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어 마스크 레플리카 ㅣ 이매진 드라마톨로지 1
하일지.정영문.서준환.김경주 지음, 장정일.김경주 기획 / 이매진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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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정일이 이름난 작가 네 명의 희곡을 골라 책으로 엮었다. 알고 보면 장정일 본인이 우리나라 연극 발전에 제일 공로가 있다고 볼 수도 있는 동아일보사의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실내극>으로 당선한 극작가이기도 하다. 희곡집도 네 권이나 냈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일 안 팔리는 문학책이 희곡집이라 책이 나왔는 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책에서 장정일의 극작품을 발견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장정일은 책을 편집해서 서문과 발문을 썼을 뿐, 각 작품의 창작에 개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희곡을 쓴 네 명의 작가/시인은 하일지, 정영문, 서준환, 그리고 김경주이다. 이름만 대도 눈앞이 환해지는 작가들. 하여간 나는 그랬다. 이이들의 작품을 책 한 권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이 책을 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으니까.


  하일지. 1990년대 경마장 주변을 서성이며 세간의 관심을 받았던 동덕여대 문창과 명예교수. 나도 당연히 당시 <경마장 가는 길>에 열광해서 이이의 경마장 시리즈를 연달아 사 읽었고, 다른 애독자와 마찬가지로 연달아 실망하다가 몇 번의 경마장을 끝으로 이별을 고했던 작가. 한 팔 년 전에는 오랜만에 하일지 생각이 나서 그의 장편소설 <손님>을 사 읽었다가 돈이 아까울 지경이었는데 더 곤혹스러운 건, 독후감을 썼는데 독후감의 아주 일상적인 단어의 조합이 하필이면 야설 탐색꾼들의 레이더에 걸려 꽤 오랜 동안 반갑지 않은 방문을 받아야 했던 우스운 기억도 있다. 그래서 하일지에 대한 관심이 거의 꺼진 줄 알았다가, 이번에 또 하일지라는 이름을 발견한 순간 피식, 웃음과 더불어 작지 않은 흥미가 돋던 것이다.

  작품 제목이 <파도를 타고>.

  <경마장 가는 길>에서 이미 본 듯한 분위기. 남자는 15년 동안 중학교 교사를 했다. 그래도 자기 집 하나 마련할 수 없는 암담한 남한 땅. 학교에서도 좋은 꼴 못 봐, 노후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늙은 부모도 봉양해야 해, 아들 딸 하나씩 있는 것들도 벌써 사춘기를 맞아 박박 기어오르기 시작하거나 귀엽기는 하지만 남들 하는 대로 학원 보내며 제대로 키우기도 쉽지 않을 거 같은 좌절에 휩싸인다. 그리하여 남자가 선택하고, 결심해서 실행해버린 것이, 전재산을 다 팔아 작은 배 한 척을 사서 무작정 남쪽 따뜻한 섬을 향해 한국 땅을 떠나는 이야기다.

  이미 <경마장 가는 길>에서 파리에 유학했다가 돌아온 30대 주인공 R이 한국에서 다시 경험하는 답답함, 자유롭지 못함에 서서히 질식하는 과정을 읽은 적이 있어서, <파도를 타고>의 주인공인 40대 남자의 좌절이 새롭지 않다. 남자가 품은 가장 지독한 좌절은, 15년간 중등학교 교사를 했어도 한 칸짜리 자기 집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거.

  미친 거 아냐? 전제가 “서울에서 집 한 칸”이다. 그렇게 될 줄 몰랐어? 이 남자, 마음먹고 서울을 떠서, 뜨기는 뜨지만 멀리도 아니고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살기로 작정만 했다 하면 하일지 연배에 중등학교 15년 경력이면 근사한 아파트 한 채는 물론이고 남는 돈으로 적어도 소나타 한 대는 굴렸겠다.

  장정일도, 이 책을 낼 때가 하일지도 근무하는 동덕여대 문창과 초빙교수를 할 때여서 그랬는지, 하일지를 두둔하며 하는 말이, 중학교 교사 15년에 내 집도 못 샀는데, 그까짓 독도가 누구 땅이면 어떻다는 말이냐는 거. 아주 시니컬하지만 꼭 틀린 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삶은 누구에게나 곤고한 것이고, 내 손톱 밑에 잔가시 박인 것이 제일 아픈 법이니까. 근데 <경마장…>도 그렇고 <파도를 타고>도 그런데, 하여튼 파리 유학을 했건, 중학교 교사를 했건 간에 주인공인 R과 남자는 우리나라의 중산층 이상의 지위를 누려야 마땅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별볼일 없는 집의 맏아들이자 유부남인 R은 파리에서 사귀고 같이 잤던 부잣집 딸 J와 여전히 파리에서 맺었던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희곡의 남자는 죽어도 서울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서 자기 집 하나 장만 못한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하일지를 포함한 이들도 어떤 의미에서 연못 안 개구락지들일 수도 있다는 건 아마 본인들도 모를 걸? 재미없어, 재미없어.


  제일 기대했던 작가가 정영문.

  책에 실린 네 편의 희곡 가운데 유일하게 정말로 공연 실적이 있는 작품이 정영문의 <당나귀들>이란다. 내가 읽어도 네 편 중에서 제일 좋다. 그러나 조심하실 것은, 다른 작가도 아니고 정영문이라는 거. 아니나 다를까, <당나귀들>은 부조리극이다. 희곡을 별로 읽지 않은 분들이 읽으면, 스토리하고 전혀 무관하게 돌아가는 장면들이 많이 낯설 수밖에 없다.

  전쟁이 터져 전선에서 전령들이 막 도착해 전황을 보고하는데, 황당하기 그지없다. 왕은 벌써 나라 밖으로 도망가버렸고, 왕의 동생이 자리를 얻은 장군은 지난 전쟁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장군, 나라 최고 군 통수권자로 있는데, 이번 침공을 어떻게 막을지 무지막지 고민하고 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정말로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는 애국자 장군? 뭐 그럴 수도 있고. 하지만 전선을 어떻게 구축하고, 어느 지형을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방어하며, 하다못해 진지가 다 뚫리면 퇴로를 어떤 식으로 확보하느냐 하는 건 장군의 머릿속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숙고에 숙고를 멈추지 않는다. 단 한 가지도 결정하지 않으면서.

  만조백관을 대표하여 등장하는 신하1과 신하2 역시 전령1이 전선에서 수도까지 뛰어오며 지나친 포도원에 포도가 잘 익었는지, 익었으면 몇 송이 따오지 그랬느냐는 등의 헛소리만 지껄이는데, 만일 부조리극에 익숙하지 않다면 이쯤에서 거품 물고 책을 집어 던질 지도 모른다.

  이런 건 비단 <당나귀들>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정영문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라서, 미리 주의를 하고 읽으면 좋겠다.


  표제작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를 실은 서준환.

  서준환은 장편소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을 읽어 보았다. 그 책 읽으면서 내내 혁명기의 공포정치가 이루어지는 혁명재판소와 로베스피에로의 집에 국한한 장소의 폐쇄성 때문에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서준환이 애초에 한예총 연극원에서 극작을 공부했다는 걸 알았다. 그리하여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을 읽을 때 느낀 폐쇄성,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니라 희곡으로 쓰는 게 마땅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한 방에 싹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는 성매매 업소에서 벌어지는 판타지. 18세기 말의 프랑스 혁명을 깊게 공부했던 서준환답게 각각 대립하는 층위의 뫼비우스 적 혼돈을 그리고 있다. 장소가 성매매업소라고 해서 괜히 야한 생각을 하거나 그런 장면을 기대할 필요 없다. 희망사항, 안 나온다.


  마지막으로 실은 <블랙박스>는 시인 김경주가 시처럼 쓴 희곡.

  비행기 안에 탄 두 남자의 대화가 거의 전부. 이건 희곡일까, 시일까? 시면 어떻고 희곡이면 어떠랴. 그냥 읽으면 되는 것이지. 근데 실제로 공연하기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좋다. 희곡이라고 다 공연을 전제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근데, 읽는 것도 쉽지 않던데? 처음부터 끝까지 둘의 대화에 아주 가끔 스튜어디스가 나타나 뭐라 하기는 한다. 근데 등장인물 소개에 뭐라고 쓰여 있는가 하면, “카파와 미하일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은 마네킹과 목소리만으로 대신할 수 있다.”

  2인극도 2인극 나름이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들은 평원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이리 뛰어갔다가 저리 뛰어가고, 뭐 그런데, <블랙박스>의 주인공 카파와 미하일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입으로만 조잘조잘. 그러니까 할 말이 뭐가 있겠어? 난기류와 비행기 창 밖의 광경과 내려다보이는 거, 그리도 구름 속 정도겠지. 아오, 또다시 밀폐성.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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