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세기에 나희덕의 시집 《뿌리에게》와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를 읽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나희덕의 천생 시인 기질을.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중략)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후략) <어린 것> 부분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산보하다 만난 새끼 다람쥐를 보고 젖이 팽 도는 여인을 우리가 시인이란 말 말고 도대체 뭐라 불러야 하나. 전적으로 게으름 탓이다. 이후로 나희덕이 어떤 시를 썼는지, 지금 뭘 해서 먹고 사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2021년 현재 나희덕은 서울과학기술대학의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금 독후감을 쓰고 있는 《사라진 손바닥》이 나온 시점인 2004년에는 조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였다. 시집을 읽고 짐작해보면 서울의 전세보증금을 탈탈 털어 광주로 짐작되는 곳으로 하향을 해 아이들 둘을 데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시에는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일원을 무대로 하고 있는 것들이 제법 된다. 첫 번째로 실은 시가 표제시이기도 한 <사라진 손바닥>이다. 전문을 읽어보자.



  처음엔 흰 연꽃 열어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짝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전문)



  1연은 연꽃의 한 살이. 처음엔 연꽃이 피고, 꽃 진 다음 넓은 꽃잎만 연못 가득하다가, 가을이 오니 가는 연꽃 대 위에 연꽃의 씨가 가득한 씨방이 고개를 든 모습. 그리고 연밥을 다 채취한 다음 물이 빠진 진흙 위에 꽂힌 꽃대를 수많은 창이라 노래하고 있다. 이하는 진흙 속에서 연밥을 줍기도 하고, 연근을 캐는 노동을 그린 2연, 시인의 감상이 3연, 연꽃이 핀 무안의 회산 백련지라는 지명을 밝히고 있다. 나는 연꽃으로 유명한 중국의 옛 월나라 회계 부근의 지명이 회산인줄 알고 찾아보니 전라남도 무안의 유명한 연꽃 연못이 있는 곳이다. 한 20년 전 쯤에 나도 가본 적이 있었으나 거기 지명이 회산인지는 몰랐다. 이번 시집의 장소는 처음이 직장인 조선대가 있는 광주와 전남 지역이고, 그 외로 오스트리아 알프스 지방, 북한 땅이 바라다보이는 중국 연길시 일대와 젊은 시절을 보낸 서울 서대문구 정도다.

  그러나 나희덕하면 저 위에 인용한 <어린 것>에서 볼 수 있는 ‘모성’이다. 새끼 다람쥐를 보고 젖이 팽 도는 것처럼, 모성의 근본은 가여운 것들에게 밥 한 그릇을 주고 싶어 하는 심정 아닐까 싶다. 이번 시집에서도 이런 성향의 시가 몇 편 보인다. 예컨대 이런 시.



  조찬朝餐



  깃인가 꽃인가 밥인가

  저 희디흰 눈은

  누구의 허기를 채우려고

  내리고 또 내리나

 

  뱃속에 들기도 전에 스러져버릴

  양식을, 그러나 손을 펴서

  오늘은 받으라 한다


  흰 밥을 받고 있는 언 손들

  목튤립 마른 열매들도

  꽃봉오리 같은 제 속을 다 비워서

  송이송이 고봉밥을 받고 있다


  박새들이 사흘은 쪼아먹고 가겠다 (전문)


 

  이번엔 새끼 다람쥐 대신 박새들이다. 탐스럽게 생겨 숭실대학의 교화로 지정되기도 한, 목튤립 꽃의 열매를 다 비운 마른 꽃봉오리 속에도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것을 보고 시인은 고봉밥이라고 했다. 시가 정말 쉽다. 이렇게 쉽게 써도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나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 이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김진수는 나희덕의 시쓰기는 “누에나 거미가 실을 자아 고치를 짓거나 거미줄을 짜는 일과 꼭 마찬가지로 일종의 직조술로 인식된다.”고 말하면서 해설을 시작하기 전에 데뷔시집 《뿌리에게》의 <시> 전문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누에나 거미와 비교해서 그렇지 시를 짓는 일, 나아가 산문을 쓰는 일을 포함한 모든 문학적 행위를 일종의 직조하는 행위와 비교한 건 드물지 않은 거 같다. 비슷하게 내가 잘 쓰는 표현으로는 벽돌 쌓는 일인데 이것도 직조술과 매우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시집에도 누에고치에 관한 시가 들어 있다.



  검은 점이 있는 누에



  잠실蠶室에서 가장 두려운 적은 파리다

  문을 단단히 닫으라던 어른들의 잔소리도

  행여 파리가 들어갈까 싶어서였다


  누에들이 뽕잎을 파도처럼

  솨아솨아 베어 먹고 잠이 든 사이

  파리가 등에 앉았다 날아가면

  그 자리에 검은 점이 찍히고,

  점이 점점 퍼져 몸이 썩기 시작한 누에는

  잠실 밖으로 던져지고 마는 것이다


  네 번의 잠을 채우지 못하고

  쫓겨난 누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허물어지는 몸을 이끌고 마른 흙에 뒹굴고 있던,

  끝내 섶에 올라 우화羽化도 못하고

  한 올의 명주실도 풀어낼 수 없게 된 그들이

  어린 내 눈에는 왜

  잠실의 누에들보다 더 오래 머물렀을까


  어느 날 내 등에도

  검은 점이 있다는 것을, 그 점지點指

  삶을 여기까지 끌고 오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낯선 골목에서 저녁을 맞고 있었다  (전문)



  시를 쓰는 일이 누에가 고치를 짓는 것과 같다면, 등에 파리똥이 찍혀 뽕잎을 파도처럼 솨아솨아 베어 먹을 뿐 고치를 만들지도 못하고 밖으로 버려진 누에들은, 자신이 교수로 있는 문예창작과 학생들 가운데 글 쓰는 일에 실패한 제자들일까? 스승 입장에서 그런 제자들이 더 마음에 짠할 수 있을 터이니. 세상을 사는 일이 다 그렇다. 전부 다 성공하면 그게 성공인가. 관건은 성공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온기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이걸 제일 잘 하는 시인이 나희덕이고.

 믿고 읽는 시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기의 여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7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손장순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보부아르야 워낙 널리 알려진 사람이니 새삼스레 소개를 할 필요는 없고, 그저 한 마디 하자면, 위명과는 별개로 나는 애초에 이이의 작품을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거. 그건 저 옛 시절, 경애하는 정여사께서, 나의 학창시절에 보부아르의 작품이 기대와 달리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제대로 심어주시어 이렇게 된 바이었다. 그러니 부모 노릇 제대로 하기도 참 힘들다. 뭐라 얘기를 못한다. 나중에 애가 크면 나처럼 세상에 다 일러바치거든. 하여튼 이렇게 살다가 내년에 보부아르의 <레 망다랭>을 읽기로 결심을 했고, 무려 두 권, 할인가 4만3천2백 원에 달하는 걸 덜컥 샀다가 읽기에 난감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싶어 스파링 삼아, 그렇다, 철학박사가 쓴 작품을 읽는 일이니 싸움 전에 연습해보는 스파링이란 단어도 어울리지 아니하는가, 읽어보게 되었다.
  그랬더니? 이 정도면 내년에 <레 망다랭>을 시도해도 좋을 듯하다. <위기의 여자>는 길이도 중편 정도의 분량이고, 내용도 바람피우는 남자와 함께 사는 중산층 아내의 일기라서 친숙하기도 하다. 아, ‘친숙’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오해하지 마시라. 우리 집안엔 바람피우는 남자들 없다. 초상이 나서 팔촌 형제들까지 싹 모였을 때 제일 큰 장형이 남자 형제들 불러놓고 한 마디 했다. 우리 집안 남자들은 술은 퍼마셔도 바람피우는 거 없다. 그러니 너희들도 그리 알아라. 맞다. 하다못해 집안의 따님들도 술 하나는 장하게 퍼마신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겨도 바람피우는 기계가 제대로 말을 듣나 말이지. 그래서 바람피운 남자 없다고 자랑스레 떠들고 다니는 거다. 별 거 없지?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이 책을 요약하면, 남편 모리스한테 여자가 생겼다는 거. 노엘리 게라르. 아름답고 총명하고 유혹적인 여자로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 이혼녀다. 남자의 자존심을 만족시켜주는 일종의 불장난의 대상으로 적당한 여자라는 것이 일기를 쓰는 주인공 ‘나’ 44세의 여성 모니크의 솔직한 심정. 남편이 고백을 하기를 노엘리를 만난 것이 5주 전이라고. 그러나 나중에 홧김에 털어놓기를 8년 전부터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기 시작해 몇 명의 여자를 거쳤단다. 모니크와 모리스는 경기도 광주 모毛씨 동성동본으로 독일 점령지에 저항군을 치료해주는 의료대원이었을 1944년 혼인을 해 스물두 해 동안 함께 살았으니 현재 시점은 1966년 정도 된다.
  1960년대 중반의 프랑스 파리는 1970년대 중반의 우리나라 수도 서울과 비슷해서, 모니크가 친구인 이사벨의 조언에 따라, 이사벨이 해준 조언이 상당히 수긍할 만하다고 확신해서 고른 ‘가장 적절한 대응방식’은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전제로, 모리스가 노엘리에게 곧 싫증을 낼 게 분명하니 모니크는 이해심이 있고 쾌활하게, 무엇보다 남편에게 친절한 태도로 기다리는 일이었다. 이사벨 자신도 남편이 다른 여자와 관계를 했을 때 같은 방법으로 남편의 마음을 돌아오게 했다지 않은가. 이야기를 듣고 모니크가 생각해보니 22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건 있을 법한 ‘정상적인 일’로 용납하지 못하면 자신이 비정상이고 심지어 유치한 여자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니크는 잠깐 잊었다. 노엘리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경력과 평판이 빵빵한 능력 있고 야심만만한 변호사로 자유분방한 성격에 사교를 즐기는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린 공격적 성격의 여성이라는 것을. 동시에 모여사가 ‘기다림’이란 작전을 펼친 것엔 자기 스스로도 한 시절 킬랑이란 이름의 남자와 잠깐 바람을 피워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자신이 평생 딱 한 번의 순간적인 불장난에 회의를 느껴 곧바로 가정으로 돌아간 경험이 있으니 모리스도 마찬가지일 것이란 희망사항도 조금은 작동을 했을 터이니.
  모니크와 노엘리. 어쩔 수 없이 두 여자의 차이점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결혼 22년차 전업주부 모니크는 남편 모리스와 함께 의학을 공부하다 결혼과 함께 학업을 중단했다. 아이 둘을 낳아 나름대로 전력을 다해 키워, 큰 아이 콜레트는 결혼해 파리에서 역시 전업주부로 살고 있으며, 둘째 뤼시엔은 미국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다. 남편 모리스는 시시때때로, 나중에 알고 보면 결혼생활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아내에게 직장을 얻거나 비슷한 경제활동을 해보라고 권유했지만 별 낌새를 채지 못한 모니크는 번번히 제안을 거절해버리고 말았다. 결과, 모니크는 모리스 없이 살 수 없다는 강박에 싸이게 되는데, 아내는 이 강박의 가장 밑 부분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반면 노엘리는 언제나 당당하다. 모르긴 해도 모리스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 그래서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며 거기에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모리스에게 당당하게 아내 모니크보다 더 많은 지분을 자신에게 쏟을 것을 요구한다.
  거의 모든 문제는 권력이다. 남편을 사랑해서 학력과 경력과 재력을 모두 포기하고 남편에게 종속된 22년을 보낸 모니크. 남편 따위는 걷어차 버리고 딸 하나를 키우면서 마음대로 애인을 집에 끌어들이며 조금씩 가정 밖으로 몰아내 자신 가까이로 오게 만드는 노엘리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권력이다. 권력은 경제력을 포함한 모든 능력의 총합이다. 아내 모니크가 남편에게 바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남편이 자신을 비참하게 버렸다, 날 희생시켰다고 주장하는 것? 둘째 딸 뤼시엔은 엄마한테 이렇게 말한다.
  “그야 물론 엄마에겐 가혹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 자신을 희생시켜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나 같으면 누구를 위해서도 나 자신을 희생시키지 않으리라는 건 확실해요.”
  정확하게 1960년대 소설. 굳이 2020년대에 다시 찾아 읽어볼 필요까지는 없을 듯.
  나는 여성주의 소설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건 확실히 아니었고, 실존주의 소설이라고 주장하면 반대하지는 않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 다시 읽고 싶은 명작 2
엔도 슈사쿠 지음, 김윤성 옮김 / 바오로딸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마쓰히데의 반란으로 사망하자 곧바로 배신자 마쓰히데를 제거하고 권력을 손에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에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패권을 쥐고 수도를 에도로 옮겨 260여 년에 걸친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한술 더 떠 자신의 생명이 다하기 불과 2년 전엔 1614년 모든 가톨릭 성직자들을 해외로 추방하고 포르투갈과의 모든 교역도 중단시켜버린다. 그러나 전 지구에 복된 말씀을 퍼뜨리는 것을 사명으로 했던 이들은 그 후에도 37명이 비밀리에 일본 열도에 남아 계속 선교활동에 힘을 쓰는데, 이 가운데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된 페레이라 신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페레이라 신부는 일본의 관구장, 성직자와 신자들을 통솔하는 고위 성직자로 일찍이 포르투갈에서도 신학적 재능과 용기를 인정받고 있던 사제. 그런데 포르투갈의 아시아 식민지 마카오로부터 접수한 소식에 의하면, 1633년에 일본 정부에 발각이 되어 ‘구덩이 속에 달아매는’ 고문을 받고 배교背敎,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을 선언했다는 거였다.
  일찍이 고결한 페레이라 신부의 가르침을 받은 바 있는 세 명의 제자인 프란치스코 가르페, 호안테, 그리고 작품의 주인공인 세바스티안 로드리고 신부는 바티칸에서 출발한 신부들과 별개로, 페레이라의 배교로 인해 추락한 교회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토록 강건한 페레이라가 배교를 한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터이니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알아내기 위하여 일본으로 떠나기로 결정한다. 이때가 1637년. 그러나 일본에서는 1년 전인 1636년 1월에 가톨릭교도들이 시마바라에서 궐기를 했다가 무려 3만5천 명의 신자 전원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져 가톨릭교도나 성직자들의 처지가 매우 난처한 지경에 빠진 상태였다. 심지어 일본 땅에는 바티칸,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파견한 가톨릭 신부는 한 명도 없다고 여기기도 했을 정도. 세 명의 신부는 드디어 1638년 3월 25일에 인도함대 산타 이사벨 호를 타고 출항을 해, 7월 25일에 희망봉을 거치고, 10월 9일에 포르투갈령 인도의 고아를 거쳐, 다음 해 5월 1일에 포르투갈령 마카오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다시 중국 선원들과 선장을 고용해 어선으로 위장한 배를 타고 일본 땅에 발을 딛는데, 일행 중엔 마카오에서 만난 일본인 배교자 기치지로라는 중요한 등장인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에 도착한 신부는 두 명. 호안테 신부는 말라리아에 걸려 마카오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구덩이 속에 달아매는’ 고문이 무엇인지 보자. 일본에서만 행해졌던 특유의 고문방식인 걸로 알고 있다. 말 그대로 구덩이를 파고 안에 인분이나 가축의 배설물을 낀 후 그 위에다 사람을 거적에 둘둘 말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 거꾸로 매단다. 머리에 오물에 닿는 건 아니다. 악취만 날 뿐.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놓으면 피가 머리로 쏠려 뇌압이 상승해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만다. 그래 귀 뒤쪽에 조그만 상처를 내서 소량의 혈액이 양쪽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몸 밖으로 나가 압력을 줄여주면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며칠 동안 죽지 않을 수 있는데, 이건 자비가 아니다. 말 그대로 고문이다. 극도의 고통, 아픔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끔찍한 ‘어려움’의 시간을 보내면서 서서히 죽어간다.
  천주교를 믿다가 발각이 되어 처형을 하는 방법도 일본은 참 독창적이다. 물론 단 칼에 목을 베어 죽이는 참형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순간적인 죽음이라는 은혜를 예수귀신을 믿는 독종들에게 베풀어본들 신자들의 믿음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걸 알고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카, 우리식 발음으로 소서행장小西行長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천주교에 귀의한 쥴리아도 이런 방식으로 사형에 처해졌는데(소서행장 자신이 천주교인이기도 했다.), 바닷가에 말뚝을 박고 거기에 몸을 꽁꽁 묶는다. 이 책에서 보니까 옷을 모두 벗기는 모양이다. 하여튼 그렇게 묶어놓고 그냥 내버려둔다. 밀물이 밀려올 때 수위가 목 부근에 도달할 정도의 높이로 조절하고. 그러면 하루 이틀 안에 죽지 않는다. 낮엔 무자비한 태양빛에 화상을 입고 밤엔 소금물에 절여지는 상태가 며칠 지속하면서 역시 ‘아픔’이 아니라 극도의 ‘어려움’을 견디며 죽음을 소망해야 한다.
  기독교가 생겨서 로마에 터를 잡은 이래 기독교도들과 성직자들은 종교적 박해가 있을 때마다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다. 이들이 순교하는 장면은 헨릭 시엔키에비치가 쓴 <쿠오바디스>에 잘 묘사가 되어 있다. <쿠오바디스>의 마지막 무렵에 사도 베드로는 환란을 피해 로마를 빠져나와 캄파니아 평원에서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향하는 그리스도를 본다. 그리하여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물었다가 베드로가 로마에서 도망하니 내가 한 번 더 십자가에 매달리려 간다는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가 바티칸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 베드로가 이를테면 초대 교황 아닌가? 그러면, 줄곧 의심이 들었던 것인데, 어떻게 해서라도 기독교의 맥을 잇기 위해 노력을 해야지, 그저 순교의 길을 택하는 것이 조금 마땅하지 못했다. 일단 살아야 다음을 도모하는 것이지 죽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일. 그리하여 기독교의 순교 역시 죽음 말고는 다른 아무 방법이 없다는 확신이 들어 마지막 방편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때,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때 해야지, 무조건 목숨을 포기한다고 다는 아닌 거 같다.
  일본에서는 기독교인들을 구별하기 위해 나무판에 동판으로 새긴 그리스도나 성모의 그림을 박아 넣고, 사람들에게 발로 밟으라고 시켰다고 한다. 누군지도 모르고 밟는 자들은 그냥 백성이고, 죽으면 죽었지 못 밟겠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틀림없이 기독교인이란다. 이걸 성화판聖畵版이라 했고, 밟는 행위를 답회踏繪, ‘그림을 밟음’이라 했단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림을 밟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고 위협하는데, 당신 같으면 밟겠는가, 안 밟겠는가. 난 종교가 없어서 그런지 밟아야 할 거 같다. 내 아이들이 망설이다가 곤란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면, 나는 주저 없이, 밟으라는 신호를 보낼 거 같다. 내 자식이 죽는다는데 그럼 죽어라, 하는 것이 옳은가.
  책의 서문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서슴지 않고 말하겠다.
  당신이 가톨릭 신부라고 가정하자. 그런데 신자 다섯 명을 ‘구덩이 속에 달아매는’ 고문에 처하고 하루 밤을 꼬박 새운 다음, 이제 언제 죽을지 촉박한 시간을 다투고 있는데, 일본의 관헌이 당신에게 배교하라고, 그리스도의 얼굴을 밟으라, 그냥 시늉으로 발바닥만 한 번 댔다가 떼기만 하면 당신은 물론이고 다섯 명의 신자도 살려주겠다고 할 경우, 어떻게 하겠는가. 다섯 명을 죽이고, 아니, 순교시키고 자신의 종교를 지키겠는가? 그러면 다시 다섯, 또는 여섯 명을 같은 고문에 처할 것이 틀림없는데도? 좋다. 당신은 그렇다 치고, 만일 당신의 자리에 그리스도가 섰다면, 자신의 얼굴을 밟으라고 했을까, 아니면 너도 함께 순교하라고 했을까.
  이 책을 쓴 이가 엔도 슈사쿠다. 내가 읽어본 것 가운데 직접 기독교와 순교에 대하여 쓴 첫 작품이다. 이이가 던지는 질문은 대단히 무겁다. 자신을 은전 30냥에 팔아먹은 유다를 예수가 용서를 했을까, 아니면 너는 네 길을 가라, 라고 하며 화를 냈을까. 슈사쿠는 결론을 지어준다. 당연히 여기서 그걸 밝힐 수는 없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1-03-26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야지 했던 책인데 잊고 있었어요. 제가 알고 있는 책이랑 역자도 다르고 더 최근에 번역된 거네요. 이걸로 읽어야겠어요.

Falstaff 2021-03-26 09:06   좋아요 3 | URL
이거 초판은 상당히 오래된 겁니다. 전 출판사가 가톨릭 기관이라 작품하고 더 어울릴 거 같아서 골랐답니다.

잠자냥 2021-03-26 0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걸로 읽으셨구나. 전 엔도 작품 중에 이 <침묵>은 왠지 아끼느라(?) 아직 안 읽었습니다! 폴스타프 님이 별 다섯 개 주신 걸 보니 아낀 제가 자랑스럽군요...(응?ㅋㅋㅋㅋㅋㅋㅋ)
ㅎㅎ 조만간 읽어야겠습니다!

Falstaff 2021-03-26 10:03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근데요, 이 책은 신자들이 읽으면 더 좋을 거 같더라고요.

coolcat329 2021-03-26 10:11   좋아요 2 | URL
아, 저도 아끼다가 그만 잊어버리고 ㅋㅋ 너무 아꼈나봅니다.

mini74 2021-03-26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이 궁금해서 꼭 읽어야 될 것 같은데. 다들 왜 이리 이 책을 아끼고 계셨는지 갑자기 궁금증이 ㅎㅎㅎㅎ

Falstaff 2021-03-26 21:57   좋아요 1 | URL
ㅋㅋㅋ 말씀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슈사쿠가 그만큼 괜찮은 작가 아닙니까. ^^

잠자냥 2021-03-26 22:00   좋아요 1 | URL
엔도 슈사쿠는 비종교인인 데다가 어떤 면에서는 종교(특히 기독교)를 싫어하는 제가 읽어도 엄청난 감동을 느끼게 되는 엄청난 작품이 많습니다(물론 엔도 슈사쿠는 가톨릭 신자입니다만). <깊은 강> 혹시 안 읽어 보셨다면 한번 읽어보세요... 암튼 엔도의 국내 번역작은 거의 다 읽었는데요, 이 작품은 대표작이기도 하고 해서 다 읽고 나면 너무 아까울 거 같아 아끼는 중입니다. ㅎㅎㅎ
 
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지음, 승주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저 거대한 철의 장막 속에서 이렇게 발랄한 여성 주인공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할 수 있다니,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1937년생 작가라면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절에 젊은 시절을 보냈을 텐데 그 젊음의 감각을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자본주의 유입, 그리고 연방 해체 시절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위와 같은 오해는 작가의 연령대가 내 작은 고모들이나 이모 또래라서, 페레스트로이카라고 해봤자 1980년대 중반에 있던 일, 토카레바의 50대 초반에 불과해서 작가적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 올린 시기라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었다. 내 고모나 이모들의 50대엔 이미 변할 수 없는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이 가득 차 있었다고 참으로 시건방지게 단정하고 있었으니 말이지. 고모님들, 이모님, 미안해.


  어린 토카레바는 또래에서 두각을 낼 정도의 재주가 있었던 듯하다. 근데 그 재주라는 것이 레닌그라드의 초중등학교에서나 빛을 발하는 수준이었다. 공부를 잘했으나 원래 희망이었던 의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에 진학할 수준까지는 안 되고, 두 번째로 선택한 림스키코르사코프 페테르부르크 음악학교에서 4년 동안이나 공부한 피아노 연주자의 길로도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토카레바는 결국 호구지책으로 모스크바 변두리 학교의 음악 교사를 했다. 근데 이것도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여겨 또다시, 이때가 1963년인데, 주립 영화 연구소에 들어가 배우가 되려 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토카레바는 배우가 아니라 시나리오 등의 작가가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 표제작 <티끌 같은 나>에서 영화 평론가이자 영화사 에디터인 키라 세르게예브나라는 인물을 자연스럽게 그려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토카레바는 열두 살 때 체호프의 <로스차일드의 바이올린>을 읽고 문학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체호프와 연결이 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유>에서 심혈관전문의 안나의 할아버지가 많고 많은 문인 가운데 체호프와 아는 사이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나는 어째 체호프보다 푸시킨을 인용한 것이 더 눈에 들어왔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체호프와 아는 사이인 안나의 할아버지’를 낳은 증조할머니가 명문가 자매와 찍은 사진이 있었고, 자매의 이름은 체호프 말고 푸시킨의 <예프게니 오네긴>에 나오는 자매, 올가와 타티아나이다.
  <티끌 같은 나>에서 주인공 안젤라에게 실연당한 백만장자 니콜라이는 자기를 버린 애인을 강제로 정신병원에 집어넣는다면 안젤라가 병원의 침대에 앉아서 카드를 펼쳐놓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3 · 7 · 에이스 카드, 3 · 7 · 에이스 카드……”라고 중얼거릴 거라고 상상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것 역시 푸시킨의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주인공 헤르만Germann이 백작 부인에게 얻어낸 마법의 수자들이다. 젊은 나이에 회고록을 쓰기 시작하는 인노겐치라는 남자도 있다. 마르트노프카 마을에서 모스크바로 무작정 상경한 안젤라를 먹여주고 재워주는 키라 세르게예브나의 남편이며 전직 브레즈네프의 연설문 담당비서. 브레즈네프가 죽은 다음에 당연히 실업자 신세로 전락해, 이젠 시간이 남아돌아 회고록을 쓰는데 이이의 롤 모델이 피멘, 역시 푸시킨의 <보리스 고두노프> 등장인물이다. 다만 피멘과 달리 회고록을 쓰지 않는 시간에 기도하는 대신 장을 보고 식사 후에 설거지를 할 뿐.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역자 승주연은 체호프 인용문은 주석을 달아 어느 작품의 어떤 등장인물에서 차용했음을 밝히는 반면, 푸시킨 인용에 관해서는 피멘의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침묵으로 일관한다. 하긴 푸시킨의 예들은 우리나라의 경우 “사뿐히 즈려밟고”나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같은 일상용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을 정도니까.


  빅토리아 토카레바. 이이의 작품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쿨하다.
  뛰어난 사람을 주인공으로 발탁하지 않는다. 전부 여자다. 그리고 인생이 늘 그렇듯이 토카레바의 작품들 역시 모두 희비극이다.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슬프고, 니콜라이 레스코프 말대로 소금물로 세수를 할지언정 툭툭 던지는 촌철의 삶의 유머가 있다. 이제 더 이상 러시아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황량한 벌판도 아니고, 비밀경찰의 손에 언제 끌려갈지 몰라 넥타이까지 다 한 채로 잠을 자던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절도 아니다. 그리하여 토카레바의 작품에서는 예전의 러시아 문학을 통해 학습했던 안나 공작부인과 라스콜니코프를 찾을 수 없다. 시베리아 유형지도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새롭게 메우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단어, 자본주의. 그리고 자유.
  아직 토카레바의 자본주의와 자유는 조금 덜 익었다. 새롭게 러시아의 카지노 허브가 될 카자흐 마을 마르트노프카에서 중증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한때는 교직에 있었으나 역시 알코올 중독에 발목을 잡혀 지금은 소 치는 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의, 흰 피부, 파란 눈동자의 동네 명가수, <티끌 같은 나> 속 우리의 주인공 안젤라는 모스크바로 가겠다고 선언을 해버린다. 이를테면 무작정 상경.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영화비평가 키라 세르게예브나의 집에서 묵는 대신 집안일을 깔끔하게 처리해주는 안젤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무척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인 몸을 이용해 흔히 하는 말로 팔자를 고쳤지만, 순식간에 휘리릭,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이야기. 그래서 다시 처음 시작했던 지점으로 가야 했으나, 자신이 품고 있던 마음속 킬리만자로의 눈을 향해 두려움 없이 새 발자국을 찍는다.
  표제작을 예로 들자. 위가 아주 간략하게 쓴 작품의 내용이다. 얼핏 보면 시어도어 드라이저가 쓴 <시스터 캐리>와 유사한 분위기일 수 있지만, 드라이저처럼 무게도 잡지 않고 무겁지도 않고, 더구나 비극도 아니다. 이미 읽어보신 분들이 동의할지 모르겠으나, 안젤라가 모스크바에 도착해 맞부딪힐 수밖에 없는 천민자본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돈을 매개로, 돈을 위하여 굴러가고 안젤라 역시 자신의 꿈을 단지 시작해보기 위해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90세 먹은 노인의 간병인, 신흥갑부 저택의 입주 가정부 등을 전전한다. 자신의 노래를 받고 녹음하기 위한 돈 5천 달러를 모으기 위해. 그러다가 안젤라에게 5천 달러를 건네주고 접촉 없이 그녀의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숙면에 빠지는 억만장자 니콜라이의 정부가 되고, 영화에 잠깐 출연을 하면서 감독을 사랑하게 된다. 안젤라는 늙은 니콜라이와 몇 백만 달러를 버리고 못생겼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사브라스킨 감독에게 갔다가 가진 돈을 몽땅 사기당하는 이야기.
  이 주제로 에밀 졸라나 시어도어 드라이저, 프랭크 노리스가 소설을 썼으면 적어도 6백 쪽 분량에다가 두 명은 죽어 자빠지고, 네댓 명은 교도소에 가야 끝을 본다. 토카레바와 같은 세대의 우리나라 작가가 썼다면 안젤라는 거부 니콜라이의 아이를 낳고 사정상 몸을 피해 갖은 고생을 하며 아이를 홀로 키우지만 결국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 다시 니콜라이 앞에 나타나 아이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미워도 다시 한 번.” 그러나 토카레바는 시종 경쾌하다. 물론 갖가지 난관에 처한 안젤라의 상황이 경쾌할 리가 있겠는가. 당하는 일마다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고, 어렵고,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안젤라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여튼 벽을 깨보고자 한다. 어떠한 방법이든지 간에. 그의 멘토라고 할 수도 있는 키라 세르게예브나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안젤라는 쿨하다. 평생 자신의 복지를 약속할 수 있는 니콜라이의 아이를 임신하고도 곧바로 낙태 수술을 받는 건 물론이고, 적어도 몇 백만 달러를 더 얻을 수 있음에도 니콜라이와의 결별을 선택한다. 그러니까 쉬운 얘기로, 토카레바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안젤라는 당시의 젊고 예쁜 여자들과 다르다. 토카레바의 어법 역시 여태까지의 작가들과 다르다. 아주 독특하게 시크하고 쿨한 발언만으로도 이이의 다른 책을 찾아볼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나는 토카레바가 만든 등장인물들이 기존 내가 알던 주인공들과 다른 점, 다른 행동 방식이 마음에 딱 들었다. <이유> 역시 빼어난 작품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이유>의 주인공 마리나의 좀 구태한 사랑이 표제작의 안젤라에 비해 덜 좋았다. 중편 셋, 단편 둘이 실려 있는데 어느 한 작품 처지는 것이 없다. 당신의 지갑을 여는데 머뭇거리지 마시라.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03-25 09: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도서관 찜바구니에 있는데 그냥 구매해야겠네요! 푸시킨 인용한걸 그렇게 파악하시다니 팔스타프님의 독서수준이 새삼 또 부럽습니다! 레스코프 ..촌철의 삶의 유머~빨리 보고 싶어요.🥲
러시아 작가들은 알면 알수록 대단들 한것 같습니다.

Falstaff 2021-03-25 09:52   좋아요 4 | URL
옙. 이런 책은 책장에 꽂혀 있는 게 좋습니다!
ㅋㅋㅋ 책만 좋으면 영업은 독자들이 알아서 해준다니까요!

잠자냥 2021-03-25 09: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작가 표현력이나 문장도 참 좋더라고요. 비록 러시아말 모르지만 ㅋㅋㅋ
아무튼 러시아는 정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빼어난 작가가 많은 것인지,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책만 좋으면 영업은 독자들이 알아서 ㅎㅎㅎㅎ 이 책이야말로 알라딘 독자들이 판매에 크게 일조한 책 같습니다.

Falstaff 2021-03-25 10:03   좋아요 5 | URL
옙. 문장이 반은 먹고 들어갔습니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러시아 작품 가운데 이런 글은 읽어보지 못했습지요. 읽으면서 자꾸 웃음이 ㅋㅋㅋㅋ
역자가 적절하게 우리말로 바꾸지 않았나 싶어요. 다른 책을 더 읽어봐야겠지만 말입니다.
관계자가 그러는데요, 현대문학단편선을 통해 토카레바를 만나고 싶으면 될 수 있는대로 많은 독자들이 현대문학 홈피나 SNS에서 단편선 내달라고 조르는 게 제일 좋다고 하더군요.
관계자가 누군지는 비밀입니다. ㅋㅋㅋㅋ 진짜 관계자인 건 맞습니다.

- 2021-03-25 13:40   좋아요 2 | URL
앍 ㅋㅋ 반가워서 들어왔더니, 여기서 또 잠자냥님 만나네? 관계자님이 잠자냥님 아녜요? ㅋㅋㅋㅋ 암튼 토카레바 짱짱!

Falstaff 2021-03-25 13:52   좋아요 2 | URL
아이고, 관계자는.... 입이 근질근질한데, 그 양반이 드러나면 좋을 게 없어서 밝힐 수 없고요, 아마 이 댓글도 보았을 텐데, 알라딘 북플에 자주 모습을 보이는 분은 절대, 절대 아닙니다. ㅋㅋㅋ 궁금하셔도 참아주셔요.

잠자냥 2021-03-25 14:22   좋아요 4 | URL
힛- 공쟝쟝 님, 저 관계자 맞아요. 전 사실 토카레바 비서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2021-03-25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1-03-25 15:05   좋아요 2 | URL
우아 비밀글로 달았는데 보여요?! 우아 나 초능력 생긴 거니???!!!!!

coolcat329 2021-03-25 11: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만간 구매할거 같습니다. 그동안 잘 참았는데...

Falstaff 2021-03-25 11:44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 그게 참는다고 참아지는 거면 저도 벌써 사람 됐게요?

잠자냥 2021-03-25 14:23   좋아요 3 | URL
아니 이걸 참았다니!!!!! 그동안 알라딘에서 토카레바 융단폭격이 굉장했던 것으로 아는데!!!

coolcat329 2021-03-25 14:33   좋아요 2 | URL
🤣🤣🤣네 진짜 꾹꾹 참았는데요...위에 두분 댓글 대화읽고 무너졌네요...🥺

새파랑 2021-03-25 11: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한마디로 정의해서 쿨하다는데 동의합니다^^(레스코프는 완전 쏘쿨이었고 ㅋ) 재미있게 읽었던 책의 리뷰를 보는건 정말 기분 좋네요^^

Falstaff 2021-03-25 12:18   좋아요 4 | URL
동의하신다니 어깨가 으쓱으쓱 거립니다! 제가 이렇게 잘난 척하는 맛으로 삽니다! ㅋㅋㅋ

- 2021-03-25 13: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 폴스타프님이 정리해주신 토카레바 일대기 읽는 데(대체 이런건 어떻게 아시는 거죠?), 그래서 그 생기있는 넘 매력터지는 여자들이 그냥 나온 여자들이 아니었구나!! 싶으면서 또 이 책이 다시한번 더 좋아집니다!! 감사해요~

Falstaff 2021-03-25 13:50   좋아요 4 | URL
ㅋㅋㅋ 저자 관련 자료는 대개 구글 검색해보고요, 홈피 있으면 거기도 가봅니다.
그죠, 이 책의 등장인물들 정말 깹니다. ㅎㅎ

- 2021-03-25 13:55   좋아요 3 | URL
구글링을 한 것을 글로 남겨쥬시는 폴스타프님의 수고로움에 제가 무임승차 했군요ㅎㅎ 종종 부탁드릴게요 ㅋㅋ

붕붕툐툐 2021-03-25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다는 리뷰를 북플에서 무수히 많이 본 거 같습니다. 이 리뷰까지 좋다니, 전 책먼저 읽고 폴스타프님 리뷰 읽을 겁니다~ㅎㅎㅎ

Falstaff 2021-03-26 08:5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재미나게 읽으셔요!!
 
떠돌이 개 두 마리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5
멍징후이 지음, 장희재 옮김 / 연극과인간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년 전에 멍징후이의 <워 아이 XXX>를 읽은 적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극작가 백철이 1933년에 <수도를 걷는 무리>라는 제목의 슈프레히코어 희곡을 쓴 적이 있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불과 3년 전에 멍징후이의 1990년대 작품인 <나는 사랑한다, 차차차 : 워 아이 XXX>를 통해 슈프레히코어를 처음 경험하게 된다. 3년 전 당시 우리 현대 희곡작품을 별로 읽어보지 못한 주제에 중국의 현대 희곡 작품을 읽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 이후 나름대로 우리 희곡을 찾아 읽어보긴 했지만 그리 많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아쉽다. 출판계에서도 우리 문학이라고 하면 주로 소설과 시에 집중을 해, 뛰어난 감정의 전달방법인 드라마와 평론 분야는 상대적으로 읽을 기회가 없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독자 역시 좀 더 분발해 좋은 희곡을 발굴하는데 일조해야 할 터이다.
  <떠돌이 개 두 마리>는 2007년 작품이니 그의 나이 43세 때, 멍징후이의 중기작품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책 뒤의 역자 해설을 보면, 멍징후이는 중국의 선봉연극先鋒演劇, 연극부분의 선봉, 최첨단, 즉 아방가르드avant-garde, 1990년대 전위극의 대표 격이라고 한다. 그는 그러나 전위는 전위인데 그동안 숱하게 (공연과 전시를 통해)보아왔고, (연주 등으로) 들어온 서구적 전위와는 달리 시장성도 확보했단다. 역자 장희재는 이를 통해 멍징후이가 “침묵에 대한 저항과 연극 시장 형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연출가”라고 정의했다.
  아방가르드가 중국의 당시 모습에 대하여 발언을 시작했다는 건 일면 당연하다고 할 터인데, 전위 연극이 연극 시장을 형성했다는 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건 그동안 우리가 접할 수 있었던 주지적 아방가르드, 망치를 들고 무대에 올라 피아노를 때려 부수거나, 피아노 앞에서 몇 분 몇 초 동안 가만히 앉아 객석에서 들려오는 소음에만 집중하거나, 완전한 나신으로 등장해 연주하기 위하여 관객을 향해 가랑이를 벌릴 수밖에 없는 첼로를 켜는 아방가르드에만 익숙해, 그래서 전위라고 하면 일단 특별한 수업을 받은 전문가가 아니라면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행위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희재는 해설에서 아방가르드의 특징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저항을 위한 발언과 (서구와 달리 시장을 확장한) 전위성. 사실 3년 전에 읽은 작품 <워 아이 XXX : 나는 사랑한다, 차차차>에서 사용한 기법 슈프레히코어 역시 전위적 방식이다. 내가 읽어본 작품에 한하여 말하자면 위에서 이야기한 백철의 <수도를 걷는 무리>와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의 <직조공> 중 한 장면도 그러하다. 군중의 외침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법. 야나체크가 오페라에서 적용했던 샤우팅shouting 발성법과 유사하지만 더욱 노골적으로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다. 그러나 백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럴 거 같은데, 슈프레히코어로 적어도 시장 확장을 도모하긴 무리 아닐까 싶다. 멍징후이는 <워 아이 XXX : 나는 사랑한다, 차차차>를 쓴 이후 일본 연극계를 둘러보고 중국의 연극판도 양적으로 더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리하여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 관객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희곡과 연극을 만들기 시작해, 중기 작품 <떠돌이 개 두 마리>를 쓴다.


  말 그대로다. 등장인물은 개 역할을 하는 배우 두 명. 아우 격인 리치. 돈이 많을 거 같지만 어딜, 반어법이다. 형은 아주 긴 이름을 가지고 있다. ‘럭드리·쿠드리히·알렉세이·막시모비치·페슈코프·탐·메키’ 어디서 들은 이름하고 비슷하지? 김수한무삼천갑자동박삭거북이와두루미... 그래 형은 이름의 첫 자 ‘럭’과 마지막 자 ‘키’만 따서 ‘럭키’라고 부른다. 아참. 다시 분명히 하자. 이들 둘은 ‘진짜’ 개다. 청년 개니까 설마 이들보고 개새끼라고는 안 하시겠지? 개는 갠데, 책에 실린 공연 사진 보니까 바지 입고, 때는 묻었지만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했다. 이런 차림으로 이제 입신양명을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두 개. 시골을 떠나 도회지로 옮긴다는 건 현대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급속한 현대화의 와류, 소용돌이 속으로 자진해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 앞에는 다양한 도시의 모습이 등장하게 되는데, 길거리 쇼단의 일원이었다가 부유한 인간에 입양되기도 하고, 감옥에 들어가 지옥 경험을 하고, 웃기게도 오디션 프로에 참가했다가 미역국도 먹고, 이것저것 다 버리고 귀향을 결심했지만 그래도 도시가 좋아 멍멍 짖는 특기로 경비원 생활도 했으며, 강도질도 하더니 결국 도시엔 적응을 하지 못한다는 줄거리.
  이 연극 속에는 관객이 보고 배울 캐릭터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멍징후이가 주장하는 선봉연극, 아방가르드, 현 사회의 모순에 대한 발언을 서슴지 않기 위하여 모순의 부근에 있는 인물들을 강하게 풍자해야 했으니. 뭐 그렇다고 전부 죽일 놈들만 나오는 것도 아니다.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좀스런 비리 유발자 정도들이다. 읽는 도중 내내 궁금했던 것이 아무리 현대화 되었다고 해도 시진핑 정부 하에서 이런 내용의 공연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 중국은 여전히 공산주의 국가라서 어린 시절부터 교육기관을 통해 중국공산당과 중국 자체에 대한 약하지 않은 정도의 사상 교육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반 시민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극장에 들어와 연극을 보고 즐긴다 해도, 문화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멍징후이를 내버려 두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이의 작품을 가지고 쉽게 장기공연을 하지는 못 했을 거 같다.
  안 읽어보실 거 알지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떠돌이 개 두 마리>는 아마 우리말로 공연하기가 극도로 어렵거나 가능하지 않을 듯하다. 만일 공연한다면 우리 식으로 완전하게 대사를 바꾸어야 할 테고, 그렇다고 해도 맛을 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가장 좋은 건 희곡을 감상하는 일일 터. 재미있는 작품이긴 하지만 전공자 말고 읽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