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다른 악마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에 대해 말을 더 보태면 입이 아플 정도로 잘 알려진 콜롬비아 작가. 그가 썼다면 이름값 딱 하나만 믿고 사서 읽어도 후회하는 일은 별로 없다. 물론 후회한 적도 있긴 하다. 그의 마지막 작품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이건 제목부터 참 불량했다. ‘내 추억’인지 ‘창녀들의 추억’인지도 모르겠고, ‘슬픈 창녀’인지 ‘슬픈 추억’인지도 헷갈렸는데, 책을 다 읽어도, 하긴 책을 읽은 게 15년도 넘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나, 하여튼 그랬다.
  그거 말고는 특별히 까탈을 잡을 수 없었다. 오늘 읽은 <사랑과 다른 악마들> 역시 같은 소감. 전형적인 마르케스. 물론 이렇게 말을 해도 된다면. 하긴 세상에 못할 말이 어디 있나.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 출신으로 무자비한 노예 매매업자, 냉혹한 군단장으로 이름을 높인 두에냐스 후작 1세의 유일한 후계자 이그나시오를 (후작 1세가 보기에)정신박약 증세가 있고, 글자도 해독하지 못하는 어리버리로 설정해놓고 집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여자 정신병원의 환자 둘세 올리비아와 눈이 맞아 둘세의 특기인 종이비행기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글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할 작가가 세상 천지에 마르케스 말고 또 있느냐 말이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후작 1세는 덜 떨어진 아들 이그나시오를 본국 명문가의 아름다운 여성 올라야 데 멘도사와 혼인을 하긴 하는데, 올라냐는 처녀성을 간직한 채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다시 혼자가 된 이그나시오는 천박한 메스티소 여자 베르나르다 카브레라와 결혼하게 만든다. 당시엔 유혹적이었던 베르나르다를 보고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이그나시오를 그녀가 거의 겁탈하다시피 해놓고, 어느 날 베르나르다의 아버지가 총을 가져와 이그나시오에게 건네주면서, “도련님 제게 이 총으로 죽을 즐거움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안 그러면 내가 도련님을 죽일 거 같아서 말입죠.” 한 마디 하는 바람에 얼른 혼례미사를 올리는 것도. 마르케스의 입담이 워낙 세계챔피언 수준이라 베르나르다를 어떻게 소개하느냐 하면,
  “베르나르다 카브레라는 그날 새벽 드라마틱한 설사약을 먹었다. 그녀는 매혹적이고 탐욕스럽고 수다스러우며, 능히 대대 병력을 만족시킬 만큼 굶주린 하복부를 지녔다. 집시 눈동자처럼 초롱초롱하던 눈동자는 흐리멍덩해지고, 총기도 사라지고, 피똥을 싸고 위산까지 게워냈다. 게다가 마스티프 종 사냥개들까지 기절초풍할 정도로 우렁차고 고약한 방귀를 뀌어 댔다.”
  하여튼 이렇게 카살두에로 후작 2세이자 다리엔의 영주 이그나시오 데 알라로 이 두에냐스와 베르나르다 카브레라 사이에 칠삭둥이 외동딸이 태어나 열두 살이 된 해 사달이 벌어진다.


  책의 서문 격으로 쓴 걸 보면, 마르케스가 신문사 기자를 하던 1949년에 산타클라라 수녀원이 팔려 그 자리에 오성급 호텔을 건설하는 바람에 갑자기 하게 된 납골묘를 비우는 작업을 취재하다가 강렬한 구릿빛의 생생한 머리카락이 22미터 11센티에 달하는 소녀의 두개골을 발견했고, 비석엔 시에르바 마리아 데 토도스 로스 앙헬레스라고만 쓰여 있어 성family name을 알 수 없었는데, 이걸 보고는 할머니가 얘기해준 전설, 머리카락을 웨딩드레스처럼 땅바닥에 끌고 다니던 열두 살 먹은 후작의 딸이 개에 물려 광견병에 걸려 죽었다는 얘기가 떠올라 소설을 쓰게 됐다고 깔아둔다. 물론 구라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두피가 평생 9미터 42센티의 머리카락을 길러낼 수 있다고 한다. 머리카락이 길면 길수록 모발의 끄트머리까지 영양분을 공급하기가 어려워 9미터도 사실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구라를 치려면 적당히 한 11미터 정도로 해야 그래도 비슷해 보이는데 말이지. 22미터라니, 애초부터 지금부터 구라를 풀기로 작정했던 것.
  이 다음에 할 이야기는 시에르바 마리아 아가씨가 전설상 사인course of death인 광견병.
  우리나라에서는 광견병과 같은 말로 물을 무서워하는 병, 즉 공수병이라고도 한다. 네이버 검색해보면, 광견병의 증세로, 발병 후기에 불면증, 불안, 혼돈, 흥분, 부분적인 마비, 환청, 흥분, 타액·땀·눈물 등의 과다분비, 연하곤란, 물을 두려워하는 증세를 보이고, 이 정도로 진행하면 평균 4일 이내에 섬망, 경련, 혼미, 혼수에 이르며 호흡근 마비 또는 합병증으로 죽는다고 한다. 나 어렸을 적에도 동네에 가끔 벌건 눈에 침을 흘리며 유난히 사납게 구는 미친개가 횡행하고는 했는데, 그때도 광견병 또는 공수병은 대단히 무서운 병으로, 걸리면 미쳐서 죽는 줄 알았다. 근데 희한한 게 미친개는 있었지만 개한테 물려 진짜로 광견병에 걸린 사람은 못 봤다는 거.
  서양의 경우에 유일하게 본 건, 조라 닐 허스턴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에서 주인공 재니 크로포드의 세 번째 남편 티 케이크가 바로 이 광견병에 걸려 죽는다. 그런데 이 책의 경우 무대는 18세기 말 콜럼비아의 무역 항구도시 카르타헤나.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의 라틴 아메리카라면, 스페인 본국보다 오히려 더 교조화된 가톨릭이 유럽 이민자들과 반half 백인들을 지배하고 있어서, 여전히 종교재판과 고문, 심지어 화형까지 집행되곤 하던 시절이다. 중요한 조연 가운데 한 명인 토리비오 데 카세레스 이 비르투데스 주교는 장교 출신의 성직자로 엑소시즘을 사제의 중요한 과업 중 하나로 보는 인간이다. 동시에 광견병 후기에 나타나는 불면, 혼돈, 흥분, 섬망증 등을 사탄이 환자의 몸에 들어와 저지르는 사악한 행위로 간주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둥글다는 걸 증명했고, 스스로 라이프니츠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교의 땅은 미신이 지배하고 있던 것.
  라틴 아메리카에서 채굴한 은을 스페인으로 보내던 주요 항구 카르타헤나의 시장에 하녀 하나를 데리고 구경나온 시에르바 마리아의 왼쪽 복사뼈 부근을 표도 나지 않게 개가 물었다고 해서 대수롭게 여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당시에 길을 가다 주인 없는 개나 고양이에게 물리는 일이 수다했던 터. 그러나 이날, 문제의 회색빛 개에 물린 다른 세 명의 흑인 노예는 며칠 후 발작을 일으켜, 다른 사람들을 깨물어 바이러스를 옮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둥에 묶인 채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시에르바 마리아가 물린 곳엔 벌써 딱지가 앉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광견병의 잠복기가 때론 5년에 이를 때도 있어서, 카르타헤나의 숨겨진 박식한 명의 아브레눈시아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시에르바 마리아의 부모, 후작 2세와 베르나르다로 말할 거 같으면 애초에 개와 원숭이 사이였지만 엄마 베르나르다가 애인 후다스 이스카리오테, 성경에 나오는 발음대로 하자면 가롯 유다와 질펀한 혼외정사가 끝나는 때를 기점으로 서로 남은 감정이라고는 이제 증오밖에 없다. 원래 서방이 싫으면 애새끼도 싫은 법이라, 시에르바 마리아가 어렸을 적부터 베르나르다가 직접 딸을 돌본 적이 거의 없이 주로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노예들의 손에 의해 자랐다. 이 결과 시에르바 마리아는 스페인 출신의 백인들이 보기엔 악마나 구사할 수 있는 이교도의 언어를 서너 개 씩이나 능숙하게 말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자신을 장식하고 있는 것도 아프리카 토속 신앙의 토템을 상징하는 목걸이 같은 것이었으니 이거 작은 일이 아니었다.
  시에르바 마리아가 미친개에게 물렸다는 소문은 어느새 주교의 귀에 들어가고, 후작을 호출한 주교는 시에르바 마리아를 산타클라라 수녀원으로 보내 광견병을 치료하기 위한 엑소시즘을 시행할 것을 ‘명령’한다. 주교, 영어로 bishop. 이거 대단한 지위다. 신부는 father. 신부, 즉 아버지가 꼼짝도 못하고 계율에 의하여 순응해야 하는 의무를 진 사람이 주교 아닌가 말이지. 그래 가뜩이나 쫄보 성향이 농후한 이그나시오 어쩌구저쩌구 카살두에로 후작 2세는 자신이 사랑하는지도 몰랐던 딸 시에르바 마리아를 직접 이끌고 산타클라라 수녀원, 미신적 가톨릭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원장 수녀를 비롯한 불쌍한 영혼들이 득시글거리는 수녀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후작 2세는 몰랐다. 문이 닫히는 순간 다시는 자신의 딸을 못 보게 될지.


  재미있는 책. 그러나 아쉽게 지금은 품절이고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른다. 그래 나머지 이야기도 더 해주고 싶기도 하고, 나도 오랜만에 시간이 철철 남아 더 자유롭게 써내려가고도 싶지만 이 정도에서 참기로 했다. 과하면 부족함만 못한 것이라서. 기다리시라. 그랬다가 시중에 다시 깔리는 순간, 머뭇거리지 마시고 구해 읽으시라. 짧아서 한 나절이면 다 읽고 독후감도 쓴다. 별점 네 개? 마르케스라면 그래도 이것보다는 더 현란하고 더 재미있어야 할 거 같은 욕심이 들어서 말씀이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04-13 18: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광견병 걸린 사람 미드에선 봤어요. 실제론 어떨지 모르겠지만 미드에선 일단 개처럼 바뀌더라구요.😳 저는 <백년의 고독>부터 읽어봐야 겠네요.
이 책도 제목이 좀 중의적으로 보이는데용?

Falstaff 2021-04-13 19:33   좋아요 3 | URL
광견병의 말기에 잠깐 그런 증세가 있는 거 같더라고요. 섬망. 근데 또 ‘섬망‘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도스토옙스키잖아요. 그게 미드에서 나오는 과장 장면 같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ㅋㅋㅋ
당연히 백년고독 부터 읽으셔야지요.

mini74 2021-04-13 2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야기속에 또 이야기가 그것도 너무나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무슨 배추속처럼 담겨 있어서 ㅎㅎ이 책 끝이 너무 궁금해요 아. 저희 동네 도서관엔 없네요 ㅠㅠ

Falstaff 2021-04-14 08:44   좋아요 1 | URL
옙! 그 책 대빵 재밌습니다. 노인네들 연애하는 것도 그렇지만 역시 마르케스의 농담 하나가 절 까무러치게 했습지요.
라틴 아메리카를 호령하는 막강한 산적떼가 등장하는데 걔네들 두목 이름이 글쎄, 아이고 어머니, 폴란드에서 출생해 젊은 시절 배타고 세상을 누비기도 했던 스타 작가 조지프 콘래드 아니겠습니까. ㅋㅋㅋㅋㅋ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창비시선 359
김성규 지음 / 창비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77년생. 시집은 2013년 출간. 그의 나이 서른일곱 살 때. 당시 시인은 명지대 문창과를 나와 같은 학교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두 번째 시집을 냈다. 물론 일 년 후에 김구용 시문학상을 수상하고, 바로 이 시집으로 신동엽 문학상까지 넙죽 받으리라는 건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2014년 시인으로서는 큼직한 두 개의 상을 받은 이후 상의 무게감 때문일까 아직 후속 시집을 출간하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시집의 제일 뒤에 실린 「시인의 말」을 보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흙을 퍼먹는 기분이다. 나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 (중략) … 시간을 함부로 소모하고, 견딘다는 것. 몸이 아파 누워 있다. 창문을 열어보니 봄이 온 느낌이다.” 라고 쓰고 있어서 혹시 건강문제로 더 이상, 세 번째 시집을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었으면 좋겠다.
  김성규의 시를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자주 쓰는 말을 한 번 더 해야겠다.
  나는 시를 거의 모른다. 좀 읽기는 했지만 거의 교과서 수준의 시를 교과서 수준으로 이해하는 정도. 그리하여 앞으로 어떤 감상을 이야기하더라도 우리나라 국민 평균 수준 아마추어의 의견으로 이해해달라는 것. 불편한 말이 나와도 무슨 특별한 주관이 있어서 시와 시인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십사 하는 것이다.
  김성규의 시는 지금 크게 유행하고 있는 시의 파편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시인의 함의를 눈치는 챌 수 있는 시도 들어 있어 그나마 안심이 된다. 그래도 처음 실린 시를 읽자마자 평론가 조재룡이 쓴 해설 「영벌(永罰)받은 자의 노래」를 먼저 읽고 김승규의 시 독법에 대해 배워야 했다. 조재룡은 평론가 역시 문학인의 한 명으로 유려한 문장을 쓸 수 있다는 듯 문장 적 과시를 조금 한 후 이렇게 말한다.


  “김성규는 폭력적 현실에 굴복하거나, 대안을 찾아 삶의 피안을 기웃거리며 희망이라는 차가운 형이상학을 염원하는 대신, 재난의 한복판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뛰어들어, 세계의 적나라하고 추악한 양상들을 땀내 나는 언어로 기록해나가는, 한없이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한다.”  (p.121~122)


  좀 현란한 문장이다. 따온 문장과 해설의 제목 「영벌(永罰)받은 자의 노래」를 합해서 생각해보면, 시인 자신이 영벌, 사전적 의미로, “(기독교) 지옥에서 받는 영원한 벌” (표준국어대사전)을 받고 있는 자라서 그의 노래는 한없이 고통스러운데, 그게 적나라하고 추악한 양상들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하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읽어도 무리는 없겠다. 그러면 영원한 벌이 무엇일까. 뭐긴 뭔가. 시를 쓰는 일이지. 그럼 시를 안 쓰면 되는 거 아닌가? 그게 쉽나 어디. 시인이 시를 쓰지 않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니, 시인에겐 시를 쓰는 일이 끝나지도 않을 천형과 같은 영벌,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한 대가로 영원하게 받아야 하는 벌이라는 뜻이다.

 

  외모는 복스러운 순둥이 같이 보여도, 김성규의 시는 이래서 고통스럽다. 예컨대, 짧기도 하니 처음 실린 시 <적도로 가는 남과 여>를 읽어보자.


  지뢰밭 가운데서
  한 남자가 일직선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적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왜 적도로 가느냐고 묻자,
  전쟁이 끝나 우리가 만날 수 없을 때
  부서진 건물 사이를 지나
  너는 왼쪽으로 걸어
  나는 오른쪽으로 걸을게
  서로를 찾아 헤매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면
  적도를 향해 걸어가자


  지뢰밭 가운데서
  한 여자가 적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전문)



  앞에서 말했다. 이 시를 읽고 곧바로 해설로 가서 시 독법에 관해 배워야 했다고. 역시 평론가는 다르더라. 1연에서 일직선으로 남자는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건물 오른쪽으로 여자를 찾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어서, 이제 그는 적도를 향해 걸어가자고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여자는 벌써 적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니까 이미 건물 사이를 지나 왼쪽으로 걸어본 다음, 적도를 향해 떠난 후다. 그리하여 이들은 앞으로도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된다.
  평론가의 시 독법에 이렇게 한 번 놀란 이후, 난 예상외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후 실제로 몇 십 편의 시를, 마치 주관식 국어 시험을 치루는 기분으로 온갖 품사와 시제와 단어의 중의성과 수사법을 따져가며 읽게 됐고, 그리하여 곧바로 시를 읽는 행위가 얼마나 따분한 짓인지 확실하게 실감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독자지 평론가가 아니었다. 그렇게 읽는 건 평론가나 밥벌이로 하는 짓이지, 일반 독자인 나는 그저 시를 읽으면서 공감하고 좋다, 아니다, 덜 좋다, 덜 싫다, 이 정도의 평을 해도 충분한 일이다. 그러다가 시의 매력에 빠져 더 열심히 읽다보면 평론가 각하들의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게 되겠지.
  그러다가 이 시를 만난다.



  방언(方言)


  점자를 읽듯 장님이 칼을 만진다


  칼날에 피가 흐른다
  사람들이 소리 죽여 웃는다


  칼은 따뜻하다!
  자신이 새긴 글씨가 상처인 줄 모르고
  기뻐하는 장님을 보라


  쏟아지는 피를 손바닥으로 핥으며
  자신도 모르는 글씨를
  칼날에 새기고 있다


  몸에서 잉크가 떨어질 때까지
  더 빨리
  더 빨리
  마귀가 불러주는 주문을
  온몸으로 받아 적고 있다  (전문)



  ‘방언方言’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사투리를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에서 쓰는 말로 “신약 시대에, 성령에 힘입어 제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외국 말을 하여 이방인을 놀라게 한 말, 또는 황홀 상태에서 성령에 의하여 말해진다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말”이다. 시에서는 두 번째 뜻으로 제목을 정했을 것.
  대학에 입학해서 놀랐던 것 가운데 하나가, 학생식당 오전에 남녀 무리 넷이 앉아 자기들의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갑자기 웅얼웅얼 뭔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를 바치는 거였다. 처음엔 조용히 나지막하게, 그러다가 크레센도, 크레센도 에다니만도, 거의 광분상태. 모교는 특정 종교를 신봉하는 학교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매우 낯설었다. 뜨악한 느낌. 이걸 방언이라고 하는가보다, 본능적으로 알게 되더라.
  이 시에서 터진 방언은? 기독교 말고 적그리스도의 마귀가 불러주는 기도문. 장님이 자기 손이 예리하고 예리하며 예리한 칼날에 베어 자신의 피로 칼을 따뜻하게 덥혀주고 있는지도 모르고 마귀의 방언을 칼에 새기고 있는 행위. 그게 시인이, 정확하게 얘기해서 시인 김성규가 시를 쓰는 일이다. 이러니 김성규의 시를 읽고 고통스럽다할밖에. 시를 쓰는 행위를 읽었으니 다음엔 <시인>이 어떤 직업인이란 걸 넘겨다보자.



  죽은 물고기를 삼키는
  두루미
  목을 부르르 떤다


  부리에서 삐져나온
  푸른 낚싯줄
  흘러내리는 핏물


  목구멍에 걸린
  바늘을 토해내는
  날개를
  터는 소리


  한번 삼킨 것을
  토해내기 위해
  얇은 발자국 늪지에 남기며
  걸어가는 길


  살을 파고드는
  석양을 바라보며
  두루미가 운다  (전문)



  시가 되겠다 싶어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 삼켰더니, 아뿔싸, 낚시 미늘을 삼킨 물고기를 삼킨 것이었다. 그래 두루미라는 시인의 목에도 낚싯바늘이 걸려 토해내야 하긴 하겠는데 그게 나오진 않고 목구멍에서 피만 흐르고 있는 광경. 이 정도면 비참하다. 김성규가 몇 년이 흘러도 다음 시집을 내지 않고 있는 것이 시인의 몸 또는 마음의 병이 원인이 아니길 바라는 심정을 이젠 아시겠지? 이러니 평론가 조재룡이 시인을 “영벌 받은 자”라고 하고 시집을 “영벌 받은 자의 노래”라고 했던 것. 시인이여, 비노니, 제발 건강하라.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04-12 1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신없이 읽었네요. 학교때 시험으로 반감이 생긴 후로는 시는 굳이 해석을 찾아보지 않았는데 슬쩍 호기심이 고개를 듭니다. 이런 시라면 한 번쯤?하고요ㅋㅋㅋ

Falstaff 2021-04-12 10:12   좋아요 2 | URL
그래도 요즘 시는 어려워요. 너무 개별적이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추상화 구경하는 거 같아 예전 시를 주로 읽었는데, 난데없이(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번에 현대시 시집 여섯권을 덜컥 사놔서 지금 고민이 한 바가집니다. ㅜㅜ

청아 2021-04-12 10:14   좋아요 2 | URL
요즘 시는 미술사에서 그런 것처럼 자꾸만 파격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팔스타프님 후기 벌써 기대됩니다!ㅋㅋㅋㅋ

새파랑 2021-04-12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정말 강렬하네요. 시도 인상적이고~ 전 시적 감수성 부족(이과 출신...)으로 자주 읽지 않지만 이런식으로 접하니 좋네요.
폴스타프님의 독서 범위가 정말 굉장하다는 걸 느낍니다 ^^

Falstaff 2021-04-12 11:1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여기 이과 출신 많아요. 저도 미적분 하나는 귀신같이 풀 줄 압니다.
감수성 부족이 어딨어요, 걍 읽고 내 맘에 든다, 아니다만 있지요. ㅋㅋㅋ
저도 딱 그 수준입니다! ^^
 
무어의 마지막 한숨 -상 - 세계현대작가선 2
살만 루시디 지음, 오승아 옮김 / 문학세계사 / 199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 씨. 이거 절판?
마르케스의 백년고독하고 이 책하고 인기투표 시키면 어떻게 될까? 겁나 궁금할 정도.
진짜 20세기 후반의 이야기꾼!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4-11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1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1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자 김승욱은 단편집 《19호실로 가다: 레싱 단편소설선 1》은 1960년대 런던을 배경으로 쓴 작품들을 모은 것이라 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60년 전의 이야기들이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로써 예상 외로 잘 읽힌다.
  작가는 이란에서 영국인 부부의 큰딸로 태어나 영국령 로디지아, 현재의 짐바브웨로 건너가 배우고, 자퇴하고, 타이피스트로 취직하고, 남자를 만나고,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서른 살이 되어 영국에 정착해 작가로 이름을 내기 시작한다. 어려서부터 유색인종들의 나라에서 성장해 그런지 레싱은 모든 차별의 철폐를 주장하거나, 적어도 주장하는 이들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차별은 당연히 피부색, 젠더, 빈부, 성적 취향, 이데올로기 등을 포함한 것들이다. 시대는 1960년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초보적인 반 차별주의이긴 하지만.
  틀림없는 페미니즘 작품이다. 나는 제일 앞에 실린 <최종 후보 명단에서 하나 빼기>와 마지막 작품 <19호실로 가다>를 제일 재미있게 읽었다. 여기에서 ‘재미있다’는 말은 글을 따라가기가 쉽다거나 흥미롭다는 것도 물론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아서인데, <19호실…>이 더욱 그러했다. <최종 후보…>는 생각지도 않게, 주인공이 지질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결말이 인상 깊었고.


  <최종 후보에서 하나 빼기>에선 결혼 20년차에 들어선 중년 남자 그레이엄 스펜스와 무대 디자인 쪽에서 재능을 드러내고 있는 바버라 콜스가 등장인물이다. 스펜스의 결혼생활은 폭풍처럼 고통스럽고 비극적이어서 헤어짐과 배신, 달콤한 화해로 가득했다가 10년이 지나고서야 겉으로 보기에 정상처럼 보이는 생활이었다. 일찍이 두 권의 책을 출간한 소설가였으나, 두 번째 책은 제발 사람들이 읽지 않아주기를 바라는 심정이었고, 이후로 예술적 자질이 밑천을 드러내 지금은 라디오와 TV, 서평 쪽으로 진출해 “예술의 변방에서 잔재주를 부려 살아가는 사람 중 하나”이지만 큰 체구와 훌륭한 언변으로 제법 괜찮게 살아가고 있다.
  스펜스가 파티에 참석했을 때, 파티의 호스티스였던 바버라 콜스에게 인사를 건넨 적이 있다. 이때 바버라가 매너 있는 미소를 지으며, 아뇨, 실례하지만 처음 뵙는 분 같은데요, 라고 응대를 한 적이 있다. 사실 이때 지질한 남자 스펜스는 언젠가는 바버라를 한 번 넘어뜨리리라, 하고 작정을 했던 거 같다. 감히 네가 나한테,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어? 하는 억하심정으로. 그러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30분 분량으로 바버라 콜스를 인터뷰 해달라는 청탁이 오고, 인터뷰 당일 처음으로 콜스의 작업장에 가서 그녀와 직접, 시간을 두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된다.
  바버라 콜스는 무엇보다 일에 전념하는 여자였다. 그래 당연하게 일하는 현장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며 함께 일하는 팀원들과 농담을 섞어 논쟁하고,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것을 관찰하면서도 스펜스는 기어이 오늘밤 그녀의 침대에 올라가리라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 물론 스펜스가 모든 면에서 지질한 건 아니어서 인터뷰를 성공리에 끝내고, 피곤한 콜스를 데리고 저녁과 술을 곁들이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이후로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치졸의 끝판을 보여주는 행태. 날이 밝고도 자신이 바버라와 관계를 가졌음을 만천하에 공개하기 위해 극장 안 현장까지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우겨댄다. 바버라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이 먼저다. 네가 그리도 원한다면 이까짓 몸, 네 마음대로 해보라는 식.
  마지막 장면은 알려드리지 않겠다.


  <19호실로 가다>에서 19호실은 디스트릭트 선 열차를 타고 사우스 켄싱턴까지 가서 서클 선으로 갈아타 패딩턴에서 내려 작은 호텔이 조밀하게 들어선 단지 가운데 더러운 유리창을 단 ‘프레드 호텔’의 19호실을 말한다. 나는 정신병원 19호실인 줄 알았으나 다행히 아니었다.
  수전과 매슈 롤링스 부부의 이야기다. 20대 후반,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해 차례로 아들, 딸, 딸/아들 쌍둥이, 이렇게 네 남매를 둔 부부는 리치먼드에 정원이 딸린 크고 하얀 집에서 산다. 매슈는 런던의 대형 신문사의 차장급 기자로 재직하고 있었으나 유명한 기자나 부장급으로 올라갈 자질까지는 갖고 있지 않았고, 수전은 상업미술에 재능이 있어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자신의 광고 일에 강한 애정은 없었다. 이들은 둘 다 고액연봉자였다가, 수전이 임신을 하는 바람에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엄마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경력을 단절했다. 여기서 방점. 1960년대라는 것. 지금이라면 아무리 임신을 해도 (특히 고액연봉자라면)자신의 일을 놓지 않을 것이 당연하겠지만 당시엔 퇴직을 하는 것이 또 당연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발생한다.
  롤링스 부부는 런던에서도 지식인층에 해당하며, 실용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는 건전하고 성실한 배우자, 잘 크고 있는 네 아이들, 넓고 하얀 집, 정원 속에서 충만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아이 네 명을 돌보느라 간혹 매슈 혼자 파티에 참석하는 일이 있었는데, 하루는 늦게 남편이 오더니 술이 깬 아침에 깜짝 놀라, 어제 파티에 갔다가 마이라 젱킨스라는 아가씨를 집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함께 자고 왔다고 고백을 했다. (이게 ‘진짜 실수’라면 고백을 하는 게 좋은지, 안 하는 게 좋은지 난 판단을 못하겠다.) 수전은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혼자 파티에 참석한 잘생긴 남자를 보고 유혹해보고 싶은 여자가 있을 수 있으니까), 자기 인생이 갑자기 사막처럼 변해버린 느낌이 들었다.
  이어 쌍둥이가 학교에 들어가 드디어 부모의 손에서 떠났을 때, 수전은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기 시작한다. 자기만의 방. 글의 생산, 창작을 위한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는 다르다. 오히려 후에 레싱이 집중하게 될,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창문 하나를 빼고 네 벽으로 갇혀 있는 곳, 자아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자기만의 방을 찾기 시작한다. 처음엔 넓은 하얀 집에서, 그러다 빅토리아에 있는 미스 타운센드의 호텔에서. 그러나 집에서는 아이들과 파출부, 남편 때문에, 빅토리아에서도 50대의 외로운 노처녀 미스 타운센드의 간섭으로 인해 가능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른 곳이 패딩턴 부근의 프레드 호텔.
  가사는 스무 살 먹은 독일 아가씨 소피에게 맡겨놓고 아침 아홉시에 나가 다섯 시까지 오롯이 혼자 의자에 앉아 창문 밖을 내다보는 아내이자 어머니.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다. 도리스 레싱은 서문에서 수전이 왜 19호실로 가야했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내 생각엔, 아이들이 커 곁을 떠나고 보니 애초부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자각이 우울증으로 변한 것 아니겠나 싶다. 작품 속에는 상실과 소외, 이런 현상이 왜 여자에게 집중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물음도 포함되어 있다. 남편은 여전히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외도를 하고, 아내 역시 따로 애인을 두고 있다고 생각해 아내의 애인과 네 명의 만남을 제안하기도 하는 속물이기도 하다. 이 부부를 통해 여성은 육아를 포함한 가정생활에서 평등하지 못한 지위에 머물고 있음을 드러낸다.
  21세기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수전에게는 일이 없으니까. 그래서 자존감도 없어져 서서히 무너져야 했음을.
  롤링스 부부가 중산층, 즉 먹고 사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니다. 일은 열심히 하되 책임에 관해서 엄격하게 선을 긋고 절대 넘어가려 하지 않는 파출부 파크스 부인이나, 자기를 버리고 다른 여자한테 장가든 남자를 잊지 못해 자신의 모든 현금을 가져다 바치는 (토카레바가 쓴 중편) <이유>의 마리나가 훨씬 더 자존감도 있고 행복하다는 데 만 원 건다. 세상이 배운 거하고 가진 돈만 따져서 행복하면 너무 지루하잖아?


  여태까지 읽은 다섯 편의 장편과 두 권의 단편집 가운데 이 책의 책장이 제일 쉽게 넘어간다. 초기작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후에 레싱이 쓰게 될 음산하거나 피로하거나 많이 비관적인 것보다는 소프트한 느낌이 든다. 처음 레싱을 읽기 시작하는 독자에게는 맞춤하지 않겠나 싶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1-04-09 14: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난번에 읽으신 레싱 작품 다음으로 이거 읽었다면 거의 술술술~~~ 읽으셨을 거 같아요.
<최종 후보 명단.....> 이거 읽고 얼마나 빡쳤던지. 으으으. 정말 그런 남자가 실제로 눈앞에 있는 거 같았어요.

저도 <이유>의 마리나가 훨씬 더 행복할 거란 말씀에 공감 1000%합니다.

Falstaff 2021-04-09 14:40   좋아요 2 | URL
넵! 레싱의 다른 것들도 이 정도면 딱 좋았을 것을요!!
<최종 후보...> 이거 1960년대에 레싱이 아니라면 마지막 장면이 나올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끝까지 독자들 열 팍팍, 팍팍팍 받게 하다가 그런 식으로 찌질이를 백안시 해버리는 거, 참... 어제 얘기와 이어서 하면, 같은 60년대인데 김**과 달리 아직까지 장면이 살아 있잖아요. 장면을 덜 꾸며서, 다른 말로 ‘별로 감수성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19호...>는 좀 답답했던 게, 아쒸, 빨리 신경정신과로 데려가야 할 텐데 천하의 속물 남편 새끼를 비롯해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집단에 의해 벌어지는 살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근데, 마리나는 쓰고 나니까 영 어울리지 않아서 어떻게 할까...하다가 이왕 쓴 거 지우기 아까워서 걍 내비둔 거랍니다. ㅋㅋㅋㅋ

(윽! 이 답글이 스포일러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냥 두겠습니다. ㅋㅋㅋ 어쩄건 전 읽었으니까요. ㅋㅋㅋㅋ 아 상쾌해!)

얄라알라 2023-01-11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빨리 읽고 싶다.
2023년 읽은 첫 소설이 도리스 레싱 작품이었던 만큼 골드문트님 서재에서 이야기해주신 도리스 레싱 작품들 찾아 읽고싶습니다.

Falstaff 2023-01-11 05:45   좋아요 0 | URL
레싱.... 아오, 쉽지 않습니다. 근데 진짜 만나서 쐬주 한 잔 마시면 사람이 담백하고, 직선적이고, 활달하고, 정의감이 뿜뿜 뿜어져나오는 화통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책은 여간해 잘 읽히지 않게 쓴단 말입니다. ㅎㅎㅎ
이 양반, 하여간 사람이 사람 차별 하는 거, 그건 눈 뜨고 안 봐준답니다. D.H.로렌스 작품 판금 소송, 루슈디 사형선고 규탄, 이런 데 무조건 앞장섰던 작가입니다.

그레이스 2023-01-11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카레바의 이유 읽지는 않았지만 전남편에게 돈을 주는 아내의 자존감에 대해 잘 모르겠는걸요?ㅋㅋ
주는 순간에는 자존감이 잠시 높을지 모르나, 그 후엔 참담하지 않을까요.(제 생각입니다)
호텔 방을 자신의 공간으로 삼는 여주인공이 부러운 사람도 있겠으나, 돈으로 환원되는 것같아 저는 저항합니다.^^

표지는 호크니의 그림이 생각나네요...^^

Falstaff 2023-01-11 20:0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도 독후감을 쓰고 아직 2년밖에 안 됐는데, 토카베라의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군요. 전 남편/여편 한테 의무가 아닌 한, 옛다, 용돈 써라, 하고 현금을 줄 정도면 폼은 나겠습니다. ㅋㅋㅋㅋㅋ 근데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즉 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겁지요. 웬수하고 한 평생 사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전생의 웬수하고 부부, 부모-자식이 된다고 하잖아요. ㅋㅋㅋㅋㅋ
성인이 된 후 자기 집을 갖지 않고 평생 호텔 방에 산 한 명을 알고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나부코프. 뭐 팔잡니다, 팔자. 뭐 다 이유가 있겠습죠. ^^
 
주말여행 문지클래식 8
홍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편 여섯, 표제작 중편 하나를 엮은 책. 초판은 1976년. 따라서 작품들은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전반까지 대략 십 년의 세월동안 생산한 것들이다. 내가 읽은 책은 2020년 3판 1쇄다. 그러니까 홍성원의 대표작이자, 상당한 시간동안 우리나라 전쟁문학의 대표작으로 군림했던 <남과 북>을 발표하기 전까지 이이가 시장에 내놓은 50여 편의 중단편 소설 가운데, 작가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하찮은 일상들을 직접 소재로 선택했거나, 때로는 (나) 자신이 이야기 속에 함께 버무려져 (내가) 바로 소설의 내레이터가 되기도” 한 것들을 골랐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우찬제는 책 뒤의 해설, “내 생각대로 살 수 있을까?”에서 첫 번째 작품의 제목처럼 “늪”을 건너거나 허우적대는 것 같은 가망 없는 희망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만일 홍성원의 작품을 공부하는 입장이라면 삼십여 년을 다작한 작가의 방대한 작품을 분류하고, 분석하면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이겠지만, 나 같은 일반 독자는 그저 60년대와 70년대 소설 속에서 흔히 발견했던 권태와 무기력과 상실과 속화俗化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라고 간단히 얘기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1980년대 초에 이이의 <남과 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고 싶어 했다가 2018년에야 겨우 바라던 것을 이루었는데, 그전까지는 홍성원에 대한 끌림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남과 북>이 명불허전, 좋은 책이라는데 공감을 한 후에, 그의 다른 책을 찾다 작년에 문학과지성사의 문지클래식 시리즈로 출간했다는 얘길 듣고, 그래도 문지가 클래식이라고 선정한 책이니 좋을 것이라는 믿음 한 가지만 가지고 선택했다.
  전형적인 60년대 단편 스타일인 <늪>에선 김승옥의 기시감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고, <무전여행>도 비슷한 기시감 위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극성도 독자에겐 너무 쉬운 복선을 앞에 두고 있다. <프로방스의 이발사>도 마찬가지로 발랑 까진 독자는 처음부터 결말을 알고 시작한다. 70년대로 접어들면, 범문화적으로 널리 유행했던 호스티스 소설과 유부녀의 일탈과 일상이 된 유부남의 바람기 또는 오입 풍습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기껏 잘 읽고 이런 독후감을 쓰는 게 이미 고인이 된 작가와 출판사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시엔 널리 읽혔는지 모르겠으나 별 특징도 없고 매력적이지도 않고, 기억할 만 한 미문도 없는 중단편 선집이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다고 홍성원의 모든 업적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이이는 대하소설에 그 본류가 있는 작가이니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1-04-08 09: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예전에 구판 버전 문지 소설명작선으로 나온 책으로 읽었는데, 읽으면서도 왜 이게 명작선에 들어가 있는지 의아했다는... 그때 읽어도 참 낡은 이야기로 생각했는데, 지금 읽으셨으면 참... ㅋㅋㅋㅋㅋㅋ

예전에 적어둔 메모가 있어서 지금 오랜만에 다시 살펴보니 정말 김승옥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요(전 김승옥도 요새 다시 읽으라면 못 읽겠어요. 뭔가 토 나오는 느낌;).

================================
나는 그런 놈팡이들을 학교 강의실과, 중국집 칸막이 방과, 영화관 구석 자리와, 후미진 골목길에서 자주 보아왔다. 여인들의 가방이나 열심히 들어주는 그런 놈팡이들은 하나같이 골통이 빈 너절한 속물들이다. 그들은 데모에 앞장을 서기도 하고, 어떤 서클의 회장도 하고, 바둑 5급에 당구는 삼백쯤 치고, 일 년에 한두 번씩 산악회나 봉사단 회원이고, 때 없이 술을 잘 사고, 족보에도 없는 춤으로 분위기를 잘 이끌고, 가끔 누군가에게 직사하게 얻어터지기도 하고, 때로는 또 누군가를 팬 뒤 한 달포쯤 종적을 감추기도 한다. 한데 왜 모든 젊은 여자들은 이런 속 빈 건달들을 좋아하는 것일까? 왜 나 같은 진지한 놈에게는 예쁜 여인들이 달려들지 않는 걸까? (<늪>, 11~12쪽)

똥개처럼 아무 때나 짖어댈 뿐 그는 정작 일을 당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나는 이런 ‘스물세 살’을 서울에서 이미 무수하게 보아왔다. 다방이나 달리는 버스 속에서 갑자기 광포해져서 ‘니나노’를 부르는 스물세 살, 학비를 대주는 자기 아버지를 ‘꼰대’라고 부르는 구역질 나는 스물세 살, 꼬치 담배를 사 피울망정 신탄진만 찾는 가여운 스물세 살, 넉넉한 하숙비를 다 써버리고 멋으로 가정교사를 하는 꼴불견의 스물세 살. 학생회장에 출마한 후로 갑자기 친절해진 징그러운 스물세 살. 아아 그리고 너무나 많은 저 싸구려의 볼품사나운 스물세 살들. (<무전여행>, 67쪽)


Falstaff 2021-04-08 09:38   좋아요 3 | URL
솔직하게 얘기해서 아주 오래 전, 이십대 시절에 읽은 김승옥이 쇼킹이었습지요. 그러다가 직행버스에서 틀어주는 라디오 방송에서 <무진기행> 낭독을 해주었는데, 아이고, 그 촌스러움이라니. 그것도 쇼킹이었습니다.
70년대 말까지 신춘문예 응모하기 위한 공식으로, 김승옥의 내용과 황순원의 문체가 거의 정석이었답니다.
전 시대가 좀 겹쳐서 ‘토‘까지는 아니어도, 김승옥을 둘러싼 후광이 좀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잠자냥 2021-04-08 10:05   좋아요 2 | URL
김승옥을 일컬어 ‘감수성의 혁명‘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 감수성이란 게 60~70년대 20대 남자들‘만‘의 감수성 같아요. 저 대학 때만 해도 그 감수성에 캬~ 하는 남자들 많았는데.... 전 아무리 읽어도 잘 쓴 건 알겠지만 공감은 어렵더라고요. 암튼 지금 읽기엔 많이 낡은 감수성 같습니다. ㅎㅎㅎ

Falstaff 2021-04-08 10:25   좋아요 2 | URL
잠자냥 님 얘기를 디스카운트 해서 읽어도, 20대 남자들만의 감수성이란 걸 부인하기가 쉽지 않네요. 근데 당시엔 20대 여성들도 생명연습, 64 서울, 무진기행 같은 거에 꼴딱 넘어갔던 건 사실이예요. 이런 류의 작품이 김승옥을 통해 처음 나온 거니까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이제 시간이 흘러 김승옥이 저절로 감가상각을 당해 저부터도 ‘당시 20대 남자의 감수성‘을 부인하지 못합니다만.
뭐 사람이 만든 거 가운데 안 그런게 있겠습니까. ㅋㅋㅋㅋ

blanca 2021-04-08 1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의외로 우리 문학 과거 작품 중 폭력적이고 마초적이고 낡은 것들이 있더라고요. 요즘 나오면 난리났을 것들. 시대적인 관점에서 봐도 사실 작가는 그 안의 세태를 그리는 게 맞지만 그걸 뛰어넘는 뭔가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냥 막 쥐어짜서 억지로 만든 이야기들도 있고...습작을 출판하며 했다는 느낌을 준 이야기들도 있고...

Falstaff 2021-04-08 10:28   좋아요 0 | URL
특히 이 책의 표제작 <주말여행>이 그렇더라고요.
물론 중산계급의 허위와 위선 등을 그리려 했겠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뭔가는 결여되어 있거나 별로 보이지 않거나, 있는데 제가 발견을 못했거나, 하여튼 셋 가운데 하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