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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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제목 "Rules of Civility"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정중함의 규칙” 정도. 1966년 10월 4일, 주인공 ‘나’ 케이티는 남편 밸과 함께 뉴욕 사람들의 표정에 초점을 맞춰 작업을 진행해온 60대 중반의 사진작가 워커 에반스의 전시회를 겸한 연회장을 둘러보던 중 사진 속에서 시어도어 그레이, 애칭으로 팅커 그레이의 모습을 두 번이나 발견하면서 1937년 12월에서 1938년 12월까지 약 1년에 걸친 과거의 기억으로 빠져들어, 그 시절 20대 부르주아 젊은이들의 초상을 회상한다. 그렇다. 부르주아 이야기. 토울스 자신이 20년 동안 투자 전문가라는 직업에 종사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부르주아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만일 그가 성공적인 투자 전문가였다면 스스로도 정복 입은 수위가 정문을 지키는 펜트하우스에서 살았을 것이어서, 40대 후반에 발표한 데뷔작 <우아한 연인>의 무대가 주로 부르주아 계층이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할 것이고, 두 번째 작품 <모스크바의 신사> 역시 구시대 귀족이며 거대 부르주아의 후손인 것도 납득이 간다. 아, 부르주아라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가. 직업은 소일거리일 뿐 신탁재산만으로도 평생 충분한 사치와 사교와 연애와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극히 소수의 존재라니. 나는 이들이 부럽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렇다고 그들이 나보다 더 행복한 건 아닐 거라는 점.
 원제 “정중함의 규칙”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이 소년시절에 요약해 둔 행동규범으로 나중에 인쇄되어 출간한 제목으로는 <사교와 토론에서 갖추어야 할 예의 및 품위 있는 행동 규칙> 110가지 항목을 의미한다. 이 110가지 행동규범은 책의 부록에 고스란히 실려 있는 바, 처음 다섯 가지만 소개한다. 어떤 식인지 감만 잡으시라고.


 첫째.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할 때는 항상 주위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
 둘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보통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신체 부위에 손을 대면 안 된다.
 셋째. 친구가 겁을 먹을 만한 것을 보여주면 안 된다.
 넷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혼자 콧노래 같은 소음을 내면서 노래하도 안 되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으로 드럼처럼 박자를 맞춰도 안 된다.
 다섯째. 기침, 재채기, 한숨, 하품 등을 할ㄹ 때는 소리를 내지 말고 은밀히 한다. 또한 하품을 하면서 말하지 말고, 손수건이나 손을 얼굴 앞에 댄 뒤 고개를 돌린다.


 그러니까 똑똑하고 조숙한 소년 워싱턴이 1700년대 중반의 미국 사교계를 둘러보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 해야 할 것들을 아주 세세하게 관찰한 일종의 ‘에티켓’ 목록쯤으로 여기면 된다. 이것들이 책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기재로 등장하는데, 주인공 ‘나’ 케이티에게는 조금, 남자 주인공 시어도어 그레이에게는 무척 중요하게 작용한다.
 스토리를 이끌고 가는 트로이카는 ‘나’ 케이티, 케이티의 하숙집 룸메이트 이브, 그리고 남자주인공 시어도어. 케이티와 시어도어(팅커)는 어떻게 뉴욕의 부르주아 집단으로 편입하게 되었을까. 이브는 일리노어 기준으로 경제적 최상부에 속한 가문의 외동딸이지만 어디까지나 농업에 터를 둔 시골부자 집안 출신이다. 케이티는 뉴욕 출신이긴 하나 기계공장에서 일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딸이며, 팅커는 놀랍게도, 한때는 부르주아였으나 아버지 시절에 재산을 완벽하게 말아먹어 다니던 사립 고등학교에서 공립 고등학교로 전학을 해야 할 정도로 몰락한 집안의 둘째 아들이다. 좋다. 워싱턴의 항목 110가지가 왜 팅커에게 중요했는지 밝히겠다. 거덜이 난 집안 출신이지만 좋은 머리로 작가 에이모 토울스와 같은 직업인 투자전문가가 된 후에도, 잘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던 팅커는 워싱턴의 ‘정중함의 규칙’ 110가지를 꼬박꼬박 지키며 최상류층에 접근해 매력적인 캐릭터, 나이 들고 현명한 뉴욕 최고의 부자 가운데 한 명인 앤 그렌딘을 고객으로 모실 수 있게 되며, 심지어 그이의 펜트하우스 한 군데를 임대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관대한 대우를 받는다. 더구나 앤 그렌딘으로부터 거의 무한정인 후원을 받아 뉴욕 사교계의 총아 가운데 한 명으로 급부상하기에 이른다.
 케이트와 163cm의 적당한 키에다 금발까지, 놀라울만한 미인인 이브는 1937년 12월의 밤, 한 구석에서는 아직도 로마노프 왕조를 그리워하는 차르 지지자들이 틀어박혀 있고 맞은편엔 트로츠키 추종자들이 자본주의를 타도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재즈 바 체르노프에서 보드카를 마시고 있다가 이들 앞에 불쑥 나타난 팅커에 의하여 조금씩 뉴욕 사교계의 중심으로 진입한다. 놀라운 부, 정확하게 말하자면 앤 그랜딘의 무한정한 후원을 받는 총아 팅커에 의하여 프롤레타리아와 시골부자 출신인 두 아가씨들은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뉴욕 최상류 사교계에 진입하는데, 이브는 그래도 시골 부르주아 출신이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가난한 주인공 ‘나’가 아무리 총명하고 재기발랄하고 행동력까지 겸비한 재원이라 할지라도 한 순간에, 다른 곳도 아닌 뉴욕의 사교계 사람들과, 그것도 1930년대에, 무람없이 지내며 관계를 만들고 좋은 평판 일색을 들을 수 있었을까는 아직도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케이트는 좋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비서로 근무하고 있던 중이었는데(그래봤자 타이피스트지만) 승진발령을 받고나선 돌연 사직서를 던지고, 문학에도 관심이 있었던 바, 19세기 영미문학에 관한 한 최고의 평판을 누리고 있는 페리시 씨의 조수로 들어갔다가 몇 달 만에 메이슨 씨에게 발탁이 되어 잡지 <고담Gotham>을 출간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인물이다. 세상을 달통한 앤 그렌딘의 견해로 케이트가 자신과 비슷한 정도의 여자 100명 가운데 99명은 빨래 통에 손을 담그고 있어야 했을 환경에서 빠져나왔을 재능을 가졌으면 오로지 혼자 힘으로 뉴욕의 상류 사교계에 진출해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일 텐데, 그러려면 시간이 적어도 20년 이상이 걸렸을 것이기 때문에 작가는 손쉬운, 그리고 무엇보다 케이트-팅커-이브의 삼각관계를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케이트를 계급간 갈등이 없는 에스컬레이터, 즉 신데렐라로 불가불 만들어버려야 했을 것이다. 원래 팅커는 케이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팅커가 운전하는 차에 탔다가 케이트는 가벼운 부상만 입었을 뿐이지만 이브가 얼굴에 상처가 나고 평생 다리를 절어야 하는 심각한 부상을 입어 도덕상 이브의 연인 비슷한 관계가 된 것도 케이트의 사교계 데뷔를 촉진시켰을 수도 있을 것. 어쨌거나 드라마의 축이 되는 사람들 셋 모두 부르주아 집안의 대물림이나 자력의 힘이 아니라 누군가의 호의와 후원의 덕을 입어 사교계의 일원, 총아가 되었다는 점은 적어도 내겐 특별했다. (특별하게 불만이었다고?)
 에이미 토울스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1930년대 당시 사교계? 부르주아들의 서슴지 않는 소비와 풍요와 마음 내키는 대로 행위 할 수 있게 하는 자본의 위력? 단지 헤어진 애인이 저쪽 강변에 산다는 것 때문에 매일 요란한 파티를 열어 내가 여기 산다는 걸 알리고, 그래서 자연스러운 방문을 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부르주아의 맹목적 일탈? 뭐 그럴 수도 있고, 상류 계급으로 상승하려는 한 젊은이의 영혼 매각 같은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상류층 젊은이들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의 투영일 수도 있겠다. 등장인물 가운데 아무도 악역을 맡은 사람이 없다. 1930년대 후반을 살아가는 뉴욕의 부르주아들 가슴 한 구석엔 아직도 Rules of Civility, 정중함의 규칙이라 할 수 있는 110가지 규범의 일부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일까? 확실한 건, 이 책이 모두 실화라고 해도 등장인물 가운데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지난 시절의 이야기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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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9-12-17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를 너무 재밌게 읽었던지라 번역본 재출간하자마자 사재기해놨는데... 아마도 토울스는 뼈속까지 부르주아인 것 같군요. 가슴절절 재미만 있다면야 뭐 .. ㅋ

Falstaff 2019-12-17 17:10   좋아요 0 | URL
이 책 읽은 사람들 거의 <모스크바의 신사> 때문에 찾아 읽었을 겁니다. 저는 심지어 출판사에 접속해 빨리 이 책 찍으라고 지청구까지 했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
맞습니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뭐니뭐니 해도 재미 아니겠습니까!

다락방 2021-09-03 09:01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저는 이 책이 먼저고 모스크바의 신사가 그 다음이었단 말입니다!!!

Falstaff 2021-09-03 09:1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이 책을 스콧 핏제럴드가 썼다면 감탄했을 거 같은데요, 21세기에 대공황 시대로 돌아가 이런 식으로 쓴 것이 마땅하지 못했었나 봅니다.
또, 틀림없이 무지하게 재밌는 <모스크바의 신사>를 먼저 읽어서 생긴 과한 기대도 원인이 됐을 거예요. 다 인생이지요 뭐. ㅋㅋㅋ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민음의 시 248
김복희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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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인의 시를 읽으면 자주 낯선 느낌을 지울 수 없다. ① 시와 시 작법에도 특정한 방향의 흐름 또는 유행이 있을 것인데 내가 그것을 미처 따라가지 못했거나, ② 시의 개별성이 극대화되거나 암호화 또는 기호화 하는 정도가 이젠 내 수준의 독자들이 이해하고 즐기기엔 과하게 특성화하여 다른 예술장르, 예컨대 현대음악이나 현대 비구상미술, 현대무용같이 소수의 특별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국한하여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갔거나, 이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런 방향성에 관해서 조금도 불만을 품지 않는다. 희랍시대부터 예술이란 형식은 잘 교육받은 소수의 ‘탁월한 자’들만의 쾌락을 위해 존재한다고 정의해온 바와 별로 다르지 않으며, 다만 내가 그 육시할 “탁월한 소수”분자 자리 밖에 서 있을 뿐일 터. 펠루치오 부조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냉혈의 중국 공주 투란도트가 자신의 처녀를 걸고 (독일어로) 세 번째 내는 수수께끼.

 “인류의 근본에서 뿌리를 내려 세대를 거치면서 가지를 풍성하게 하는 것. 어느 것보다 영광스러운 과실을 매다는 나무. 모든 사람에게 매력적이긴 하지만 소수만이 유지할 수 있으며 선택된 사람만이 비밀을 알 수 있는 것. 이것이 무엇인고?”

 저 멸망한 오랑캐 나라에서 온 칼라프 왕자가 이 수수께끼의 정답을 맞춰 그레이트 중화의 부마가 되니, 정답은 바로 “예술”이다. 그러니 ‘현대시’라는 저 아스라한 꼭대기에 달린 과실의 아름다운 비밀을 내가 모른다고 어찌 불평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현대시를 지어 책을 만드는 시인들이여, 너무 높이 천상의 과일을 매달아 놓은 것은 생각 안 하고, 그것을 즐기길 포기한 무지한 대중들 때문에 배고파졌다고 징징대지만 말아라. 너희들은 대신 천상의 과실을 유지하고 비밀을 공유하는 선택된 ‘탁월한’ 소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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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장이의 딸 - 상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아고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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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조이스 캐롤 오츠의 책이 번역 출간되어 성황리에 읽히고 있다. 읽어보려 책을 선택한 순간, 아쉽게도 나하고 궁합이 덜 맞는 역자의 이름이 표지에 박혀 있었다. 처음 대하는 작가의 작품을 선택할 때 어떻건 간에 마음에 들지 않는 역자의 문장으로 읽었다가 엉뚱하게 작가 본인을 경원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어서, 오츠의 다른 작품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고른 책이 <사토장이의 딸>이다. 사토(莎土)장이는 “무덤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원 제목도 ‘The Gravedigger's daughter’ 즉, 무덤 파는 사람의 딸이다. 모두 두 권 950여 쪽의 장편소설이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조이스 캐롤 오츠가 1938년생. 만81세. 1963년 등단했으니 작가생활 56년 동안 장편소설 58편을 발표했다. 외에도 드라마, 노벨라, 단편소설, 에세이 등 이이야말로 평생 쓰는 일에만 전념해온 사람이다. 그러니 한 스토리를 펼쳐가기 위해 설치한 구조나 구성 같은 것에 관해 감히 아마추어 독자가 섣불리 불만을 토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 한 사건의 필연성을 완전하게 갖추려 타당한 원인을 제공하기 위한 집요한 설명이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쯤은. 이런, 나중에 이야기해야 마땅한 것을 미리 밝혀버리고 말았다.
 먼저 사토장이 제이콥 스워트 씨를 소개한다. 스워트 씨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1920년대에 독일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상류계급의 자재들만 다닐 수 있던 남자 고등학교에서 다년간 수학교사를 역임하며 이후 과학서적 전문 출판사의 뛰어난 편집자로 활약하던 중 재수 없게 히틀러가 집권하는 바람에 아내 안나, 두 아들 허셀과 어거스트를 이끌고 전 재산을 써 미국행 배를 탄 인텔리 유대인이다. 몇 달에 걸친 항해 끝에 뉴욕에 도착해 모든 이민자들은 하선을 마쳤으나 창도 없는 더러운 공간에서 아들들이 다 보고 있는 와중에 안나 스워트 여사는 무려 열한 시간의 산통 끝에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속에서 다리부터 빠져나온 딸을 성공적으로 순산하여 이름을 레베카로 하고, 아이를 누더기에 싼 채로 약속의 땅에 첫 발을 내딛기에 이른다. 레베카는 그리하여 다른 가족과 달리 미국의 속지주의 정책에 의거해 낳자마자 미국인이라는 타이틀이 달리고, 부모와 형제들은 여전히 미국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외국인의 처지에 머물게 된다.
 제이콥 스워트 씨가 유럽, 그것도 독일 땅에서 나치의 손아귀로부터 도망치는 와중에 그는 철저하게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을 체험한다. 그리하여 길고 긴 장편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약자들은 금방 죽음을 당한다.”
 제이콥 씨가 자식들에게 두고두고 강조하는 것은 그러니 ‘약점을 숨겨야’ 한다는 것. 선생의 경험에서 비롯한 철학 속에, 유대인이라는 것도, 평생 육체적인 일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도, 하다못해 풍부한 지식과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삶의 정글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 제이콥씨에게 뉴욕 변두리의 지방정부에서 묘지관리를 맡기자마자 정확한 선택을 하신 겁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는 부지런하며 몸으로 하는 일은 자신 있습니다. 라고 지방 공무원에게 말한다. 그리하여 묘지와 묘지 근처 습기찬 지역에서 돌로 만든 자그마한 오두막에 다섯 가족이 정착하게 되는 것.
 고된 일과와 사토장이에 대한 지역주민의 멸시, 독일 이민자로 2차 세계대전 전 미국인들의 불쾌감, 여기에 또 (더러운)유대인이란 정체성에다 그동안 겪었던 온갖 수난 속의 생존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발아시킨 비정상적 두뇌활동. 이것들이 과학서적 출판사 편집자 출신의 제이콥 씨뿐만 아니라 한때는 아르투르 슈나벨 만큼은 아니지만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칠 줄 알았던 부르주아 출신의 안나, 그들 사이의 유복한 유년기를 지낸 두 아들의 뇌 속에서도 발아하기 시작한다. 낳자마자 미국인이었으며 한 번도 여유롭게 살아본 경험이 없는 주인공 레베카는 자신을 사랑해주던 아버지가 차츰차츰 변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역시 사토장이의 딸에게 쏟아지는 멸시를 거친 싸움을 통해 이겨가며 소녀로 성장해간다. 대강 그림이 그려지실 것.
 그러던 어느 날, 매장을 위해 공동묘지에 온 한 신사가 제이콥 씨에게 평상시 같으면 자연스러웠을 무람없는 말을 했고, 이를 들은 제이콥 씨는 아무 대답도 없이 돌오두막집으로 가더니 천에 싸인 뭔가를 외발 수레에 싣고 와 ‘나리’들을 향해 갑자기 “나치 살인자들! 더 이상은 가만 안 둬!”라고 외치면서 거대한 엽총을 쏴 가슴과 그 위에 놓였던 손을 통째로 날려버린다. 눈이 홱 돌아간 제이콥 씨는 엽총을 들고 집에 들어오더니 아내 안나의 머리를 향해 또 한 방을 쏴버리고, 이어서 레베카의 가슴에다 총구를 댄 채 잠깐 생각에 잠긴다. “너. 너는 여기에서 태어났어. 저 사람들이 너는 건드리지 않을 거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총구를 레베카의 가슴에서 자기 머리통으로 돌리고는 발사해버리고 만다. 어마어마한 큰 총소리 뒤에 피와 뼈의 파편과 뇌의 잔해가 레베카의 머리카락에 엉겨 붙으면서, 이미 두 오빠가 이미 집을 떠나버린 레베카는 완전히 천애고아가 돼버리고 만다.
 하지만 아직 레베카의 불운한 초년운세는 끝나지 않는다. 1936년에 태어나 1999년에 죽을 운명인 레베카. 동시에 피투성이가 되어 부모가 죽어버리는 것과 견주어 더하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혹독한 젊은 시절의 고통이 또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20대 중반부터 도래한 두 번째 시절을 맞아 몇 백만 분의 일의 확률에 당첨이 되어 험한 초년운세가 끝나고, 살면서 누구나가 겪는 애환을 제외하면 한 마디로 정의해, ‘아메리칸 드림’을 완성하는 신데렐라의 관을 쓰는 이야기.
 흠. 이런 스토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불행한 소녀가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되어 하늘에서 우수수 행운의 별이 줄지어 쏟아진다는 결말이라니. 난 신데렐라가 싫단 말이다. 이런 결말이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애초 구상이었을까, 아니면 출판사 편집자의 권유에 의해, 책을 많이 팔기 위한 의도였을까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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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be00 2019-12-13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이 분 책들 좀 편차가 심한 것 같아요. 가장 최근에 읽은 위험한 시간 여행도 딱히 좋지는 않았는데 워낙 다작하셔서 그런가..;;

Falstaff 2019-12-13 13:54   좋아요 0 | URL
전 이이의 작품들 제목을 보면서 혹시 장르문학 작가 아닌가 싶어 읽기를 머뭇거렸습니다. 근데 워낙 많이 쓰긴 썼습니다. ^^;;
 
광대 샬리마르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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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바로 소설 속 이야기로 들어가자.
 80년대 후반 또는 90년대 초반, 늘씬한 체격에 잘 생긴 외모와 거의 무한정한 재산을 보유한 전직 출판업자, 레지스탕스, 첩보원, 대사, 경제학자, 대 테러리즘 국가조직의 부서장, 영화제작자이며 이혼남인 막시밀리안 오퓔스 씨는 그의 늦둥이 딸이자 혼외자녀인 스물네 살의 미인 인디아의 집 앞에서 자신의 건장한 유색인 운전수가 그은 식칼에 의해 거의 참수 수준으로 목에 깊은 자상을 입어 선홍의 피를 한없이 뿌리며 만찬 상 위의 할랄 닭고기처럼 처참하게 죽는다. 할랄. 이슬람 식 만찬을 위해 이슬람식으로 사육해 이슬람식으로 도살한 식재료처럼. 첫 장 ‘인디아’에서 사건이 이렇게 벌어진다. 루슈디의 다른 작품 <수치> 속에서도 거의 앞부분에 앞으로 벌어질 행위와 살인을 미리 알려주고 그것에 이르는 과정을 밝히는 구도를 사용한 것과 비슷하게, <광대 샬리마르>도 애초부터 국가적 주요인물인 막스 오퓔스 살해 사건을 올려놓은 것.
 이후 이야기는 매우 거창하게 펼쳐진다.
 파키스탄과 인도 국경 사이의 카슈미르 지역. 그곳의 작은 마을 파치감(이 동네 이름을 몇 번이나 ‘파김치’로 읽었는지 모르지만). 파치감에서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가 서로 잘 조화하여 이교도들이라기보다 그저 같은 카슈미르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고유한 문화를 만들어 잘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의 파키스탄과 힌두교를 믿는 인도가 서로 세력을 다툼으로 비극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 전에 이슬람 청년 노만 셰르 노만과 힌두 처녀 부니 카울이 서로 사랑하고, 사랑해서 관계를 맺고, 이게 알려져 이교도들 간의 결혼이 이루어지게 된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카슈미르 정서라는 것 하나로 주민들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것. 파치감은 전통적으로 카슈미르의 공연예술을 이어가는 매우 중요한 곳이며 노만 가문이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네 명의 형제 모두 공연에 참여하는데, 동네의 가장 어여쁜 이교도 처녀를 얻어 결혼에 성공한 노만 셰르 노만이 바로 ‘샬리마르’라는 예명으로 탁월한 재능으로 줄타기 곡예를 벌이는 광대이며 작품의 주인공이다.
 알자스 지방에서 대대로 출판업과 고급 문예잡지를 발간해 온 부르주아 유대인의 아들 막시밀리안 오퓔스. 2차 세계대전 발발 즈음해 부모와 함께 망명을 시도했으나 치매 증상처럼 보이는 부모의 완고함 때문에 바다를 건너지 못해 결국 부모가 나치수용소의 의료 마루타로 생을 마감한 후 레지스탕스로 항독 전선에 뛰어든 인물. 이야기를 끌고 가는 캐릭터답게 아름다운 용모와 무한정한 부와 좋은 두뇌의 소유자로 망명 드골정부에서 드골의 눈 밖에 나 미국으로 이민한 바람둥이. 눈부신 업적으로 주 인도 대사로 임명되어 뛰어난 활약을 벌이지만, 카슈미르 탐방 때 한 무희의 매혹적인 자태에 반해 그녀를 미 대사관으로 불러 공연하게 하고, 수도에서 살면서 최고 무용 선생을 사사하게 해주는 대신에 자신의 정부로 취해버린다. 무희의 이름이 부니 카울. 막스와 부니 사이에 생긴 아이가 바로 인디아 오퓔스, 부니가 지어준 이름으로는 ‘카슈미아 노만’이 된다.
 부니는 결국 아이를 막스의 법적 아내에게 빼앗기고 다시 카슈미르로 돌아가지만 그곳 주민들에 의하여 이미 법적으로 사망신고를 마친 상태. 그리하여 산송장으로 남은 생을 이어가야 하며 마을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남편 셰르 노만을 사랑했었다는 걸 너무 나중에야 깨달은 그녀에게 남편이 줄 수 있는 것은 부정한 아내의 목숨을 거두게 하는 일. 그러나 그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이미 부니는 죽은 상태, 유령의 몸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둘이 연애할 때, 노만 셰르가 농담 삼아 한 맹세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만일 네가 다른 남자의 자식을 낳으면 너와 너의 자식을 죽여 버리겠다.”
 노만 셰르의 남은 생은 자신이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바쳐진다. 그리하여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조직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천성적으로 갖고 있어 외줄타기를 그토록 훌륭하게 할 수 있게 만든 운동신경을 보태 그는 인간병기로 변신한다. 카슈미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싸고 소비에트가 침공을 하고 이를 막기 위해 보내준 미국의 무기로 저항을 하다가, 이제는 다시 그들을 향해 총부리를 돌리게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애초부터 종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맹세를 완결시키기 위했던 것. 그리하여 20여 년이 흐른 후, 셰르 노만, 광대 샬리마르는 막스 오퓔스의 운전수 겸, 집사 겸, 비서까지 헌신을 하는 아랫사람으로 일하기에 이르러 어느 날 아내와 아내의 정부 사이에서 나온 ‘인디아’이기도 하고 ‘카슈미아’이기도 한 의붓딸이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서, 백주 대낮에 부엌에서 쓰는 식칼로 아내의 정부의 목을 깊숙하게, 거의 뒷목의 피부만 남아 달랑거릴 정도로 베어버렸던 것.
 이 책은 그리하여 크게 ① 남아시아, 특별히 인도 북부 지역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와 유럽/아메리카의 문화의 충돌, 그리고 ② 인도, 파키스탄 사이에서 종교 갈등으로 새우등 터지는 최고의 자연 유산 카슈미르 지역의 불행을 그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이라면 광대 샬리마르는 오리엔탈 문명의 문화이고 자존심일 수도 있고, 종교적 폭력일 수도 있으나 어떤 경우라도 유럽식 사고, 문화는 샬리마르와 그의 동양식 문화를 야만으로 규정하여 수용 하지 못하게 된다. 여기에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루슈디 특유의 신비주의적인 색채도 적절하게 가미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특히 루슈디가 강조하고 싶었던 점은 문화충돌과 종교 갈등이 앞으로도 화해의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전망으로 읽었다. 그의 비관적인 미래관이 당분간은, 아니, 앞으로도 상당한 세월 동안 타당할 것으로 보이는 것도 비극이긴 하다.
 그리하여 이 책은 거대한 담론이 되는데, 글 쓴 이가 루슈디라서 이 세계적 이야기꾼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도 결론이 어떻게 날까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위에서 이야기한 소설의 내용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큰 프레임이 이렇다는 것이고 세목별로 들어가면 저절로 풍부하고도 풍부해 넘쳐버릴 것 같은 이야깃거리가 마치 35가지 혹은 60가지 코스 요리로 만드는 카슈미르 전통 만찬인 와즈완을 맛보는 것과 비슷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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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be00 2019-12-12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만 루슈디 읽어보려던 중인데 폴스태프님의 리뷰 읽으니 확 땡기네요~ 조지프 앤턴 먼저 읽고 소설 읽으려 했는데 이 책 궁금합니다~ 집에 손도 안 댄 무어의 마지막 한숨이랑 악마의 시도 있는데 꼭 없는 책이 더 땡기는^^;

Falstaff 2019-12-12 12:06   좋아요 1 | URL
ㅎㅎㅎ 다 인생입죠.
전 루슈디 가운데 <한밤의 아이들> <광대 샬리마르> <수치> <악마의 시> 순서로 좋더라고요. 단편집 <이스트, 웨스트>는 루슈디 책으로 보면 경쾌하고, <하룬과 이야기 바다>는 그저 그랬습니다.

slobe00 2019-12-12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밤의 아이들에 이어 두번째라니~ 와ㅡㅡㅡ폴스태프님 순위를 염두에 두고 집근처 알라딘 가봐야겠어요~^^

Falstaff 2019-12-12 13:23   좋아요 0 | URL
읽어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근데 제가 읽은 루슈디가 많지 않아서요. ㅜㅜ

레삭매냐 2019-12-12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흥미롭게 읽은 그런 책이었습니다.

루슈디 덕에 카슈미르 여행을 한 그런 기분
이라고나 할까요.

Falstaff 2019-12-12 13:58   좋아요 1 | URL
옙.
카슈미르가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네요. 저도 카슈미르, 사마르칸트 뭐 이런 동네에 로망을 품고 있답니다. ^^
 
생활이라는 생각 창비시선 392
이현승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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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1973년생. 시집의 출간 연도가 2015년. 그러면 만 42세. 여자는 모르겠고(내가 한 번도 여자였던 적이 없어서) 남자로 말할 거 같으면 황금기다. 그런데 나는 다른 42세 남성 시인이 낸 시집에서 정말 엿 같은 노래를 읽은 적이 있다. “내 나이 때면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등 모든 죄가 어울린다.”고 조잘댄 시인.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겠다. 그래 마흔두 살의 남성시인에 대해 별로 감정이 좋지 않다. 물론 선입견이겠지만.
 마흔두 살 정도의 나이는 만일 집의 맏이가 아니라면 이제 슬슬 부모가 세상을 하직하기 시작할 즈음이다. 이현승도 당연히 이런 삶의 완결을 목격한 것처럼 보인다. 다 인생이지 뭐. 만일 직장 생활을 하는 마흔두 살이라면 주위에 소위 ‘명예’나 ‘희망’이나 ‘권고’ 퇴직을 권유받아 저항하지 못하고 봉급쟁이 졸업하는 사람들 구경도 깨나 했을 나이다. 그것도 심각하게. 다음은 내 차례거니, 하는 심정으로. 아이들 키우면서 아프기도 하고, 어디가 찢어져 꿰매기도 하고, 심지어 수술도 해봤을 수도 있으며, 본격적으로 중2 타이틀을 달고 바락바락 기어오르는 낭패를 당할 수도 있을 나이. 결혼생활마저 “승차는 했으니 하차만 남은 사람처럼 / 앉아서 흔들리는 미이혼남”, 즉 아직 이혼을 하지 못한/안 한 남자인 것 같은. 이런 우울한 그림이 하필이면 인생의 황금기에 도래한다.
 그래 마흔두 살의 시인은 딱 그때의 우울을 시집에 차곡차곡 담았다. 결과는? 우중충하다. <봉급생활자>라는 시를 통해 “우리는 나가고 싶다고 느끼면서 /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면서 더 간절해진다. / 간절해서 우리는 졸피뎀과 소주를 섞고” 그걸 마시는 행위를 통해 삶의 한 순간을 망각하려 애쓴다고 노래한다. 비슷한 시인데(만일 이것도 시라면 말이지만) 내가 빌어먹고 사는 회사의 사보에 실린 한 아마추어(회사 직원)의 노래(부분)


 이 절 말고 절밥 먹을 데 또 있을까
 석간수 한 모금에 체하는데
 山門 나서는 길 멀기만 해
 일신상의 사정으로 삼가 하산하고자 하오니
 차마 마저 쓰지 못하고
 山門만 내려다보는
 바랑 걸머진 중


 이라 하는 게 더 깔끔하지 않나? 세상의 봉급쟁이들 가운데 뛰쳐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별로 없고, 그중 거의 대부분 역시 직장이라는 폐쇄공간에 갇혀 있다는 폐쇄공포증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폐쇄공간에서 나가기는 두려워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 희망을 포기했다는 핑계로 소주에 졸피뎀, 고유정이라는 여자가 살해도구로 삼아 유명해진 수면유도제를 섞어 마시는 극단의 우울까지 몰고 가서야 어디 되겠어?
 예컨대 움직임을 노래하는 시 <이동>에서도 “제자리란 하나의 강박이다. / 켜놓고 온 가스불을 떠올리는 사람의 동공처럼 컴컴하게 열린 / 저 구덩이 어디쯤에서 돌아온 자리를, 또 또나온 자리를 보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묘혈墓穴이다. 또는 중한 수술을 받아 회복실에서 의식 없이 뜬 아내의 눈동자, 동공이든지. 그래 다음 연은 “불현 듯 아내에게 필요한 사람은 아내였다는 생각. / 컴컴하게 풀린 구덩이 앞에서 / 어디를 봐도 돌아보는 오르페우스의 아내여 / 소금기둥이 된 아내여”로 이어지는 것. 오르페우스의 아내는 에우리디케. 기껏 저 깊은 지하에까지 내려가 하데스하고 담판을 지은 끝에 다시 세상에 이르는 계단을 오르면서 조잘조잘 끝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여인?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하여간 죽었거나 죽음의 근처에까지 왕림한 아내를 말하는 것이겠지. 근데 감정과잉분비 아닌가 싶다. 시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시어들 역시 시류를 닮아가는 것일까. 과격하다. “켜놓고 온 가스불”에서 이미 죽음의 이미지가 상당할 정도의 타격감을 준다. 그래서 시들을 읽기가 조금은 부담스럽다.
 (잠깐. 정말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한테 여기까지 와서 자기 얼굴 한 번 안 보냐고 졸랐을까? 그렇다. 그럼 오르페우스는? 정신을 차려 생각해보니 계단 세 개만 오르면 또다시 에우리디케와의 결혼생활이라는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는 엄연한 현실에 번쩍 눈이 뜨이며, “그래, 여기서 끝내자.”라면서 홱, 뒤를 돌아봤다는 거다. 미셸 오스트가 <밤의 노예>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제 지긋한 연세의 “청춘 노인”들께서도 인터넷 접속을 자주 하시어 이렇게 이야기하기 송구하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감정이 과한 시어들이 힘겹고, 부담스럽고, 지긋지긋하다. 이현승의 이 시집은 그나마 덜 한 편이다. 덜한데도 이럴진대 다른 시집을 읽는 경우는 어떻겠는가. 죽음, 권고사직, 명예퇴직, 중환자실, 독감, 링거 병. 이런 것들, 당할 때 당하더라도 좀 덜 듣고 싶다. 가뜩이나 변비 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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