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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ㅣ 창비시선 359
김성규 지음 / 창비 / 2013년 3월
평점 :
1977년생. 시집은 2013년 출간. 그의 나이 서른일곱 살 때. 당시 시인은 명지대 문창과를 나와 같은 학교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두 번째 시집을 냈다. 물론 일 년 후에 김구용 시문학상을 수상하고, 바로 이 시집으로 신동엽 문학상까지 넙죽 받으리라는 건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2014년 시인으로서는 큼직한 두 개의 상을 받은 이후 상의 무게감 때문일까 아직 후속 시집을 출간하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시집의 제일 뒤에 실린 「시인의 말」을 보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흙을 퍼먹는 기분이다. 나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 (중략) … 시간을 함부로 소모하고, 견딘다는 것. 몸이 아파 누워 있다. 창문을 열어보니 봄이 온 느낌이다.” 라고 쓰고 있어서 혹시 건강문제로 더 이상, 세 번째 시집을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었으면 좋겠다.
김성규의 시를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자주 쓰는 말을 한 번 더 해야겠다.
나는 시를 거의 모른다. 좀 읽기는 했지만 거의 교과서 수준의 시를 교과서 수준으로 이해하는 정도. 그리하여 앞으로 어떤 감상을 이야기하더라도 우리나라 국민 평균 수준 아마추어의 의견으로 이해해달라는 것. 불편한 말이 나와도 무슨 특별한 주관이 있어서 시와 시인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십사 하는 것이다.
김성규의 시는 지금 크게 유행하고 있는 시의 파편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시인의 함의를 눈치는 챌 수 있는 시도 들어 있어 그나마 안심이 된다. 그래도 처음 실린 시를 읽자마자 평론가 조재룡이 쓴 해설 「영벌(永罰)받은 자의 노래」를 먼저 읽고 김승규의 시 독법에 대해 배워야 했다. 조재룡은 평론가 역시 문학인의 한 명으로 유려한 문장을 쓸 수 있다는 듯 문장 적 과시를 조금 한 후 이렇게 말한다.
“김성규는 폭력적 현실에 굴복하거나, 대안을 찾아 삶의 피안을 기웃거리며 희망이라는 차가운 형이상학을 염원하는 대신, 재난의 한복판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뛰어들어, 세계의 적나라하고 추악한 양상들을 땀내 나는 언어로 기록해나가는, 한없이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한다.” (p.121~122)
좀 현란한 문장이다. 따온 문장과 해설의 제목 「영벌(永罰)받은 자의 노래」를 합해서 생각해보면, 시인 자신이 영벌, 사전적 의미로, “(기독교) 지옥에서 받는 영원한 벌” (표준국어대사전)을 받고 있는 자라서 그의 노래는 한없이 고통스러운데, 그게 적나라하고 추악한 양상들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하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읽어도 무리는 없겠다. 그러면 영원한 벌이 무엇일까. 뭐긴 뭔가. 시를 쓰는 일이지. 그럼 시를 안 쓰면 되는 거 아닌가? 그게 쉽나 어디. 시인이 시를 쓰지 않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니, 시인에겐 시를 쓰는 일이 끝나지도 않을 천형과 같은 영벌,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한 대가로 영원하게 받아야 하는 벌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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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는 복스러운 순둥이 같이 보여도, 김성규의 시는 이래서 고통스럽다. 예컨대, 짧기도 하니 처음 실린 시 <적도로 가는 남과 여>를 읽어보자.
지뢰밭 가운데서
한 남자가 일직선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적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왜 적도로 가느냐고 묻자,
전쟁이 끝나 우리가 만날 수 없을 때
부서진 건물 사이를 지나
너는 왼쪽으로 걸어
나는 오른쪽으로 걸을게
서로를 찾아 헤매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면
적도를 향해 걸어가자
지뢰밭 가운데서
한 여자가 적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전문)
앞에서 말했다. 이 시를 읽고 곧바로 해설로 가서 시 독법에 관해 배워야 했다고. 역시 평론가는 다르더라. 1연에서 일직선으로 남자는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건물 오른쪽으로 여자를 찾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어서, 이제 그는 적도를 향해 걸어가자고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여자는 벌써 적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니까 이미 건물 사이를 지나 왼쪽으로 걸어본 다음, 적도를 향해 떠난 후다. 그리하여 이들은 앞으로도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된다.
평론가의 시 독법에 이렇게 한 번 놀란 이후, 난 예상외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후 실제로 몇 십 편의 시를, 마치 주관식 국어 시험을 치루는 기분으로 온갖 품사와 시제와 단어의 중의성과 수사법을 따져가며 읽게 됐고, 그리하여 곧바로 시를 읽는 행위가 얼마나 따분한 짓인지 확실하게 실감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독자지 평론가가 아니었다. 그렇게 읽는 건 평론가나 밥벌이로 하는 짓이지, 일반 독자인 나는 그저 시를 읽으면서 공감하고 좋다, 아니다, 덜 좋다, 덜 싫다, 이 정도의 평을 해도 충분한 일이다. 그러다가 시의 매력에 빠져 더 열심히 읽다보면 평론가 각하들의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게 되겠지.
그러다가 이 시를 만난다.
방언(方言)
점자를 읽듯 장님이 칼을 만진다
칼날에 피가 흐른다
사람들이 소리 죽여 웃는다
칼은 따뜻하다!
자신이 새긴 글씨가 상처인 줄 모르고
기뻐하는 장님을 보라
쏟아지는 피를 손바닥으로 핥으며
자신도 모르는 글씨를
칼날에 새기고 있다
몸에서 잉크가 떨어질 때까지
더 빨리
더 빨리
마귀가 불러주는 주문을
온몸으로 받아 적고 있다 (전문)
‘방언方言’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사투리를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에서 쓰는 말로 “신약 시대에, 성령에 힘입어 제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외국 말을 하여 이방인을 놀라게 한 말, 또는 황홀 상태에서 성령에 의하여 말해진다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말”이다. 시에서는 두 번째 뜻으로 제목을 정했을 것.
대학에 입학해서 놀랐던 것 가운데 하나가, 학생식당 오전에 남녀 무리 넷이 앉아 자기들의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갑자기 웅얼웅얼 뭔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를 바치는 거였다. 처음엔 조용히 나지막하게, 그러다가 크레센도, 크레센도 에다니만도, 거의 광분상태. 모교는 특정 종교를 신봉하는 학교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매우 낯설었다. 뜨악한 느낌. 이걸 방언이라고 하는가보다, 본능적으로 알게 되더라.
이 시에서 터진 방언은? 기독교 말고 적그리스도의 마귀가 불러주는 기도문. 장님이 자기 손이 예리하고 예리하며 예리한 칼날에 베어 자신의 피로 칼을 따뜻하게 덥혀주고 있는지도 모르고 마귀의 방언을 칼에 새기고 있는 행위. 그게 시인이, 정확하게 얘기해서 시인 김성규가 시를 쓰는 일이다. 이러니 김성규의 시를 읽고 고통스럽다할밖에. 시를 쓰는 행위를 읽었으니 다음엔 <시인>이 어떤 직업인이란 걸 넘겨다보자.
죽은 물고기를 삼키는
두루미
목을 부르르 떤다
부리에서 삐져나온
푸른 낚싯줄
흘러내리는 핏물
목구멍에 걸린
바늘을 토해내는
날개를
터는 소리
한번 삼킨 것을
토해내기 위해
얇은 발자국 늪지에 남기며
걸어가는 길
살을 파고드는
석양을 바라보며
두루미가 운다 (전문)
시가 되겠다 싶어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 삼켰더니, 아뿔싸, 낚시 미늘을 삼킨 물고기를 삼킨 것이었다. 그래 두루미라는 시인의 목에도 낚싯바늘이 걸려 토해내야 하긴 하겠는데 그게 나오진 않고 목구멍에서 피만 흐르고 있는 광경. 이 정도면 비참하다. 김성규가 몇 년이 흘러도 다음 시집을 내지 않고 있는 것이 시인의 몸 또는 마음의 병이 원인이 아니길 바라는 심정을 이젠 아시겠지? 이러니 평론가 조재룡이 시인을 “영벌 받은 자”라고 하고 시집을 “영벌 받은 자의 노래”라고 했던 것. 시인이여, 비노니, 제발 건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