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장이의 딸 - 상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아고라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요즘 조이스 캐롤 오츠의 책이 번역 출간되어 성황리에 읽히고 있다. 읽어보려 책을 선택한 순간, 아쉽게도 나하고 궁합이 덜 맞는 역자의 이름이 표지에 박혀 있었다. 처음 대하는 작가의 작품을 선택할 때 어떻건 간에 마음에 들지 않는 역자의 문장으로 읽었다가 엉뚱하게 작가 본인을 경원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어서, 오츠의 다른 작품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고른 책이 <사토장이의 딸>이다. 사토(莎土)장이는 “무덤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원 제목도 ‘The Gravedigger's daughter’ 즉, 무덤 파는 사람의 딸이다. 모두 두 권 950여 쪽의 장편소설이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조이스 캐롤 오츠가 1938년생. 만81세. 1963년 등단했으니 작가생활 56년 동안 장편소설 58편을 발표했다. 외에도 드라마, 노벨라, 단편소설, 에세이 등 이이야말로 평생 쓰는 일에만 전념해온 사람이다. 그러니 한 스토리를 펼쳐가기 위해 설치한 구조나 구성 같은 것에 관해 감히 아마추어 독자가 섣불리 불만을 토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 한 사건의 필연성을 완전하게 갖추려 타당한 원인을 제공하기 위한 집요한 설명이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쯤은. 이런, 나중에 이야기해야 마땅한 것을 미리 밝혀버리고 말았다.
 먼저 사토장이 제이콥 스워트 씨를 소개한다. 스워트 씨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1920년대에 독일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상류계급의 자재들만 다닐 수 있던 남자 고등학교에서 다년간 수학교사를 역임하며 이후 과학서적 전문 출판사의 뛰어난 편집자로 활약하던 중 재수 없게 히틀러가 집권하는 바람에 아내 안나, 두 아들 허셀과 어거스트를 이끌고 전 재산을 써 미국행 배를 탄 인텔리 유대인이다. 몇 달에 걸친 항해 끝에 뉴욕에 도착해 모든 이민자들은 하선을 마쳤으나 창도 없는 더러운 공간에서 아들들이 다 보고 있는 와중에 안나 스워트 여사는 무려 열한 시간의 산통 끝에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속에서 다리부터 빠져나온 딸을 성공적으로 순산하여 이름을 레베카로 하고, 아이를 누더기에 싼 채로 약속의 땅에 첫 발을 내딛기에 이른다. 레베카는 그리하여 다른 가족과 달리 미국의 속지주의 정책에 의거해 낳자마자 미국인이라는 타이틀이 달리고, 부모와 형제들은 여전히 미국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외국인의 처지에 머물게 된다.
 제이콥 스워트 씨가 유럽, 그것도 독일 땅에서 나치의 손아귀로부터 도망치는 와중에 그는 철저하게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을 체험한다. 그리하여 길고 긴 장편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약자들은 금방 죽음을 당한다.”
 제이콥 씨가 자식들에게 두고두고 강조하는 것은 그러니 ‘약점을 숨겨야’ 한다는 것. 선생의 경험에서 비롯한 철학 속에, 유대인이라는 것도, 평생 육체적인 일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도, 하다못해 풍부한 지식과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삶의 정글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 제이콥씨에게 뉴욕 변두리의 지방정부에서 묘지관리를 맡기자마자 정확한 선택을 하신 겁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는 부지런하며 몸으로 하는 일은 자신 있습니다. 라고 지방 공무원에게 말한다. 그리하여 묘지와 묘지 근처 습기찬 지역에서 돌로 만든 자그마한 오두막에 다섯 가족이 정착하게 되는 것.
 고된 일과와 사토장이에 대한 지역주민의 멸시, 독일 이민자로 2차 세계대전 전 미국인들의 불쾌감, 여기에 또 (더러운)유대인이란 정체성에다 그동안 겪었던 온갖 수난 속의 생존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발아시킨 비정상적 두뇌활동. 이것들이 과학서적 출판사 편집자 출신의 제이콥 씨뿐만 아니라 한때는 아르투르 슈나벨 만큼은 아니지만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칠 줄 알았던 부르주아 출신의 안나, 그들 사이의 유복한 유년기를 지낸 두 아들의 뇌 속에서도 발아하기 시작한다. 낳자마자 미국인이었으며 한 번도 여유롭게 살아본 경험이 없는 주인공 레베카는 자신을 사랑해주던 아버지가 차츰차츰 변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역시 사토장이의 딸에게 쏟아지는 멸시를 거친 싸움을 통해 이겨가며 소녀로 성장해간다. 대강 그림이 그려지실 것.
 그러던 어느 날, 매장을 위해 공동묘지에 온 한 신사가 제이콥 씨에게 평상시 같으면 자연스러웠을 무람없는 말을 했고, 이를 들은 제이콥 씨는 아무 대답도 없이 돌오두막집으로 가더니 천에 싸인 뭔가를 외발 수레에 싣고 와 ‘나리’들을 향해 갑자기 “나치 살인자들! 더 이상은 가만 안 둬!”라고 외치면서 거대한 엽총을 쏴 가슴과 그 위에 놓였던 손을 통째로 날려버린다. 눈이 홱 돌아간 제이콥 씨는 엽총을 들고 집에 들어오더니 아내 안나의 머리를 향해 또 한 방을 쏴버리고, 이어서 레베카의 가슴에다 총구를 댄 채 잠깐 생각에 잠긴다. “너. 너는 여기에서 태어났어. 저 사람들이 너는 건드리지 않을 거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총구를 레베카의 가슴에서 자기 머리통으로 돌리고는 발사해버리고 만다. 어마어마한 큰 총소리 뒤에 피와 뼈의 파편과 뇌의 잔해가 레베카의 머리카락에 엉겨 붙으면서, 이미 두 오빠가 이미 집을 떠나버린 레베카는 완전히 천애고아가 돼버리고 만다.
 하지만 아직 레베카의 불운한 초년운세는 끝나지 않는다. 1936년에 태어나 1999년에 죽을 운명인 레베카. 동시에 피투성이가 되어 부모가 죽어버리는 것과 견주어 더하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혹독한 젊은 시절의 고통이 또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20대 중반부터 도래한 두 번째 시절을 맞아 몇 백만 분의 일의 확률에 당첨이 되어 험한 초년운세가 끝나고, 살면서 누구나가 겪는 애환을 제외하면 한 마디로 정의해, ‘아메리칸 드림’을 완성하는 신데렐라의 관을 쓰는 이야기.
 흠. 이런 스토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불행한 소녀가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되어 하늘에서 우수수 행운의 별이 줄지어 쏟아진다는 결말이라니. 난 신데렐라가 싫단 말이다. 이런 결말이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애초 구상이었을까, 아니면 출판사 편집자의 권유에 의해, 책을 많이 팔기 위한 의도였을까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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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be00 2019-12-13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이 분 책들 좀 편차가 심한 것 같아요. 가장 최근에 읽은 위험한 시간 여행도 딱히 좋지는 않았는데 워낙 다작하셔서 그런가..;;

Falstaff 2019-12-13 13:54   좋아요 0 | URL
전 이이의 작품들 제목을 보면서 혹시 장르문학 작가 아닌가 싶어 읽기를 머뭇거렸습니다. 근데 워낙 많이 쓰긴 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