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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ㅣ 랜덤 시선 9
안현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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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태백생. 시집을 읽어보면 태백에서 낳고, 강원도 어디쯤에서 조금 살다가 서울로 와서 여상을 다닌 후 기업의 사무 보조원으로 들어가 가난하게 살면서 시를 썼다. 이이의 내력을 조금 들여다보면 여섯 살 정도 되어 아버지가 안현미를 새엄마한테 보내 함께 산 듯하다. 집이 여유롭지 않아 서울여상을 나와 기업에 다니다가 20대 후반에 서울산업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시인이 됐다. 김경주, 김민정과 함께 “불편” 동인이란다. 《이별의 재구성》으로 2010년에 신동엽창작상을 받았다. 이크, 이 대목에서 깜짝. “이별의 재구성”이냐 “이 별의 재구성”이냐, 이런 말장난 잘 했던 시인이로구나. 읽어본 적 있다. 2017년 4월에. 《이별의 재구성》에 <post-아현동>이란 시가 있어 안현미는 이렇게 노래했다.
오늘은 아현동 산동네에 갔다 // 오래전 월세 들어 살던 방,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하던 방, 연탄불을 넣던 방, 이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울먹이던 방, 외롭던 방, 고맙던 방, 아주아주 춥던 방, (하략)
161번 시내버스 타고 굴레방다리에서 내리면 북아현동. 길 건너 당시에 무슨 공업전문대학 있었는데 그쪽이 아현동. 거기서부터 저 대현동까지 좀 춥고 배고픈 사람들 많이 살던 동네다. 안현미가 졸업했다는 서울여상은 1972년생은 모르겠지만 “라떼는” 집 가난하고 머리 좋은 여자애들만 갈 수 있는 우수한 학교였다. 중학교 담임이 학부모 불러서 웬만하면 인문계 고등학교 보내 좋은 대학 가라고 설득하다가, 돈이 없어서 가오도 없는 학부모의 완곡한 하소연에 어쩔 수 없이 원서 써주던 곳이 서울여상이었다. 거기서 주산, 부기 잘 하면 한국은행 무조건 들어갔다. 물론 옛날 이야기다. 안현미 시절에는 그렇지는 않고 대기업 사무보조원으로 일하면서 20대 후반에야 대학에 진학했단다. 그러니 갓 스무 살 시절, 꿈 많고, 정 많고 사랑도 많던 시절에 아현동 언덕배기 사글세방에 혼자 산 것 같으니 얼마나 고생을 했을꼬. 짠하다. 그리하여 그때 쓴 시들이 많은 모양이다. 이 책 《곰곰》에서도 두 번째 실린 시가 아현동 시절이다. 읽어보자.
거짓말을 제조하다
우우, 우, 우 그녀의 더듬이가 쥐오줌 번진 책장을 더듬고 있다 불 꺼진 방 전기 장판은 얼음장 위에 신문지 같다 그녀의 더듬이는 의수(義手)를 닮았다 우우, 우, 우 비키니 옷장 속에는 아귀 같은 짐승이 웅크리고 앉아 그녀의 잠을 아귀처럼 먹어치우고 있다 우우, 우, 우 그녀의 더듬이가 의수 같은 그녀의 더듬이를 부빈다 쥐오줌 번진 책장 속에선 벌레가 된 사내가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있다 그녀의 의수 같은 더듬이가 제조하는 현은 세상의 슬픔 따위에는 울지 않는다 우우, 우, 우 산동네의 겨울은 길다 차라리 신(神)은 봄 같은 건 제조하지 말았어야 한다! 고 그녀의 더듬이는 쓴다 우우, 우, 우 그녀의 더듬이가 운다 네 울음은 불온하다, 고 누군가 그녀의 불면 속으로 걸어 들어와 딸깍, 그녀의 더듬이를 자른다 우우, 우, 우 봄을 제조한 신(神)은 위대하다, 위대하다! 불 꺼진 방에서 벌레처럼 납작 엎드린 그녀가 거짓말을 제조하기 시작한다 더듬더듬, 시 같은 거짓말을! (전문)
가난한 하숙집에 빠질 수 없는 품목이 두 가지. 하나는 전기 장판이고 다른 하나는 비키니 옷장이다. 다 그렇게 살았는데 시인이라서 감수성이 예민해 심각하게 받아들인 모양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런 정도의 극심한 가난은 시간이 지나도 트라우마 현상이 생길 수 있다. 이제 안현미가 쉰 둘? 그렇게 세월이 지났음에도 당시의 고통스러운 환경, 천장에선 밤이면 밤마다 쥐들이 트랙 경기를 하고, 쥐오줌이 짙게 밴 천장은 언제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고, 전등불을 켜면 갑자기 화르륵 달아나는 바퀴벌레, 바퀴벌레들의 길고 긴 더듬이들, 촉수 낮은 전등 아래 비키니 옷장을 열면 무엇인가 흉측한 것이 안에서 확, 튀어 나오거나 웅크리고 앉아 있을 것 같은 두려움. 그리고 우풍, 외풍, 웃풍, 황소바람.
그런데 비슷한 시가 또 있다. 기세도 좋게 바로 다음 시로 같은 아현동의 자취방과 더듬이가 긴 곤충이란 동거생물들, 그리고 영탄이 출몰하는. 워낙 인상 깊었던 삶의 시절이었던 것은 이해가 가지만 같은 주제로 몇 다발의 시를 쓰는 건 어쨌거나 내 생각으로는 거슬린다. 처음 인용한 <post-아현동>처럼 다음 시집 《이별의 재구성》에서도 또 나오면 말이다. 어떻게 비슷한지 한 번 볼까?
거짓말을 타전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전문)
그러니까 이이가 말하는 “거짓말”은 창작으로의 “시”를 쓰는 행위이다. 먼저 거짓말을 제조하더니 이제는 거짓말을 타전한다. 한 단계 도약해서 제조한 것을 세상에다 대고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우우, 우, 우 너무 비슷한 거 아닌가? 물론 그만큼 시인한테는 절망이었고, 좌절이었으며 전혀 좋아질 것 같지 않은 우울의 산꼭대기였겠지. 더듬이가 긴 곤충인 바퀴벌레만 자신과 동거하고 있는 것 같은 고독과 단절. 목을 매거나 다리에서 뛰어내릴 자신은 없으니까 그저 연탄가스에라도 중독되어 죽고 싶었던 삶의 끝장까지 갔었고, 거기서 거짓말 같은 시를 쓰기 시작한 전경이 잘 보인다.
근데 좀 장황하다. 당연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겠지. 그러나 읽는 독자도 좀 생각해주셔야지. 시인은 이래서 이렇게 시를 썼고, 그건 좋은데 반면에 시의 성취와 관계없이 시를 읽는 독자는 이래서 이렇게는 시를 읽기가 질려버리면 그거 되겠냐는 말이다. 아현동, 산동네, 사글세 방, 쥐오줌, 더듬이가 긴 곤충, 새파랗게 추운 밤. 비애와 비통과 고통이, 좋아, 좋아. 이제는 시인도 극복했겠지. 그랬겠지.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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