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4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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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언 매큐언을 읽으면서 실망해본 적이 없다. 근데 어째 읽게 되지 않는다. 이번에도 <암스테르담>을 재미있게 읽었다. 근데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다른 유명 작가하고 이이를 혼동했던 거였다. 재미는 있지만 뭔가 불편한 작가, J.M. 쿳시. 두 양반의 공집합이 사실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희한하게도 헷갈렸던 거다. 아직도 J.M 쿳시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럴 수 있는데 엉뚱하게도 이언 매큐언의 책을 검색하면서 이이는 참 이상한 방식으로 불편해, 이렇게 생각했으니 이것 참. 뭐 세상 살다 보면 별 일이 다 일어나는 것이니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이제 보니까 이이의 작품이 꽤나 많이 번역해 나와 있다. 헷갈리고 있는 동안 도대체 몇 권이나 놓친 건가. 그래도, 그럴 수 있지 뭐.


  작품은 몰리 레인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서로가 친한 친구 사이이면서 시기를 달리해서 고 몰리 레인의 연인이기도 했던 작곡가 클라이브 린리와 신문사 편집국장 버넌 핼리데이. 클라이브는 1968년 둘 다 대학생일 때 처음 몰리를 만났다. 베일 오브 헬스의 어수선한 하숙집에서 함께 기거했는데, 영국식 하숙집은 각자의 방이 있고, 공동 화장실과 샤워실, 그리고 공동 식당에서 식사를 함께 하는 식이다. 당시는 젊은 시절이었으니까 뭐 아무것도 몰랐을 때였고, 나중에, 한 십년 정도 더 지난 후에 몰리와 다시 잠깐 연애를 할 때는 몰리로부터 침대 위 사랑의 다양한 방법과 기교와 자세 같은 것을 감명 깊게 물려받은 추억이 있다. 물론 더 나이를 먹어서 둘 사이엔 섹스를 매개로 하는 감정 같은 건 사라지고 진짜 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정만 남아 몰리는 작곡실에 와서 자신만의 의자에 앉아 고즈넉한 눈길로 클라이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감정을 고양시키거나 전환시켜주는 순기능을 기꺼이 담당했다. 물론 자신이 새로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누구와, 진도상황과 앞으로의 전망 같은 것을 빠짐없이 이야기해주었다고 오해도 하고.

  버넌 핼리데이는 1974년에 첫 직장인 로이터 통신 파리 특파원으로 나가 있을 때 몰리도 <보그>지에서 이러저런 일을 닥치는 대로 하고 있어서 1년 간 동거를 한 적 있다. 헤어지고 영국에 와서도, 서양 사람들이 자주 그러듯이 서로 감정이 상하지 않고 좋은 친구로 늙도록 가까이, 당연히 섹스리스로 지내고 있었다.


  근데 몰리가 어떻게 죽었을까? 아, 걱정 마시라.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리거나, 나중에 책에 나오듯이 독을 탄 샴페인을 마시거나 그렇게 비명에 가지 않았다. 요즘 느와르 소설을 몇 개 읽다 보니 아휴, 이런 생각이 자동적으로 뜬다니까. 런던 시내의 도체스터 그릴 레스토랑에서 밥 잘 먹고 나와 택시를 잡으려고 팔을 드는 순간 어딘지는 밝히지 않았는데 찌르르 저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더니 불과 몇 주 사이에 사물의 이름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다. “정당, 화학, 프로펠러” 같은 단어는 잊을 수 있다고 쳐도 “침대, 크림, 거울” 같은 생필품을 지칭하는 단어가 왔다 갔다 하면 이건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후 몰리는 대규모를 신체 전부를 정밀 검사 했음에도 그냥 병실의 수인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남편 조지 레인은 돈만 많은 출판업자이다. 까탈이 심하고 병적으로 소유욕이 강한 남자이며 한 시절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를 통틀어 몰리를 절대적으로 신봉해 마지 않았다. 몰리는 조지를 홀대하면서도 부자와 사는 편리함 때문이었는지 그의 곁을 떠나지는 않았다. 심지어 몰리가 노골적으로 외도를 하고 다녀도 조지는 속수무책,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몰리가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고, 남은 것은 요양원으로 갔다가 그 요양원 지하의 영안실로 가면 끝나는 거였는데, 놀랍게도 조지는 요양원으로 보내는 대신 자신의 저택에서 자기가 직접 아내를 돌보겠다고 선언했다. 조지는 몰리가 이제 다 죽어가는데도 방문객을 철저하게 가려 받았고, 과거에 연인 사이였던 클라이브와 버넌, 그리고 현직 외무장관 줄리언 가머니는 병문안 할 생각을 말아야 했다. 병이 들고서야 아내를 온전히 소유할 수 있게 된 조지는 은근히 만족하는 모습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외무장관 줄리언 가머니는? 이 양반이 참 골치 아프다. 클라이브와 버넌은 이심전심으로 가머니 장관이야말로 자신들의 공통적인 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지능이 대단히 높아서 불리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환시키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순발력을 지녔다. 그러나 안타깝게 고루한 시선에 입각해 보자면 아쉬운 취향이 있었으니 바로 드레스스왑(이라고 칭할) 트랜스베스티즘(Drag Queen, trap). 쉬운 얘기로 여성의 옷을 입고, 여성 화장을 짙게 하고, 마치 남성을 유혹하는 듯한 자세와 표정을 짓기 좋아하는 것. 명색이 장관이라 고상한 취미를 과시할 사람을 구할 수 없었던 차에, (거의) 모든 일에 쿨한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했던 몰리는 가머니의 취향을 존중했고, 그래서 가머니는 몰리와의 만남을 통해 혼외정사나 애정문제로 복잡하게 얽는 게 아니라 드레스스왑을 하고 몰리와 피카디리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하는 정도였으며, 자신이 생각해 특별하게 드레스 스왑을 멋있게 한 기념으로 비록 흑백이지만 사진으로 여러 장 박아 놓았다. 당연히 이게 실수지. 가머니가 사진을 가지고 자기 집으로 가져갈 수 있었겠어? 그러니 남편을 한 손아귀에 쥐고 사는 몰리가 보관을 했다가 졸지에 오늘 내일 하는 처지에 떨어졌고, 급기야 숟가락 놨으니 그게 이제 저 밴댕이 창아리 속을 가지고 있는 조지한데 가지 않았겠느냐는 말이지. 내용을 모르고 그저 자기 아내와 바람 피운 남자들 명단 가운데 중요한 한 명으로 치부하면서. 그러니 시간이 문제일 뿐이지 줄리언 가머니는 죽은 목숨이다, 죽은 목숨. 물론 정치적으로 말해서.


  줄리언 가머니는 국무위원으로 20세기를 끝내는 마당에 밀레니엄을 기념하기 위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영국의 가장 유명한 작곡가 두 명, 클라이브 린리와 폴 매카트니 가운데 클라이브 쪽으로 손을 들어 그에게 <새 천년 교향곡>을 의뢰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밉더라도 하여간 클라이브가 더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을 것이어서.

  아직 세기가 끝나려면 몇 년이 남았는데도 벌써 올해 초연의 타임 라인이 나왔다. 클라이브는 벌써 두 번의 데드라인을 넘긴 상태. 마지막 4악장의 끝부분이 남았을 뿐인데 도무지 악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두 개의 상이한 박자, 그러니까 템포 루바토를 포함한 경과구가 적절한 장소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떤 멜로디일까 자신도 궁금할 지경이다. 그는 1970년대 이후에 무조음악, 우연성 음악, 음렬, 일렉트로닉스, 음조해체 같은 모더니즘 적인 것 대신 여전히 멜로디를 중시해 초보수주의, 퇴행으로까지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전문화되고, 고립되고 메말라가서 그 오만함 때문에 청중과 격리된 음악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런데 자신의 특기인 멜로디가 떠오르지 않는 거였다. 날이면 날마다 밤을 지새우는 등 오래 고민하다가 예전처럼 레이크 디스트릭트로 산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힘들여 능선에 올라 마음을 비우면 곧잘 멜로디가 떠오르고는 했던 예전의 일을 기억했던 거였다. 그리하여 갔다. 아침 일찍 산을 오르기 시작해 한참을 가니 저 앞에 여성 혼자 산행 복장을 하고 능선을 향해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가 보다. 클라이브도 힘을 다해 드디어 첫번째 정상에 오른 순간 쏟아지는 햇살처럼 4악장에 쓰일 적당한 멜로디가 번쩍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래, 이거야. 집중, 또 집중해 수첩을 꺼내고 급하게 오선을 그었으며 쉼없이 콩나물 대가리를 그리고 있는데 바로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 소리들. 앞에서 가던 여성과 허름한 차림의 남성. 남자가 여자의 손을 나꿔챈 거 같기도 하고, 배낭을 빼앗아 연못에 던져버린 건 확실했다. 저 사람들의 일에 참견을 하면 멜로디는 분명히 날아가버리고 말 터. 그는 자리를 옮겨 마치 테이블처럼 평퍼짐한 바위 위에서 멜로디를 끝까지 스케치하고 산을 내려와, 이제 등산의 목적은 말끔히 달성을 했으니, 밤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산 위에서 그들의 일은 그들이 알아서 했겠지.

  <저지>지의 편집국장 버넌 핼리데이는 요즘 판매부수 감소로 죽을 맛이다. 이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어서 은근히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는데 죽은 몰리의 남편 조지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 꼭 만나서 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이니, 자기 집에 들러달란다. 조지는 <저지>지의 지분을 1.5퍼센트 정도 가지고 있는 지분이 그리 많지 않은 대주주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그래 밤에 조지의 집에 가서, 슬쩍 몰리의 방도 들여다보고, 진로인지 화사인지 쐬주도 한잔하는 와중에 조지가 슬쩍 서류봉투 하나를 건넨다. 벌써 뭔지 아시겠지? 그렇다. 줄리언 가머니의 드레스 스왑 사진. 버넌이 생각하기에 이걸 신문에 내기만 하면 판매부수는 말할 것도 없이 대박 가운데 대박일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시라. 현직 외무장관의 드레스 스왑이라니. 갑자기 테스토스테론과 안드로메다, 아니, 아드레날린이 뿜뿜 뿜어져 나오는 버넌은 너무 기분이 좋다.

  좀 이상하지? 클라이브와 버넌은 확실히 진보적 인물이다. 근데 클라이브는 산 속에서 불량한 것이 확실한 남자가 홀로 산에 오른 여성을 거칠게 대하는 걸 모른 척하고 내려왔고, 버넌은 이 시대에는 트랜스베스티즘이 개인의 기호에 불과한 것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개인의 취향이 대중과 다르다는 것을 부각하여 황금주의에 경배하려 한다. 이들 사이가 어떻게 될까? 클라이브의 행위를 버넌은 이해할 수 없고, 버넌이 그런 짓을 하리라는 걸 클라이브는 용인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될까? 어떻기는 뭐, 절친 사이가 쫑나는 것이지. 내가 만일 몰리처럼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게 되면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암스테르담의 의사한테 데려다 주겠어? 약속해? 좋아, 내가 그런 상태가 된다면 너도 그렇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알았어. 이런 사이면 절친 가운데 절친이다. 하여간 이쯤에서 뭔가 사달이 나도 크게 날 거 같은데, 내가 아무리 다른 결말을 생각을 해봐도 이언 매큐언이 소설 속에서 끝맺은 결론보다는 덜 획기적일 것이니 구라는 이쯤에서 끝내야겠다. 그냥 읽어 보시라. 2백쪽을 겨우 넘기는 짧은 장편이라 부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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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3-01 0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이언 매큐언과 존 쿳시 외모가 좀 비슷한 거 같아요. 그래서 헷갈리신 게 아닌지요?
저는 매큐언의 소설 네 권 -속죄, 칠드런 액트, 넛셸, 체실 비치에서- 읽어봤는데, 다양한 소재로 무거운 주제의 글을 참 잘 쓴다 생각했어요.
<암스테르담> 작가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저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4-03-01 18:36   좋아요 1 | URL
하여간 좀 헷갈리는 건 맞나요? ㅎㅎㅎ 엄한 사람이 쓴 걸 읽지 않았으니 웃기잖습니까? ㅎㅎㅎㅎ

페넬로페 2024-03-01 0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암스테르담, 읽다가 멈춘 상태인데 완독해야겠어요.
저는 아직 존 쿳시를 읽어보지 않았는데 불편한 지점이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Falstaff 2024-03-01 18:38   좋아요 2 | URL
이 작품이 마지막 반전이 죽여주더라고요. 이 양반 머리 속이 궁금해지더라니까요. ^^

그레이스 2024-03-01 22: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짧은 스토리 안에 아주 충격적인 질문을 임팩트있게 던지죠. 제 경우엔 그랬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좀 소름돋았습니다.
이언 매큐언 소설에는 항상 반전이 있는듯요.
이 소설에서는 좀 더 강했습니다.

Falstaff 2024-03-02 05:42   좋아요 2 | URL
역시 결말 부분에 많은 분들이 허걱, 하셨군요. ㅎㅎㅎ 당연히 저도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