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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만찬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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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만찬>을 이해하기 위하여 알바니아 역사를 대강 훑어볼 필요가 있다. 알바니아는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는다. 이탈리아-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알바니아, 3국왕정시대라고 일컫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시기와 겹친다. 알바니아 청년들은 이탈리아 군의 일원으로 세계대전에 참전했지만 1943년에 이탈리아가 항복하는 순간, 같은 파시즘 국가라도 형님 뻘인 독일은 한때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 병사들을 탈영병으로 간주해 즉결처분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알바니아도 엉겁결에 독일과 동맹국이었다가 이제 적대국으로 바뀌어 버리고 만다. 1943년 9월, 이미 그리스 지역까지 내려갔던 독일군은 북상하는 길에 저절로 알바니아에 입성하면서 알바니아에 괴뢰정부를 수립하지만 겨우 1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작품의 무대는 알바니아의 두번째 도시이자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지로카스트라 시.
독일군은 지로카스트라에 들어오기 전에 비행기를 날려 다량의 삐라를 살포한다. 독일어와 알바니아어로 쓰인 삐라에는 요약해서 “독일은 알바니아에 적대감이 없고 이탈리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주려는 것뿐이다, 코소보와 차머리아까지의 영토를 포함해 독립을 보장한다. 또한 알바니아가 독일군의 진행방향에 있어서 그냥 길을 빌릴 뿐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지로카스트라 시민들은 독일군을 환영하는 무리(코소보하고 차머리아까지 보장한다잖아?)와 그들과 싸워야 한다는 무리로 나뉘었다. 전자는 민족주의자와 왕정주의자이고 후자는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소수에 불과해 지로카스트라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지로카스트라는 도시와 꽤 냉랭한 관계를 맺고 있는 드넓은 광야에 둘러싸인, 일종의 적대적 고립상태에 놓였다. 남쪽의 그리스 소수민족 부락과의 사이에 있는 라자라트 마을은 앙심과 고집스러움을 가진 사람들이 지로카스트라에 대한 원망과 원한에 싸여 살고 있었다. 또 룬저리아 촌락은 작은 양초로 가득한 교회와 유난히 상냥한 여자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지만 여자들이 차츰차츰 실종되고, 실종된 여자들은 지로카스트라의 집에서 날마다 죽어간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아니면 행복한 귀부인이 됐을까, 하는 의문들이.
이런 시절의 지로카스트라에는 두 명의 훌륭한 외과의사가 있었는데 우연히 이름이 두 명 다 구라메토 박사였다. 그래서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은 대大구라메토, 젊은 사람은 소小구라메토라고 불렸다. 이 가운데 대구라메토가 작품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카다레 선생이 노름빚으로 빼앗긴 저택을 병원으로 개조하여 그곳에서 외과와 산부인과 전공의를 하고 있다. 대구라메토는 1만5천회, 소구라메토는 9천회 정도의 수술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당연히 적지 않은 환자가 수술 도중에, 수술 후에 죽기도 했다.
독일에 의한 알바니아 정부 수립은 1943년 9월 8일. 지로카스트라에 오토바이를 탄 독일군 척후병/전위대가 등장한 건 1943년 9월 16일. 이들이 도시에 처음 들어온 순간, 도심의 한 건물에서 총알이 날아들어 척후병 한 명의 고개가 뒤로 휙 꺾어지고 만다. 즉사해버린 것. 독일군 입장에서는 입성 전에 미리 삐라를 통해 의도를 알렸고, 척후병 역시 별다른 보호대책 없는 무방비 상태로 진입했음에도 시민들의 총에 맞아 한 명이 죽은, 가볍지 않은 일이었다. 시민들 역시 이것은 분명히 단순한 복병이 저지른 우발적 사고에 불과하지만 배신행위임이 틀림없다는 걸 인식하고 전부 집안으로 잠적해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독일군이 보복을 시작했다. 폭파. 거대한 석조 저택들, 귀부인들의 거처. 그들의 집, 집문서, 수없이 많은 드레스와 꽃신 같은 모든 것들이 날아가 버렸다. 그렇다고 알바니아 인들이 용기를 잃지는 않았지만 무참한 폭격을 당하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수치심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 알바니아인들은 자신이 직접 당해보니, 이 불행은 여자들만의 징벌을 닮았다는 점에서 본질이 전혀 달라 보였다. 독일의 무력은 알바니아, 지로카스트리아를 덮치고, 쑤셔넣고, 순결을 빼았고, 밑을 찢어버렸다. 모든 게 여자들에게만 적용되어 왔던 것을 그토록 사내답게 산다고 자부하던 이 도시가 고스란히 당한 거였다. 그러다가 누군가 지붕 위에서 하얀 천을 휘날렸고, 포격을 일시에 중단되었다. 알바니아인들은 궁금했으며 단순화시켰고, 자기들 편한대로 합리화했다. 누가 항복했나? 아니다. 아무도 아니다. 그저 열린 창문에 흰 커튼이 바람에 날려 그것이 독일군 눈에 띄었을 뿐이다.
드디어 독일 탱크를 앞세워 그들의 진주가 시작됐다. 이 틈에 끼어 장갑차에서 내린 독일군 지휘관. 철십자훈장을 단 프리츠 폰 슈바베 대령. 곧바로 그는 자신의 대학동창, 제일 친한 친구, 형제보다 나은 친구인 그라메토 그라스, 바로시가街 22, 지로카스트라, 알바니아에 사는 대그라메토를 데려다 달라고 했다. 슈바베 대령은 대구라메토에게 독일의 맥주집에서 열광적으로 이야기하던 알바니아의 두카지니 관습법과 ‘베사(신의)’를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대구라메토는 즉각 대령과 장교 일부를 자신의 집에, 오늘 저녁 만찬에 초대하고, 대령은 이를 수락한다. 이윽고 저녁이 되고, 밤이 되자 대령은 샴페인 한 상자와 함께 대구라메토 집을 방문했고, 구라메토 박사는 베사의 관습대로 창문을 다 열어놓은 채 브람스의 <릴리 마릴린>을 큰 볼륨으로 틀어놓는다.
독일이 손님으로 온다고 미리 알렸어. 알바니아는 총을 쐈지. 알바니아는 베사를 베풀지 않았어. 열 집 가운데 한 명씩, 모두 스물네 명의 남자를 인질로 잡아 놓았어.
정말로 인질들은 처형을 위하여 테펠레나 골짜기에서 몰아치는 매운 바람 속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을 바라보는 지로카스트리 시민들의 눈에는 활짝 불이 켜진 대구라메토 박사의 응접실 창문이 보이고 그곳을 통해 큰 소리의 축음기 음악소리가 들린다. 시민들은 대구라메토 박사를 배신자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죽음을 기다리는데 음악과 만찬이라니.
구라메토 박사는 오늘의 만찬 때문에 온 도시 사람들이, 세월이 흘러도 배신자로 여기고 배신자로 기억될 것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만찬이 계속되던 한 순간, 구라메토 박사는 슈바베 대령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인질들을 풀어줘, 프리츠!” “리베라 온시데스!”
대경실색을 하는 대령. “네가 감히 내게 명령을 해? 그걸 감히 라틴어로 반복해? 구라메토, 너 정말 미쳤구나! 네가 황폐해진 유럽의 친구만 아니었어도 아 자리의 사람들은 모조리 끝장났을 거야.”
슈바베 대령은 그러나 일곱 명의 인질은 내주겠다고 한다. 현장에서 일곱 명의 인질이 풀려나는 걸 본 시민들. 그들은 또다시 궁금해진다. “독일군들은 이 인질 석방의 대가로 무엇을 받았을까?”
대령은 무엇을 받기 원했다. 암살범들. 이름을 대라고 요구한다. 박사는 모른다고, 이곳에선 별명으로만 부르는데 그것도 모른다고 뻗댄다. 범인들의 별명만 알 수 있다고 한 대구라메토의 행위는 배신이었을까, 아니었을까? 천년간 토론을 해도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소수의 구라메토 지지자들은 열광적이다. 대구라메토는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인질해방자이다. 이렇게 쉽게 인질을 풀어주는 걸 보면 만찬장에서 구라메토 박사를 총독에 임명한다는 소식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하면서. 그러나 문제는 인질 속에 끼어 있던 유대인 야코엘. 알바니아에서도 유대인 문제만큼은 민족주의자, 왕정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의 의견이 일치된다. 당연히 돌볼 이유가 없는 민족이라고. 그러나 박사는 슈바베 대령에게 유대인은 이 도시의 손님으로 온 자이니 두카지니 관습법과 베사에 의거해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고집을 피운다. 그게 가능한가? 나치 군대의 총책임자 대령이라고 하더라도 만찬 자리에 게슈타포 장교가 있는 곳에서? 새벽 닭 울음이 들리는 시간, 프란츠 폰 슈바베 대령은 인질을 전원 석방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유대인을 포함해.
이 명령을 내리자마자 구라메토 박사의 아름다운 딸이 음료를 들고 나타나 걸어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한 잔씩 권하다. 대령에게, 게슈타포 장교에게,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그리고 남편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에게. 그들이 거침없이 한 잔 쭉 들이키는 걸 본 딸은 자기 방에 들어가 옷을 입은 채로 잠에 빠져들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에서 깨어 만찬장에 나와 보니까. 회식자들 모두 쓰러져 있었다. 딸은 혼자 살아남아 독살의 범인으로 몰릴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해졌고.
이게 다냐고? 천만의 말씀을. 잘못된 만찬을 벌인 비극적 결과는 안타깝게도 11년 후인 1954년에 벌어지고 만다. 이때가 대구라메토 선생이 수술 1만5천회, 소구라메토 선생이 9천회의 시점이다.
무지 재미있다. 이스마일 카다레가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썼는지 처음 알았다. 언제나 은근히 무게를 잡는 작가인 줄 알았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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