그의 권총이 채여 있다. 톈우는 권총을 자신이 체면을 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긴다. 물론 잠깐 그렇다는 뜻이다. 리톈우 앞에 나타난 18세에서 19세로 보이는 여자 아이. 샤오주小久라고 부르면 된단다. 그런데 톈우가 보기에 샤오주의 뺨 위에서 어렴풋이 진실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서 의문. “진실하지 못한 부분”이라는 표현이 문제인데, 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 때문에 독자는 샤오주 자체를 허위, 범죄자, 거짓말장이 같이 보게 된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샤오주는 조금도 허위와 거짓이 없는 소녀이다. 딱 하나. 정신과 적인 병도 아니고, 피부병도 아닌데, 자신이 흐려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정말로 조금 흐려져 있는 상태이다. 이 흐려지는 상태는 앞으로 더욱 심해져 불과 며칠 사이에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다. 마치 <1Q84>에서 아오마메가 고가도로 비상구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가면서 차원을 통과하는 것처럼, 자신의 신체가 서서히 흐려지다가 사라질 예정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톈우가 특정 호텔의 409호에 묵고 있는데, 샤오주는 바로 옆방인 411호에 짐을 푼 상태. 그러니까 일종의 운명이랄까 인도자, 책 속에서는 ‘사장’이라고 일컫는 인물, 기독교의 하느님과 비견해 조금도 꿀리지 않을 막강한 능력의 소유자가 미리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고, 나중에 짐작하게 된다. 하여간 톈우와 샤오주는 서로가 서로를 도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로 약속을 하는데, 샤오주는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자기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 사진첩에 남기는 일을 도와달라고 하고, 톈우는 사장한테 받은 지시, 타이페이에서 101 빌딩보다 더 높이 솟은 교회를 찾는 걸 도와달라고 한다.

  세상에나. 101 빌딩이 타이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건 다들 아실 터. 꼭대기에서 번지 점프를 하면 그렇게 재미있다고 하덜 안 혀? 근데 그 빌딩보다 더 높이 솟은 교회가 있다고?


  하여간 나는 이렇게 세 가지의 우주를 설명해 놓았다. 이것들이 어떻게 긴밀하게 얽혀 있는지 찾는 일은 직접 해보시라. 시간 죽이는데 맞춤인 소설책. 더 이상은 크게 바라지만 않으면 충분하게 만족할 만하겠다. 아, 한 가지 더. 시간 죽이기 좋다는 말 듣고, 야한 장면 바라지 마시라.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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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유령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최용준 감수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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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의 제일 뒤에 “블라네스 1984”라고 작품을 쓴 장소와 연도가 쓰여 있다. 그런데 책은 2016년에 나왔다. 볼라뇨는 2003년에 바르셀로나에서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니 죽은 다음 14년 만이고 작품을 완성하고 부터는 무려 32년 만이다. 즉 사후 출간한 초기 작품이라는 뜻. 나는 이런 작품은 믿지 않는다. 볼라뇨가 <SF의 유령>을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마음에 들었거나, 돈을 받고 독자에게 팔 수 있는 상품이라고 봤다면 죽기 전에 벌써 책방에 깔려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면 작가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더 수정해야 할 미완성 작품으로 여기다가 눈을 감았겠지. 끝내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미완성인 채 남겨둔 작품. 몇 번 이야기한 거 같은데, 나는 대가들의 사후 출판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근데 왜 읽었느냐고? 볼라뇨니까. 도서관에 책 있으니까 읽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볼라뇨의 시집 말고 소설책은 다 읽고 싶다. 품질을 떠나서 몽땅. 팬이라면 그럴 수 있는 거잖아?


  작품의 주인공은 칠레인은 칠레인인데, (볼라뇨처럼)아옌데 대통령을 참살하고 피노체트가 정권을 잡자마자 칠레를 떠서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두 명의 청년 한 슈레아와 레모. 한은 SF 소설을 습작하고 있고, 레모는 아방가르드 시를 쓰려 한다. 이들은 멕시코시티 외곽의 엘리베이터 없는 녹회색 8층 건물의 8층에 살며, 최고층 주민의 특권으로 당연히 옥상도 거의 소유한 것처럼 보인다. 나중에 레모의 친구들이 함빡 놀러 와 옥상에서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짝을 이루어 화장실에 들어가 할 거 다 하고, 밤그늘이 제법 어두운 구석에 가서 서로를 실컷 더듬는 등 난장판을 벌이기도 한다.

  레모는 176cm의 키에 청바지, 파란색 티셔츠 차림으로 아메리카에서 가장 긴 거리의 갓돌 위에서 햇살을 맞으며 서있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그는 함께 칠레에서 도착한 룸 메이트 한에게 말한다.

  “나는 신문 문예란의 시평을 담당하는 스타 기자가 될 거야.”

  반면에 한은 죽자사자 SF 소설에 관심을 두고, 전세계, 특히 미국에 몰려 있는 SF 소설 작가들에게 끊임없이 팬레터를 보낸다. 한은 삼시 세끼 때문에 하루에 한 번 정도 식료품점에 가는 것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집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레모에게 시 창작교실에 다녀볼 것을 권유한다. 그리하여 출석하기 시작한 곳이 등단 시인 헤레미아스 모레노의 시 창작교실. 이곳에서 만난 멕시코 사내 호세 아르코. 기름에 찌든 청바지에 검은 가죽 부츠 차림의 낯선 사내. 그러나 헤레미아스가 비록 겉으로나마 예의를 차리는 될성부른 떡잎이었으며, 작품이 진행되면 레모와 함께 아방가르드 시 동인을 만들려 하는데, 이때 독자의 머리에 딱, 떠오르는 또다른 볼라뇨의 소설, 심지어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 그 책에 나오는 내장사실주의, 1920년대 멕시코 아방가르드 시 창작 소 그룹.

  이것을 눈치채는 순간 <SF의 유령>은 재미없어진다. 놀랍게도 한 순간에 그렇게 되더라.

  이제 스물한 살이 된 레모와 한은 멕시코 젊은이들과 어울려 시를 궁리하고, SF 소설을 쓰면서 앞에서 말했듯이 한쪽으로는 여자와 섹스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등장하는 여자들도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유사하다. 특히 나이든 노파 ‘에스트레이타’마저. 에스트레이타는 생활고에 허덕이는 늙은이면서도 젊은 아가씨 테레사, 앙헬리카 토렌테와 어울려 카페에 앉아 있다가 레모를 따라 나치의 군복 색깔과 똑 같은 녹회색 건물까지 동행해, 술 마시고 그냥 떨어져 자 버리기도 한다. 이 늙은이(와 비슷한 여성 인물)도 다른 볼라뇨에서 여러 번 본 적 있다.

  그래서, 아니겠지만, 볼라뇨에게 <SF의 유령>은 훗날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쓰기 위한 스케치였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비단 <… 탐정들> 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작품에서 몇 차례 등장한 사람들이 모인 듯한 기분. 볼라뇨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독일인 아르침볼드가 나오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니까, 말 다했지. 하여간 대가의 사후 출판 작품은 조심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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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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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드 창. 단 두 권의 중단편집으로 세계만방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중국계 미국인 과학자이자 소설가. 《숨》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출간하고 17년만인 2019년에 낸 두 번째 소설집으로 모두 아홉 편의 중단편소설을 실었다. 책 두 권의 터울이 무려 17년. 그래서 두 권의 작품 속 분위기는 무척 다르다. 만일 누가 내게 어떤 책이 더 마음에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숨》이 더 흥미롭고 사색적이었다고 단박에 대답할 거 같다.

  그러나 아쉽게도 책을 읽으며 단 한 줄의 메모도 하지 않아, 3일이 흐른 지금 독후감을 쓰려 하니 막막하다. 아홉 편 모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개별적으로 특정 작품마다 어떤 식으로 인상 깊었다고 짚어서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읽은 즉시 써야 하거늘 하필이면 그날 오후에 두부부침에 소주와 맥주를, 다음 날엔 생선구이에 소주를, 그 다음 날에는 또 불고기에 소주와 맥주를 퍼 마셔, 오늘 아침에야 겨우 랩탑을 꺼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아무래도 알코올 의존증이 점점 심해지는 거 같아서 걱정이다. 나도 술 끊고 싶다고!


  아홉 편의 중단편 가운데 호오好惡… 호오? 좋고 나쁨? 그런 거 없다. 전부 다 좋다. 그래서 호오가 아니고 좋아하는 정도가 제일 컸던 작품을 고르라고 한다면, 내 주제에 결정해서 말하기 힘든 조건이지만, 표제작인 <숨>과 마지막 순서에 실린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을 두고 한 두어 시간 책상 위에 손가락만 톡톡 두드리고 앉아 있을 거 같다.

  하지만 책을 열자마자 처음으로 읽을 수 있는 단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부터 쇼크는 시작한다. 이 짧은 단편의 분위기는 여지없이 <아라비안 나이트>. 다음 날 새벽이 밝아오자마자 언월도의 칼날에 목이 댕거덩 날아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생글생글 웃으며 칼리프한테 옛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는 셰헤라자드의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가 아니라, 푸와드 이븐 압바스라는 이름의 바그다드 상인이 연금술사 바샤라트를 만나 경험한 일을 아뢰는 내용인데, 그게 놀랍게도 시간여행, 타임머신, “백 투더 퓨처” 이야기다. 우리는 그동안 H.G. 웰스가 19세기 말에 <타임머신>을 발표한 이후 숱하게 다양한 버전의 시간 여행 이야기를 읽고, 보고, 관람해왔지만, 아마도 주된 이야기는 주인공의 불운한 현재를 바꿀 수 있는 과거의 행적을 수정한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작가 복거일이 쓴 <역사 속의 나그네> 역시 마찬가지. 주인공 이언오는 26세기에서 5백년 전인 21세기로 날아온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하는데, 기계의 오류인지 또다시 5백년 전인 16세기 말 조선에 불시착하니, 임진왜란이 터지기 10년 전. 처음 16세기에 도착한 이언오는 자신의 행동과 소지품 때문에 시간에 흔적을 남겨 시간줄기가 변형, 기존의 역사가 바뀌게 될 수 있음을 충분히 이해해서 그냥 곱게 죽기를 원하는 걸로 시작한다. 즉 시간 여행으로 과거 원인이 바뀌면 미래의 결과 역시 바뀐다는 것이 그동안의 타임머신 작품들의 공통점이었는데, 테드 창은 이런 개념에 반대한다.

  테드 창, 강봉남姜峯楠 씨는 보다 나은 현재 또는 행복을 위하여 과거를 수정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충분히 동의를 하지만, 백 번 과거를 바꾸어 보아도 결코 현재는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20년 전으로 돌아가 한 변곡점에 충격을 주어 시간 줄기를 흔들어봤자, 20년이라는 세월이 시간여행자가 원하는 대로 시간줄기가 흐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건, 변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이 그렇게 비극적인 건 아니라는 점이다. 누가 알아? 더 비극적 처지로도 빠져버릴 수 있었는지.

  그런데, 이런 면에서 읽으면, 과거가 어땠는지 인생은 미리 정해진 경로를 따라 갈 뿐이라는 운명론과 만날 수밖에 없다.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어서 인간은 그냥 그대로 걷게 디자인되어 있는 걸까? 그것 참. 나는 모르겠다. 이젠 별로 관심도 없다. 슬슬 도가 트기 시작하는 거 같다.


  두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인 <숨>이, 이 책에 실린 것들 가운데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SF 아닌가 싶다.

  “공기 혹은 아르곤이라고 불리는 기체가 생명의 원천이라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작품은 이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르곤? 원자번호 18번. 내가 배울 당시에는 원소 주기율표의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불활성 기체”라고 배웠는데 요즘엔 “비활성 기체”라 하는 모양이다. 발음 상 조금 문제가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농담이다). 어쨌든 다른 원소와 거의 반응하지 않는 기체라서 높은 순도를 유지해야 하는 산업 기계에 많이 사용한다. 불활성 기체 가운데 공기 중에 가장 흔하다. 즉 가격이 저렴해 그나마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비활성 기체.

  문제는 이런 아르곤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설정. 이쯤 되면, 즉 물이나 산소가 아니라 불활성 기체가 생명의 원천이라는 가정이라면, 이 생명체가 탄소를 기반으로 하는 유기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어야 했다. 그러면 뭘까? 뭐긴 뭐야, 무기 생명체, 즉 인조인간 로보트? 또는 지능을 가진 외계 생명체. 아니면 스타니스와프 렘 식으로 기계가 스스로 진화해 발생한 기계 생명체. 어느 것이라도 무방하다. 이 생명체 역시 허파 호흡을 한다. 그러나 호흡의 방식은 유기 생명체와 다르다.

  “우리는 매일 공기를 가득 채운 두 개의 허파를 소비한다. 매일 가슴에서 빈 허파들을 꺼내 공기를 가득 채운 허파들로 교환하는 식으로 말이다.”

  마치 잠수부가 등에 짊어지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 산소통을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게 가슴 속에 두 개가 있어서 매일 아르곤 가스가 만땅 채워진 허파로 교체해주어야 한다니 독자는 초장부터 “우리”가 기계 등의 무기 생명체라는 것을 알아챘어야 마땅하거늘. 강봉남 씨도 독자를 헷갈리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를 계속 “사람”이라 칭하는 바람에, 뭐 변명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숨>의 핵심은 기계 인간의 생존 방식이 유기생명체인 진짜 인간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점. 그러니까 태드 창은 아르곤을 생명의 원천으로 하고, 몸체를 이루는 로드rod 사이에 어떤 윤활 물질도 필요하지 않은 기계를 통해 사람들의 생존과 소멸에 관해 사색한 결과물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이자 화자 ‘나’인 무기 생명체, 스스로 진화한 기계 생명체, 또는 로봇일 수도 있는 해부학자 ‘나’는 발견한다.

  “내가 매일 새로운 허파 한 쌍으로부터 끌어내는 공기의 양은 내 팔다리 관절과 내 주위의 대기에 내가 더하는 공기의 양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중략)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는 이 우주의 압력 평형화에 기여하고 있다. 생각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치명적인 평형상태의 도래를 촉진하고 있는 것이다.” (p.78)

  운동/열 에너지를 말하고 있는 듯한데 자신의 운동과 생각을 포함한 에너지의 소비와 허파를 통한 보충이 서로 평형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간다는 의미. 근데 평형이란 건 뭘까? 정지. 그리하여 평형상태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이걸 발견한 ‘나’는 어떻게 했을까?

  “다른 상황에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거리로 뛰쳐나갔겠지만…” (p.78)

  생각나는 옛 사람 한 명 생각난다. 퍼뜩 진리를 깨닫자 욕탕에서 벌떡 일어나 알몸으로 거리를 내달리며 이렇게 외쳤던 사람.

  “유레카!”


  테드 창은 SF 소설 작가로 이름을 높였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테드 창, 강봉남 씨를 SF 작가로 국한시킬 수 있을까, 국한시켜야 할까를 생각해보았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몰라도 이 책 《숨》은 비록 SF의 외피를 입었어도 삶과 인생과 인간에 대한 진지한 에세이를 읽는 듯했기 때문이다.

  독후감 초장에 얘기한 마지막 수록 작품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 대표적이다. 프리즘. 백색광을 투과하면서 빛이 분산해 여러가지 색으로 변하게 하는 삼각기둥처럼 생긴 거. 여기서 방점은 빛이 굴절하며 얼마나 굴절하는지에 따라 다양하게 분산한다는 것인데, 테드 창은 이걸 ‘평행공간으로의 이주로 가게 할 수 있는 매개물 또는 장치’로 해석했다.

  이 작품이 내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세상의 70억명 모두 개별적으로 다양한 평행우주 또는 평행공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걸 곧이곧대로 그냥 평행우주/평행공간이라 생각하는 것도 재미겠지만, 삶과 인간에 대해 생각할 거리로 여겨도 의미있는 생각할 거리가 될 수 있다.

  이런 생각 거리가 이 책 《숨》에 가득하다. 편마다 숙고와 사색의 흔적이 들어 있으니 이 작가가 두 번째 책을 17년 만에 낸 것도 일견 이해할 수 있을 터. 이이는 SF 작가라기 보다 과학 철학자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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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10-05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봉남 씨라 하니 ㅋㅋㅋ 되게 친근하게 순박하게 느껴지네요. 저도 테드 창 소설은 경이롭다, 수준이더라고요. 복거일 소설 한번 읽어볼까요?

Falstaff 2026-10-05 17:58   좋아요 0 | URL
앙드레 김 선생이 팍 떠오르지 않으셨어요? ㅎㅎㅎ 저도 재미있는 이름이라서 그냥 넘기기엔 아깝더라고요. (악취미이긴 한데 재밌잖아요.)

꼬마요정 2026-10-05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다 좋았어요!! 강 씨였군요. 중국 발음으로 강이 창이군요. 저는 테드 창 하면 어느 순간부터 영화 <극한직업> 창식이 오정세가 생각나요. ㅎㅎㅎ

Falstaff 2026-10-05 17:58   좋아요 2 | URL
넵. 저도 테드 창, 하면 무조건 오정세였습니다. ㅋㅋㅋㅋ

얄리얄리 2026-10-06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SF를 좋아하는 편인데,
아주아주 개인적인 생각으로 저한테는 ‘SF다운 책‘ top3에 들어갑니다.

Falstaff 2026-10-06 17:52   좋아요 0 | URL
아, 그러시군요. 충분히 공감하겠네요.
 
꿈을 꾸게 하는 꿈이 있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629
이문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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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재. 1959년 김포생. 나는 서울 출생이지만 김포 사람이다. 시인과 성씨도 같다. 조부모, 부모도 김포 문중 납골당에서 사이좋게 한 방에서 명복을 누리시고 있다. 그래서 처음 이이의 시집을 읽었을 때부터 어어, 이거 혹시 우리 문중 사람 아녀? 이랬다는 거 아닌가. 근데 다행이다. 시집을 읽어보니 원래 평안도 웅진 사람인데 전쟁 때 부모가 형과 누나를 솔가하여 꽝꽝 얼어붙은 바다 위로 인천, 태안을 거쳐 저 남도 끝자락까지 피난을 해 먹고 살다가 김포로 옮긴 다음에 시인을 낳은 거란다.

  이문재는 1990년대부터 읽었으니 세월이 꽤 됐고, 기중 좋아하는 시인으로 시집이 탁 보이면 척 골라 읽는 수준이었다. 근데 이젠 그짓도 그만 해야겠다. 내가 만일 이이의 동생이라면 다시는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내지는 못할 거 같다.



  문자 메시지


  형, 백만 원 부쳤어.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야.

  나쁜 데 써도 돼.

  형은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잖아. (문학동네, 《지금 여기가 맨 앞》, 2014)



  이문재는 문학동네 시집과 이번 시집 사이에 팍 늙어버렸다. 그래서 위에 소개한 문자 메시지를 보낼 생각도 안 할 거 같다. “형은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잖아?”

  이 시집을 읽으면서 제일 읽을 만했던 것은 다른 시인도 아니고 무려 나희덕이 쓴 발문 “생각을 생각하는 시, 꿈을 꾸게 하는 꿈”이었다. 같은 시인 그룹의 선배 시인이 자기 시집에 발문을 써 달라고 하니 아무리 나희덕이라도 거절하기가 쉽지 않겠지. 나희덕도 국문학 박사님이니 그럴 듯한 발문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그리하여 한 마디 꽝, 하는 데:

  “시집 제목부터가 재귀적 표현이다. 수록된 시들의 제목을 일별해보아도 ‘고통이 말해주지 않는 고통’ ‘혼자의 혼자’ ‘혼자 혼잣말’ … 등 동어반복과 재귀적 허용이 잦은 편이다. 시집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반복과 변주는 그야말로 ‘이문재식 문장법’이라고 부를 만하다. 1부만 해도 재귀적 문장이 수두룩하다.” (p.164)

  정말 그렇다. 그래서 책의 뒷표지, 가끔 책 판매를 위한 카피 역할을 하는 뒷표지에 뭐라 적어 놓았느냐 하면,


  꿈을 꾸게 하는 꿈이 있듯이

  시를 쓰게 하는 시가 있다.

  밥을 먹게 하는 밥이 있듯이

  삶을 살게 하는 삶이 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삶을 살도록 하는 죽음들이 있다.



  뭔 시집의 카피가, 말이 많았다. 시집의 맨 앞에 실린 시를 읽어보자. 다행히 짧은 시다.



  눈동자



  눈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눈동자다


  눈동자는

  다른 눈동자가 필요하다


  지금 가장 필요한 눈동자는

  내 눈앞에 있는 다른 눈동자다 (전문.  p.11)



  원래 시인들이 하는 말이 이렇지 뭐. 그냥 내 앞에서 나를 봐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이렇게 한 거다. 사실은 나를 봐줄 필요까지도 없고 그냥 앞에 있어 주기만 해도 좋을 사람 하나.

  그러나 시집의 저 뒤로 가면 이 눈동자에게 작지 않은 일이 생긴다.



  눈동자 2



  눈동자가 위기에 처했다

  눈동자가 눈동자를 찾지 않는다


  눈동자를 바라본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다른 눈동자가 내 눈동자를 

  오래도록 바라본 적이 언제였는지


  눈짓으로 말한 적이 언제

  서로 눈빛을 마주친 적이 언제였는지


  눈동자가 위험하다

  눈동자가 눈동자를 잃어버렸다  (전문. p.125)



  에그. 시인이 좀 외롭구먼. 늙으면 다 조금씩 외로워지는 것이지 뭐. 하긴 시인이니까 이리 엄살도 떨고 그러는 거겠지만. 근데, 그래서 당신 눈동자가 잃어버린 눈동자는 몇 알이나 되는 거야? 같은 단어 이리 줄을 이어서 이게 시입네, 하니까, 재귀적으로 눈동자 눈알을 주욱 나열하니까 성질 좀 풀리시나 보다.

  초장부터 까탈을 부리는 건, 시집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다. 확실하게 말하자. 지금 나는 이 시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고 했지, 조금도 시가 잘못된 것이란 의미는 담지 않았다. 틀림없이 시 읽는 수준이 별볼일 없어서 이렇게 말하는 용기도 있을 거라 여기면 정확하게 맞는 생각이다. 무엇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너도 봄날



  거울 속의 거울

  마주 보는 거울은 떼어놓기

  눈동자는 다른 눈동자와 마주 보게 하기

  눈동자 안에 다른 눈동자 빛나게 하기

  반짝이는 눈동자에게

  꿈을 꾸게 하는 꿈 말해주기

  시를 쓰게 하는 시 서로 읽어주기 (전문.  p.12) * 원문은 모든 행이 한 연인데 그냥 붙여 인용했음.



  단어를 연속해 가져다 놓음으로 강조의 의미도 줄 수 있고, 의미를 확장할 수도 있고 하여간 여러 시적 표현이 가능한 연상작용을 의도했을 수 있겠지만, 앞에서 눈알이 툭 튀어나오고, 몇 페이지 건너 다시 눈알이 툭 튀어나오고, 저 뒤에서 또다시 눈깔이 툭 튀어나오면 이거 뭐 가자미 눈깔도 아니고, 동태 눈알도 아니고, 죽어도 못 잊는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누이동생의 눈동자도 아니지, 많고 많은 눈동자에 뭐가 그리 좋은 것이 많다고, 서로 눈알끼리 마주보게 해야 하느냐는 것. 낸 앞의 눈동자 모두 선하고, 아름답고, 눈길만 닿았다 하면 찌르르 아랫배가 찌릿하고, 다 그럴 거 같지? 그 많은 눈동자 속에서 몇 알, 몇 쌍은 당신의 눈동자를 읽으면서 저걸 어떻게 뒤통수를 칠까, 몇 대나 때려줄까, 지갑에 얼마나 들었을까, 애먼 생각을 하는 눈알도 수다하게 있을 수 있다. 시인도 다 알면서 저리 예쁜 눈동자만 골라 생각하라고 하는 거다. 그게 시니까. 좀 독하게 평하는 거 같은데, 나는 한 마디로, 나희덕이 말한 재귀적 표현을 지극하게 싫어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쁜 말이 안 나가지.

  1959년생이니 이제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자리에서는 은퇴를 했을 거 같고, 그럼 명예교수? 아, 그 참. 명예교수들이 문제라니까. 열라 시 쓰고, 공부하고, 발표하고, 제자들에게 만날 올림을 받으며 살다가 갑자기 툭. 여태 가오가 있었으니 무슨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도무지 뇌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황지우는 말했다는 거 아냐.

  “성님, 시는 이십대에나 쓰는 거 아뉴?”



  엄마 전화기



  엄마 전화기가

  여전히 살아 있다

  세상 떠난 지 1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원을 켜면 문자메시지가 와 있고

  부재중 전화도 제법 있다 어쩌다

  진동이 울리면 받을까 말까 망설여진다

  전화기가 죽으면 엄마가 또 죽을까 싶어

  충전을 계속하는데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죽은 엄마 전화기를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살아 있는 나 때문임이 분명하다 며칠 전에도

  너무 힘들어 엄마한테 문자를 보냈다

  나도 거기로 가고 싶은데 엄마 나 가도 되나

  답 문자 기다리는 대신 엄마 전화기 속으로

  이니셜과 별명이 많은 엄마의 사생활 속으로

  들어가곤 한다 수백 번 넘게 열어본 우리 엄마

  그래서 그렇게 비상금이 필요했고 그래서

  아빠와 매번 심하게 다퉜고 그래서 그래서

  요양원에 있는 엄마의 엄마한테 달려갔고

  그래서 그날 새벽 차를 몰고 동쪽 바다로 향했고

  그래서 엄마가 그래서 엄마는 그래서 나도

  그날 이후 눈을 들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엄마 전화기를 버리지 못하고 겨우 견뎌왔는데

  이제는 안 되겠다 이렇게 한 살 더 먹기 전에

  죽은 엄마 두번째 생일이 오기 전에

  전화기를 엄마한테 돌려줘야겠다

  매번 다짐하곤 하는데 다짐하긴 하는데   (전문. p.24~25)



  이번 이문재 시집을 읽으면서, 이 시집을 마음에 든다고 말하지 않기로 작정하게 만든 시. 이 시의 화자가 누굴까? 시인의 엄마? 시인의 아내? 아이쿠, 시인의 아내는 취소. 멀쩡히 살아 있는 분일 확률이 높은데 산 사람을 그리 말하는 건 사람 할 일이 아니다. 그럼 시인의 삶 속 특정한 여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자는 늙은 시인의 어머니, 2년 전에 돌아가신 모친을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이 시를 언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문재가 환갑이 넘어 돌아가신 것 같다.

  그런데 이거 뭐 이렇게 궁상이야 싶다. 세상에 어머니 보낸 사람이 시인 한 명인가? 자실 만큼 자신 나이가 부끄러울 것도 같은데, 뭐 그렇다고 꼭 이렇게 내놓고 큰 울음을 울지 말라는 얘기도 아니지만, 아이고, 난 딱 싫다. “죽은 엄마”를 얼른 잘 보내드리는 것도 나이 든 자식이 할 일. 내 이야기를 해서 안 되기는 했지만, 난 죽은 엄마가 꿈에서도 잘 오시지 않는 게 그렇게 고맙더만. 생과부로 두 아들 키우느라 뼈빠지게 고생하다 간 엄만데도 돌아가시자마자 팍 보내드렸는데, 그것도 괜찮은 일이란 걸, 시인은 모르는 모양이다.

  시집 안 읽어본 분은 모르시겠지. 이 시집의 가관은 2부 이후부터 나온다.

  이미 55세도 아니고, 60세도 아니고, 65세 정년퇴직한 명예교수라는 분이, 뒷방으로 물러났으면 거기서 좀 고요히 여생을 즐기면 될 것을 세상살이 거의 모든 잡사에 끼어들어 한 마디를 하고 싶어한다. 그거 참. 정치, 경제, 사회, 환경, 세계정세 같은 거에 빠지지 않으려 하니, 나중에 시인의 엄마처럼 세상 등질 때 얼마나 아쉽겠느냐고. 제발 좀 그러지 마시라. 쓸데없이 말 많고 참견 많은 꼰대를 주책바가지라 하는 것도 아실 터인데. 오랜 팬이라서 이런 말도 올려주는 거란 것도 이해해줄 연치의 시인이라서 오랜만에 속 다 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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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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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집중해서 읽고 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 제니퍼 이건. 퓰리처상을 받은 발랄한 <깡패단의 방문>에서 시작해 거의 데뷔작이라고 봐도 좋을 소설집 《에메랄드 시티》에 이어 2006년에 출간한 <킵>까지 왔다. 앞에 읽은 두 작품과 많이 다르다.

  나는 작품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오직 작가의 이름 하나만 가지고 선택해 읽었는데, 그래서 읽는 도중에 적어도 두 번 “이게 뭐야?” 크게 판을 뒤집는 광경을 제대로 감각할 수 있었다. 아예 노골적으로 대놓고 작품이 픽션이라 선언한다. 이런 건 읽을 때마다 메타 픽션인 걸 알면서도 꼭 깜짝 놀란다.


  대니 킹.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다. 킹의 아버지는 여러 형제 가운데 한 명이었고, 형제들끼리 우의가 돈독하여 자주 가족 모임을 가졌는데, 대니는 사촌들 가운데 하위, 레이프에 관한 기억이 제일 많이 남아 있다. 그렇다고 세 명이 “함께” 즐거웠다는 말이 아니다. 개별적으로 두 명의 사촌하고 친했다는 말이지. 둘 중에 특히 하위하고. 하위는 자기가 만든 아이들 게임 “터미널 제우스”에 대니를 끼워주어 어린이 시절에만 공감할 수 있는 독특한 놀이를 즐기게 해 주었는다. 하위는 많고 많은 사촌들 가운데 딱 한 명, 킹 가문에서 입양한 사촌이라 삼촌들이나 고모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척했고, 사촌들은 은근히 왕따를 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집단 놀이를 해도 하위만 끼워주지 않거나 소위 ‘깍두기’ 역할만 하게 만드는 식으로. 그러니 성격이 좀 비뚤이지겠지? 그래도 놀이를 만들 만큼 머리가 좋았는데, 그게 사촌들 눈에는 괴짜에다가 루저로 보여 날이 갈수록 따돌림이 심해져, 끝내 대니 역시 하위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십대의 하위에게는 일종의 외상성 경험으로 작용을 해 하위가 가지고 있던 양순함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성마르고 노심초사하는 성격으로, 환상적으로 망가졌다는 소문이 킹 가문에 흘러 들어왔다. 마약 복용으로 체포되었다고? 그런 애를 입양하다니 다 노엄 잘못이야. 유전자 잘못이라고. 우리 집안에 없는 유전자를 갖고 끼어 들어와서 말이지.

  하지만 하위는 일찌감치 집을 나가 좋은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주식 채권 딜러 일에 혁혁한 전공을 쌓아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등에 비견하는 업계의 월계관이란 월계관은 다 수집해버렸고, 재산 역시 무지막지하게 많은 백만장자의 반열에 올라 서른다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돈벌이에서 은퇴해버리고 보다 그럴듯한 삶을 위하여 폴란드인지, 오스트리아인지, 체코인지, 독일인지 모를 곳에 있는 9백년 된 고성을 사서, 그걸 호텔로 리빌딩해 편안한 나머지 삶을 도모하고 있다. 앤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 벤지와 젖먹이 딸이 있다. 이제는 누구도 그를 ‘하위’라고 부르지 못한다. 대신 본명인 하워드를 갖다 바친다. 대니 조차도.


  대니는 어린 시절에 레이프와 한패가 되어 범죄를 저지르는 것만큼 짜릿한 일은 세상에 없다고 믿으면서, 그러니까 대강 껄렁껄렁한 십대를 보낸 후에 집을 떠나 뉴욕에 정착해 사는 척을 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다닐 때 미식축구로 이름을 날려 대학은 졸업한 거 같다. 도무지 먹고 사는 일에 능숙하지 못해 친구의 소개로 별로 건전하지 않은 식당의 바지 사장으로 들어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나마 괜찮게 먹고 살았는데, 이런 업소의 바지 사장들이 항용 그러하듯 그럴 때가 되니까 업주 또는 물주, 그것도 아니면 보스의 눈 밖에 나, 아마도 한 바탕 제대로 두드려 맞고 쫓겨난 거 같다. 이 와중에 20대 초반까지 몸 바쳐서 투신했던 미식축구 선수 시절부터 좋지 않았던 무릎에 추가 상해를 입어 장애 수준에는 살짝 미치지 못할 만큼의 통증이 유발, 다리를 약간 절고 있다.

  딱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처지에 떨어진 순간, 저 동유럽 모처에서 연락이 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오스트리아인지, 독일인지, 체코인지, 폴란드인지 모를 곳의 오래된 성을 구입한 사촌 하위가 대니한테, 성의 개조를 도와준다는 조건으로 돈과 편도 비행기 티켓을 보내왔다. 도시에서 완전하게 탈출해 조용하고 여유롭게 유럽의 흑림에서 살고 싶어하는 하위와 달리 전형적인 도시인인 대니는, 그러나 당장 먹고 살 방법이 없어 ‘폰 아우스블링커’ 성에 가서 하위, 앞으로 하워드라고 불러야 하는 사촌의 따까리 또는 당번이나 보좌관, 아니면 다행스럽게 넘버 투 일을 하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을 들기를, 워낙 심심산골이라 와이파이라는 건 아직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시절이어서, 인터넷도 터지지 않고, 당연히 폴더폰이었을 휴대폰도 그냥 플라스틱 뭉치 또는 휴대용 무기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아, 내복 몇 개, 스웨터 몇 장을 넣은 샘소나이트 트렁크와 함께 세상 어느 곳에서도 전파를 발송하고 접수할 수 있는 위성용 안테나까지 장만해 깊고 깊은 동유럽의 산악지역으로 떠나 폰 아우스블링커 성벽 앞에 섰다. 성문이 아니라 성벽 앞에. 무너져가는 성 앞. 이게 첫 장면이다.


  그리고 레이프. 레이프의 멋진 점은 그가 무엇을 하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죽었다 깨도 알 수 없다는 거였다. 대니가 살면서 제일 짜릿했던 경험이 레이프와 함께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었다니 10대, 하이틴 시절 이후에 별로 바람직하게 살지 않았을 거 같은데, 제니퍼 이건은 이 건에 대하여 끝내 모른 척한다. 그리하여 독자의 권한으로 넘겨 짚어 보건대, 레이프는 일찌감치 뉴욕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진출해 이러저러한 범죄를 저지르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쏜 권총 총알이 상대의 머리통을 관통해버린 것을 알았다. 정신이 번쩍 든 레이프는 그길로 스스로 경철서에 출두해 자기 죄를 고백하고 선처를 호소한 것이 아니라, 이리 도망가고 저리 숨어 다니다가 끝내 체포되어 거의 무기수 비슷한 처지로 떨어져 교도소 2인실에서 살고 있다. 하필이면 같은 방에 사는 흑인 재소자가 푸시 업을 하루에 750회씩 하는 어마어마한 덩치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이 데이비스 덕분에 다른 방에 사는 더러운 호모 새끼들이 레이프의 엉덩이를 바라만 볼 수 있을 뿐, 감히 더듬어 대지 못하는 덕도 본다. 그렇게 산다.

  다시 말하건대 이건 전적으로 독자인 내가 다시 그려보는 사촌 세 명의 훗날 모습니다. 레이프가 작품에 나오는 수감자, 더 뒤로 가면 감히 21세기 또는 20세기 말에 저격병이 망루를 지키고 있는 미국 교도소의 이중 철조망을 뚫고 무사히 탈옥에 성공하는 ‘레이’와 동일인이라는 아무 증거도 없기는 하지만 뭐 독자가 그렇게 생각하겠다는데. 그래서 앞으로는 레이프 말고 레이라고 쓴다.

  레이는 처음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어마무시한 압박을 느끼는 데이비스를 잠깐이나마 피하기 위하여 교도소가 마련한 재소자 성격 개조 프로그램의 일환인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다. 강사는 딸 둘을 키우는 돌싱녀이자 현재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있는 홀리. 그러니까 아직 정식으로 강의를 맡을 자격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무도 교도소에서 험한 재소자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홀리한테까지 강사 자리가 밀려올 수 있었는데, 심지어 지원자가 없으니 재소자와의 대면이라는 위험수당까지 붙어 홀리 수준의 가방끈으로는 어떤 강사도 받지 못하는 급료를 받았다.

  범죄자 레이가 원래부터 글쓰기에 소질이 있었다는 건 그럴 수 있는 일. 다만 독서량이 모자라 처음부터 기막힌 글을 뽑아내지는 못했다. 하여튼 처음 적어낸 이야기는, 선생 또는 강사와 침대에서 한 탕 벌이는 남자의 이야기. 일종의 패관문학이었겠지. 그러나 재질이 있는 레이의 두번째 이야기가 무엇이었는고 하면, 바로 저 동유럽, 오스트리아인지, 독일인지, 체코인지 모를 흑림 속 산악지역의 9백년 된 성과 성 안에 솟은 공략할 수 없는 탑, 이른바 아성牙城the Keep, 그리고 성이 팔렸음에도 결코 아성에서 퇴거하기를 거부하는 97세의 남작부인. 아성 지하에 미로처럼 뻗어 있는 지하 동굴과 심지어 9백년 묵은 포도주, 고문 도구, 현대인은 생각도 못할 옛 시절의 갖은 무기 종류.

  여기가 하위와 대니가 얼굴을 맞대고 있을 폰 아우스블링커 성일까?

  책을 읽는 도중에 여러 번, 적어도 몇 번은 머리 속이 헝클어지는 즐거움을 맛보실 수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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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10-01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아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근데 내용은 기억이 희미해요ㅋㅋㅋ미로같은 성 지하에서 오래된 와인 먹고 분수대 위로 올라와서 어쩌구저쩌구 했던 거 같은데.. 읽으면서 어드벤처 게임 같다 느꼈던 기억이 있어요😆

Falstaff 2026-10-01 16:37   좋아요 1 | URL
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니퍼 이건의 입심이 보통이 아닙니다. 주목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고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