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라는 생각 창비시선 392
이현승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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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1973년생. 시집의 출간 연도가 2015년. 그러면 만 42세. 여자는 모르겠고(내가 한 번도 여자였던 적이 없어서) 남자로 말할 거 같으면 황금기다. 그런데 나는 다른 42세 남성 시인이 낸 시집에서 정말 엿 같은 노래를 읽은 적이 있다. “내 나이 때면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등 모든 죄가 어울린다.”고 조잘댄 시인.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겠다. 그래 마흔두 살의 남성시인에 대해 별로 감정이 좋지 않다. 물론 선입견이겠지만.
 마흔두 살 정도의 나이는 만일 집의 맏이가 아니라면 이제 슬슬 부모가 세상을 하직하기 시작할 즈음이다. 이현승도 당연히 이런 삶의 완결을 목격한 것처럼 보인다. 다 인생이지 뭐. 만일 직장 생활을 하는 마흔두 살이라면 주위에 소위 ‘명예’나 ‘희망’이나 ‘권고’ 퇴직을 권유받아 저항하지 못하고 봉급쟁이 졸업하는 사람들 구경도 깨나 했을 나이다. 그것도 심각하게. 다음은 내 차례거니, 하는 심정으로. 아이들 키우면서 아프기도 하고, 어디가 찢어져 꿰매기도 하고, 심지어 수술도 해봤을 수도 있으며, 본격적으로 중2 타이틀을 달고 바락바락 기어오르는 낭패를 당할 수도 있을 나이. 결혼생활마저 “승차는 했으니 하차만 남은 사람처럼 / 앉아서 흔들리는 미이혼남”, 즉 아직 이혼을 하지 못한/안 한 남자인 것 같은. 이런 우울한 그림이 하필이면 인생의 황금기에 도래한다.
 그래 마흔두 살의 시인은 딱 그때의 우울을 시집에 차곡차곡 담았다. 결과는? 우중충하다. <봉급생활자>라는 시를 통해 “우리는 나가고 싶다고 느끼면서 /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면서 더 간절해진다. / 간절해서 우리는 졸피뎀과 소주를 섞고” 그걸 마시는 행위를 통해 삶의 한 순간을 망각하려 애쓴다고 노래한다. 비슷한 시인데(만일 이것도 시라면 말이지만) 내가 빌어먹고 사는 회사의 사보에 실린 한 아마추어(회사 직원)의 노래(부분)


 이 절 말고 절밥 먹을 데 또 있을까
 석간수 한 모금에 체하는데
 山門 나서는 길 멀기만 해
 일신상의 사정으로 삼가 하산하고자 하오니
 차마 마저 쓰지 못하고
 山門만 내려다보는
 바랑 걸머진 중


 이라 하는 게 더 깔끔하지 않나? 세상의 봉급쟁이들 가운데 뛰쳐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별로 없고, 그중 거의 대부분 역시 직장이라는 폐쇄공간에 갇혀 있다는 폐쇄공포증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폐쇄공간에서 나가기는 두려워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 희망을 포기했다는 핑계로 소주에 졸피뎀, 고유정이라는 여자가 살해도구로 삼아 유명해진 수면유도제를 섞어 마시는 극단의 우울까지 몰고 가서야 어디 되겠어?
 예컨대 움직임을 노래하는 시 <이동>에서도 “제자리란 하나의 강박이다. / 켜놓고 온 가스불을 떠올리는 사람의 동공처럼 컴컴하게 열린 / 저 구덩이 어디쯤에서 돌아온 자리를, 또 또나온 자리를 보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묘혈墓穴이다. 또는 중한 수술을 받아 회복실에서 의식 없이 뜬 아내의 눈동자, 동공이든지. 그래 다음 연은 “불현 듯 아내에게 필요한 사람은 아내였다는 생각. / 컴컴하게 풀린 구덩이 앞에서 / 어디를 봐도 돌아보는 오르페우스의 아내여 / 소금기둥이 된 아내여”로 이어지는 것. 오르페우스의 아내는 에우리디케. 기껏 저 깊은 지하에까지 내려가 하데스하고 담판을 지은 끝에 다시 세상에 이르는 계단을 오르면서 조잘조잘 끝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여인?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하여간 죽었거나 죽음의 근처에까지 왕림한 아내를 말하는 것이겠지. 근데 감정과잉분비 아닌가 싶다. 시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시어들 역시 시류를 닮아가는 것일까. 과격하다. “켜놓고 온 가스불”에서 이미 죽음의 이미지가 상당할 정도의 타격감을 준다. 그래서 시들을 읽기가 조금은 부담스럽다.
 (잠깐. 정말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한테 여기까지 와서 자기 얼굴 한 번 안 보냐고 졸랐을까? 그렇다. 그럼 오르페우스는? 정신을 차려 생각해보니 계단 세 개만 오르면 또다시 에우리디케와의 결혼생활이라는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는 엄연한 현실에 번쩍 눈이 뜨이며, “그래, 여기서 끝내자.”라면서 홱, 뒤를 돌아봤다는 거다. 미셸 오스트가 <밤의 노예>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제 지긋한 연세의 “청춘 노인”들께서도 인터넷 접속을 자주 하시어 이렇게 이야기하기 송구하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감정이 과한 시어들이 힘겹고, 부담스럽고, 지긋지긋하다. 이현승의 이 시집은 그나마 덜 한 편이다. 덜한데도 이럴진대 다른 시집을 읽는 경우는 어떻겠는가. 죽음, 권고사직, 명예퇴직, 중환자실, 독감, 링거 병. 이런 것들, 당할 때 당하더라도 좀 덜 듣고 싶다. 가뜩이나 변비 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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