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민음의 시 248
김복희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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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인의 시를 읽으면 자주 낯선 느낌을 지울 수 없다. ① 시와 시 작법에도 특정한 방향의 흐름 또는 유행이 있을 것인데 내가 그것을 미처 따라가지 못했거나, ② 시의 개별성이 극대화되거나 암호화 또는 기호화 하는 정도가 이젠 내 수준의 독자들이 이해하고 즐기기엔 과하게 특성화하여 다른 예술장르, 예컨대 현대음악이나 현대 비구상미술, 현대무용같이 소수의 특별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국한하여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갔거나, 이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런 방향성에 관해서 조금도 불만을 품지 않는다. 희랍시대부터 예술이란 형식은 잘 교육받은 소수의 ‘탁월한 자’들만의 쾌락을 위해 존재한다고 정의해온 바와 별로 다르지 않으며, 다만 내가 그 육시할 “탁월한 소수”분자 자리 밖에 서 있을 뿐일 터. 펠루치오 부조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냉혈의 중국 공주 투란도트가 자신의 처녀를 걸고 (독일어로) 세 번째 내는 수수께끼.

 “인류의 근본에서 뿌리를 내려 세대를 거치면서 가지를 풍성하게 하는 것. 어느 것보다 영광스러운 과실을 매다는 나무. 모든 사람에게 매력적이긴 하지만 소수만이 유지할 수 있으며 선택된 사람만이 비밀을 알 수 있는 것. 이것이 무엇인고?”

 저 멸망한 오랑캐 나라에서 온 칼라프 왕자가 이 수수께끼의 정답을 맞춰 그레이트 중화의 부마가 되니, 정답은 바로 “예술”이다. 그러니 ‘현대시’라는 저 아스라한 꼭대기에 달린 과실의 아름다운 비밀을 내가 모른다고 어찌 불평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현대시를 지어 책을 만드는 시인들이여, 너무 높이 천상의 과일을 매달아 놓은 것은 생각 안 하고, 그것을 즐기길 포기한 무지한 대중들 때문에 배고파졌다고 징징대지만 말아라. 너희들은 대신 천상의 과실을 유지하고 비밀을 공유하는 선택된 ‘탁월한’ 소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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