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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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제목 "Rules of Civility"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정중함의 규칙” 정도. 1966년 10월 4일, 주인공 ‘나’ 케이티는 남편 밸과 함께 뉴욕 사람들의 표정에 초점을 맞춰 작업을 진행해온 60대 중반의 사진작가 워커 에반스의 전시회를 겸한 연회장을 둘러보던 중 사진 속에서 시어도어 그레이, 애칭으로 팅커 그레이의 모습을 두 번이나 발견하면서 1937년 12월에서 1938년 12월까지 약 1년에 걸친 과거의 기억으로 빠져들어, 그 시절 20대 부르주아 젊은이들의 초상을 회상한다. 그렇다. 부르주아 이야기. 토울스 자신이 20년 동안 투자 전문가라는 직업에 종사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부르주아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만일 그가 성공적인 투자 전문가였다면 스스로도 정복 입은 수위가 정문을 지키는 펜트하우스에서 살았을 것이어서, 40대 후반에 발표한 데뷔작 <우아한 연인>의 무대가 주로 부르주아 계층이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할 것이고, 두 번째 작품 <모스크바의 신사> 역시 구시대 귀족이며 거대 부르주아의 후손인 것도 납득이 간다. 아, 부르주아라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가. 직업은 소일거리일 뿐 신탁재산만으로도 평생 충분한 사치와 사교와 연애와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극히 소수의 존재라니. 나는 이들이 부럽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렇다고 그들이 나보다 더 행복한 건 아닐 거라는 점.
 원제 “정중함의 규칙”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이 소년시절에 요약해 둔 행동규범으로 나중에 인쇄되어 출간한 제목으로는 <사교와 토론에서 갖추어야 할 예의 및 품위 있는 행동 규칙> 110가지 항목을 의미한다. 이 110가지 행동규범은 책의 부록에 고스란히 실려 있는 바, 처음 다섯 가지만 소개한다. 어떤 식인지 감만 잡으시라고.


 첫째.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할 때는 항상 주위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
 둘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보통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신체 부위에 손을 대면 안 된다.
 셋째. 친구가 겁을 먹을 만한 것을 보여주면 안 된다.
 넷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혼자 콧노래 같은 소음을 내면서 노래하도 안 되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으로 드럼처럼 박자를 맞춰도 안 된다.
 다섯째. 기침, 재채기, 한숨, 하품 등을 할ㄹ 때는 소리를 내지 말고 은밀히 한다. 또한 하품을 하면서 말하지 말고, 손수건이나 손을 얼굴 앞에 댄 뒤 고개를 돌린다.


 그러니까 똑똑하고 조숙한 소년 워싱턴이 1700년대 중반의 미국 사교계를 둘러보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 해야 할 것들을 아주 세세하게 관찰한 일종의 ‘에티켓’ 목록쯤으로 여기면 된다. 이것들이 책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기재로 등장하는데, 주인공 ‘나’ 케이티에게는 조금, 남자 주인공 시어도어 그레이에게는 무척 중요하게 작용한다.
 스토리를 이끌고 가는 트로이카는 ‘나’ 케이티, 케이티의 하숙집 룸메이트 이브, 그리고 남자주인공 시어도어. 케이티와 시어도어(팅커)는 어떻게 뉴욕의 부르주아 집단으로 편입하게 되었을까. 이브는 일리노어 기준으로 경제적 최상부에 속한 가문의 외동딸이지만 어디까지나 농업에 터를 둔 시골부자 집안 출신이다. 케이티는 뉴욕 출신이긴 하나 기계공장에서 일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딸이며, 팅커는 놀랍게도, 한때는 부르주아였으나 아버지 시절에 재산을 완벽하게 말아먹어 다니던 사립 고등학교에서 공립 고등학교로 전학을 해야 할 정도로 몰락한 집안의 둘째 아들이다. 좋다. 워싱턴의 항목 110가지가 왜 팅커에게 중요했는지 밝히겠다. 거덜이 난 집안 출신이지만 좋은 머리로 작가 에이모 토울스와 같은 직업인 투자전문가가 된 후에도, 잘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던 팅커는 워싱턴의 ‘정중함의 규칙’ 110가지를 꼬박꼬박 지키며 최상류층에 접근해 매력적인 캐릭터, 나이 들고 현명한 뉴욕 최고의 부자 가운데 한 명인 앤 그렌딘을 고객으로 모실 수 있게 되며, 심지어 그이의 펜트하우스 한 군데를 임대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관대한 대우를 받는다. 더구나 앤 그렌딘으로부터 거의 무한정인 후원을 받아 뉴욕 사교계의 총아 가운데 한 명으로 급부상하기에 이른다.
 케이트와 163cm의 적당한 키에다 금발까지, 놀라울만한 미인인 이브는 1937년 12월의 밤, 한 구석에서는 아직도 로마노프 왕조를 그리워하는 차르 지지자들이 틀어박혀 있고 맞은편엔 트로츠키 추종자들이 자본주의를 타도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재즈 바 체르노프에서 보드카를 마시고 있다가 이들 앞에 불쑥 나타난 팅커에 의하여 조금씩 뉴욕 사교계의 중심으로 진입한다. 놀라운 부, 정확하게 말하자면 앤 그랜딘의 무한정한 후원을 받는 총아 팅커에 의하여 프롤레타리아와 시골부자 출신인 두 아가씨들은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뉴욕 최상류 사교계에 진입하는데, 이브는 그래도 시골 부르주아 출신이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가난한 주인공 ‘나’가 아무리 총명하고 재기발랄하고 행동력까지 겸비한 재원이라 할지라도 한 순간에, 다른 곳도 아닌 뉴욕의 사교계 사람들과, 그것도 1930년대에, 무람없이 지내며 관계를 만들고 좋은 평판 일색을 들을 수 있었을까는 아직도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케이트는 좋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비서로 근무하고 있던 중이었는데(그래봤자 타이피스트지만) 승진발령을 받고나선 돌연 사직서를 던지고, 문학에도 관심이 있었던 바, 19세기 영미문학에 관한 한 최고의 평판을 누리고 있는 페리시 씨의 조수로 들어갔다가 몇 달 만에 메이슨 씨에게 발탁이 되어 잡지 <고담Gotham>을 출간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인물이다. 세상을 달통한 앤 그렌딘의 견해로 케이트가 자신과 비슷한 정도의 여자 100명 가운데 99명은 빨래 통에 손을 담그고 있어야 했을 환경에서 빠져나왔을 재능을 가졌으면 오로지 혼자 힘으로 뉴욕의 상류 사교계에 진출해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일 텐데, 그러려면 시간이 적어도 20년 이상이 걸렸을 것이기 때문에 작가는 손쉬운, 그리고 무엇보다 케이트-팅커-이브의 삼각관계를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케이트를 계급간 갈등이 없는 에스컬레이터, 즉 신데렐라로 불가불 만들어버려야 했을 것이다. 원래 팅커는 케이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팅커가 운전하는 차에 탔다가 케이트는 가벼운 부상만 입었을 뿐이지만 이브가 얼굴에 상처가 나고 평생 다리를 절어야 하는 심각한 부상을 입어 도덕상 이브의 연인 비슷한 관계가 된 것도 케이트의 사교계 데뷔를 촉진시켰을 수도 있을 것. 어쨌거나 드라마의 축이 되는 사람들 셋 모두 부르주아 집안의 대물림이나 자력의 힘이 아니라 누군가의 호의와 후원의 덕을 입어 사교계의 일원, 총아가 되었다는 점은 적어도 내겐 특별했다. (특별하게 불만이었다고?)
 에이미 토울스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1930년대 당시 사교계? 부르주아들의 서슴지 않는 소비와 풍요와 마음 내키는 대로 행위 할 수 있게 하는 자본의 위력? 단지 헤어진 애인이 저쪽 강변에 산다는 것 때문에 매일 요란한 파티를 열어 내가 여기 산다는 걸 알리고, 그래서 자연스러운 방문을 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부르주아의 맹목적 일탈? 뭐 그럴 수도 있고, 상류 계급으로 상승하려는 한 젊은이의 영혼 매각 같은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상류층 젊은이들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의 투영일 수도 있겠다. 등장인물 가운데 아무도 악역을 맡은 사람이 없다. 1930년대 후반을 살아가는 뉴욕의 부르주아들 가슴 한 구석엔 아직도 Rules of Civility, 정중함의 규칙이라 할 수 있는 110가지 규범의 일부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일까? 확실한 건, 이 책이 모두 실화라고 해도 등장인물 가운데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지난 시절의 이야기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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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9-12-17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를 너무 재밌게 읽었던지라 번역본 재출간하자마자 사재기해놨는데... 아마도 토울스는 뼈속까지 부르주아인 것 같군요. 가슴절절 재미만 있다면야 뭐 .. ㅋ

Falstaff 2019-12-17 17:10   좋아요 0 | URL
이 책 읽은 사람들 거의 <모스크바의 신사> 때문에 찾아 읽었을 겁니다. 저는 심지어 출판사에 접속해 빨리 이 책 찍으라고 지청구까지 했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
맞습니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뭐니뭐니 해도 재미 아니겠습니까!

다락방 2021-09-03 09:01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저는 이 책이 먼저고 모스크바의 신사가 그 다음이었단 말입니다!!!

Falstaff 2021-09-03 09:1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이 책을 스콧 핏제럴드가 썼다면 감탄했을 거 같은데요, 21세기에 대공황 시대로 돌아가 이런 식으로 쓴 것이 마땅하지 못했었나 봅니다.
또, 틀림없이 무지하게 재밌는 <모스크바의 신사>를 먼저 읽어서 생긴 과한 기대도 원인이 됐을 거예요. 다 인생이지요 뭐.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